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듣는 귀와 보는 눈 그 둘을 다 만드셨느니라." (잠20:12)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눈을 최첨단 동영상 카메라로 만드셨습니다. 눈의 정교함을 연구한 논문만 해도 그 분량이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보는 눈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는 눈은 하나님의 목적하신대로 사용할 때 그 진가가 발휘됩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공통의 특징중 하나는 눈이 두개라는 것인데요, 두개의 눈은 사물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고 촛점을 맞출 수 있게 해줍니다. 이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눈은 0.1미리 이하의 작은 크기나 비물질적인 것들은 보지 못하도록 적당하게 만드셨습니다. 이는 보이는 것이 극히 제한적이고 부정확하므로 보는 것을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됩니다. 어쨋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눈을 통해 수많은 정보들이 쉴새없이 뇌에 전달됩니다. 이토록 신비한 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마6:22,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22 몸의 등불은 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단일하면 네 온 몸이 빛으로 가득하되 23 네 눈이 악하면 네 온 몸이 어둠으로 가득하리라. 그런즉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되면 그 어둠이 얼마나 크겠느냐!" (흠정역) 몸의 등불은 눈입니다. 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몸이 빛으로 가득하게 할 수 도 있고, 또 어둠으로 가득하게 할 수 있게 됩니다. 결론은 눈을 악하게 하지말고 단일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단일과 악"을 대비하고 있는데요, 왜 "선과 악"으로 대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개역성경은 "눈이 성하면(좋으면), 눈이 나쁘면"으로 대비를 했습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개역) 이 글을 문자대로 이해하면 시력이 좋으면 온 몸이 밝고, 시력이 나쁘거나 안경을 쓰면 온 몸이 어둡다는 뜻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영해를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죠, 그러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일단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위 20절에 "오직 너희 자신을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재물에 대한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고, 그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구제, 기도, 금식을 할 때 사람앞에 보이려 하지 말고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께 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24절 이후부터 두 주인에 대한 언급이 있고, 육체와 땅의 일을 구하기에 앞서 33절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약속의 말씀을 하시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면 22,23절을 보겠습니다. 시력이 좋고 나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악은 선의 반대로서의 악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부터 벗어난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누리는 육체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을 알려주고 계신 것이고요, 우리의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땅히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어야 하며, 하늘의 복을 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부와 명예에 눈을 두는 것은 악한 것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늘의 복에 눈을 단일하게 두는 것이 우리 온몸을 빛으로 가득하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개역성경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어려운 내용이지만 흠정역 성경으로 통해 그 의미가 분명히 와닿고,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눈을 이 땅의 삶을 살면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알려주시는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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