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은 나이에 깨달은 사랑!
내가 살고 있는 집 옥상에는 이런저런 꽃들과 함께 작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는 이 숲에 반하여 자주 옥상으로 올라가 그것들과 함께 숨바꼭질을 하며 즐깁니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거진(?) 숲답게 날마다 새들의 잔치들을 봅니다.
또 내방의 창문틀 틈 사이에는 어느 참새부부가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 참새부부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면 하루를 열지 못할 만큼 그 참새부부의 울음소리들을 즐기기도 합니다. 요즘엔 그 참새부부의 떠드는 소리에 아침잠을 깨는 것이 크나큰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아침, 참새들의 조잘대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눈 비비고 일어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즐거운 짜증을 부렸습니다.
“하, 고놈들 참! 되게 시끄럽게 떠드네.......”
그리고는 침상에 앉아 그 참새부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저들 부부는 살아생전에 연애소설 한 권도 안 읽고 슬픈 영화 한 편도 안 보는 것들인데 어떻게 그렇게 사랑은 잘 해서 새끼들도 잘 낳고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사랑을 잘 해서 오순도순 화목하게 지내어. 아침마다 시끄럽게 내 단잠을 깨게 하는지 그것이 매우 궁금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어째서 사랑하는 일마저도 이렇게 복잡하고 미묘하며 까다롭기까지 한 것일까? 도대체 여자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따끈한 커피까지 한 잔 타놓고 홀짝이며 계속 생각해 보았습니다.
새들처럼 저렇게 단순하면서도 날마다가 잔칫날인 그런 사랑을 할 수는 없을까? 도대체 저놈들은 어느 누구에게서 사랑을 배운 것일까?
한국 남자들은 사랑을 잘할 줄 모른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로 사랑을 할 줄 모르느냐하면,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영화배우들조차도 입맞춤하는 장면이 나오면 무슨 벌레 씹은 표정이 되곤 할 정도로 사랑을 잘할 줄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미국 남자들은 아무 데서나 침 한 방울 안 튀기고도 뒷머리가 간질간질할 정도로 “아이 러브 유”소리를 너무나도 잘 합니다.
그러나 한국 남자들은 평생에 한 두어 번쯤이나 “사랑해”소리를 했을까요? “꼭 말로 해야만 아느냐?”며 핀잔 아닌 핀잔을 앞세우고 그 한 마디마저도 마지못해 “그래~, 사랑해~~. 별걸 다가지구~~~” 이렇게 말 해 놓고는 돌아앉고 맙니다.
그러면서도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잘 한다는 미국남자들도 어째서 이혼율에 있어서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판이라 하니 이건 또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난감합니다.
세상의 각종 인종들이 사랑하는 모습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랑하는 법에는 정도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모두가 다 잠깐 좋아하다가 결국엔 길게 울고 짜기는 다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사랑에는 과연 정도가 없는 것일까?”
세상의 대중가요는 사랑이란 슬픈 것이라고 밤 낯없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대중가요는 마치 사랑이란 슬퍼하기 위해서 있는 것처럼 깨어져서 슬프고, 갈라져서 슬프고, 버림받아 슬프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이어서 슬프고, 내 마음을 몰라주어서 슬프고 온통 슬픈 사연들뿐입니다. 만약에 누군가 "사랑이란 즐거운 것이다."이렇게 노래했다면 대중가요의 배신자라도 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대중가요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그뿐인가요? 시와 소설 등 문학작품에서는 사랑이란 어쨌든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어야만 합니다. 만날 듯 이루어질 듯 남의 애간장을 있는 대로 다 태우다가 "아, 이제 조금만 더~" 하게 되면 "오,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여~" 하고는 살짝 옆으로 비껴 지나갑니다. 이렇게 이야기는 한참 삼천포로 빠져 버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만 그렇게 끝장나고 마는가?" 이렇게 종지부를 찍으려할 때, 이 무슨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는지 기적적으로 다시 만나 꿀 같은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두 사람 중 하나가 그만 불치의 병으로 눈 깜작할 사이에 세상을 떠나고 소설책의 이야기는 어느 듯 마지막 뒷장만 남깁니다. 어디다 대고 하소연 할 데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노래는 슬픈 노래일수록 더 잘 불려지고 소설책도 기구한 운명의 이야기일수록 그 기구한 운명처럼 더 잘 팔리니 인간이란 정말로 알다가도 모를 존재들입니다. 참으로 사랑이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예전에 교회에서 즐겨 불렀던 복음송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낯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순 없을까?" 이런 가사의 노래가 있습니다. 해의 햇빛이란 무엇이고 달의 달빛이란 무엇일까? 햇빛 과 달빛은 뜨겁기와 밝기는 서로가 사뭇 다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똑같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둘 다 우리에게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낯의 햇볕이 따뜻한 까닭은 햇빛이 우리 몸속에 스며들기 때문이고 밤의 달빛이 은은한 까닭도 달빛이 우리 눈에 그 은은함이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햇빛과 달빛은 이렇게 만물 가운데 스며들어 만물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섭니다.
만물 속에 스며들어 만물의 생명력이 되어 주는 햇빛과 달빛! 풀 한 포기 나무 한 잎에 스며들어 삶의 힘이 되어 주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스며들어 반짝이는 즐거움이 되어 주며, 꽃 한 송이 속에 스며들어 빵긋 웃는 웃음으로 위로해주는 햇빛과 달빛! 낯엔 그런 햇빛처럼 밤엔 그런 달빛처럼 그런 사랑으로 우리가슴속에 스며들어 영원토록 그렇게 같이 살수는 없는 것이었을까?
슬픈 영화가 왜 슬픈가? 시나 소설책의 주인공들은 왜 그들의 운명이 기구한가?
그토록 사랑하던 두 사람이 끝내 같이 살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기 때문에 슬프고 기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슬픈 영화의 주인공들보다도 그런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들보다는 차라리 내 집 옥상의 새들이 얼마나 더 행복한가! 차라리 내 창문 위에 둥지를 튼 참새부부가 얼마나 더 행복한가!
새들은 생전 슬픈 영화 한편도 안보고 슬픈 유행가도 안 부릅니다. 그러나 평생 울고 짜고 하는 일없이 아침마다 내 단잠을 깨울 정도로 사이좋게 조잘대며 늙도록 같이 살아갑니다. 새들이 헤어지는 것을 나는 본 일이 없습니다. 포수들의 산탄 총알에 의해 기구한 운명이 되기 전에는 말입니다.
제아무리 세상에 둘도 없는 멋진 사랑이라 할지라도 같이 살지 못하면 슬퍼집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같이 사는 것이라고 마침표를 찍고 싶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같이 살면 됩니다. 같이 사는 것 빼 놓고 사랑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모든 노력을 다 바쳐서 어떻게든 같이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들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님의 사랑도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영원토록 같이 살기 위함이 그 모든 목적이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헤어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제일 미워하셨나봅니다. 헤어지는 것은 같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같이 살지 않으면 영원히 사랑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한 문장을 남겨 놓고 싶습니다.
“사랑이란 낯의 햇빛처럼, 밤의 달빛처럼 그렇게 스며들 듯 영원히 함께 같이 사는 것이다.”
할렐루야!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2014년 7월 12일(토) 유 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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