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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같이 일하시는 하나님조회수 : 9748
    • 작성자 : 김정훈
    • 작성일 : 2012년 2월 7일 19시 7분 33초
  • 아래에 적은 글은 성도컬럼 123번에 실린 조양교 형제님의 글 "옳은 것처럼 보이는 길"을 읽고 느낀 소감을 적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댓글로 달려고 하였으나, 양이 너무 많아 독립된 글로 올립니다. 조양교 형제님께서 쓰신 글이 분명 좋은 의도로 쓴 글임에는 틀림없다고 믿는데, 글을 읽으면서 (아마도) 본래 의도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오해의 소지도 다분히 있다는 아쉬움이 들었고, 결국 깊은 생각과 고민 끝에 그래도 이렇게 글을 써서라도 저의 생각을 같이 나누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유익하지 않나 하는 결심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

     

    1. “나의 어떤 성과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하등의 이유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오, 소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필요한 자리에 나를 앉히실 수도 있으시고, 또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더 중요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신 것은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하실 수 있는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나의 어떤 성과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말씀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더 중요하게 해결될 문제라는 지적도 일견 타당한 말이긴 하지만, 앞에서 말한 ‘어떤 성과’와 맞물려서 같이 생각해 보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을 근본적으로 다시 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이 말씀을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주인으로서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와 같이 일 하기를 원하십니다 (고전 3:9).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그 분의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키어 우리에게 면류관과 상까지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빌 3:14; 고전 9:24-27; 히 10:35).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내를 본받아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들 앞에서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고 있는 것 이지요 (히 12:1). 다만 이 모든 명령 받은 일을 행한 후에 그저 우리는 우리의 해야 할 의무를 다했다고 겸손히 고백해야 하겠지요 (눅 17:10).

     

    이러한 하나님의 같이 일하심과 맡김의 원리는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마 25:14-30). 여행을 떠난 주인이 5 달란트와 2 달란트 받은 종에게 열심히 일하여 이익을 남김에 대하여 칭찬을 하시되, 1 달란트를 받고 그저 땅에 묻어둔 종은 크게 나무라셨습니다. 그때 1 달란트 받은 종이 “당신은 엄한 사람이라 뿌리지 않은데서 거두고 흩뿌리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라고 말하였는데 (마 25:24), 가만히 음미해 보면 이 말은 자신의 주인 즉, 하나님의 능력을 칭송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것만 믿고 오히려 자신의 일을 다 하지 않은 종이 되었기에 주인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게 됨을 봅니다. 제가 말씀 드리려고 하는 요지도 이것입니다. 형제님의 글에도 가만히 보면 한편 하나님의 모든 것의 주인 되심과 못하심이 없는 능력을 칭송하면서, 동시에 나의 성과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기에, 마치 1 달란트 받은 종의 말처럼 들리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을 높여야 한다는 데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자칫 놓치기 쉬운 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능력이 많으시지만, 그렇다고 아무 때나 맘먹을 때 하면 되지 하고 그저 멀리서 팔짱끼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고 그 일을 완수하게 격려 하시며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뤄낸 성과들로 인하여 같이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상까지 주시며 세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각 분야에서 탁월함을 들어내는 것은 성경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권장해야 하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지 그것이 단지 ‘사람이 보기에 옳은 일’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윗을, 모세를, 바울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믿음의 본보기가 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지만, 자신의 분야에서도 모두 탁월함을 일군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도 여전히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성공을 하고 나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거나 세상 유혹만을 쫒아갈 때가 잘못된 것이겠지요. 아울러 형제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적으셨는데, 무엇을 말씀 하시려고 하시는지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사실 존재야말로 어떻게 보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존재를 따지기로 하면, 우리의 구원도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이뤄진 것이며 (롬 5:8), 성화를 위해 싸워 가는 과정에서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도 내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여전히 버거워 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롬 7:13-25). 그런 ‘존재’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충실히 하면서 오히려 죄의 법을 이기는 힘을 얻기도 하며, 그 크신 능력을 갖고 계신 하나님에 비하면 정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성과를 낸’ 우리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며 그 일을 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상을 주시며 칭찬하시겠다는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은혜인 것입니다.

     

    2.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긍정적 사고의 힘, 웃으면 복이와요, 등과 같이 그럴듯한 말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너무 고지식하게 살면 안된다, 세상은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 등과 같이 타협을 제의해 오기도 합니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상대적으로 풀어 나가야 한다. 문화나 시대는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능동적으로 적응해 나가야 한다. 등과 같이 다원주의, 상황윤리와 같이 교묘한 말로 현혹을 시키기도 합니다.”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긍정적 사고의 힘", "웃으면 복이 와요", "너무 고지식하게 살면 안 된다", "세상은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 이런 종류의 말들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틀린 말들이 아닙니다. 칭찬은 정말로 고래도 뛰게 할 만큼 탁월한 교육 효과가 있습니다. 긍정적 사고는 좌절과 아픔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힘이 있음을 누가 부인할까요? 웃음은 복까지는 몰라도 확실히 신체 및 정신 건강에도 유익할 뿐만 아니라 주변도 환하게 해주어 좋습니다. 고지식하게 살면 분명히 많은 경우 사회생활에서 주변에 덕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을 즐기면서 사는 것 또한 결코 나쁜 일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즐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다만 ‘무엇을 즐기냐’의 차이가 있겠지만요. 그런데, 이런 말들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런 모든 것들의 중심이 ‘하나님 안’에서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내용을 다룬 시중의 베스트셀러 책들이 대부분 인본주의 내지는 진화론 혹은 뉴에이지적 접근으로 이런 주제를 확대 해석하거나, 하나님 없이 이룰 수 있을 것 같이 보이는 유토피아적 그림을 제시하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형제님도 문장 말미에 “어쨌든 사람에게 기원을 둔 말이나 이론들은 겉으로 보기에 그럴 듯하게 보이고 무언가 힘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사람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라고 적어 놓으신 것을 보면 이런 점을 지적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만, 하나님을 떠난 것이 문제이지 앞에 제시한 예들 (예, 칭찬은 고래를..) 그것들 자체가 문제는 아님을 좀 더 강조할 필요가 있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위에 열거한 예들은 기독교적 가치관을 충실히 따라가면 그렇게 남을 칭찬하고, 세워주며, 자주 웃고, 긍정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회생활에서 술 같은 것을 안하여 더러는 고지식해 보일 수도 있으나, 다른 면에서 남들이 잘 하지 않는 봉사와 성실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얻게 되는 총명함으로 고지식하기는 커녕 인정 받으며 리더가 더 잘 될 수도 있습니다. 향락적 세상 문화를 즐기지는 않지만, 건실한 교제와 봉사와 전도의 삶으로 더욱 풍요롭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가치관들을 분명히 분별은 하되, ‘그럴듯한 말’이나 ‘타협’ 혹은 ‘현혹’으로만 치부하여 그런 모습과 동떨어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 “결론적으로 외적인 것, 환경적 요인을 바꾼다고 마음의 상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웃는다고 해서 마음이 즐거울 수는 없으며, 아무리 긍정적인 생각과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긍정적 결과를 야기할 수 없습니다. 칭찬과 위로를 한다고 해서 헌신과 봉사를 유도할 수 없습니다. 칭찬과 위로가 소홀해지는 순간 그 헌신의 열의는 사그러들고 말 것입니다. 나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높이고 존중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 물론 외적 요인을 바꾸는 것은 근본적인 마음의 상태를 바꾸는 것 보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외적 요인을 바꾸려는 노력과 태도가 필요하고 실제로 마음의 상태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깨끗이 청소된 집이나 아늑한 커피숍을 연상 해 보십시오. 바람이 거세고 눈보라가 치는 날과 쾌청하게 맑은 날을 비교해 보십시오.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자녀가 건실하거나 교회가 비좁아도 성도들 간에 사랑이 넘쳐남을 상상해 보십시오.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는 우선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등 주변 환경적 요인을 바꾸기 시작하는 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환경을 바꿔 주면 마음도 어느 정도는 좀 더 쉽게 따라와 줍니다. 웃는 것, 긍정적인 말과 사고, 칭찬과 위로, 이 모든 것들은 결코 ‘나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지향해 나가야 할 덕목입니다. 은혜로 복음을 받은 자들이 교회에 와서 조차도 무뚝뚝하기 그지없이 앉아 있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보기 안 좋습니다.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원하기에 우리는 좀 더 기뻐해야 하고, 의도적으로라도 긍정적일 수밖에 없게 되며, 칭찬과 위로로 서로 세워주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행동을 하다 보면 마음도 변합니다. 마음이 변하면 다시 그 행동이 습관이 되면서 쉬워지기 시작 합니다. 마음의 상태를 온전히 한 후에 일을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바울도 죄의 법과 씨름할 만큼 육신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의 마음은 진정으로 의를 행할 만큼 온전하여 지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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