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주일 예배를 마친 뒤, 한 어르신께서 제게 다가와 말을 건네셨습니다. 여든이 넘으신 분(형제님)이셨습니다. 그날은 제가 처음으로 회중 대표기도를 한 날이었는데, 어르신께서는 아침에 대표기도를 한 사람이 맞느냐고 물으시며 저를 알아보셨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다른 교회에서 오전 예배를 드린 뒤 곧바로 우리 교회에 오셔서 다시 예배를 드리고 가시는 분이셨습니다. 작년 12월에는 우리 교회에서 침례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전화번호와 이름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다음 주일, 어르신께서는 제게 꼭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개역 성경을 190회 이상 통독했으며, 사랑침례교회를 알게 된 뒤로는 킹제임스성경을 약 7회 통독했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몇 차례 더 통독한 뒤에는 킹제임스성경도 필사할 계획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약 15년 전에 개역 성경으로 세 차례 필사를 마친 경험도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주에 다시 만난 어르신은 여러 자료를 보여 주셨습니다. 성경을 190회 통독했다는 사실이 기록된 교회 주보, 성경 전체를 필사한 자료, 성경 구절을 이미지로 만들어 암송한 자료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오랜 세월과 수고가 고스란히 담긴 결과물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웠습니다. 그 자료들을 보면서 먼저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얼마나 성경을 읽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이 어르신을 내게 보내셔서 나를 부끄럽게 하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르신의 말씀을 향한 갈급함과 열심과 끈기는 참으로 귀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염려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빌립보서 3장의 바울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에게는 육체를 신뢰할 만한 수많은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에 속했으며,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율법에 관해서는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에 있는 의에 관해서는 흠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얻는 일과 비교하여 손실로 여겼으며 마침내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것들이 본래 아무런 가치도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근거로는 전혀 쓸모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쌓아 올린 종교적 경력과 의가 그리스도의 의를 붙드는 일을 방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르신께 사람이 자기 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알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내어놓을 만한 자기 의가 남아 있는 사람은 빈손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자기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의만을 붙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제 말을 듣고 계셨지만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으셨습니다. 제가 잘못 느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깊이 받아들이셨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분의 마음을 단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만남을 통해 제 자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들고 서 있는가?”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성경을 필사하고 암송하는 일도 귀합니다. 새벽기도, 금식, 헌금, 전도, 봉사, 교회 출석, 신학 공부 역시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한다면 모두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성경을 190회 읽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통해 자기 안에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음을 발견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세 번 필사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와 무능함이 얼마나 깊은지를 깨달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천 구절을 암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에 비추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임을 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이 많아질수록 자신이 크게 보인다면 그것은 위험한 지식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알아 갈수록 하나님은 더욱 크고 거룩하게 보이며 자신은 더욱 작고 가련하게 보인다면, 그 말씀은 사람을 은혜 앞으로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의 헌물이 거절된 사건도 이 원리를 보여 줍니다. 가인은 땅을 갈며 땀 흘려 얻은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가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수고와 정성이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의 노력과 정성으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나아오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 필사와 통독 자체가 가인의 헌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의와 공로를 인정받으려 하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귀한 종교적 행위라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와 의를 대신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자기 의의 헌물이 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이브는 범죄한 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스스로를 가렸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앞치마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수치와 죄를 가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만든 것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친히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인간이 만든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도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금식과 십일조와 도덕성을 들고 섰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이 얼마나 나은 사람인지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께 드릴만한 것을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멀리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긍휼만을 구했습니다. 바리새인은 많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으나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세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의롭다 하심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까닭은 그에게 선한 행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자신을 부자라 생각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가련하고 비참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가난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영적 파산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의 파산을 모르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사실보다 더 위험한 것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잘 가렸다고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회개와 믿음을 말합니다. 청교도 토머스 왓슨은 회개와 믿음을 성도에게 필수적인 두 가지 큰 은혜라고 하였고, 성도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두 날개에 비유했습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단지 몇 가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전 존재가 무능하며, 자기 안에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룩한 기준을 만족시킬 만한 것이 전혀 없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선함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수고를 변호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이 읽고, 얼마나 오래 기도하고, 얼마나 충성스럽게 봉사했는지를 하나님께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하게 됩니다. 믿음도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자기 능력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습니다. 자기 지혜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자기 의가 남아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말씀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말씀을 붙들지 않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완전한 무능함을 발견하고 나면 비로소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믿음은 자신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아무 가능성이 없으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함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선한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선한 행위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 읽기와 필사와 암송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에게는 매우 귀한 순종의 열매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습니다. 봉사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봉사합니다. 선한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에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습니다. 행위가 은혜를 사는 값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행위는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감사의 열매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사람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사람을 받으십니다. 자신의 성취를 펼쳐 보이는 사람보다 빈손으로 그리스도를 붙드는 사람을 받으십니다. 자기 의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보다 자신의 벌거벗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구하는 사람을 의롭다 하십니다. 그 어르신과 헤어진 뒤 잠시 그분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그 어르신을 제게 보내신 이유가 단지 그분의 자기 의를 보게 하시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통해 제가 성경을 얼마나 게을리 읽었는지를 보여 주셨을 것입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자기 의를 분별한다고 생각하는 제 안에 또 다른 형태의 자기 의가 숨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게 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성경을 많이 읽은 것을 자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자랑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필사 횟수를 내세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를 바르게 안다는 사실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나는 바리새인처럼 금식과 십일조를 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바리새인과 다르다는 사실을 은밀히 자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의는 언제나 종교적인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의를 비판하는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어느 한 어르신을 향한 글이기 전에 제 자신을 향한 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눈물과 열심도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수백 번 읽고 여러 차례 필사한다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이루신 일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해 죽으셨고 묻히셨으며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자신의 의를 값없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사람의 두 손은 비어 있어야 합니다. 한 손에 자기 죄를 감추기 위한 무화과나무 잎을 들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다른 손에 자신의 땀과 수고로 얻은 가인의 헌물을 들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종교적 경력과 행위를 담은 주보나 필사 노트나 봉사 기록을 들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의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회개는 자신이 가진 것을 조금 고치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의로운 것이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판단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부족한 의에 그리스도의 의를 보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를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은혜가 은혜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한 사람임을 깨닫는 순간,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말씀을 읽을수록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랑하게 하시고, 많이 알수록 높아지는 사람이 아니라 낮아지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통독과 필사와 암송과 봉사가 자기 의의 벽돌이 되지 않고,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사랑의 열매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가 자랑할 것은 단 하나뿐일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하였는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이루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