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얼마나 훌륭한가?
교회게시판에 글을 쓰기 시작한 후 나에게 하나의 작은 고민거리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댓글로 글 잘 읽었다는 인사말과 과하다 싶을 정도의 칭찬을 듣고는 내 마음속에서 야릇하고 요상한 마음의 충동이 일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 하나가 잘못된 환상이라는 것이 이렇게 해서 만들어 질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사람들로부터 글 잘 읽었다는 칭찬을 계속 듣다 보면 나 스스로가 어느새 당치도 않은 훌륭한 사람 중 하나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가 앞섰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어쩔 수없는 사람이기에 이러한 요사스러운 마음이 생겼나봅니다.
나는 정확히 2001년 8월부터 내 인생의 큰 고비를 넘기면서 내 나름대로의 신앙에 대한 명제 하나를 걸어놓고 믿음생활을 하기로 작정하고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삶에 있어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라는 단어를 넣고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단어는 기독교사상에 배경을 두고 있는 말이기에 이 말을 내 삶의 명제로 삼겠다는 결심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5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나는 아직 “있는 그대로” 살고 있지 못합니다. 이러한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러웠으며 그러한 현실에 큰 불만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있는 그대로” 글을 쓰지 못하고 있음에 매번 고민과 갈등을 겪으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인생을 있는 그대로 살 수 없다고 하는 이 현실에 절망감마저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어떻게 해야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 나의 고민거리입니다. 그런데 환갑을 한참 넘기게 된 지금까지도 전혀 있는 그대로 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있는 그대로”라는 것이 너무나 크고 너무나 엄청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말은 현실적으로 나는 왜 빨가벗고 나돌아 다니지 못하는가? 이렇게 묻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 같은 질문은 말도 안 되는 질문인 것 또한 너무나 잘 압니다. 누가, 사람은 왜 빨가벗고 나다니지 못하는가라는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단 말입니까? 그 같은 문제는 문제로 느낄 수조차 없을 만큼 엄청난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런 문제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나 개인의 실질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방귀를 힘차게 뀌어댑니다. 그러나 옆에 사람이 있을 때는 소리가 안 나게 그만 참아버리고 맙니다. 사람들이 없는 데서 방귀를 뀌는 것도 나 자신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방귀 한번 안 뀌고 사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도 나 자신입니다. 나는 이러한 나 자신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만 그런가 하여 주위를 살펴보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밖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들어온 줄 빤히 알고 다그치는 아내 앞에서 가진 능청을 다 떨어가며 생트집 잡는다고 딱 잡아떼는 이름 없는 가장으로부터 국민의 혈세를 통치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어마어마하게 떼어놓았다가 들통이 나는 순간까지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던 대한민국의 유명한 전직대통령과 코흘리개도 다 알 정도로 들통 날 대로 다 들통나버린 정사사건을 놓고 마지막 순간까지 네버, 네버를 연발하던 미국의 유명한 전직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그 중간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도 다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사람이란 그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알려진 그 만큼만 정말로 훌륭해도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세상에 알려진 그만큼도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훌륭하다는 사람들은 알고 보면 허명을 뽐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학창시절 때부터 글은 곧 사람이라는 말을 배워왔습니다. 내가 글을 써 보니 정말로 맞는 말이었습니다. 내 속에 내가 쓴 그런 글의 세계가 없다면 글은 한 자도 쓰여 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컴퓨터화면위에 한 자, 한 자 들어가 박히는 글들은 모두 다 내 속에서 지금 막 튀어나오는 글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내 속에 있던 것들이 컴퓨터화면위에 나와 박혀야 됩니다.
나는 지금 기독교정신이 담겨진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기독교 이야기란 하늘의 이야기입니다. 그 하늘의 이야기가 지금 어디서 나오고 있는가하니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는 내 육체 속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나의 기독교정신은 나의 육체 안에 있고 나의 영과 혼도 내 육체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기독교정신과 영과 혼을 담고 있는 나의 육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그 무엇과 비교가 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작년 어느 때쯤, 집 근처에 있는 공원을 산책하며 보고 느꼈던 그 연못이 생각났습니다. 연못바닥에는 더러운 온갖 잡동사니들이 다 빠져 있습니다. 지난가을에 떨어진 나뭇잎은 물론 공원에 산책 나왔다가 코풀어 쓰레기통에 버린 휴지가 바람에 날려 연못 속에 가라앉은 것까지 그 속에는 없는 게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더러운 연못바닥에서 물위로 고개를 내민 연꽃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실력으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연꽃은 연못바닥의 더러운 잡동사니들을 매달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빚으신 그 빛만을 안고 물위로 고개를 내밀었을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훌륭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의 훌륭함이란 바로 이 연못에서 고개를 내민 하늘빛 같은 연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하다는 그 한 사람도 온갖 쓰레기들의 잡동사니 속에서 피어난 하나의 연꽃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도 함께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따라 다니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나 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명하는 모든 것은 지키고 행하되 그들의 행위대로 하지는 말라“고 말입니다. (마 23장 3절)
나는 청년시절부터 교회를 다니다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엎어지고 자빠졌다 다시 일어나면서 행복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나온 내 삶 동안에 일어났던 “사람의 바람”이야기만 다 하려고해도 지면이 부족할 정도일 것입니다.
“모모라는 유명한 사람이 나타났다", “어느 기도원에 신통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더라." “미국에서 박사학위 받은 훌륭한 목사가 왔다더라.” “유명한 말씀의 종" “영력이 넘치는 목사” “굉장한 부흥회목사" 등등 실로 끝도 없는 사람의 바람이야기들 말입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신앙은 어떤 훌륭하다는 사람을 쫓아다녀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기독교신앙은 자기 자신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고민하고 고뇌하는 생생한 생활의 삶속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오늘도 살기위하여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그 작업현장에서 나오고, 엎어지고 자빠지는 삶의 실망과 좌절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일어나 힘차게 전진하는 그 고뇌와 결단 속에서 참된 살아 있는 신앙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유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바람을 경계해야 됩니다. 특별히 “유명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름을 조심하고 “훌륭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사람일수록 더욱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에 빠지지 않고 굳건히 살아남을 수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참된 신앙은 어떤 용하다는, 유명하다는, 훌륭하다는 사람을 쫓아 산으로 들로 왁자지껄 쫓아다니는 달콤한 환상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자식들의 학비를 걱정하는 그 쪼들리는 살림걱정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사소한 일로 다툰 부부싸움의 생각지 못했던 격렬한 감정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랬다가 멋 적게 다시 화해하는 그 멋 적은 화해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람이 살아가는 그 의미를 되새기고 부부싸움 한 후 다시 화해하며 살아야 되는 의미를 되새기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살아있는 예수님신앙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아름답게 피어있는 연꽃을 보고 더러운 연못바닥에 뿌리를 박고 피어난 꽃이라고 침을 뱉고 돌아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상에! 저렇게 더러운 연못바닥에서 어떻게 이렇게 곱고 순백한 꽃이 피어날 수 있을까?“ 감탄하며 환호성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연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연못 감탕바닥에 손을 처넣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훌륭하다는 사람의 감탕밭에는 또 유명하다는 사람의 감언이설에는 그렇게도 쉽게 손뿐만이 아니라 영과 혼까지 다 디밀어 주며 쫓아다닙니까?
진정으로, 죽을 때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쫓아 다녀야 할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와 같은 죄인의 몸을 입고 태어나 우리처럼 살았지만 죄는 없으신 단 한 사람이며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라고 나는 굳게 믿습니다.
오늘도 예수님 이외의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연꽃 구경하듯 하는 것으로 족할 뿐입니다.
2015년 11월30일 유 용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