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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만과 편견조회수 : 8133
    • 작성자 : 김경민
    • 작성일 : 2013년 11월 9일 4시 36분 29초
  •  다음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이라는 코너에 “신데렐라 구두를 차버린 여인”이라는 제목의 칼럼 내용으로,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국의 여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 관한 서평입니다. 소설 속 이야기의 줄거리를 파악하시라는 의미에서 잘 요약 된 서평을 올린 것입니다. 깊어가는 가을에 잠시 고전을 감상하시면서 사색을 즐겨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미 2006년도에 영화로도 만들어져 기회가 되신다면 영화로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작가 제인오스틴은 과연 이 소설에서 무엇을 이야기 하려 했는지 직접 들어 알 수는 없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단순히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소극적 해석 보다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오만과 편견’이라는 이해와 관계적 측면에서 이 작품을 바라봤으면 합니다. 특히 결혼 안한 싱글들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연애소설로만 바라볼게 아니라 부부의 관계, 혹은 교회 안에서의 관계로도 대입해서 본다면 더 유익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수많은 매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청혼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사실을 고려하셔야지요. 당신의 지참금이 너무 적어서 아마도 당신의 장점과 많은 사랑스러운 자질의 효과를 상쇄할 테니까요.”(첫 번째 구혼자 콜린스 목사가 엘리자베스의 거절을 믿을 수 없어 하며 한 말)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우리가 처음 서양 문물을 접했을 때, 서구의 ‘숙녀’는 얼마나 선망의 대상이었던가. 그러나 많은 ‘숙녀’의 삶은 치욕적인 곡예였다. 여성이 자력으로 생계를 영위할 수 없던 사회에서, 숙녀는 필사적으로 결혼을 해야 했다. 그런데 결혼 시장은 정글의 법칙이 지배했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모두 적령기 여성의 배우자 찾기가 주제이다. 오스틴의 여섯 권 소설 중에서 제일 활기 넘치고 아기자기한 ‘오만과 편견’(1813년 출간)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닛은 지주 계층이기는 하지만 부친의 생존 기간 내에 결혼을 하지 못하면 생계가 막막해질 처지다. 아버지가 아들이 없어서, 남자 후손에게만 토지를 상속하는 ‘한정상속’ 제도에 의해 부친 사망 후에는 전 재산이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 상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무일푼의 여자라도 데려가겠다는 신랑만 나서면 감지덕지 매달릴 의사가 추호도 없다.

      인구도 적고 미혼 남성이 별로 없어서 결혼시장이 지극히 좁은 이 시골마을에 다시라는 남성이 등장하는데 처음 대면하는 날, 엘리자베스와 춤을 추라는 친구의 권유에 엘리자베스의 외모가 “봐 줄만은 해도 내 마음을 동하게 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대꾸하는 것을 엘리자베스가 들었다. 다시는 헌칠하고 당당한 외모에 무려 연 1만 파운드의 수입이 있는 대지주여서 최고 조건의 신랑감이지만 비사교적이고 거만해서 곧 마을 사람들의 반감을 산다.

      그런데 엘리자베스와 다시가 함께 있을 기회가 자주 발생하게 된다. 자기를 관찰하는 듯 한 다시의 시선을 가끔씩 느끼게 되는 엘리자베스는 무슨 흠을 찾아내려는 것인가 하고 느낄 정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는 좀 가식적이고 얌전빼는 당시의 숙녀들과는 전혀 다른, 쾌활하고 재기발랄하고 비판적 지성이 예리한 엘리자베스에게 점점 끌리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엘리자베스 집안의 지체가 자기 집안보다 현격히 낮고 엘리자베스의 부모, 여동생들이 모두 몰상식해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엘리자베스와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이별을 하게 될 때 다시는 청혼을 하고 만다. 엘리자베스는 그동안에 다시가 자기 언니와 그의 친구의 결혼을 방해했고, 위컴이라는 싹싹한 청년의 장래를 잔인하고 비열하게 망쳤다고 오해해 지극히 악감정을 갖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청혼을 받고 엘리자베스는 순간적으로 다시가 거절당하고 상심할 것을 안쓰러워한다. 그러나 다시가 자기 이성이 만류하는 청혼을 열정에 떠밀려 한다고 고백하자 분노가 치밀어서, 분연히 거절하면서 다시를 자기 언니의 행복을 가로막고 악의로 한 청년의 일생을 망친 비인격자라고 맹비난한다.

      다시는 비인격자는 아니었고 무식하고 속된 무리들에 대해 우월감은 느꼈지만 매우 관대하고 공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엘리자베스의 처지에서 자기의 청혼을 거절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단호한 거부와 함께 자신의 인격에까지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는다. 모욕감에 떨면서 엘리자베스에게 자기 친구가 몰상식한 가족과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점은 인정하고 위컴의 일생을 망쳤다는 것은 완전히 오해였음을 해명하는 편지를 써서 건네고 떠난다. 그에게는 일생일대의 치욕이었으나 차츰 자신의 엘리자베스에 대한 예의와 인격적인 존중이 미흡했기 때문에 그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부족했음을 인정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역시 다시의 편지를 읽고 자기의 다시에 대한 평가가 상당 부분 자신의 판단력 과신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수치스럽고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두 사람은 영영 서로에 대해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전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는 엘리자베스의 철없는 막냇동생으로 인해 집안이 치욕의 나락에 떨어지게 될 위기에서 몰래 전방위로 힘을 써서 그 일을 해결해 준다. 그것을 알게 된 엘리자베스의 다시에 대한 감정은 감사와 존경과 애정으로 변하고, 다시가 다시 구혼할 용기를 내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지만 마침내 한 쌍의 이상적인 부부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오스틴은 불리한 조건의 젊은 여성 한 명이, 현실적인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 자기의 가치에 충실했기 때문에 여성이 원하는 모든 것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 단지 인물 좋고 재산 많은 남편이 아니라 한층 향상된 인격자 남편의 애정과 존중까지 얻게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다시를 혐오하고 인격을 불신하면서도 그의 뛰어난 조건 때문에 첫 번째 청혼에서 승낙했다면 다시의 부인이 된다는 사실은 같다 해도 그 결혼생활의 내용이나 행복의 질은 결코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두 번의 청혼 과정은 소설의 재미를 더하는 기제일 뿐 아니라 오스틴이 강조하는 행복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련이다. 엘리자베스와 다시는 바탕이 주변의 속악한 인물들보다 지적이나 도덕적으로 단연 우월한 인물이다. 그러나 서로의 오해와 비난을 소화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결점을 깨닫고 한 차원 높은 도덕성과 포용력, 그리고 겸허함을 터득해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이상적인 결합은 또한 철저한 계급사회이던 영국에서 많은 서민을 보듬는 모범적인 지주와 마님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들은 내적으로 타락해 가던 영국적 가치를 정화하고 다시 확립할―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주역이 되고 영국적 가치를 발전적으로 계승할 2세를 길러 낼 부모가 될 것이다.

      이렇게 준엄하고 통렬한 교훈과 꾸지람을 이토록 흥미진진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소설 속에 담아 놓은 오스틴에 대한 평가는 그녀의 사후 2세기 동안 계속 상승했다.<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영화<오만과 편견>, 2006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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