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떤 옷을 입을까?, 누구를 만날까? 점심 메뉴는 무엇으로 할까? 등 일상의 선택에서부터 직장을 구하는 사람은 어느 직장을, 진학하려는 사람은 어느 학교를, 결혼하려는 사람은 어떤 배우자를, 이사를 하려는 사람은 어느 지역, 어떤 집을 구할까? 이런 저런 고민도 하면서 결국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 진지해 질 수 밖에 없다. 한번 잘못 선택하면 그 후유증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지금 한 직장에서 20년을 보냈지만 그 전에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해보았다. 젊은 나이에 이것을 선택하면 저것이 나아보이고, 저것을 선택하면 예전 것이 나아보이고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국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고스란히 물적, 시간적 대가를 치루어야 만 했다. 그래도 후회 없는 선택이 있다면 지금의 아내를 만난 일과 예수님을 구원자로 만난 것이다. 아내에게 물어본다.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어땟을까?’ ‘지금보다 좀 나았을까?’ ‘더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까?’ 물론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지만 .... 이런 여유있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이제는 좀 더 잘 할 수 있고, 문제의 중심에 서있지 않고 멀찍이 떨어지는 법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선택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를 선택하는 일이다. 이단 사이비, 여타 종교들은 제쳐놓고라도 기독교내에서도 어떤 교회를 선택할까? 어떤 지도자를 선택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최소한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이상 심각히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나의 영적인 방향이 결정되기에 그렇다. 선택의 우(愚)에 있어서 대안이 없어서, 버리기 아까워서 선택하는 사례가 있다. 어떤 사람이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남 주기 아까워서 결혼한다면 그 결혼생활이 행복할까? 뾰족한 대안이 없거나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결혼하다면 어떨까? 행복한 결혼을 장담하기 심히 어려울 것이다. 결혼이란,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의 모든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런 마음이다. 그랬을 때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함께 인내하고 평생을 이겨낼 것이다. 작금의 중도하차의 많은 예들이 잘못된 내적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을 반증해 준다. 많은 교회들이 처음에 세웠던 기준점에서 많이 이탈했다. 그 현상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고, 이에 대한 증거가 사랑침례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목사님은 왔다가 떠나는 사람들로 인해 가슴아파 하신다. 사랑침례교회의 추구하는 바를 충분히 살펴보고 자신의 내적동기를 돌아 보아야 한다. 구원자 예수님과 그분의 피로 사신 교회, 킹제임스 성경, 신약교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 여자를 배우자로 선택하는 것은 다른 모든 여자를 배우자로 포기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선택하는 것은 다른 모든 신들을 거부하고 포기하는 결정이다. 이 논리로 말하자면 킹제임스 성경을 선택하는 것은 개역성경을 포기하는 것이고, 신약교회를 선택하는 것은 구약식 교회를 포기하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표적으로 탄생한 민족이다. 그 누구보다 강력한 하나님의 권능을 눈으로 몸으로 체득한 민족이다. 주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이라고 약속까지 한 민족이다. 그런 민족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으로 돌아간 예가 성경에 가득하다. 이스라엘 백섣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선택했지만 그 마음속에는 포기하지 않은 구석이 남아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성경기록을 선택하는 것은 그에 부홥되지 않는 것들은 철저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포기를 아는 사람이 진정 선택의 의미와 가치를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값을 치루지 않는 선택, 값을 치루지 않는 포기는 어떤 면에서 진정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나의 선택이 올바르다면 인내로서 경주해 나가고, 다른 것들을 내려놓는 작업이 우리의 생각속에서, 우리의 삶속에서 지속되어야 함을 이 아침 시간에 돌아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