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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기도회에 가고 싶은 이유조회수 : 7574
    • 작성자 : 박혜영
    • 작성일 : 2018년 4월 22일 17시 47분 20초
  • 요즘 사무엘기하의 압살롬 반역 사건을 읽으며 오늘날의 우리나라의 위기 상황과 너무나도 흡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과연 성경의 모든 기록이 우리의 배움을 위해 기록되었으며 동시에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치고 위로를 주어 소망을 주신다는 귀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압살롬의 반역 사건은 어쩌면 외견상 지극히 개인적인 가정사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아름다운 누이 다말이 그의 이복형 암논에게 부당하게 강간을 당한 사건이 발단이 된 것이다.  마치 세월호 사건이라는 지극히 개인 가정사적인 사실이 체제 전복적 정치사로 변환된 것처럼.  압살롬은 암논에게뿐 아니라 아버지 다윗에게도 상당한 원망의 마음을 가졌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암논의 거짓 연기에 속아 자기 누이 다말을 암논의 시중을 들도록 보낸 것이 다윗이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 압살롬이 야망을 품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가정사적 원망을 빌미로 그의 야망의 문이 활짝 열린 셈이다.  압살롬은 2년 동안이나 일절 이 일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왕권 찬탈의 주도면밀한 계획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이 사이에 이 압살롬 가족의 비극을 알고 있었던 일반 대중들은 압살롬이 당한 불의에 심정적으로 동정하고 그가 2년 후에 암논을 술책을 써서 살해하였어도 대중은 아마도 마땅한 일로 여기고 오히려 박수를 쳤을 것이다.  

     

    만일 압살롬이 사건 발생 직후 암논을 죽였다면 여론이 그토록 압살롬을 동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압살롬이 얼마나 원통하겠어.  아버지 다윗은 뭐하는 거야.  아니 암논이 아버지 다윗의 비호를 받으니까 압살롬이 아무말도 못하고 당하는 게 아니야? 압살롬이 불쌍해" 등등.  여론이 그렇게 압살롬에게 흘러가도록 스스로 참았을 것이다.

     

    이후의 압살롬이 취한 수년에 걸친 일련의 사건들은 그가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반역을 준비하며 민심을 이용했는지 잘 드러내준다.  어쩌면 현대의 이미지 정치를 십분 활용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암논을 죽인 직후 자기 외가인 그술 왕 달매에게로 도주하여 3년 간 망명생활을 한다.  이 때 압살롬은 다윗 왕국의 실세인 요압과 모종의 연락을 취하고 있지 않았나 싶은 정황이 드러나 있다.  

     

    요압을 통해 자기가 예루살렘에 돌아갈 길을 마련하고 자기에게 향한 아버지 다윗의 사랑을 철저히 이용한다.  다윗으로부터 법적으로 용서받은 압살롬은 그 직후부터 본격적인 반역의 수순을 밟게 된다.  우선 그는 반역에 필요한 병력을 준비하면서 치밀하게 민심을 훔치는 작업을 개시하는데, 오늘날의 이미지 정치를 보는 듯하다.  자기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여기는 백성이 다윗에게 가려 하면 압살롬은 우선 그 사람의 입장에 무조건 동조해 주면서 마치 자기만이 해결사인 양 "나라면 네 문제를 해결해 줄 텐데.  다윗 체제는 안 돼. 틀려먹었어!" 하면서 체제비판에 열 올리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스킨십 하고. 과연 대중의 감성을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의 외모는 완벽에 가까와서 대중들의 호감을 한몸에 모으고 있던 인물이 아닌가!

     

    반역사건의 정점의 순간은 다윗을 속이는 일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주께 서원한 것이 있어 주께 서원을 갚으려 헤브론에 갑니다." 하면서 정권 전복의 치밀한 계략을 진행해 나가 순식간에 세를 불리게 된다.

     

    여기에 편승한 인물들!

     

    이 반역의 도모에 아히도벨 같은, 찬탈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돕기까지 하는 인물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백성들은 압살롬이 미리 풀어놓은 스파이들이 퍼뜨리는 언론조작 선동에 휘둘린 채 열렬히 따라갔고, 더구나 한심하게도 압살롬의 초청을 받은 많은 지도층들이 "단순히 가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압살롬과 운명을 함께했다는 것이다. 

    이러니 하루 아침에 다윗의 나라가 전복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살펴 보니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 현 상황의 그림자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여기서 압살롬의 반역 사건이 끝났다면 너무 슬플 것 같다.  하지만 후반부의 반전은 감사하게도 야구의 9회 말 2 아웃 상황에서의 역전극보다 더 큰 희열을 주는 주님의 역사가 있어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다윗은 그에게 있어 느닷없는 아들의 반역 사태를 맞이하여 황급히 수도를 버리고 울며 울며 맨발로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이 장면에 이르면 현재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염려하며 슬퍼하는 많은 이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사라지려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그가 가졌던 영적 자세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사실을 단지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면 진실을 발견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이 모든 사태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님을 잘 인식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그를 도와  따라나서려는 제사장 사독을 만류하면서 다윗은 "주의 눈에 호의를 입으면" 자기가 예루살렘에 돌아올 것이고 "주께서 너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하면" 주의 뜻대로 자기에게 행하시라고 고백한다.  

     

     또 그는 눈물의 피난길에서 사울을 패망케 한 죄값을 받는다고 돌멩이를 던지며 끈질기에 따라붙어 그를 저주하고 비난하는 시므이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도 그를 죽이려는 신하를 만류하며 "주께서 그를 명하셨으니 그를 내버려두고 그가 저주하게 하라.  혹시 주께서 내 고통을 보시리니 이 날 그의 저주로 인해 내게 선으로 갚아주시리라." 고백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에 자기의 죄가 있음을 고백하고 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겸손히 인정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다윗의 겸손한 믿음을 하나님이 압살롬 반역 사건의 후반의 통쾌한 결말을 이끄시는 촉매제로 사용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 난국을 풀어나간 사람들이 다윗 한 사람만이 아니었음을 보게 된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주께서 사용하시는데 적진의 한 가운데 생명을 내걸고 뛰어들어 지략을 사용해 적진을 무력화 한 후새와 같은 책사들, 적진의 돌아가는 상황을 그들 또한 생명을 내걸고 우군에게 알려주는 아이하마스와 요나단 같은 소식통들과 그 보호자들, 후방에 왕과 함께 고난을 같이하고 기도하며 끝까지 왕을 지킨 백성들, 피곤하고 지친 그들에게 자기의 재물을 기꺼이 털어 먹이고 입혔던 외방 사람들 소바와 마길과 바르실래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주님께서는 이런 모든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멋진 역전극을 마련하셨는다.  그것은 압살롬의 책사 아히도벨의 기가 막힌 계략을 다윗 측의 책사인 후새의 계략이 저들에게 먹히도록 역사하셔서 일거에 압삽롬의 반역사건이 종말을 맞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이었는지!

     

    이 현 상황 이쯤 해서 나는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돌아본다.  나는 아마도 피난길의 다윗 왕을 따라나선 백성 중 한 명이 아닐까?  아니 그것도 과분한 비교일 테지만 그래도 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무언가 감당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한 사람으로서 감히 상상해 본다.  

     

    고난의 다윗 왕 옆에서 눈물로 기도했을 민초의 한 사람으로 서 있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에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기도회가 그렇게 귀할 수 없고 어떻게 해서든 함께 기도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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