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징벌하지 않는 하나님 영화 “오두막”의 하나님은 어떤 악인도 징벌하지 않는다. 맥이 엘루시아에게 “누구를 유독 싫어하느냐?”고 묻자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한 번도 징벌한 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미 죄책감만으로도 충분한 벌이 되므로 달리 벌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있으라!”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죄 없으라!” 는 한 마디면 죄도 없앨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죄를 용서는 해 주셨지만 그 대가를 인류 대대에 지불하도록 하심으로 하나님의 질서를 세워나가셨다. 용서를 남발하면 영적 모럴헤저드가 발생해서 이 세상은 지금보다도 더 크고 흉악한 죄로 가득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죄에 대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따를 것을 명시하고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이 영화는 하나님의 양면성인 공의와 사랑에서 균형을 잃고 사랑을 강조하고 심판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반쪽짜리 하나님을 보여준다.
19. 죽은 자를 만날 수 있는가? 맥은 동굴 입구에서 흐르는 폭포수에 몸을 씻고 천국의 모습을 환상으로 본다. 미시가 꽃이 가득한 들판에서 다른 아이들과 예수님과 함께 천진하게 뛰어놀고 있다. 맥은 즐겁게 잘 지내고 있는 미시를 보고 안도감을 느끼고 행복감에 젖는다. 성경은 죽은자에 대한 참된 위로는 부활을 믿을 때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그 나라에서 분명히 만날 것이고 부활한 몸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랑했던 사람들과 함께 다시는 죽음이 없는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엘루시아는 누구나 고통을 면할 수는 없으며 죽음은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라고 말했지만 성도에게는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권세가 있고, 영생의 길이 주어져 있다. 이 영화는 모든 이의 참 소망이 되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침묵한다는 점에서 아쉽다. 엑스터시를 경험한 맥에게 예수가 어땠느냐고 묻자 맥은 테러블하고 원더풀한 경험이었다면서 미시를 볼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대답한다. 그날 밤 성부 성자 성령은 맥을 데리고 들판으로 나간다. 사라유가 맥의 눈을 쓰다듬자 맥의 눈이 열려 영혼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무수한 언어와 종족, 나라에 속한 영혼들의 성격과 감정이 온갖 색깔과 빛으로 나타나 보인다. 그때 저쪽편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온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맥을 보고 끌어안더니 “정말 미안하다. 내가 눈이 멀어 널 제대로 못 보았다. 널 용서하마.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자기를 살해한 아들을 쉽게 용서한다. 맥은 어설프게 포옹하며 화해를 한다. 아버지의 영혼은 “나중에 또 보자”하면서 사라진다. 죽은 자의 영혼과 산 자가 만나 교류하는 것은 뉴에이지적인 설정이다. 성경은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죽으면 즉시 그 영혼은 낙원이나 음부로 떨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된다는 설정은 무의식적으로 심령술이나 영매의 활동을 부추기며 심판의 즉각성과 엄중함을 흐릴 위험이 있다.
20. 무조건 용서가 가능한가? 맥이 아버지와 화해한 후에는 파파가 인디언 할아버지로 변신해서 등장한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데 이 장면은 경우에 따라서 변하는 분으로 왜곡된 인식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하나님 아버지를 양성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모습으로 형상화해 표현하고 있는 영화적 한계에서 비롯된 위험성이다. 파파는 맥과 함께 아이의 시신을 찾으러 간다. 파파는 맥에게 “나를 믿고 옳은 일을 하라. 최선이 뭔지를 깨우치라. 그의 목덜미를 놓아주라. 내면의 고통이 자신을 옭아매고 기쁨을 빼앗아가 사랑할 능력을 잃게 된다” 라고 말하면서 너 자신을 위해 그 자를 용서해 주기를 권한다. 맥이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항거하자 또 다시 심판자가 되었느냐고 묻는다. 그도 내 자식이라 그도 구원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나는 너를 용서한다”를 반복해서 자꾸 외우면 용서가 될 거라고 말한다. 맥은 번민 속에서 자기 손 안에서 살해범을 상징하는 무당벌레를 죽이려다가 살려서 날려보낸다. 맥은 딸의 시신을 안고 돌아오면서 여러 차례 그 말을 반복하면서 범인을 용서한다. “나는 너를 용서한다”는 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면 용서가 된다는 것은 바알신앙적이고(왕상 18장), 주술적이며 샤머니즘적인 세계관이다. 힌두교나 샤머니즘 등의 바알 신비주의에서는 말 자체가 능력이 있어 말로 신의 힘을 끌어낼 수 있다고 본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용서는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친히 보수하실 때 비로소 용서가 된다. 내가 엄청나게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아빠가 박애정신을 가지고 내가 그 애도 사랑하니까 무조건 용서하라면 말이 안 된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라. 아빠가 그 녀석 혼내줄게.” 이래야 그 애를 나중에 혼내 주어 내 억울함을 풀어줄 정의의 아빠를 믿고 간신히 눈물을 그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한 것은 맥 자신도 아버지를 간접살해한 살인자가 아니던가? 나는 아버지를 살해해도 되고 내 딸은 누가 살해하면 안 되는가? 자기가 누구를 용서할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용서받을 자리에 있는 자라는 것을 깨달을 때 인간은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죄를 죄가 아니라 상처라고 말하기 때문에 치유의 장면은 나오지만 맥이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는 회개의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고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는다거나 하나님에게 원수 갚는 것을 의탁하며 자유를 얻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영화 “오두막”에는 영적인 치열함이 없다.
21. 말씀과 체험 이 영화는 체험에 비해 성경말씀을 중요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에서 성경책이 딱 한 장면 나오기는 한다. 맥이 서랍에서 성경책을 꺼내 침대에서 누워 보려고 하다가 잠이 들어 스르르 성경책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리고 침대가 붕 뜨면서 환상을 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어떤 꿈이나 환상의 체험이 말씀을 압도하는 이미지의 그림이다. 성경은 체험을 중요시하지만 그 어떤 체험도 성경 말씀 위에 두지 않는다. 한순간의 체험이 그 후의 삶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삶을 변화시키고 성화되어 가는 것은 체험이 아니라 말씀의 힘이다. 그런데 “오두막에서는 어린 맥을 정죄할 때 외에는 성경구절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바로 세워나가는 데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사도바울은 3층천에 다녀오는 최고의 영적 체험을 하고도 14년간이나 침묵했다. 체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체험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바울이 그것에 대해 침묵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맥처럼 무언가 눈으로 보고 듣고 만져지는 영적인 체험을 원하지만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후로 지금은 계시가 다 열려 말씀으로 완성된 시기이다. 그래서 말씀으로 응답하시고 역사하시는 시대이다. 그래서 누가 무슨 꿈을 꾸었다, 환상을 보았다, 직통계시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한다. 이미 계시되어 완성된 성경 말씀만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다.
22. 나비 파파는 미시의 죽음을 상징하는 붉은 색깔의 표시가 있는 돌을 치우고 미시의 시신을 찾아주어서 예수가 짠 관에 넣어 장례를 치르게 해 준다. 이런 의식은 부모의 한을 풀어주는 일이다. 몸은 한 때 영혼의 장막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님의 재림날 육이 부활한다는 점에서 비록 시신일망정 엄숙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목수인 예수가 만든 관에 나비문양이 많이 새겨져 있다. 정원을 파고 관을 내려 미시를 묻자 사라유는 눈물병을 열어 그 관 위에 치유의 눈물을 몇 방울 뿌려준다. 그것은 맥이 그동안 흘린 눈물을 성령이 모아둔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그 땅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큰 나무가 쑤욱 자라나온다. 그때 제왕나비가 나타나 맥의 얼굴을 터치하고 무수한 나비들이 온 정원을 뒤덮는다. 나비들은 환생을 의미한다. 제왕나비는 마인드컨트롤의 대표적인 심벌이다. 근래에 케이팝 아이돌의 뮤직비디오에 가수의 마인드컨트롤 장면과 나비들이 자주 등장한다. 나비가 갖는 상징성을 생각할 때 연출상의 아쉬움이 남는다.
23. 인간은 우주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성부성자성령은 맥에게 여기에 남아서 당장 미시를 볼지 남은 가족에게로 돌아갈지 선택하라고 말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다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말한다. 파파는 맥에게 “네가 사랑하고 용서할 때마다, 너의 친절한 행동 하나하나가 우주를 더 낫게 변화시킨다. 한 가지라도 상관이 있으면 다 상관이 있다. 어느 하나라도 중요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네가 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네가 중요하다. 모든 친절과 봉사를 통해서 네 목적은 이루어지고 어느 것도 예전 같지 않게 된다”라고 말한다. 중국 베이징에 있는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훗날 미국 뉴욕에 폭풍을 가져온다는 ‘나비효과’처럼 나의 작은 행동이 우주와 연결되어서 우주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를 신으로 보고, 그 우주와 하나인 인간도 신적인 존재로 보는 뉴에이지 세계관을 반영하는 말이다. 그래서 “네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도 우리 한 영혼이 우주보다 귀하다고 말씀한다(막8:36-37). 그러나 내가 우주의 중심이며 우주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라서 중요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철저하게 무능하고 연약한 존재이다. 성경은 인간의 행위로 세상이 바뀐다고 보지 않는다.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을 때이다. 자기의 선행과 용서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용서조차도 그분이 하게 해 주셔야 할 수 있는 것이다.
24. 해피엔딩 이렇게 해서 맥은 지상의 세계로 돌아온다. 눈을 떠 보니 병원이고 친구 윌리가 곁을 지키고 있다. 금요일에 차를 빌려서 갈 때 40톤 트럭에 받히는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맥은 오두막에 가지 않았다. 꿈을 꾸었던 것이다. 맥은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딸 케이시에게 “내 슬픔 속에서 허우적대느라고 네가 이기도록 돕지 못해 미안하다. 지나간 건 생각하지 마. 나도 이제야 털어내는 법을 배워가고 있거든. 우리 함께 배워나가자”라고 말한다. 가정은 회복되고 관계도 회복되고 예전의 평화가 찾아온다. 정말 환상 한번 본 것 갖고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되고 기복 없이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는지는 의문이다. 영화는 윌리의 시각에서 자기 친구 맥이 그 경험 후로는 거의 매일 심오한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남을 빨리 용서하고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는 형식으로 끝난다. 이 영화가 주장하는 대로 맥의 용서와 친절한 행동으로 인해 우주가 어떻게 변하는지까지 다루었더라면 더 친절하고 신뢰도 높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25. 사람들은 왜 힐링에 집착하는가? 영화 “오두막”의 하나님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놓여나게 하고 기분 좋게 해 주는 하나님이다. 3위 혹은 4위의 신이 총동원해 한 사람의 내면의 상처를 치료한다. 사람들이 힐링에 집착하는 이유가 뭔가? 내 고통을 제거하고 평안과 행복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나를 가장 위해주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내 힐링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에게 집중해 있고 자기가 중심에 있고 자기가 우상이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다. 그런데 자비의 하나님이 죄로 인해 상처 가득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일시적인 힐링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힐링을 넘어 구원까지 가야 한다. 예수님에게 치유 받은 사람은 많으나 다 영혼의 구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힐링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그러나 구원은 꼭 받아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이용해 치유받고 평안을 얻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을 얻는 구원의 종교이며, 자신을 힐링하는 것이 아니라 킬링하며 자기로부터 눈을 떼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는 종교다. 영적 성숙을 위해서 쓴뿌리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힐링에 집착하는 것은 이제 와서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과거와 셀프에 집중하게 만들어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만들 위험이 있다. 기독교는 미래지향적이고 하나님중심적이고 타자중심적이다. 주인공을 오두막으로 보내는 설정은 사람이 상처를 치유받으려면 억압하지 말고 직면하라는 의미인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서도 보면 사람이 죄를 오래 덮어두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서서 만 천하에 다 까발리신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오두막에 가야만 하나? 과거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는 상처 입은 과거의 그 현장으로 거슬러 되돌아가서 해야 한다는 것은 최면요법적 치료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맥이 잠 못 이루며 고통을 받는 것은 아버지를 간접 살해한 죄책감 때문이었는데 왜 자기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한 장소에서 생긴 그 깊은 상처는 왜 유년기의 자기 집으로 가서 치료하도록 설정하지 않았을까?
26. 고통의 의의 파파가 맥에게 “고통이 없는 세상을 원하느냐?”고 묻자 맥이 “그렇다”고 답변한다. 파파의 말대로 그런 세상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이 싫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고통을 제거하라고 말하지 않으며 그 고통의 원인인 죄를 제거하라고 말씀한다. 그게 구원의 길이며 고통을 종식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끝없는 인생에서 한 가지 고통을 해결하는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성경은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셀프가 아닌 하나님에게 집중하라고 말한다. 고통과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이다. 고통은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죄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은 신 중심적 세계관이다. 죄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하나님 한분만 바라보면서 구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한 무수한 사례들이 등장한다. 이해할 수 없으나 성경에 따르면 고통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하나의 방법이다. 고통을 받으며 인간은 비로소 고통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며 완전한 구속의 그날을 꿈꾼다. 고통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알고 신 앞에 겸허해진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시고, 고난을 통과한 자에게 존귀로 옷 입히신다. 그런 점에서 고난은 영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고통은 당사자에게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아가는 기회가 되고 그것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기회가 된다. 우리의 시선이 우리 자신에게 머물러 있으면 외부, 즉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구원을 보지 못하게 된다. 성경은 우리의 중심축이 자기로부터 타인과 하나님으로 이동하기를 촉구한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셨다. 우리가 영육간에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보다 주님이 더 원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치유 자체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궁극적 골(goal)은 아니다. 인생이 얼마나 연약하며 치료가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시고 구하게 하시고 응답하심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치료자되시고 구원자 되심을 경험적으로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나 개인을 치유하신 주님의 이름을 공동체에 전하게 하심으로 나를 통해 공동체를 치유하시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개인과 가족에게만 시선이 머물러 있어 나와 가족만 행복하면 다 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는 몸과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서 상처를 입으신 주님은 우리에게 너도 남을 위해 상처를 받고, 네 상처로 다른 상처 입은 사람들의 영혼을 보듬어주고 섬기면서 살라고 말씀하신다. 나를 위해 상처 입으신 주님을 바라보며, “나도 상처가 있는데 쯧쯧, 너도 상처가 있구나” 하면서 다른 상처 입은 사람을 긍휼한 마음으로 품고 가다보면 어느 새 상처가 낫고 새 살이 돋으며 그 상처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영광이 된다. 고통을 통해 인간은 정금 같이 단련되고 영적으로 성숙하고 강인해진다.
27. 샤머니즘화된 기독교 영화 “오두막”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과 늘 함께하면서 내면을 치유하는 하나님이다. 그것은 성경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로 삼고 나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도구로 삼는 것은 기복주의적인 샤머니즘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기복신앙이란 신의 힘을 빌려 현세의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모든 형태의 신앙을 이른다. 남들은 이것저것 있는데 내게는 그게 없는 것이 고통이므로 신의 감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치성을 드리며 자꾸 복을 달라고 비는 것이다. 만약 나의 고통을 없애기 위한 치유의 수단과 방편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게 기복신앙이다. 뉴에이지는 종교 자체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종교를 인간의 필요와 상황에 따른 치료방법이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수단화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먼저 추구할 때 결과적으로 모든 영육간의 축복이 따라온다고 말한다.
28. 환상은 죄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맥이 살아오면서 받은 깊은 상처는 그것뿐이었나? 맥이 치유 받고 변화된 삶을 살아갔다고 하지만 그 후로 행복하기만 했을까? 인생이란 것이 고난의 연속인데 그다음에 또 상처를 깊이 받으면 그때는 어떻게 치료할까? 또 그 장소에 가서 환상을 통해 4위 하나님을 만나야 할까? 죄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이 환상을 한번 보면 일시에 해결될까? 인생의 모든 문제는 죄로부터 시작되며 그 죄 문제가 예수님을 만나 해결되지 못하면 그는 참 평강을 누릴 수도 없고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맥의 죄를 죄라고 말하지 않고 ‘치유 받아야 할 상처’라고 말한다. 상처라고 한다면 그건 치유의 영역이지 회개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상처의 치유는 죄 문제를 회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데 맥은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개의 기도를 드린 적이 없다. 성경은 인간의 치유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나의 죄와 질고를 대신 담당해서 죽으셨음을 믿을 때 일어난다고 말씀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29. 총평 저자는 선교사이던 아버지의 율법적이고 정형화된 신앙교육에 대한 반작용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직된 사고방식을 가진 편협한 신앙인들이 좀 더 폭 넓은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성경을 다양하게 변주하는 과감한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아버지에 대한 반발과 여성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일면 이해는 간다. 그러나 해석의 논란을 일으킬 여지가 많은 영화다. 판타지는 포스트모던적이라 초월적 세계에서 인간이 갈망하는 어떤 것도 다 성취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에 현실의 억압에서 해방시켜주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한다. “오두막”은 판타지 영화로 현실세계에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경험하게 해 관객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해 주기는 하지만 대증요법적인 진통제 기능을 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면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잠시 위로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인생의 근본 문제를 치유하지는 못한다. 이 영화는 개인과 여성과 주관을 중시하고, 모든 진리에 대해 관용적이며, 기존의 모든 권위와 질서를 해체하는 포스트모던 세계관의 영향으로 기존의 신학체계를 뒤집고 허용치를 넘은 주관적인 해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려가 된다. 주관이 중시되는 이 시대에 성도들은 내가 믿고 싶은 하나님을 믿는 위험에 자주 노출된다. 이 영화는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으시고 영이시며 우주보다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만져지고 보이는 형상으로 축소하고 제한한다. 그래서 우주에 충만한 신성의 경외감을 제하고, 아주 능력 없고 만만하게 여기고 사람의 마음대로 부리며 우상화할 위험이 있게 만든다. 엘루시아는 여자이면서 자기를 ‘파파’라고 부르라고 해 젠더상의 혼란을 일으킨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을 서로 뒤섞고, 4위의 신격을 제시해 삼위일체 신학에 혼란을 일으킨다. 하나님을 여성화해 엄마같이 자애롭고, 친구 같이 친밀한 하나님을 제시함으로써 진노를 제하고 공의와 사랑의 양면성을 지닌 하나님에 대해 균형감을 잃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영광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연적인 고난을 제거할 문제로 바라보게 만든다. 내가 우주의 변화의 단초가 되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존재이며,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나의 고통을 제거하는 내적치유가 중요하다고 여기게 만들며, 하나님도 치유의 수단으로 대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시킨다. 그리고 개인을 중시하고 공동체에는 무관심하게 만든다. 나는 맥이 정말로 거듭났다면 딸을 잃은 자신의 아픔으로 다른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영혼을 섬기는 일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를 믿는 믿음보다는 우주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용서, 선행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왜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방치했느냐면서 성부를 공격하고 정죄하기 위해 예수의 죽음은 언급하고 있지만 우리의 모든 소망인 예수의 부활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쪽짜리 예수를 보여준다. 그리고 어떤 죄도 다 무조건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무효화하고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아예 불필요하게 만든다. 성경은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끝나는데 이 영화는 예수님에 대해 충분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참 많다. 영화 ‘오두막’에서는 성부 하나님을 뚱뚱한 흑인 여자나 인디언 느낌의 할아버지로, 성자 예수님을 아랍인 남자로, 성령님을 아시아인 여자로, 지혜의 여신을 백인 여자로 형상화하여 모든 인종을 등장시켰다. 이들이 일체로 묘사되는 점으로 보아 초인종적인 평화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뉴에이지 영성은 다원종교적, 종교혼합적, 보편주의적 구원을 주장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더 잘 알게 되고 예수님을 더 잘 믿게 되었을까? 만약 예수님이 이 영화를 보셨다면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