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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에 대한 늑대와의 대화2: 오해와 편견>조회수 : 8392
    • 작성자 : 김상진
    • 작성일 : 2014년 1월 8일 23시 12분 55초
  •   동물 가운데 늑대만큼 억울한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이전의 글 ‘왜, 늑대인가?’에서 잠시 다루었듯이, 늑대는 인간을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동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누명을 뒤집어 쓴 채 사람들로부터 학살을 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끊임없이 테러(terror: 공포, 그리스어 ‘terrior’에서 파생된 됨. ‘terrorism’은 공포의 확산의 뜻을 지님.)를 당해온 셈입니다. 그런 피해자인 늑대를 두고, 우리 사회는 단독테러를 자행하는 범행을 일컬어 일명, ‘론 울프테러(lone wolfe terror)’라고까지 명명합니다. 늑대가 들으면 억울해서 환장할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죄(crime)와 테러리즘(terrorism)이라는 용어를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팁(tip)을 드리자면, 그것은 범법동기에 의해서 구분됩니다. 범죄는, 가해자 자신(들)의 이익이 동기가 되어 자행하는 범법행위이지만, 테러리즘이란 정치․종교․이념 간의 갈등이 동기가 되어 자행되는 범법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테러(terror)의 개념이 바라보는 각도(입장)에 따라서 달리 해석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과거 일제치하로부터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던진 ‘윤봉길’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의로운 순국열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그를 정치적인 테러분자로 여기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렇듯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한 편에서는 영웅, 다른 편에서는 잔인한 킬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도가 인간과 늑대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15c 이후 인류는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땅을 개간하면서 늑대들의 구역을 찬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늑대는 자신들의 영역과 무리(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대상이 누구이건 간에 목숨을 내놓고 다투는 그들만의 습성이 있는데, 그러한 늑대의 습성을 알리 만무했던 우리 인간과의 갈등은 그때부터 불가피하게 되었고, 동시에 자신들의 영토를 찬탈당한 늑대들은 전처럼 사냥감을 찾기가 어려워져 새끼들의 생존을 위해 사람들이 개간한 농가의 양, 염소, 말들을 습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막기 위한 과정에서, 늑대는 인간을 습격하는 ‘잔인한 킬러’라는 오명이 생겼고, 그 이후로 사람들은 늑대를 총, 덪 등으로 사냥하기 시작 했으며 심지어는 현상금까지 걸어가며 마구잡이로 죽여 댔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결과로 사람들은 늑대의 방해가 없이 땅을 개척할 수 있게 되었지만, 늑대의 개체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오늘날에 와서는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기는 시국을 맞게 되었습니다.(참고로 늑대는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중간 포식자의 위치를 담당합니다.)

      이처럼 ‘오해와 편견’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늑대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 셈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봤을 때, ‘오해와 편견’이 만들어지는 데는 적어도 두 가지 요소가 필연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째는 정확한 지식이나 정보가 결여된 ‘선입견’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익관계에 따른 타협(탐욕)’입니다.

      심리학에서 ‘초두효과(primacy effect)’라고 불리 우는 용어가 있습니다, 초두효과란, ‘초기의 정보 즉, 첫인상이 나중의 정보보다 그 사람에 대한 인상형성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선입견은 이러한 초두효과로 인해서 생겨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입견의 문제점은 한 번 뇌리에 고착되면 좀처럼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좋지 않은 선입견은 자기방어 기재로 작용하기 때문에 객관성을 마비시키는 위험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누구나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믿고 싶어 하는 타협성이 강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한비자(韓非子)는 "사람들은 뱀을 보면 놀라고, 뽕나무 벌레를 보면 소름끼쳐 하지만 어부들은 손으로 뱀장어를 잡고 부녀자들은 누에를 친다." 라며 이익이 있는 일 앞에서는 누구나 용사처럼 용감해진다는 인간의 본성을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선입견과 이익관계가 하나로 결합하게 되면 선입견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더 없이 좋은 구실이 되어줍니다. 설령 선입견이 이익관계에 결부되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은 또 다른 구실을 만들어 내고 자신을 정당화시키기도 합니다. 마치 이브가 뱀의 말에 꼬임당해 선악과를 탐하기 위한 구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켰듯이 말입니다.<창 3:3> 다시 말해서, 이익을 넘어 탐욕이 되어버리면 기존의 좋은 선입견도 더 이상 귀찮은 것이라고 치부하게 되어버립니다. 이쯤 되면 명확한 기준이 되는 법(法)도 무시하게 되어 탐욕을 위한 타협에 우정을 싹티우며 손잡을 기회를 엿보게 됩니다. 그런 유의 사람에게는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 예로, 자살테러를 자행하는 이슬람의 극단주의자들이 이러한 유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한 가지 예를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테러집단은 이슬람교의 부흥을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12살 전후의 어린 소년 병사들을 모집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먼저 주입시키는 내용은, 이슬람 외에는 구원이 없으며 이슬람 교리를 핍박하는 종교에 대해서는 강하게 응징해야 한다<꾸란 8:39, 9:123, 47:4>는 거짓 교리 입니다. 더 나아가 특히, 기독교인들과 싸울 때는 가차 없이 벌하라<꾸란 8:57>고 합니다(그 방법으로는 목을 베는 것인데, 김선일 사건이 그와 같은 사례입니다). 그 같은 교육을 받은 소년병들에게는, 이슬람을 반대하는 모든 종교는 응징의 대상이 되는데 그들에게 특히 기독교는 가장 나쁜 종교이면서 그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닌 오히려 알라의 뜻이라는 정당성이 선입견으로 뇌리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장하면 행동적인 것을 요구하게 되는데, 행동적인 실천을 요구하기 위해서 그들은 구원관과 관련하여 내세에 주어지는 인본주의적 상급(이익)을 가르칩니다. 그 내용은, ‘모두가 죽으면 연옥이라는 곳에 머물러 있다가 죄의 정도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으로 심판 때에 갈라지게 되는데, 단지 직통으로 천국에 가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알라를 위해서 순교(테러행위)를 당하는 것이다<꾸란, 4:74, 9:89>. 그리고 그 순교자(테러분자)는 포상으로 천국 가는 첫날 72명의 미인들과 성관계를 즐길 수 있는 정력이 부여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어이없는 비상식적인 교리입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에 목숨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자신의 몸을 폭탄과 함께 내던지는 어리석은 일을 자행합니다. 이처럼 ‘선입견’과 ‘이익관계의 조화’는 상식을 뛰어넘는 ‘사탄의 절묘한 계략’으로 활용 됩니다. 그런데, 사탄의 이러한 계략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인가? 답은 아닙니다. 현재 기독교에도 사탄의 탐욕스러운 인본주의 교리가 우리의 신앙 가운데 ‘오해와 편견’이라는 열매로 탐스럽게 무르익고 있습니다.

      기독교에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짜 신도들도 넘쳐 납니다. 참된 성도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가짜 성도는 자신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가짜 성도들은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이 되어주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사해하고 사랑한다고 고백까지 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웃을 향한 지독한 사랑까지도 흉내 내는 일도 가능하며, 심지어는 인류애도 품어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에게는 자신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가짜 성도처럼 장기적으로 흉내 내기란 불가능합니다. 물론 가끔은 위선적인 행동으로 남들에게 좋게 보이려하는 그릇된 일도 하지만 그 때마다 성령님의 자극으로 자신들이 곧바로 알게 됩니다. 가짜 성도들이 믿는 하나님은 결국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입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기독교는 소위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폄하할 때 표현하는 개독교가 되어 버렸다고 사람들이 종종 표현하는데,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마음이 참으로 씁쓸할 뿐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탐욕으로 마귀와 손을 잡은 이 땅의 기독교는 온통 ‘오해와 편견’으로 조장된 가짜 하나님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 가짜의 정체는, 인본주의적 산물인 복(福) 사상의 주체가 되는 맘몬입니다. 맘몬을 섬기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인양 믿고 있는 가짜 성도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이제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바른 교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른말을 하는 그들을 교세라는 뒷배를 이용하여 이단으로 매도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믿고 있는 그 가짜 하나님(실상은 맘몬)이 뭔가 더 직접적으로 해줄 수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맘몬이 하나님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맘몬의 능력으로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소위 성령님의 열매라고 착각하면서 그것은 구원받은 자들만의 확증이라고까지 너스레를 떱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대가를 주님 오신 날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슬피 우며 이를 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 자신들이 주님을 오해했다고 변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마태복음 7:21~23> 우리 손 안에 쥐어져 있는 진정한 말씀(KJB)만이 그들의 심판자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작금의 기독교의 행태에 대하여 알파늑대(우두머리)에게 소감을 묻는다면, 알파늑대는 이렇게 말을 할을 할 것 입니다. "우리에게도 신은 있어. 우리 신의 이름은 대자연(大自然)이지. 자연은 여태까지 우리 늑대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아낌없이 허락하고 제공해 주었어. 우리가 뭘 잘해서 그렇게 허락해 준 것이 아니라, 자연은 원래 그런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기에 우리는 자연을 대상으로 너희들처럼 감히 거래를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해. 우리에게 자연은 오직 경배의 대상일 뿐이지. 자연은 우리가 있기 이전에 스스로 존재<출 3:14>하고 있었어. 그래서 자연 앞에서는 우리 늑대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굴복할 수밖에 없지. 우리는 자존심이 강해서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대자연 앞에서 만큼은 굴복할 뿐만 아니라 자연이 정해놓은 규칙(순리)대로 순종하고 무엇보다 두려워하며 살지. 우리는 그것이 우리 늑대가 오랫동안 멸종당하지 않고 살아온 지혜의 원천이라고 믿고 있어<잠 1:7>. 우리는 너희들이 믿는 신(神)을 잘 몰라. 하지만, 우리도 우리에게 부여해준 모든 대자연을 보면서 자연이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는 신성을 모른 척 변명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롬 1:20>.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자연은 잔인하고 사악한 너희 인간을 존중해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그것도 많은 권위를 부여해주면서 말이야. 너희가 잔인하다는 소문은 조상 때부터 전해져 내려왔는데 듣자하니, 너희들은 너희들이 믿고 싶은 대로 '오해와 편견'을 만들어 내는데 능숙하다지?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 조상(늑대)들을 죽여 왔을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진정으로 믿는 신(神)까지도 너희 손으로 잡아 죽였다며? 그런데도 너희 신(神)은 너희를 용서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야? 우리는 단지 자연이 너희들에게 부여해준 권위 때문에 너희들에게 복수를 하지 못했지만, 너희 신(神)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너희의 구원자가 되기 위하여 기꺼히 목숨을 내놓으셨다고 하던데? 아니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게 구원을 위한 계획이었다? 이런 스토리는 소설에서도 듣도 보지도 못한 믿겨지지 않는 일인데 말이야! 만일 그 이야기가 정말로 사실이라면 너희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존재임에 틀림이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너희들을 부러워하지 않아, 왜냐고? 우리는 너희처럼 잘못된 선입견과 탐욕에 가득 찬 추악한 냄새를 풍기면서까지 안락하게 살고 싶지 않거든. 우리가 너희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 냄새 때문이야.“

      인류는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한 번도 이성적이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수 많은 오해와 편견속에서 인류는 지금까지 흘러왔고, 여전히 ‘오해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 해답을 늑대로부터 찾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늑대가 제시해준 비결이라고는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침묵’이라는 단어 였습니다. 늑대들은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마치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결해주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라는 듯 권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 찬 한 세상. 그리고 이 새대. 이제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수 많은 오해와 편견으로 시험이 찾아 오지만, 어쩔 수 없는 죄 많은 인간이라서 용서를 못한다는 핑계는 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더 이상 희생물을 찾지 않고도 죄 없는 늑대처럼 상대를 용서할 수 있음이 가능해 졌기 때문입니다.

    <요 13:34>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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