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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수영
    • 작성일 : 2016년 6월 13일 12시 48분 28초
  • 취미로 그림을 그릴 때 젊은 선생님한테 배웠는데 가르치는 방식이 참 특이했어요.
    첫날 소개를 다 하고나니 백지를 나누어 주고 무엇이든 아무거나 그려보라고 해요.
    사람들이 ‘ 배우러 왔는데, 맨 땅에 헤딩하라’ 고 하니 다들 쉽게 그리지 못하고 있었죠.
    그래도 시간이 흘러 각자가 그린 그림 하나씩을 이젤에 올려놓고 선생님이 설명하였지요.
    그린 사람의 성향을 말해주고, 이런 방향으로 그려나가면 좋겠고, 참고 할 화가는 누구라고.
    만화처럼 그린 그림을 보고 일본 만화가 누구를 소개하면서
    그분 그림의 느낌이 난다고. 그분의 그림을 많이 보고 이런 방향으로 그려보세요.
    여백이 많은 느낌이 있는 그림을 보고 동양화를 했는지 묻고 어떤 그림이 좋았는지
    수묵화도 잘 맞을 것 같다고.
    각자의 성향을 파악해서 자기에게 맞는 것을 알려주면서
    “각자가 자기가 사용하고 싶은 재료로, 표현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표현해 보세요. 수업진행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림은 각자 인생의 모습이 반영되는 것이라 잘하고 못하고가 없습니다.”
    “우리가 피카소의 그림도, 인상파도,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그림과 여러 작품들도 보다시피 시대에 따라 그림의 성향이 달라지고 개성이 있는 것을 알기에 어떤 틀에 매이지 않고 개성 있게 자기만의 표현으로 그리는 것이 중요한데 학원에서 석고 하나를 놓고 모두가 다 똑같이 따라서 그려야만 하는, 개성 없이 복사를 해내는 것에 익숙해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요.”
    “강의하는 대학에서도 학생들에게 자유로운 과제를 주면 마감일을 넘기기가 일쑤인데다 상상력의 빈곤을 보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힘들어요” 
    선생님의 그림 관에 대해서 듣고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런데 다음 시간에도 몇 몇 사람들이 또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고 앉아만 있었어요.
    선생님이 여러 가지 그림을 제시해 줬는데도 시작을 못하고 망설이며 시간이 흘러갔어요.
    여러 사람들이 모이니 여러 가지 모습이 나타났는데 어떤 나이 드신 남자 분은 스티브잡스를 연필로 시작했는데 두 달에 걸쳐서 진짜 스티브잡스를 그려내셨어요!
    흑백 사진이었는데 털 하나하나까지 연필로 세밀하게!!!
    나중에 그 분을 ‘잡스형님’이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또 한 젊은 엄마는 너무 궁리를 하고 지우고를 반복하느라 세 시간을 보냈고 어떤 나이 드신 여자 분은 크레파스로 그렸는데 형태도 안 맞고 우리가 보기엔 너무 못 그려 보이는데 선생님이 극찬을 하셨어요.
    전문가들에게 자기 학생 그림이라고 스마트폰으로 돌릴 정도로.
    그림은 아주 거칠고 원본과는 형태도 다른데 야성이 느껴지고 순수성이 돋보였어요.
    신 피카소? 랄까^^
    그런데 중요한 건 선생님이 최고라 인정을 하고 동료들이 잘 그린다고 말해도 정작 그린 본인은 전혀 인정을 못하는 거예요.
    자기는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고 자기가 봐도 원본과는 형태가 전혀 다르니까요.
    도무지 자신감이 없어하고 숙제를 숨기고^^
    저의 경우는 선생의 그림 관을 확실히 이해하니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쓱-싹 그려내고^^
    각자가 다 다른 재료와 소재로 그리는 그림이 한 교실에서 진행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나중에 어느 정도 그리면 선생님이 한 작품씩 이젤에 놓고 부족한 부분은 가필하면서
    설명을 하면 눈썰미도 생기고 여러 가지를 보는 재미가 생겼고요.
    자유를 누리면서 내 맘대로 그리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지요. 
    성격대로라서 덜렁덜렁 휘- 딱^^ 그려내면 꼼꼼한 성격의 정밀화를 그리는 분은 너무 부러워하고 반대로 나는 또 초정밀 하는 분이 존경스럽고^^
    사람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부러워하죠^^
    사람들의 성격이 그림에도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은 역시 살아온 흔적을 드러낼 수밖에 없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어요.
    하나하나 진행할 때마다 망설이고 지우고를 반복하던 분이
     “어떻게 그렇게 망설임이 없이 뚝 딱 쉽게 그리세요?”
     물어왔어요.
    “맘에 안 들면 다시 그리면 되니까요”
    아주 단순한 대답을 들으면서도 납득이 안 되는 얼굴 표정-
    어떤 남자 분은 설계도를 보는 것 같은 초정밀의 그림을 그려내서 존경스럽기도 하고
     저는 머리가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 적성이 아닌거죠^^
     
     
    정말 신선한 학습법이었는데 그림을 그리면서 심리 상담에서 왜 그림을 사용하는지 이해가 되더라구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소수였어요.
    저는 내 맘대로 그리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그 자유를 아무것도 못하는 망설임 속에서 보내는 분들도 있음을 보았지요.
    점차 수업에 안 나오고 (자유의 이면에는 수업에 참여할 책임이 있는데) 가끔씩 나와서는 여행 다닌 얘기만 하다가는 결국 중도 하차하는 분도 생기고....
    “나는 기초부터 배우려 왔는데, 선생님이 기초를 안 가르쳐 줘서 못 나오겠어요.”
    “기초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하시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한 번 시도를 해 보세요”
    하고 권해도 도무지 너무 가르치는 것이 없다고 도중하차....
    “선 긋기 이런 거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계속 주장하는 한 분은 사각석고를 놓고 그리라고 배려를 했는데 결국 재미없다고 도중하차하고 말았어요.
    첫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미술’이다 는 말을 듣고 모두가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말이지요.
    듣기는 들었고 이해도 한 것 같았으나 자기 생각에 이리 저리 해야 하지 않나? 하는 고정관념이 너무 강해서 한 발도 내딛지를 못하니 수업이 어렵고 힘들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제가 경험한 취미 미술수업에 국한 된 일이지만 우리 교회가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다보니 간혹 이해를 잘 못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영혼의 자유엔 반드시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인데 말이지요.
    “어듬 속의 등불”이라는 영화를 봐도 우리가 보는 성경이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피 값인 것을 알게 되는데, 현재 우리가 (감사하게도) 공산국가가 아니라서 고귀한 피 값인 성경을 자유롭게 살 수 있고, 볼 수 있고, 교회도 많아서 그 귀중함을 잊고 지내는 것 같아요.

    중세시대는 말 할 것도 없고, 근세에 들어서도 영혼의 자유를 얻기 위해 죽을 각오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이주한 선진들-그들의 피 값으로, 주님을 믿는다고 참수형을 당한 우리의 선조들의 피 값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선진들의 피 값으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누리는 영혼의 자유는 선진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어렵고, 힘들게, 피 흘려 죽기까지 지켜온 것임을 잊어버리고
    당연시 하는 것은 아닌지?
    주일 성수를 주장하는 교회는 당연히 출석률이 좋을 수밖에 없지만,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자원해서 행하는 것을 취하다보니 너무 자유롭게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닌데도) 방종으로 가는 분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지요.
    교회 구성원이라면 당연히 몸과 마음과 시간과 금전으로 섬기는 것이 당연하건만 자기 좋은 것만을 취하는 분도 드물게 생기지요.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간증을 들어보면 교회 안에서도 “좋은 게 좋지”라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는 듯해요.
    그래서 일반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부정을 저질러도 눈감고 넘어가고 성도끼리도 서로 말 안하고 넘어가는 것이 너그럽고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해요.
    “관용”이라는 좋은 단어를 사용해서 “거룩함”을 덮는 일들이 많이 생기고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기도 해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오래참고 기다려 줘야 한다고.
    그런 사고는 “분별력 있는 사랑”이 차갑게 느껴질 수 있어요.
    비근한 예로 대부분의 조부모는 손자, 손녀에 대해 너무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지요.
    부모들은 사랑하기에 매를 들기도 하고 야단도 많이 치구요.
    누구나가 인정하듯 무조건 적인 사랑은 기준이 없다보니 자기 위주의 사람을 만드는 경향이 많이 있지요. (다 그런 것은 물론 아니지만요.)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온갖 좋은 것은 다 해주면서 자녀들이 반드시 배우고 알아야하는 참을성, 예의, 도덕적인 기준과 분별력, 사회성, 인성, 겸손 등을 안 가르쳐서 신문의 사회면을 채운 다음에 후회하기도 하지요.
     
    ‘무조건적인 사랑’
    ‘관용’
    ‘좋은 게 좋지’
    이러한 사고가 거룩함과 배치 될 때는 우리는 거룩을 취해야 한다는 말씀이 옳다고 생각해요.
    한 성도와 교제가운데에서도 증명이 되는데,
    예전에 설렁설렁 그냥 교회 다닐 때는 사무실에 친구들이 매일 많이 놀러 와서 농담도 하고 시끌벅적했는데, 바른 성경과 바른 설교를 통해서 영적인 영양을 공급받고 부터 매일 사무실에서 설교CD를 틀어놓고 공부를 하고, 들은 말씀을 전하려고 애쓰다보니 한 사람 두 사람 발길을 끊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거룩함은 분리라는 뜻도 있으니 그리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랄까요?
    세상의 영과 분리될 수밖에 없어서 대부분은 세상 친구들과는 멀어지게 되지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람을 사귀는 일을 제외하고는 될수록 먹고 마시는 모임은 피하게 되지요.
    말 한 마디를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서로 교제가 되는 성도들을 만나는 일이 더 기쁘고 좋으니 자연스레 정리가 되어 가는 것 같아요.
    주님의 자녀들은 주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서로가 교제하며, 위로하고, 감동도 함께 나누며, 또한 서로 권면하고, 받고 하면서 성장해 가는 것 같아요.
    옷을 입었는데 속치마가 삐죽 나와 있으면 가서 말해 바로 잡아 주는 성도가 되어야 우리 교회의 모습이 단정해지지요.
    한 개의 돌이 바닷가의 고운 모래가 되기까지는 수나 양을 셀 수 없는 물의 연단을 받고, 같은 돌끼리도 부딪히는 힘든 과정을 겪어야 고운 모래가 되듯이 우리도 그러한 과정 속에 있다고 여겨져요.
    그것도 주님 오시기까지 쭈-욱 -
    물결이 세고, 파도가 높아서, 떨어질 때 죽을 것 같이 아파도,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후퇴하고 싶어도,
    부딪힘이 너무 싫고 괴로워도,
    우리는 성령님의 품안에서 우리를 빚어 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외로움도 감사로,
    아픔도 감사로,
    고난도 감사로,
    연단도 감사로,
    모든 것을 감사로 받으면서 주님을 바라며 함께 성장해 가야겠지요.
    주님께서 불러주시는 날까지.....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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