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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력이란 조회수 : 7888
    • 작성자 : 김경민
    • 작성일 : 2017년 11월 27일 10시 15분 58초
  • 문득 자려고 옆에 누운 아이가 묻는다.
    "엄마, 지구력이 뭐예요?"
    흔한 단어인데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고 머뭇거리자 아이가 재치있게 다시 묻는다.
    "아, 지구를 막 미는 힘이에요?"
    순간 이런게 창의력일까, 반신하며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아이가 잠들고나서 잠시 책상에 앉아 있다가 그 생각이 떠올라 '지구력'이라는 단어를 구글에서 검색해보았다.

    지구력(持久力)이란 어떠한 일을 오랫동안 버티며 견디는 힘을 의미한다. 지구의 힘이 아니다

    종종 과소평가되는 '인간'의 신체 능력 중 타 동물 대비 가장 우수한 항목이 지구력이다.

    운동역학적 면에서 2족 보행이 4족 보행보다 효율적이며, 연비가 좋다. 훈련된 인간은 몇 시간 이상 지속적인 달리기와 수영이 가능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 지속 보행이 가능하다. 특히 두 손이 비어있기 때문에 이동 중에도 음식물 섭취(=에너지 보충) 등 다른 동작이 가능하다.

    수렵채집문명의 사냥꾼들이 자기보다 강한 동물을 사냥하는 방법이 바로 지구력을 활용해서 간격을 두고 지속적으로 추격하는 방식. 잘 단련된 성인 남성이라는 가정 하에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냥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추격할 수 있다! <위키백과>

    인간이 동물과 다른 차별된 능력 중  하나 혹은 사냥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추격할 수 있다는 문구가 바로 '지구력'이라는 말에 순간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자기능력 이상의 버거운 거대한 청새치를 얻기까지의 지구력이란 가히 경이적이다.
    게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며칠 동안 청새치의 피냄새를 맡고 몰려든 흉상어떼를 물리치기까지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도 노인은 고집스럽고 미련하리만큼 대단한 인내심으로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살은 다 흉상어들에게 빼앗기고 앙상한 뼈만 끌고서 뭍으로 나왔을 때의 노인의 포부는 더욱 놀랍기만 하다.
    다시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자는 것이다.

    지구력이란... 고도의 인내와 수련이 없이는 한순간의 의지만으로 단시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안다. 그런데 <노인과 바다>에서의  주인공의 모습을 가만 생각해 볼 때 지구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희망에 있었던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믿음에도 지구력은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우리는 수많은 환경의 변화 속에서 갈등을 겪게 된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지구력이다. 굳이 따져본다면 믿음에서의 지구력은 자유의지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얼만큼 삶속에서 제대로 올바르게 지구력을 발휘하며 살고 있을까?
    주님께서 복음의 무한 선물을  누구에게나 주신 것 만큼 자유의지 또한 모든 인간에게 공통으로 부여하신 놀라운 특권임에도 나는 얼만큼의 지구력을 발휘하며 이것을 올바르게 잘 활용하고 있을까?
    가벼운 풍파에도 쉽게 요동하거나 무뎌진 양심의 날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안주하며 이 소중한 자유의지를 아예 지구력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분명 천국은 구원을 얻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나 한편으로는 성도 앞에 닥칠 더욱 큰 시험 즉 예수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선다는 사실을 나는 종종 망각 내지는 편리함 앞에서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존 맥아더 목사님의 책 <순전함>의 서론에 보면 이런 인상적인 구절이 나온다.

    오늘날 교회는 너무 능숙하게 세상과 타협해서 타협하지 않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현재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방법들을 찾고 있다. 하지만 복음은 본질적으로 공격적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죄인들에게 자신의 죄에 직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것은 내가 구원에 이르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과 더불어 성경 전체에 나타난 여러 인물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구주로 시인하는 전과정이 이 말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나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뼈를 깎는  자기 부인에서 출발하여  예수그리도의 본성에 참여하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발휘하는 순전한 지구력으로 견디어야 함을 새삼스럽게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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