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컬럼

  • 커뮤니티
  • 성도컬럼
  • 니모를 찾아서조회수 : 8597
    • 작성자 : 유용수
    • 작성일 : 2012년 10월 18일 22시 41분 43초
  • # 니모를 찾아서

     

    너무 감동적인 에니메이션 영화가 있어 소개합니다.

    저는 에니메이션의 만화영화는 처음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사실과 같이 그림을 그려 영화로 만들었을까?

    영화를 보는 동안 내 자신이 바다 속에 들어와 있는 그런 느낌이었지만

    눈에 보이는 그런 느낌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화의 내용이 나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너무 강하게 다가오기에 우리 형제자매님들과 함께 느껴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여기에 올립니다.

     

    ==> “말린”은 아내 물고기와 함께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들 부부 물고기도 여느 물고기 가족과 마찬가지로 수백 개의 알을 낳습니다.

    “말린”과 그의 아내 물고기는 자기 자식들을 바라보며 흐뭇해합니다.

    그러면서 아내물고기는 알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주며 푸른 꿈들을 꾸기도 합니다.

    “말린”은 그런 아내가 무척 사랑스럽습니다.

    알들이 깨어나고 무럭무럭 자라나면서 북적북적 거릴 것을 생각하며 행복해 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잠시뿐,

    “말린”의 그런 행복은 일시에 거의 산산조각 나버리고 맙니다.

    상어가 나타나 “말린”을 기절시키고 아내와 알들을 먹어치웠기 때문이지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차린 “말린”은

    아내는 물론 자신의 알들까지 모조리 사라지고 없는 빈자리를 바라보게 됩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며 바닷물까지 사라지는 듯 하는 충격을 받습니다.

     

    남편으로서 처자식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도 사무쳤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것은 자기가 직접 그런 경험을 해보지 않고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쓰라린 심정들을 말입니다.

     

    자신의 무능을 탄식하며 한없는 절망감에 휩싸이던 “말린”은

    바닥 한 모퉁이에서 희망의 불씨를 발견합니다.

    죽은 아내가 "니모"라고 이름 붙여준 알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지요.

    “말린”은 너무나 기뻐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마지막 남은 알 하나이기에 그랬습니다.

    그래서 “말린”은 그 알을 고이, 고이 감싸며 굳게, 굳게 다짐합니다.

     

    "이 아빠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반드시 지켜줄 것이야,,,,,,,"

     

    [우리 인간들은 3가지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소화기체계와 순환기체계, 그리고 면역체계로 말입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어했을 때 이사람 저사람 들로부터 들은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에니메이션 영화를 통해서 한 가지 더 얻은 상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식체계라는 것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체험은 기억을 낳고 기억은 인식체계로 형성되며 그렇게 형성된 인식체계는 행동으로 나타나고

    그러한 행동들이 바로 생활패턴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제 생각입니다.]

     

    바다라는 곳이 얼마나 험악한 곳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했던 “말린”은

    하나뿐인 “니모”가 결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인식체계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니모”에게는 그런 아빠가 보여주고 가르치는 생활패턴은

    겁쟁이의 모습으로 비춰질 뿐이었습니다.

     

    아내를 잃고 수백 개의 알을 잃어버린 것은 아빠인 “말린”의 체험이었지

    아들인 “니모”의 체험은 아니었기에 사소한 위험의 조짐만으로도 신속히 보금자리로 숨어 들어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아빠 “말린”을 아들 “니모”는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거 하지 마라"

    "거기는 위험하니 가지 마라"

    "그 건 조심해라"

     

    이러한 잔소리들은 아들 “니모”가 이미 가버린 아내나 다른 자식들처럼 상어 밥이 되지 않고

    또 다른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성년으로 자라기를 바랐던 간절한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빠 “말린”의 아픈 체험들은 아들 “니모”의 인식체계에는 기억으로 인식되어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빠의 그런 사랑의 충고는 불필요한 잔소리였으며

    친구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소심한 간섭으로 해석될 뿐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니모”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안절부절못하는 아빠와 다르다는 것을 친구들에게 과시하고 싶어집니다.

    결국 “니모”는 친구들과 더 위험한 방향으로 누가 더 멀리 가는지 내기를 합니다.

     

    한 친구가 이 만큼 갔다가 얼른 되돌아오면 다른 친구가 저 만큼 갔다가 또 얼른 되돌아옵니다.

    그러자 “니모”는 친구들도 아빠도 경악을 금치 못하는 곳까지 과감하게 나가게 됩니다.

    결국 아들 “니모”는 열대어 채집 광이었던 치과의사의 그물에 덜커덕 걸려들고 맙니다.

    아빠 “말린”에게 이보다 더 큰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는 “말린”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말린”에게는 오직 아들을 구해야한다는 일 외에는 아무런 일도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린”은 자신의 온 힘을 다하여 “니모”를 구하는 일에 열정을 다 바치게 됩니다.

     

    오직 그 한 가지가 “말린”의 생애에 마지막 사명처럼 활활 타올랐기에

    굶주린 갈매기 떼나 덩치 큰 고래들,,,,,,,

    한번 빠지면 살아날 수 없는 해파리 소굴과 앞이 캄캄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깊고도 깊은 심해,

    급속히 흐르는 해류,,,,,,,

    그 어떤 것도 기필코 헤쳐 나가서 극복해야 할 난관일 뿐이었습니다.

     

    “말린”이 온갖 어려움을 뚫고 치과병원이 있는 시드니 항구까지 도달하게 되는데,

    “말린”이 체험했던 여러 가지 난관들, 즉 “말린”이 극복했던 난관들의 과정들은 소문에 소문을 타고

    바다의 온 동물들에게 영웅으로 회자되어 바다세계의 영웅담으로 널리 퍼지게 됩니다.

     

    이런 영웅담은 “니모”가 갇혀 있는 치과의사의 수족관까지 전달됩니다.

    창가로 날아든 펠리칸이 전해주는 아빠 “말린”의 영웅담을 듣는 “니모”의 눈빛은 얼마나 초롱초롱 빛이 났는지,,,,,,,

    아빠를 단순 무식한 겁쟁이로 본 것은 큰 잘못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니모”는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사랑"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확실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체계가 진작 있었더라면 쓸데없는 반항 심리로 모험을 하다가 인간에게 잡히고,

    아빠로 하여금 그 기나긴 수고와 고난들을 당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겠지요.

     

    아빠의 사랑을 깨달은 “니모”는 수족관에서 탈출할 것을 결심합니다.

    그래서 아빠를 꼭 만나야겠다는 희망과 의지를 아빠의 열정처럼 더욱 불태웁니다.

    드디어 “니모”는 탈출에 성공하여 아빠를 만납니다.

     

    한 바탕, 큰 난리를 겪은 “니모”는 이제 예전의 “니모”가 아닙니다.

    아들인 “니모”는 많이 성숙해 졌습니다.

    “니모”는 아빠의 그 모든 간섭, 그 모든 잔소리들이 다 사랑에서 비롯되었으며,

    아빠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작정 반항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짓이 아니라는 크나큰 체험을 하였기에

    아빠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관계로 성숙하게 됩니다.

     

    아빠는 학교에 가는 아들에게 삶의 모험을 즐기라고 말해줍니다.

    아들은 이제 무지막지한 반항 심리로 모험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아빠가 심각하게 걱정하는 위험한 요소가 있다는 현실을 명백히 인정하고

    지혜롭게 지킬 것은 지키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지요.

    end

     

    물고기들의 관계이긴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내 가정의 이야기일수도 있고 우리들 이웃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 같습니다.

     

    “말린”이 하나님이고 ”니모“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페리칸이 성령님이고 치과의사가 사탄이며 수족관이 수십 년을 다녔던 교회로 대입시키니

    현재의 나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수족관을 탈출한 “니모”는 아빠를 만납니다.

     

    아빠인 “말린”이 참 하나님이신 참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킹 제임스성경이었고 사랑 침례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빠의 수고와 고난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아빠는 학교에 가는 아들에게 삶의 모험을 즐기라고 말해줍니다.

     

    “말린“은 세상이라고 하는 학교에 가는 ”니모“에게 친구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라 말합니다.

    이것이 삶의 모험을 즐기라는 것이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겠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시련의 체험을 겪지 않고도

    하나님의 올바른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인식체계를 제대로 터득하였더라면 수십 년씩이나 수족관에 갇혀

    사탄의 눈요기 감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니까요.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경청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지하게 기억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성실하게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면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길이 이루어 지지 않을까요?

     

    2012년 10월 18일(목)

    유 용수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텔레그램으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