낙엽이 쉼없이 떨어져 쌓여가고 마침내 앙상한 가지만 남아도 나무는 생명을 잠재하고 있듯이, 모든 사람들도 언젠가는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의 시처럼 낙엽과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을, 녹화해 둔 영상처럼 일시정지를 시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바람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은 거침없이 앞으로만 달려갑니다. 그 달음질하는 시간에 따라 순간순간 우리의 위치는 계속 변하며 바뀌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현재라고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현재는 있을까요? 문자적 현재 말고 실질적 현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언어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우리가 영(spirit)을 가진 영적 존재로 태어났듯이, 오직 영원 속에 계신 그분의 숨(breath)이, 우리 스스로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창조물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의 의미는 항상 우리 신앙의 순간마다 기초가 됩니다.
히 11:1.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위에서 잠깐 언급드렸다시피 현재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진행되며 영원 속에 포함된 실체와 증거는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나타난 행위,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듯이 하늘에 영원히 정착되어 있습니다(시 119:89).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으로~ 라는 의미를 함께 깊이 묵상해 보며 우리들 신앙에 적용하면 좋을거 같습니다.
현재라는 그리스어 ‘에니스테미(가까이 두다)‘는 ’엔(위치)‘이라는 기본전치사와 ’히스테미(서다, 멈추게 하다)‘라는 기본 동사에서 유래된 단어로 과거와 미래 속에서 순간순간 멈추어 서 있는 위치를 말합니다. 과거와 미래속에서 내 위치와 가까이 있는 것이 현재라는 말이 되지요. 그럼 과거와 미래는 어디에 속했습니까? 모두 알고 계시듯이 영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주제의 일부입니다.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셨던 동일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영원(eternity)에 대한 확신과,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가지고 있는 평안은, 곧 다가올 육체의 죽음을 초월하며 두려움에 떨게 만드려는 마귀의 거짓된 계략을 무력화시킵니다. 또한 우리의 형제자매님들이 소천 되신 이후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이, 위안 삼을 수 있는 큰 도피처가 되기도 합니다.
영원은, ’현재를 포함한 과거와 미래‘에 같이 사용되며, '계속되는 기간'을 의미하는 ’아에이‘, 그리고 '시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아이온’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마 1:1.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generation)에 대한 책이라.
시대는 ‘역사적으로 어떤 표준에 의하여 구분한 일정한 기간’을 말하고 있지만, 위 구절을 통해서 보듯이 우리가 예수님의 한 세대에 속한다면, 시대 또한 한 시대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영원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따라 ‘항상 계속되는 시대의 한 세대’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성도입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살던 그 시대나 지금이나 주님 안에서는 한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이 그 시대에 살지 않았고, 앞으로 태어날 어떤 사람들과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리적 지식을 쌓을 땐 시대를 구분해서 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에서는 첫 사람 아담까지 모두가 영원히 살아있으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시대를 한 시대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낮과 밤과 날을 주시며 시간으로 경계(境界)를 두신 것처럼, 모든 창조물에도 경계를 두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면 비로소 시간의 경계를 벗고 모두 영원으로 들어가겠지만, 시간이 남아있는 아직까지는, 우리는 모두 육신의 경계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육신의 경계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두 가지 불변하시는(히 6:18) 하나님의 ‘계획’과 그분의 ‘약속’에 따라, 지금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 안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요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요일 2:25. 그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이 땅에 주신 말씀들을 통해, 또 우리가 항상 실감하고 있는 우리의 속사람을 통해, 영원에 계신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럴진대 지금의 이 순간들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습니까?
지금 이 세상은 거짓과 위선. 불법이 더욱더 자라나 마귀의 계략에 부합하며, 시간이 멈추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같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점점 더 무질서의 끝을 향해 가고 있고, 가나안 땅의 불법이 충만해졌었던 그 시대의 정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치관을 가진 성도로서 거짓과 불법들에 타협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항거(抗拒)는 당연히 있어야겠지만, 주님의 계획 속에는 이 세상이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다고 봐야 성경적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는 없겠죠. 옳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저들과 마찬가지로 거짓과 위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다름이 없을테니까요. 그래서 성도의 신분은, 옳은 것을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자들보다 더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클수록 그날에 받는 영광은 더 빛난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저나 읽고 계시는 여러분이나, 우리는 현재가 없는 영원 속에 계속 진행하고 있는 순간순간을 살고 있습니다. 단지 육신의 옷을 벗고 있느냐 입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 사나 죽으나 주님과 항상 함께 있다고 인지(認知)한다면 이 육신의 옷을 벗는 그 날이 설렘으로 기다려지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그 아름다움의 거룩함 속으로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 그 하나의 특권으로 누리는 이 은혜의 시대가 이제 종점(終點)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는 요즘입니다.
이런 즈음에, 시간의 끝을 바라보는 성도의 시각이, 육신의 경계를 벗어나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거룩함의 아름다움 속에 계신 그분의 영광에 나침판처럼 고정되어 있다면, 세상에 보이는 악한 것들로 인해 슬픔이 있을지라도 항상 기뻐하는 자요, 또한 그분을 보고 싶어 하는 애절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순간들을 이기는 자로 살 거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므로, 포기하고 싶도록 낙담이 되거나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도래할지라도 모두 이겨 내시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며 마침내 도달할 그곳을 항상 사모하며 힘을 얻기를 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말로 할 수 없는 존귀에 이르도록 긍휼을 베푸신 우리 주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해 감사를 드립니다.
엡 5:16 시간을 되찾으라. 날들이 악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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