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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화론과 예수님의 부활이 무슨 관계? 조회수 : 8654
    • 작성자 : 김정훈
    • 작성일 : 2012년 4월 8일 18시 15분 3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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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화론은 도대체 성경과 조화가 될 수 있는 이론인가?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또한 동시에 성경을 믿을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어쩌면 진화론 사상의 정착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던 찰스 다윈(Charles Darwin)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윈은 한때 신학도로서 본래 목회를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연선택이론을 중심으로 한 진화론을 믿게 되면서 그는 점차 신앙을 잃어버리고 결국은 무신론자가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론은 그 후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되게 하였는데, 유명한 진화론자인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나 사회생물학이라는 학문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 같은 사람은 모두 진화론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버리고 자기 자신이 진화론자가 된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결국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떠나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과 진화론을 같이 혼합하여 받아들이고 있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먼저 앞장서서 지켜야 마땅할 신학교에서 조차도 진화론과 타협한 신학이론을 가르치고 있는 현실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령,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셨으나 진화론적인 방법으로 창조를 하셨다는 소위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든지, 이를 조금 변형하여 하나님께서 진화과정의 중간 중간에 필요에 따라 개입하여 창조를 하셨다는 ‘점진적인 창조론’, 그리고 창세기 1장의 날들을 지질학적 연대로 해석하는 소위 ‘날-시대 이론’ 등이 모두 진화론과 타협하여 나온 이론들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창조 사실의 기록에 대하여 매우 엄격히 말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진화론과는 혼합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다. 반면에 진화론의 본질은 반-성경적이다.

     

    우선 먼저 진화론이 성경과 조화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에서 각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열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창조 후에 안식을 취하심으로 (창 2:2-3; 히 4:3, 10) 지질학적 연대와 생물의 점진적인 진화의 가능성을 배제하셨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물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선언하심으로, 수억 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진화의 가능성을 부정케 하셨다. 넷째, 예수님 자신께서 직접 창세기의 창조 기록을 역사적인 사실로 취급하셨다 (마 19:4-6; 막 10:6).

     

    그럼 이제 진화론이 왜 반-성경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 그 근본적인 문제점을 생각해 보자. 진화론에 의하면, 사람의 조상이 지구상에 처음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약 200 만 년 전으로서, 그 전에 이미 수많은 생물들이 지구상에 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람이 나타나기 까지 수 없이 많은 죽음과 생존을 거듭하면서 나름대로 진화를 계속해오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람을 지으셨다면, 아담이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수많은 죽음의 행렬이 있어야 하고,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모순이 된다. 성경은 잘 아는 바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과 사람을 처음에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는데 (창세기 1장), 이 말은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죽음이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진화론적 개념과는 같이 어울려 생각하기 매우 어려운 말이다.

     

    오히려 성경은 창조가 있은 후에,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 땅에 죽음이 들어 왔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내용은 신약성경에서 더 분명하게 명시되어 나타나는데, 바울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다’ (롬 5:12) 라고 하였으며, 또한 그 한사람은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전 15:22). 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창조물들도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고 있다고 기록 (롬 8:22) 함으로써, 결국 생물계에 나타나는 죽음이 사람의 존재 이후에 생겨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진화론 혹은 이것의 변형인 유신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커다란 모순에 빠지는 일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기원과 부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부활은 한마디로 죽음을 이긴 사건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사람의 죄악으로 인해 이 땅에 생겨난 것이다. 이 말은 결국 부활이란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죄 없는 예수님이 죽음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음으로 부활을 하신 것처럼, 그를 믿는 우리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요 (고전 15:12-19), 그래서 그것이 기독교인들에게 부활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진화론적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람의 죄악이 있기 훨씬 이전에 이미 죽음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었음으로 죽음은 우리의 죄와는 아무 관련이 없고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 가셨다가 부활을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되고 만다. 이 말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동시에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우스꽝스럽게 되어 결국은 신앙을 버려야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바로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부활과 진화론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서로 대립되는 관계를 띠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진화론이 갖고 있는 바로 이와 같은 반-성경적인 속성을 간과하고 있다. 복음을 전파하는데 매우 열심이면서도 정작 그 복음의 기초를 두고 있는 부활의 사실성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진화론에 대해서는 많은 교회가 무관심하거나 혹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진화니 창조니 하는 내용을 전혀 모르고도 부활의 사실만을 받아들임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또 교회 활동에 열심을 낼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깊이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창세기의 역사적 사실에 그 깊은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데 (엡 4:13) 성경을 오직 부분적으로만 믿는 것이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를 경험해본 이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님 옆에 같이 있던 한 범죄자는 그냥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 낙원에 가는 것만으로도 만족 할 수 있었겠지만 (눅 23:40-43),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아직 이 땅에 살면서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엡 4:13), 믿음 안에 거하되 터를 다지고 정착해서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않아야 (골 1:23) 할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가능하겠는가? 이는 오직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기록된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으로서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현대의 신학자들이 성경과 진화론을 혼합한 이론을 가르치고 있지만, 사실은 그들의 이론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다윈의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이론들이 그 당시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되어 졌었다. 즉, 하나님께서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창조를 하셨으며, 따라서 창세기는 수십억 년에 걸친 지구 진화의 역사에 걸맞게 재해석 되어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에 대한 이와 같은 신학적 접근 방식의 모순을 아주 예리하게 웅변적으로 잘 지적했던 사람이 바로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인본주의자로 소문이 나있었던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 이었다. 그는 아주 열렬한 진화론의 신봉자로서 ‘다윈의 불독’ 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다윈 자신보다도 더 진화론을 전파하는데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진화론을 가지고 성경 기록의 진실을 파괴하길 원했으며, 그 결과 사람들이 더 이상 성경을 믿지 않으려 할 때 이를 즐거워하였다. 반면에 진화론을 성경과 혼합하여 받아들임으로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든 유지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신랄한 공격을 통하여 그들이 취하는 자세의 부당성을 아주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여러 성경 구절을 직접 펼쳐 보이면서, ‘성경의 창조 기록에 진화론을 합치는 일은 결국은 믿음을 죽이는 일이 될 것이며, 결국 창세기를 진화론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신약의 교리를 진리로 붙들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어리석은 일이 될 뿐이다’ 고 조롱하고 다녔다. 물론, 그의 말의 요점은, 결국 더 이상 그와 같이 어리석은 타협을 그만두고 진화론을 제대로 받아들임으로 우리의 성경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것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진화론은 잘못된 사상이다. 진화론은 우리의 신앙을 노략질하는 철학이요 헛된 속임수이다 (골 2:8). 그러나 헉슬리의 지적은 옳았다. 비록 그 자신은 성경을 불신하였었지만, 무엇이 성경 전체의 기초가 되는 책인 줄을 잘 알고 그것을 정확히 공격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는데 공헌 할 수가 있었다. 진화론자였던 헉슬리가 오히려 더 잘 파악하고 있던 것처럼, 기독교의 교리는 절대로 진화론과는 양립할 수가 없는 성질의 것이므로, 우리는 양자택일을 하여 오직 한 가지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가 죽은 지 백년이 더 지난 지금은 어떤가? 도대체 언제까지, 교회는 그야말로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며, 교회가 지켜내야 할 성도들을 다 잃어버리고 있을 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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