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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사의 정치적 발언은 성경적이다!조회수 : 193
    • 작성자 : 김영규
    • 작성일 : 2025년 10월 27일 23시 54분 49초
  • <차례>

    1. 서론: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 (내 마음을 바꾸어 주신 하나님)

    2. 본론: 목사의 정치적 발언은 성경적이다!

        2-1. 잘못된 사회적 통념 바로알기

        2-2. 성경해석의 오류 바로알기

    3. 결론: 성경적 가치에 반()하는 세상을 향해 침묵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1. 서론: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 (내 마음을 바꾸어 주신 하나님)

     

    지난 921일 일요일 오전·오후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제 마음을 강하게 두드렸습니다. 찰리 커크의 장례식이 열리기 바로 전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은 3가지 키워드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찰리 커크, 정치 그리고 가인의 길, 이 세 키워드가 바로 저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하는 이유가 되기에 그 세 키워드에 대해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첫 번째 키워드, 찰리 커크입니다. 비록 그는 이 땅을 떠났지만, 그의 유산과 정신은 제 안에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제게 많은 영감을 주었으며 저를 한없이 부끄럽게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저는 그분처럼 살지 못했습니다.”라는 뼈아픈 고백이 나오며 가정에서의 제 삶과 직장에서의 제 모습을 돌아보게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의 삶을 지배했고, 그 말씀은 그의 삶을 통해 이 악한 세대에 빛과 소금이 되어주었습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제게는 대언자적 사명을 짊어지고 험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하나님의 큰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를 통해 나이는 신앙 생활하는데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많고 믿음 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적다고 하여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구나.”란 생각을 해봅니다.

     

    두 번째 키워드인 정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정치는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우리 삶을 우리도 모르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총체적 진리(Total Truth)로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철학, 교육, 체육, 종교, 예술 등 -에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교회에서 정치적 영역은 제외되어야 하는 것인지 오히려 되묻고 싶습니다. 왜 그것이 잘못되었는지를 본론에서 설명해 나가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주일 예배당 안에서만 주(Lord)가 되시는 분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과 국가 위에서도 주(Lord)가 되십니다.

     

    세 번째 키워드, 가인의 길입니다그날 오후 예배 때는 유다서 말씀을 전하셨는데, 제게는 특히 가인의 길이 마음에 남아 여러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지난해 12월부터 시작된 목사님의 정치적 발언으로 말미암아 진통을 겪다가 올해 봄 무렵,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적 가치를 추구하는 보수 우파로 돌아서게 된 저 자신이 생각나며, 저의 옳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한 채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힘쓰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던”, 바로 저 자신과 같은 분들에게, 제가 갇혀 있었던 생각의 틀이라는 껍질을 어떻게 깨뜨리고 나오게 되었는지, 제 마음에 일하신 하나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다 읽을 즈음에는 마귀가 어떻게 우리 마음에 거짓된 생각들을 교묘하게 심어 놓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먼저 우리 교회는 마치 미국이라는 나라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입니다. 샐러드 볼(salad bowl) 안에 다양한 재료가 자신들의 고유한 맛과 색깔을 그대로 유지하고는 있으나 그 모든 재료가 하나로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우리 교회도 다양한 교파에서 오신 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전 교회에서 나도 모르게 몸에 밴 교리 또는 몸소 체험한 것들은 쉽게 버리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름 아래 모든 분들이 하나로 연합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는 말씀의 능력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 몸은 함께 하고 계시지만, 교리적으로 마음이 완전히 연합되지 못한 분들도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사님이 선포하시는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가로막는 방해 요소를 가지고 있는 분들을 보아왔습니다. 지금 하는 이야기는 어떤 분들에겐 불편함으로, 어떤 분들에겐 저의 주제넘는 발언으로 들리실 수도 있지만,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용기 내어 가감 없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글이 우리 교회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너그럽게 잘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년이 넘게 교회 출석을 하면서 교제를 나눈 분들 중에 어떤 분은 방언이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지금도 확신하는 분도 계셨으며 또 어떤 분은 우리 목사님이 방언을 하실 줄 몰라서 그래,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야!”라며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성경적인 것으로 여겼지만, 다행히도 약 6개월 전에 말씀의 은혜를 입어 방언은 이미 그쳤음을 새롭게 알게 되신 분도 만나봤습니다. 그 분은 방언을 제외한 다른 교리들은 다 동의하셨지만 방언만큼은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고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기도를 하던 중에 마음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는데 그것이 성령 침례였고, 그때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며 구원의 확신이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신비롭고 특별한 자신의 체험을 주장하시는 분도 이곳에서 만나봤습니다. 그 분은 어떤 체험과 자신의 감정에서 구원의 확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복음 전도와 믿음 고백에 있어 어떤 특정한 방식만을 크게 고집하시는 분도 만나보았습니다.

     

    몇몇 분들 - 사실 제가 만난 분들은 몇 명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우리 교회에서 극히 미미한 수를 차지한다고 봅니다. - 이 이전 교회에서부터 오랫동안 경험적으로 해왔던 것들 또는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고, 여전히 그걸 붙잡고 그 위에 목사님 말씀을 하나둘 쌓아가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안타까움이,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 앞에서 참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기도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고난과 죽으심, 부활에 대해 세 번씩이나 밝히 드러내셨지만, 그들은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이 땅에 도래할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광만을 고대하고 있었기에 거기에만 매몰되어 고난, 죽으심, 부활은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짖기까지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대화를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분으로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의 고난, 죽으심 그리고 부활은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부활 후 40일 동안을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것을 말씀하셨음에도 그들은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 다시 회복시키려 하시나이까?”라며 여전히 자신들의 생각 속에 사로잡혀있음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어떤 것을 내가 옳다고 믿고 꽉 붙잡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제대로 들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됩니다. 바로 제가 그러했습니다. 저는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이곳에서 배워야 했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어른이 되어 판단만 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자기가 알아야만 할 것에 대하여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느니라.”

     

    저의 경우, 제가 확신하고 있었던 이 사실,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성경도 지지하고 있는지, 아니면 잘못된 사회적 통념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생각하는 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이러한 제 생각의 근원을 더듬어 찾아갔습니다. 그 출발은 바로, “내가 틀렸을 수도 있구나, 내가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구나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제 생각이 조금씩 확장해 나갔습니다. 1,600년 동안 수십 명의 성경 기자들을 통해 당신의 계시를 점진적으로 보여주신 것처럼, 제게도 한꺼번에 모든 것을 알게 해주신 것이 아니라, 마치 퍼즐 맞추기 하듯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게 하셨고, 그 결과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많은 말씀이 저를 지금의 저로 바꾸어 주셨기에 성경 이야기를 부득불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점 널리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본론: 목사의 정치적 발언은 성경적이다! 

     

    2-1. 잘못된 사회적 통념 바로알기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며 교회 강단에서 목사의 정치적 발언이 왜 성경적인지를 잘못된 사회적 통념과 성경해석의 오류라는 두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의 명령들과 관습에 길들여져 왔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주변 어른들 또는 친구들로부터 자주 이런 얘기를 마치 사회적으로 합의한 약속인 것처럼, 또는 진실인 것처럼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명절에 집에 가면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절대 정치와 종교 얘기는 하면 안 된다!" 이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세뇌 되어왔고, 과연 성경은 뭐라 하는지 관심도 없었습니다. 또한, "교회 목사는 하나님을 얘기해야지 정치 얘기하면 안 돼." 이 또한 많이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나라의 암울한 역사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1940년대부터 이념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분열을 경험한 나라로서 결국 6.25 전쟁을 통해 분단의 아픈 역사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이후 혼돈의 시기를 거치며 여러 처참하고 비극적인 사건들을 겪으며 사회 모든 구성원은 이념과 사상이라는 무서운 괴물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온 사회가 정치 권력의 눈치를 보며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가 되어 갔으며 정치 이야기를 꺼리는 분위기 속에서 이를 일종의 불문율처럼 받아들이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서글픈 역사와 맞물려 더욱 우리 삶 속 깊숙이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더욱 심각한 것은, 2,500년 동안 고대 그리스 철학 사상, 그중 대표적으로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 이데아론이 초기 기독교, 특히 알렉산드리아 학파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근현대에까지 더욱 계승, 발전되어 오면서 총체적 진리인 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몰아넣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인데 이를 공론화하거나 주변에 전파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여기게끔 자유주의, 계몽주의 및 상대주의 사상들과 결탁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오며 마귀에게서 비롯된 교묘한 사상들이 우리 삶 속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교회는 영적인 것만 다루어야 하고, 정치라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세속적인 것이기에 교회에서 언급하면 안 된다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마귀의 간교한 속임수로서, 이는 오늘날에 이르러 교회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비성경적이며 잘못된 사회적 통념의 토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보존 되어왔듯, 마귀의 역사도 우리의 생각과 이성, 상상을 뛰어넘어 일해 왔습니다. 우리가 짐작하고 발견할 수 있으면 그게 마귀의 역사일까요? 우리 위에서 우리를 가지고 노는 게 마귀입니다. 오직 성경적 세계관, 성경 말씀이라는 렌즈를 끼고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린 내가 속는지도 모르고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생각을 통해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듯, 오직 성경만이 우리의 유일한 판단 근거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영화 <건국전쟁2>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박진경 대령을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을 무차별 학살한 악마로 만들어 놓은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박 대령을 악마화한 그들의 주장에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고 있는 후안무치하고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들을 보았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격할 대상 그리고 희생양이 필요할 뿐입니다.

     

    교회는 정치에 중립을 지켜야 하며, 목사는 정치적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 말은, 마귀가 우리 속에 심어둔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성경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비성경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2-2. 아홉 가지 성경해석의 오류 바로알기

     

    다음으로, '교회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며 강단에서 목사가 정치적 발언을 하면 안 된다"라는 주장이 지금부터 소개할 아홉 가지 성경해석의 오류를 통해 결코 성경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성경의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지 못한 혼동에서 기인한 생각의 오류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성경의 본질적 내용에는 일치와 연합을, 그리고 고린도전서 8장과 로마서 14장에서는 비본질적 내용에 대해서는 각자의 양심의 자유를 따라 자유롭게 결정하되 형제 사랑의 마음으로 절제하는 것도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적 가치를 주장하면 정치적 발언으로 여기는 악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적 가치를 개인의 양심의 자유의 문제로 격하시켜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성경의 본질과 비본질에 대해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채 지내왔으며 성경적 가치에 해당하는 정치적 이슈를 개인의 양심의 영역에 속한 비본질적 내용으로 착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고린도전서 110절을 보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 같은 것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게 하며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 안에서 완전히 함께 결합하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안부 인사를 하자말자 편지 서두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며 간청(beseech)”하는 바울을 통해 고린도 교회의 분열이 그에게 얼마나 큰 슬픔과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주었는지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에게 교회의 분열은 그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나뉘셨느냐?”라며 예수님 중심으로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함을, 예수님 안에서, 진리 안에서 하나 된 목소리,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낙태, 이는 생명을 경히 여기는 것으로 성경적 도덕관과 충돌합니다. 동성애, 이 또한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정면 위배되며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것입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이는 성경이 말하는 죄를 죄라고 외칠 수조차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이 땅에서 선포할 수도 없게 만들며 또한 복음 전도의 길도 막는 마귀의 정책입니다.

     

    성경의 본질에 해당하는 가치와 정면충돌하는 낙태, 동성애, 차별금지법 등을 옹호하는 세상과 그것들을 입법화하여 이 땅에 구현하고자 하는 정당과 정책을 그리스도인이 두 눈 뜨고 그저 침묵하고만 있어야 할까요? 과연, 하나님이 무얼 기뻐하시겠습니까?

     

    안식일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우상의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와 같은 비본질적인 내용은 구원의 핵심 교리와 성경적 가치와는 결이 다른 개인의 양심의 자유에 속한 영역이기에 믿음으로 그 어느 쪽을 선택하고 결정해도 이는 그 누구의 판단의 대상도, 정죄의 대상도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의 본질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할 수 없으며 이는 개인적 선택의 영역이 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의 비본질적 내용에 관하여는,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고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지만, 내 양심의 자유 또는 자신의 믿음을 따라 행한 어떤 행위가 다른 지체들의 양심에 걸림이 되어 그들을 넘어지게 한다면, 즉 죄를 짓게 만든다면 이때는 우리 자유의 권리도 내 마음대로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 사랑의 마음으로 절제도 필요하다는 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교회는 영혼의 자유를 큰 가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영혼의 자유에도 형제 사랑이라는 배려와 절제가 브레이크처럼 동반될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성숙하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영혼의 자유라고 해서 형제 사랑의 권면과 훈계마저도 필요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둘째,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속성을, 이 세상의 그 모든 것을 무조건 용서하고 용납하며 포용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리고 이 착각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묵인하고 불의에 침묵하게 만듭니다.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속성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미워하게 하고 불의에 대해 분노하게 하며, 성경적 가치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게 합니다.

     

    성경은 사랑의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참된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랑을 하나님의 다른 성품과 분리하여, 모든 죄를 용인하는 사랑으로 축소 또는 왜곡하는 오류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사실 성경은 사랑의 하나님도 나타내지만, 거룩함이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이고 근본이 되는 성품이며 바로 그 성품이 외형적으로 공의의 하나님 또는 사랑의 하나님 등으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은 바로 <거룩함>입니다. 이 거룩함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사랑도 나타나게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성경 이야기들, 즉 가나안 족속의 진멸,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웃사의 죽음 등은 거룩함의 속성을 통해서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성경 66권 중 단 한 권을 읽어야 한다면? 이라는 질문에 많은 분들이 로마서, 요한복음, 요한일서 등 사람마다 차이가 존재하지만, 성경 중 단 한 구절을 꼽는다면? 이라는 질문에는 거의 대다수분들이 요한복음 316절을 주저 없이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와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등식으로 성경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통한 예수님의 언행을 일반화하려는 오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특히 마태복음 5장 이후의 산상수훈은 왕국 백성의 윤리 헌장이며 비록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도덕 윤리이지만 그 말씀의 대상이 누구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산상수훈을 바로 나 자신, 그리고 오늘날에 적용하려다 보니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성령님을 모신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마땅한 도덕 윤리는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왕국 백성에게 주어진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 바이블 빌리버들 조차도 혼동에 빠뜨리곤 합니다. 또한, 산상수훈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무조건 용서하고, 무조건 모든 것을 포용, 용납해야 하는 줄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공생애는 성경이라는 전체적인 틀에서 바라보아야지, 그것만 따로 떼어 일반화하려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속성과는 달리 거룩함의 속성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미워하게 하고, 불의를 보면 분노하게 하며, 진리가 아닌 것과는 타협하지 않게 하며 이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게 만듭니다.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그들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여기며 착각하고 있는 성경 속 사랑이라는 개념은 죄와 불의를 감싸 안아야 하며 때로는 세상과 타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말씀을 큰 숲에 비유하자면, 한두 그루의 나무와 같은 몇몇 말씀으로 성경 전체를 판단하는 어리석은 자로 살아왔음을 또한 고백합니다.

     

    제가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여겼던 몇몇 말씀이 오히려 저를 작은 사고의 틀 안에 가두어 버리고 성경 66권이라는 말씀의 큰 숲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너무 좁은 시각으로 성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몇 그루 나무와 같은 그 한두 구절의 말씀이 제 사고의 확장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결국, 몇몇 성경 말씀이 다른 성경 말씀을 거부하는, 말도 안되는 일이 제 속에서 일어났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몇 구절의 말씀이 바로 지금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모르면 듣게 되는데, 내가 무엇을 아는 줄로 여기는 순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의 경우, 요한복음 18장의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니라.”라는 말씀과 고린도전서 8장의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면 나는 세상이 서 있는 한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가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리라.”, 그리고 형제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느니라.”는 그 말씀이 목사님의 정치적 설교에 대해 나름대로 성경을 근거로 판단만 하고 있었던 대표적 말씀에 해당합니다. 굳이 비유를 들자면, 설악산 등산로 입구에서 보이는 한두 그루의 나무만 보고 마치 설악산 전체를 다 본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넷째, 저는 성경 말씀에 서열(Rank)을 매기며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자각하지도 못하며 살아왔습니다.

     

    모든 성경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졌으며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다고 합니다. 성경 66권 전체의 모든 말씀은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많은 분들이 구약보다는 신약, 신약에서는 사도들의 말씀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권위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예전의 어떤 성경에는 예수님의 말씀만 특별히 붉은색으로 표기하기도 했습니다. 20대 초반에 구원받은 후 한때 그 붉은 글씨만 찾아서 봤던 기억도 납니다. 바로 여기에서 성경을 좁게만 보는 어리석음이 발생합니다.

     

    저는 이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높은 위치에 두고 다른 말씀은 상대적으로 좀 더 낮은 것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해왔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말을 주의 명령(고전14:37)’, ‘하나님의 말씀(살전2:13)’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어디 바울의 말씀뿐이겠습니까? 구약의 모든 대언자들의 말씀 또한, 동일한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말씀에 서열(Rank)을 매기는 오류를 범하며 성경 전체를 좁게만 보아왔습니다. 구약을 포함한 성경 66권의 그 모든 말씀이 동일한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저는 예수님의 말씀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의 공생애는 구속사적 관점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삶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오직 구속사적 관점, 곧 하나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로마 제국에 저항하지도 않고 빌라도 앞에서도 침묵한 것은 구약의 이사야서 537절 말씀, “그는 압제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어도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도살장으로 향하는 어린양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는도다라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순종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공생애를 일반화하려는 오류 또한 우리의 생각을 좁은 틀에 갇히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인 구약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지, 제자들이 바랐던 것처럼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속(or 해방)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성경 어디 한 곳에라도 예수님이 정치에 개입한 적이 있더냐?’라고 묻는 분들에게 드리는 또 하나의 제 대답이기도 합니다.

     

    여섯째, 교회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며 다음의 말씀을 인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앞뒤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악마의 편집과도 같습니다.

     

    교회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성경적 근거로 여호수아 1장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를 인용합니다. 이 표현을 많이들 쓰시길래 개역 성경의 말씀을 인용해 봤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닌데 왜 그 구절의 일부만 떼어내어 오용을 하는지 개인적으로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됩니다.

     

    해당 구절의 앞뒤 문맥을 고려하여 읽으시면 정치적 중립에 관한 내용이 아님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그 말씀을 너무나 쉽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명에서 벗어나지 말고 순종하여 명하신 그 길을 곧게 걸으라는 영적 의미의 직진성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진리에는 결코 중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 편에 서느냐, 그렇지 않느냐, 오직 이 둘 뿐입니다.”

     

    일곱째, 정교분리에 관한 것입니다.

     

    정교 분리 - 카이사르의 것들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께 바치라 - 의 정확한 의미도 요즘은 AI가 워낙 발달해서 간단히 질문만 해도 답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답은 국가는 특정 종교를 국민에게 강요할 수 없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입니다. 미국의 헌법에 구현된 정교분리, 또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된 이 사실을 저는 잘 못 오해하며 살아왔습니다. 국가와 종교는 서로 간섭하거나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정치에 전혀 개입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여덟째, 권력에 복종해야 하고 정치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권력에 복종하고 거역하지 말아야 함을 주장하며 교회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 모든 혼은 더 높은 권력들에 복종할지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권력은 없나니~” 라고 시작하는 로마서 131절과 2절입니다.

     

    바울은 13장에서 권력들에 복종할 것을 가르치는데 이는 치리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선을 장려하고 악을 벌하는 공의를 실현할 때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치리자가 성경의 가치에 반하는 악한 일을 할 때에도 복종하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정부의 명령이나 정책 등이 성경의 가치와 다른 경우에는, 단호히 그 명령이나 정책에 "NO" 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은 권력에 대한 복종만을 강조할 뿐, 그 권력이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하나님의 명령과 충돌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한다는 아래의 말씀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19~20절에서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들을 말할 수밖에 없노라.”라며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의 지시를 거부합니다. 신앙의 자유가 억압될 때, 침묵하지 않고 사도들이 진리를 선포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529절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하느니라라며 종교 지도자들의 명령을 거부하며 하나님의 명령이 더 우선이라는 원칙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과 바울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씀 속에 '정치'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2820절에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또한, 사도 바울이 급히 예루살렘으로 가느라 밀레도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씀을 사도행전 2027절에서 하시며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모든 것과 바울의 고별 말씀 중 하나님의 모든 계획안에, 정치라는 영역은 배제되어야 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에는 정치적 영역을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이 들어갑니다. 그 앞 구절인 18절을 보면 하늘뿐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권능도 예수님께 주어졌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이 주어졌는데 정치 영역만 쏙 빠졌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대한민국의 정치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국가와 민족 위에 권능을 가진 주(Lord)가 되십니다.

     

    3. 결론: 성경적 가치에 반()하는 세상을 향해 침묵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이제는 결론으로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때때로 최악(最惡)을 피하기 위해 차악(次惡)을 선택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놓이기도 합니다많은 경우, 차악인 정당을 어쩔 수 없이 지지하게 되는 이유는 그 정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래도 상대적으로 성경적 가치에 더 가깝기 때문일 것입니다. 양심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차악조차 선택하지 않는 것은 바로 침묵이며 방조라고 생각합니다.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운 것을 선택하는 것이 성경적 책임이라 봅니다.

     

    둘째, 교회 강단에서 성경적 가치를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 발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는 목회적 사명이라 봅니다.

     

    저는 교회의 기능과 역할이 다만 복음을 선포하는 데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강단에서 정치적 사안에 대한 성경적 원칙을 밝히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발언이 아니라, 복음의 총체성을 드러내는 사역에 해당할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세속적 가치에 의해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성도들을 방치하는 것이며, 교회의 사명을 축소 시키는 것이라 봅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빛과 소금이 되려면, 먼저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알리고 당당히 우리의 주장을 밝히고 우리 스스로를 세상에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빛이 비취지 않고 소금의 맛을 내지 않으면 어찌 우리를 주목하겠습니까!

     

    셋째, 로마서 154절에,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들은 우리의 배움을 위하여 기록되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성경 기록들이 주는 인내와 위로를 통해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성경은 우리에게 신약뿐 아니라 구약 말씀들도 우리의 배움을 위하여 기록되었으니,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의 역사와 그 많은 정치 이야기들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위로를 받아, 절망으로 가득한 이 악한 세대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망을 갖고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겐 부활의 소망, 휴거의 소망천국의 소망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세(現世)에서도 주님 안에서 기쁨과 감사로 소망 가운데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 기록들이 주어진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할지라도 우리는 성경 속에서 절망하거나 낙담할 어떠한 이유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 강단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면 안 되고, 오직 성경 이야기만 해야 한다고들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경 이야기를 하려면 정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정치 이야기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남유다가 멸망하기 전까지 예레미야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40년 가까이 눈물로 호소하며 외쳤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시편 137편이 기록됩니다. “우리가 바빌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 참으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로 시작하는 시편은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의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이 자유의 땅 대한민국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자유롭게 믿음 생활을 영위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적 진리와 가치에 반하고 대립하는 이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침묵하며 바라만 봐야 할까요? 바빌론 강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던 그들의 이야기는 결코 과거 이스라엘만의 역사는 아닐 것입니다.

     

    예레미야뿐 아니라, 구약의 사무엘, 나단, 엘리야, 이사야 그리고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왕후 에스더처럼 내가 법대로 하지 아니하고 왕에게 들어가리니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가치에 맞서는 마귀의 궤계를 향한,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구약 대언자들과 광야에서 외쳤던 침례자 요한의 외침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정권에 저항한 독일의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을 두 가지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악을 보고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침묵할 때 우리를 죄가 없다고 하시지 않을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는 것이요, 행동하지 않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히틀러가 공산주의자를 체포했을 때,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침묵했다. 그가 유대인을 학살했을 때,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침묵했다. 그러나 마침내 히틀러가 신학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주위에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모두가 자기 일이 아니라며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는 결코 값없이 주어진 공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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