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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조회수 : 9263
    • 작성자 : 김정훈
    • 작성일 : 2012년 1월 29일 19시 24분 18초
  • 오래 전에 한국에서도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미국의 TV 프로그램 가운데, “특수 공작원 소머즈” 라는 프로가 있었다. 사고로 잃게 된 오른 팔과 두 다리 그리고 한쪽 귀를 인공전자기관으로 대체하여 정상인과는 다른 초능력을 갖게 된 한 여성 특수공작원의 이야기였다. “소머즈”에 있어서 특히 인기 있었던 것은 초능력적인 전자 인공 귀였는데, 멀리서 들려 오는 아주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그런 귀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과학은 아직 소머즈 같은 초능력은 아니지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사람의 귀에 인공 달팽이관을 이식하여 청력을 회복하여 줄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렀으니 이런 식으로 기술이 계속 발전해 간다면 실제로 공상과학 속에나 나오던 ‘소머즈의 귀’를 보게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귀를 통해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에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는 사실에 얼마만큼 고마움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귓속을 들여다보면 그 세밀한 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귀에 부딪힌 소리는 먼저 외이도-우리가 귀지를 팔 때, 귀 후비개로 지나면서 건드리게 되는 부분으로 대략 2.5 cm 길이에 7 mm의 직경을 갖는다-라고 부르는 좁은 통로를 지나면서, 그 통로의 끝에 연결된 마치 펼쳐진 우산 모양으로 생긴 얇은 고막을 진동 시킨다. 이때 만들어진 진동은 고막에 연결된 세 개의 작은 이소골을 차례로 통과 하면서 그 귀에 들어온 소리의 강도를 증폭시키는데, 이소골이 들어 있는 이 부분을 중이라고 하며, 대략 우리가 보통 커피에 넣어 먹는 각설탕만한 크기의 공간에 해당한다. 중이 속의 이소골은 그 구조와 배치가 소리를 증폭시키기에 매우 적절하게 놓여 있어 우리의 귀에 들어온 소리를 거의 잃어버림 없이 들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제 이소골을 통과한 소리는 마지막으로 대략 완두콩만한 크기의 달팽이관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달팽이관 속에는 약 눈물 한 방울에 해당하는 부피의 액체가 들어 있어, 고막에서부터 이소골을 통해 전해져온 소리의 진동은 이제 이 달팽이관 속 액체에 작은 물결을 일으키게 된다. 이 액체 위에는 얇은 막이 하나 떠 있는데, 물결이 움직일 때마다 이 막이 같이 움직이면서 거기에 붙어 있는 미세한 머리카락 모양의 신경세포들이 이 막을 통해 전해지는 물결의 높낮이를 감지하게 되고, 그것을 전기적 신호로 바꾸어 뇌에 전달하게 되면 비로소 우리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한 방울의 적은 액체 속에서 생겨나는 물결의 파고를 가지고 우리가 느끼는 수많은 소리의 신비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사람의 귀는 보통 20에서 20,000 Hz 사이의 주파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참고로 이야기 하면, 피아노의 소리는 27.5에서 4,186 Hz의 소리를 내며, TV를 켜고 소리를 가장 낮게 줄여 놓았을 때 나는 지지직거리는 소리는 16,000 Hz에 해당 한다), 그 중에서도 약 2,500 Hz 부근의 소리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외이도의 구조가 이 주파수 부근의 소리를 가장 잘 증폭해주도록 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 주파수 부근의 소리는 자그마치 우리의 고막이 불과 1억 분의 1cm 즉, 수소 원자의 두께에 해당하는 길이만큼만 움직임으로도 소리를 전달 할 수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수소 원자의 직경에 해당하는 길이만큼의 고막의 미세한 움직임이 달팽이관 속의 눈물 한 방울만한 액체에 파고를 일으키고, 그 물결의 높낮이를 머리털 같은 신경세포가 감지하여 전기 신호를 일으키고 그것을 뇌에 전달하여 마침내 소리를 듣게 하는 과정을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설계를 통하지 않고 우연히 생겨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겠는가?

     

    우리들은 아주 어릴 적 엄마의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우리 주변의 소리에 익숙해 와서 듣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고 살고 있다. 그래서 청각을 잃어버린 세상을 상상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쉽지 않은데, 마치 TV의 벙어리 화면을 보는 답답한 기분은 아닐까? 사실 소리는 우리에게 많은 신비감을 주며, 또 상상을 자극한다. 음악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라. 사랑하는 사람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성을 떠 올려 보라. 소리의 세계는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지만, 우리를 또 다른 존재의 차원으로 인도한다. 보이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으며, 말조차 할 수 없었던 삼중고의 유명한 헬렌켈러는 만약에 한 가지를 골라서 회복할 수 있게 된다면 자신이 겪고 있는 삼중고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겠냐는 질문에, 놀랍게도 소리를 듣고 싶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과연 듣는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새롭게 한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과연 몇 번이나, 우리에게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청각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했었던가?

     

    성경에서는 소리에 대하여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요한복음은 처음에 말씀이 있었는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요 1:1).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말씀으로 ‘이르심으로’ 천지를 지으시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의 길을 예비한 침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마 3:3). 예수님이 침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을 때에 하늘로부터 음성이 있으며 성령이 임하셨다 (마 3:16-17). 마가의 다락방에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에도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으며 (행 2:2),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를 만나 회심할 때에도 하늘에서는 음성이 있었다 (행 9:3-4). 이제 요한계시록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벌어 질 때에도 하늘에는 큰 음성이 있어 축제의 소리가 하늘에 자자하게 될 것이다 (계 19:1-8). 이와 같이 성경은 매우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소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청각을 가지고 우리는 어떤 소리를 들을 것인가? 세상에는 수많은 다양한 소리가 있어 저마다 자기 소리를 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신다. 그것도 아주 고요한 작은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왕상 19:12) 그 분의 음성에 우리가 귀 기울이기를 원하신다. 그야말로 우리의 고막을 수소 원자 두께 만큼, 눈꼽의 눈꼽만큼 움직이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귀를 열어 그 분의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싶은 것이다. 태초부터 계시어 우리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며, 너희는 내 음성에 순종하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렘 7:23)라고 말씀 하신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 귀를 진리로부터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니 (딤후 4:4), 주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교회에 거듭하여 말씀 하신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 13:9),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계 2-3장).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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