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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주교인 전도 ( 옮김 )조회수 : 11019
    • 작성자 : 백화자
    • 작성일 : 2009년 6월 22일 17시 51분 32초

  •  천주교인을 전도하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요?


    [질문]

    며칠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에게, 아직 예수 안 믿으면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혹시 교회를 다니시는지 여쭤봤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믿는다.", 안 믿으면 "안 믿는다."의 답변을 예상했는데, 그 아저씨께서 자기는 성당 다닌다고 하시는 겁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일단 그분의 마음을 상하지 않으면서 다음 기회에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일단 인사만 하고 나왔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천주교 믿는 분에게는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는 지 고민이 됩니다. 도와주세요.

    [답변]

    천주교인은 개신교와 신앙의 뿌리가 같기에 전도하기 쉬울 것이라고 간주하기 쉽지만 큰 오산입니다. 아마 가장 힘들 것입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예의 경비원 아저씨께서 “자기는 성당 다닌다.”고 말한 것처럼 천주교인들도 개신교와 같은 뿌리니까 즉, 이미 예수를 믿고 있으니 구태여 개종할 이유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 대답에는 그 외에도 여러 의미가 더 포함될 수 있습니다. 개신교처럼 말만 앞서고 시끄러우며 광적으로 믿는 것 같은 종교는 싫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천주교는 경건하고 엄숙하며 사회적인 부정에 대해 목소리 높여 시정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술 담배 문제에 관대하고, 제사 지내는 것도 허용하며, 다른 종교와 포용하며 잘 교류하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든다는 뜻입니다.

    또 종교는 다 같은데 왜 구태여 개신교만 옳다고 하면서 꼭 개종해야 된다고 권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반발은 사실 천주교인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타종교인과 불신자들이 개신교에 대해 반감을 갖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나아가 개신교는 자기들끼리 모여서 복 받기만 소원하고, 겉으로는 가장 경건한 척 하면서 뒤로는 호박씨 까는 위선적인 모습이 아주 싫다는 뜻입니다.

    천주교인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특성이 몇 가지 있습니다. 대체로 성품이 조용하면서 도덕적으로 비교적 선한 편입니다. 이웃에 어려운 사람들을 자기 일처럼 잘 도와줍니다. 종교간 교류에 상당히 포용적이며 사회적 이슈들에 관한 분명한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인류공동체가 서로 힘을 합해 사랑하며 지구의 자연환경을 아름답게 보존하는데도 열심을 보탭니다.

    신앙적인 측면에선 성경의 진리와 그 의미를 잘 모릅니다. 개신교만큼 성경을 세밀하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미사를 비롯한 7대 성사에 참여하는 것이 말씀을 믿는 것보다 우선적입니다. 교황의 칙령을 성경의 권위보다 상위에 둡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믿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이미 동일한 예수를 믿고 있고, 아주 선하게 살고 있으며,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거나 힘을 합해야 한다고 믿는데다, 개신교를 도리어 정통 기독교에서 떨어져 나간 이단아로 취급합니다. 말하자면 개신교 교리의 독특성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가 더 우월하다고 믿기에 전도하기가 가장 힘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개괄적인 특성들에 맞추어 접근하되, 특별히 천주교가 갖는 결정적 약점에 포커스를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과 상황에 따라 더 좋은 방안이 많겠지만 아래 사항들을 참조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천주교인들이 미처 모르고 있는 개신교와의 가장 큰 차이점을 강조하면서도 그들의 잘못된 사고에 경종을 올려주는 방식들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일종의 쇼크 요법을 쓰는 셈입니다.

    그리고 아주 조심해야할 측면이 있습니다. 처음 얼마간은 개종을 은연중에라도 강요 내지 권면하는 것 같은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 천주교인들의 선한 행실과 포용력 있는 마음과 사회 부조리를 개혁하려는 활동들의 장점들을 인정하고 존경해주어야 합니다. 대신에 그들이 잘 알지 못하는 부분,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성령님의 실제적 권능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개신교 교리를 직접적으로 상대에게 설득, 교육, 주입시켜야겠다는 고집은 절대 지양(止揚)해야 합니다. 가능한 상대로 하여금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하되 개신교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날카로운 코멘트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물론 참으로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전도자가 복음의 진리 뿐 아니라 천주교와 성경의 상이점에 미리 능통하여서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되, 적절한 때에 천주교의 모순과 개신교의 진리가 확연히 대비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제시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에 관해 물어보라.

    천주교와 개신교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다른 모든 종교와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원 얻는 길이 다릅니다. 천주교도 예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은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현격하게 다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은혜가 없었다면 인간에겐 구원의 길이 열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내용은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주님을 믿되 교회의 가르침을 온전한 믿음으로 따라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천주교에선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구원을 주실 죄인 각자에게 직접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회의 성사(聖事)를 통해 간접적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천주교회가, 성경이 아님, 정한 규례를 따라야만 구원이 가능합니다.  

    그 성사는, 죄를 씻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분과 함께 부활하는 세례(洗禮)성사,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받아 신앙을 전파하는 힘을 받게 되는 견진(堅振)성사, 예수 그리스도와 성삼위이신 하느님과 더욱 깊은 친교를 이루는 성체(聖體)성사,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죄인에 대한 자비를 알아 뵙고 찬미하는 고해(告解)성사, 병자를 강하게 하고 마음에 평화와 용기를 주는 병자(病者)성사, 이미 세례와 견진으로 축성된 사람들이 타인을 위해 봉사하도록 해주는 성품(聖品)성사와 혼인(婚姻)성사의 일곱 가지입니다. (성사에 대한 설명은 천주교에서 설명하는 그대로 인용했음) 최근에는 마리아에게 중보를 요청해야만 구원이 유효해진다는 교리까지 덧붙였습니다.

    쉬운 말로 바꾸면 우선 유아세례를 받는 순간에 원죄가 사해진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자라 스스로 헌신하기로 고백하는 견진 성사를 통해 성령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반드시 미사(Missa* 성당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여해야만 하고 특별히 영성체라고 부르는 작은 떡을 나눠 먹는 것이 필수입니다. 윤리적 죄를 지을 때마다, 특별히 천주교에서 정한 일곱 대죄를 범하면, 반드시 신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병이 들면 신부를 불러 기름을 바르는 예식을 해야 합니다. 결혼은 물론 천주교 의식에 따라야 하며 사제로 평생 독신으로 봉사하기로 헌신한 자는 성품 성사를 거쳐야 합니다. <*‘보냄’ 또는 ‘파견’이라는 뜻, 성당 예배의 마지막에 “가십시오. 나는 그대를 보냅니다.”라고 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함>
      
    이 성사들은 이미 믿은 자가 예수님을 회상 기념하며 그분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개신교의 주일예배, 성찬식, 세례식과는 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합니다. 예컨대 자의식은커녕 아직 말도 못하는 유아가 세례를 받기만 하면 원죄는 자동으로 씻깁니다. 모든 성사가 베풀어지는 순간 실제로 하느님께서 죄인을 용서하고 치유하여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믿음 안에서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미사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으면 몸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피와 살로 변하는 권능이 실제로 임하기에 미사에 참여하여 그 영성체를 받아먹지 않으면 사죄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말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완전히 인간의 행위와 공적에 의해서 스스로 취득하는 구원입니다. 모든 이단들이 말로는 예수님의 은혜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한 결 같이 제일 먼저 가르칩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알게 모르게 많은 행위구원의 교리를 덧붙인다는 것입니다.

    그 덧붙이는 교리도 예수님의 은혜를 더 확실히 믿기 위해서, 더 확증하기 위해서, 더 많이 받기 위해서, 더 깊은 교제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는 단서가 반드시 따라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은혜를 믿어야만 구원 얻는다는 기독교 기본 교리를 배우고 있다고 착각하며 이단 고유의 덧붙인 교리가 불합리하다거나 틀리다고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합니다. 개신교 측에서 아무리 세세히 지적하며 틀렸다고 말해 주어야 잘 이해하지 못하며 오히려 그렇게 따지는 자를 이상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천주교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결정적 약점 두 개가 노정됩니다. 우선 구원 얻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 공로만으로 부족하므로 인간 쪽에서 따로, 그것도 평생을 두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또 성경을 억지로 왜곡 첨가했기에 구원 교리 내용이 복잡하고 심오하게 변하여 평신도로선 그 정확한 내용을 잘 알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구원에 관한 교리를 잘 모르는데다 평생을 두고 해야 할 구원의 절차가 있으니까 구원의 확신이 생길 수 없습니다. 예컨대 고해성사만 해도 죄를 지으면 반드시 회개해야 하는데 평생에 걸쳐 죽기 직전까지 죄를 짓지 않습니까? 또 죄 짓고도 고해하지 못했거나 잊어버린 것도 있을 텐데 어떻게 구원의 확신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또 다른 약점은, 완전히 치명적인 것인데, 성령의 거듭나는 체험을 모릅니다. 성경의 십자가 진리가 왜곡된 데서 구원으로 이끄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단순히 성령 역사의 부재(不在)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교리 자체를 가르치지 않기에 구원에 중생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며, 간혹 성경과 다르게 배운 자들 또한 당연히 중생 체험을 할 수 없습니다.  

    내용적으로는 구원의 확신이나 중생 체험이나 결국 같은 뜻입니다. 구태여 둘로 구분한 이유는 전자는 절대적 구원의 진리를 명확하게 붙들고 있지 못하다는 뜻으로, 후자는 실제 개인적으로 중생 체험을 못했다는 측면을 말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어떻게 구원 받는지를 모르니까 자연히 평생을 두고 구원 받은 체험은 물론 그 확신도 생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제 천주교인들에게 개신교에 대한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서 전도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나눠야 할 대화의 주제가 드러났습니다. 적절한 시점과 분위기에서 다음 두 가지 질문을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던져야 합니다. 사실 이 질문은 모든 이단과 불신자에게 원칙적으로 다 적용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천주교 신자와 대화 주제가 개신교의 구원 교리로 옮겨갈 수 있도록 하는데 가장 적절한 질문입니다.

    “당신은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확실한 자신이 있습니까?” - 중생 체험에 관한 질문
    “만약 있다면 대체 어떤 근거와 이유로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구원 교리에 관한 질문

    만약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그 동안 성당을 오래 다녔는데도 왜 그런 확신이 없습니까?”라고 물으면 됩니다. 또 답변 여하에 따라 전도자의 대응 태도도 자연히 달라져야 합니다.

    1) 첫 질문에 예스를 하고 둘 째 질문에도 나름대로 답변을 할 수 있는 경우: 천주교 구원 교리에 대해 상당히 능통하며 실제로도 실천하고 있는 신자라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아주 정밀한 접근이 요구되는데 천주교 교리가 성경의 진리에 대비해 어떻게 왜곡 모순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2) 첫 질문에 예스를 했는데 둘 째 질문에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문자적으로 받아 들여서 그저 그냥 믿은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줄 필요가 있습니다.  

    3) 첫 질문부터 노를 하는 경우: 단순히 도덕적 인격적 수양을 하거나, 어떤 초월적 힘이나 종교적 관행에 의탁하여 정신적 위로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실존과 그 역사에 대한 확신도 없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부터 시작해서 기독교 교리 전반에 대해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성부터 확실히 심어주어야 합니다.

    성경공부로 유도하라.

    상기 질문에 어떤 형태로든 답변을 얻었다면 전도까지는 몰라도 십자가 복음을 바로 소개할 수 있는 기회는 생긴 것입니다. 어쩌면 그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기회라도 잡으면 전도는 시작되었고 또 상당한 성공을 한 셈입니다. 말하자면 그 질문에 언짢고 귀찮은 반응을 보였을지라도 자신의 구원 여부와 또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즉, 천주교 교리의 정당성 여부에 대해 한 번쯤은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질문을 던졌고 대화가 이어졌다면 당연히 그 다음에 이어질 것은 성경의 진리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 때 가능한, 아니 반드시 성경을 펼쳐서 구체적인 구절을 짚어가며 설명 드리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천주교에선 성경을 제대로 안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었는지조차 처음 알게 되어 놀라는 경우마저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호기심, 관심, 의심, 반발, 불평 등이 나타나면 될 수 있는 대로 성경공부를 함께 해보자고 권하셔야 합니다. 특별히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교리 부분을 중심으로, 즉 로마서, 갈라디아서, 요한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혹시라도 이 세 책이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 모두 어렵게 느껴지면 반드시 마태, 마가, 누가 등 복음서에서 시작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일생과 사역에 관해 흥미를 유발하며 쉽게 가르칠 수 있으면서도 죄와 타락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내용을 병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창세기의 창조와 타락에 관한 부분은 수시로 인용하며 함께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다른 이단들은 자체적인 구원 교리와 그 변증 논리를 성경을 통해 세밀하게, 비록 궤변에 불과하지만, 개발하여서 신자들에게 암기식으로 세뇌 교육시켜 놓았습니다. 어지간한 성경지식이 없이는 개신교 신자가 그들을 설득, 변증, 인도는커녕 도리어 그들 논리에 말문이 막히고 당혹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천주교는 사제에게 죄를 고해하고 미사에서 주로 인격적 훈화 같은 간단한 강론을 듣고 교회 전통과 성사를 따르는 것이 그 신앙 활동의 주가 되어 있기에 성경을 정밀하게 읽고 배우지 않습니다. 성경공부로 그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일단 조금이라도 유발시킬 수 있으면 전도에 아주 효과적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죄의 본질을 정확하게 가르쳐라.

    천주교와 개신교의 결정적 차이는 구원론입니다. 문자적 교리로는 비슷해 보여도 실제 내용은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인간의 행위와 공적”으로 확연히 구분됩니다. 그렇게 달라진 배경은 죄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주교인을 성경공부로 인도하게 되었다면, 설령 그럴 기회가 없었다 해도, 죄의 본질을 잘 설명해주어야만 합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모든 인간이 원죄 하에 태어난다는 것은 천주교도 인정합니다. 문제는 그 원죄를 씻으려면 유아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죄를 사해주는 권세와 능력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근거 구절로 성경의 마16:16을 듭니다만, 예수님이 말한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지 그 본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선 “성경의 맥을 잡자” 사이트의 #11 “성경의 맥을 잡는 최선의 방안”이라는 글의 셋째 단락 “예수님께 전권을 받은 로마 교황”을 참조하셔서 설명에 응용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에서 하나님의 전적 은혜냐 인간의 행위인지로 갈리는 근본 이유는 죄를 스스로 씻을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행동으로 지은 죄가 죄의 본질이라면 그 행동만 회개하고 고치면 됩니다. 그러나 루터가 몇 시간을 회개해도 일어서면 또 다른 죄가 떠올라 천주교 구원교리에 회의를 품게 되었듯이 인간이 자기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 고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말과 생각으로 짓는 것도 죄라고 그 범위를 확대했습니다. 나아가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외부의 열악한 환경이나 교육과 훈련 부족으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 자체가 전적으로 타락했기에 속에서부터 죄가 솟아나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범한 잘못된 행위로 죄가 한정되어지면 행위와 공적에 의한 자력 구원이 가능합니다. 반면에 인간의 존재 자체가 타락되어 흑암에 묶여 있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거듭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느냐, 죄인이기에 죄를 짓느냐에 따라 구원 방식이 전혀 반대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배역하여 그분과의 관계가 끊김으로써 인간은 자신과도 이웃과도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해자인 하나님 쪽에서 먼저 인간을 화해로 초대해야 합니다. 아니 죄에서 영원한 구원과 심판은 당연히 그분이 베푸셔야 합니다.

    천주교를 비롯한 모든 이단과 타종교는 죄와 인간의 본성을 성경과는 다르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저지른 허물과 잘못에 불과하니까 인간이 스스로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나면서 죄인이라는 개념이 없거나 아주 부족합니다. 성경공부든, 단순히 복음을 전하든, 가장 자세하게 설명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인간의 타락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죄에 대해선 성경문답 사이트의 # 145 “원죄가 과연 유전되는지요?”라는 글과 같은 사이트에서 비슷한 주제들을 다룬 문답들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에 한 가지 길뿐임을 설득하라.  

    인간 행위로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결국 착한 자가 천국을 가야한다는 생각에서 기인하거나 혹은 필연적으로 그런 생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개신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종교의 구원관의 바탕에 깔린 사상입니다. 또 인간 스스로 죄를 씻을 수 있다면 그 방식은 당연히 시대, 문화, 관습, 인종, 상황에 따라 여러 수만 가지 갈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 다 구원이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반면에 개신교는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는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절대로 선하지도 않고 선해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의로 따지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인간 스스로 죄 사함이 아예 불가능하기에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하여서 구원에 유효한 믿음을 갖는 것까지 성령이 간섭하여 하나님이 심어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착한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논리에 관해선 세상에 구원을 얻을만한 착한 자란 한 명도 없으며, 오히려 그런 방안이 더 불공평하고 모순된 구원의 방식이라 점을 설명해주어야 합니다.(이 주제에 대해선 “믿지 않는 형제에게” 사이트의 #12 “착하게 사는 자는 천국 가지 못한다.”는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또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것도 인간의 자력 구원을 믿는 영역 안에서만 합당한 말임을 논리적으로 납득시켜야 합니다. 인간이 착하고 스스로 죄를 씻을 수 있다는 관점에선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주장이 맞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영적 시체로 태어나서 도무지 죄를 씻을 길이 없다는 개신교의 관점에선 구원의 길은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오직 하나만 성립됩니다. 개신교와 다른 모든 종교와는 아예 출발부터 다르기에 결코 타협 융화될 수 없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선 같은 사이트의 #10 “모로 가면 서울은 가지 못한다.”는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두 가지 주제를 천주교 신자에겐 잘 설명하여서 납득만 시켜도 전도에는 큰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아주 선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기, 아니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만약 그런 자부심이 무너진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또 종교 간의 관용에 대해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종교가 절대 다 옳을 수 없다는 점이 확실해지면 그런 태도를 유보하고 어느 것이 옳은지 알아볼 마음이라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개신교의 입장은 종교인들끼리는 교제하고 또 인류의 현실적인 공통 유익을 위해서 합력해야 하지만, 구원을 얻는 영적 진리에선 타협 수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인은 포용해야 하지만 틀린 종교까지 관용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해 주어라.

    성경공부와 병행해서 특별히 천주교인들에게 반드시 해주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도를 아주 구체적으로 해주는 것입니다. 현실의 환난, 염려, 문제나 개인적인 상처, 갈등, 고민 등 무슨 기도 제목이든 좋습니다. 기도할 내용을 일상적인 쉬운 문장으로 바꾸어 하나님과  대화하듯이 세세하게 아뢰어 간구하셔야 합니다.  

    왜냐 하면 천주교에선 교회가 작성해준 기도문을 따라 읽으며 기도하는 법만 주로 배우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육신의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듯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법은 전혀 모릅니다. 그런 기도를 해주었더니 크게 놀라는 경우를 실제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기는 하되 그 은혜가 교회를 통해야만 신자에게 전해진다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신자 개인과 일대일로, 체험적으로 교제하신다는 사실은 그들에겐 너무나 생소합니다. 당연히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도 없습니다. 최근엔 가톨릭도 성령 운동을 많이 전개합니다만, 뜨레스디아스 운동의 원조도 천주교임, 여전히 사제들의 전유물이거나 순간적으로 감정이 고양되는 체험으로 그칩니다.  

    성경공부를 할 수 없거나 죄의 본질에 관해 대화를 나눌 기회마저 여의치 않다면 잠시 기도를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해 준다고 해서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예수 믿어 구원 받게 해달라고 하지 말고, 먼저 상대에게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그 일을 두고 아주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한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계속해서 수시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로 자기를 인격적으로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세세한 부분에까지 보호, 인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본인더러 절감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를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님을, 아니 그동안에는 교회를 통해서도 전혀 오지 않았음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분과의 개인적 교제를 통해 누리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생명력이 풍성하게 넘치는 참 은혜이고 성당에서의 성사를 통한 느낌은 허사였음을 분명하게 비교 체험토록 해야 합니다.

    선하게 살아라.

    마지막이자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항은 전도자가 절대로 선하고 의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전해진 복음의 진리를 수긍하여 예수를 제대로 믿고 성경을 본격적으로 배워보아야지 하는 마음이 생겼더라도 전하는 자의 행실이 마음에 안 들면 허사가 됩니다.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6,27)

    비교적 의롭게 살고 있는 천주교인들 앞에는, 아니 신자라면 당연히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자기들끼리 교회에만 모여서 떠들썩하게 박수치며 복만 받으려 한다는 인식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말이 앞서고 행동은 다르다는 평판이 잘못되었음을 실제 본보기로 입증해야 합니다. 또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올바른 의견도 제시하고 지구환경보전 운동 같은 일에도 적극 참여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물론 신자가 도덕적으로 완벽해질 수는 결코 없으며, 또 불신자들의 요구에 일일이 맞추어 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누가 봐도 옳고 그른 일에 대해서마저 개신교 신자가 하나님의 뜻이기에 혹은 영혼 구원과 교회 일이 우선이니까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는 절대로 보여주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설령 개신교 신자가 큰 잘못을 범해도 성경의 십자가 진리와는 전혀 무관하며 그 개인의 문제일 뿐이라는 점도 납득시켜야 합니다. 전도자 본인의 잘못에 대한 변명과 핑계로 동원해선 안 되고 개신교인에 대한 일반적 인식에 논리적 모순이 있음을 지적해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모든 종교에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스님이 잘못했다고 부처님이나 불교 자체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술 담배와 제사 문제

    천주교의 모순과 개신교의 진리 됨에 어지간히 수긍하게 된 자도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습니다. 왜 개신교는 술 담배를 못하게 하며 제사를 금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특별히 제사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개종을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선 성경문답 사이트 # 49 “왜 제사를 지내면 안 되는가?”라는 글에 구체적으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한 마디로 개신교에도 형식만 다르지 추모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강조하고, 술 담배를 허용하는 것이 금지하는 것에 비해서 여러모로 나쁘다는 점을 주지시켜야 합니다. 또 그 이전에 이 두 문제는 실제 구원을 얻고 믿음 생활하는데 장애 요인이 되지 않으며, 믿음을 가진 후에 천천히 그 잘못을 확실히 깨달은 후에 고치면 된다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질문자님께서 특별히 천주교인을 지목하여서 그 접근 방안을 문의해오셨습니다. 그래서 상기 방안들은 그들의 특성에 맞춘 답변인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불신자들과 타종교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핵심은 인간 스스로 죄를 씻을 수는 절대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방식과 말로 복음을 전하든 상대로 하여금 본인이 죄인이라는, 그것도 털어 먼지 아나는 사람 없다는 통상적 의미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 아래 있다는, 확고한 인식이 생기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재삼 강조하지만 아담의 타락과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관한 교리적 설명부터 우선해선 안 됩니다. 상대로 하여금 죄인이라는 철저한 자각과 도무지 구원 받을 길이 없음을 수긍토록 해야 합니다. 상대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고 정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 받기 전 죄로 죽었던 나의 옛 사람을 진솔하게 설명하고 또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거듭난 체험을 있는 그대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항상 유념할 것은 신자가 복음의 진리를 말로만 전해선 전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들어 볼만한, 잘해야 그런대로 가장 옳은 종교적 진리라고 수긍시킬 수는 있습니다.

    전도란 사단에 묶여서 죽어 있던 한 영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는 역사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간섭하지 않으면 전해진 복음의 진리는 단순히 상대의 지정의의 영역 안에만 머뭅니다. 그 영역을 넘어 심령의 가장 깊숙한 곳에까지 침투하려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직접적으로 미쳐야 합니다.

    상대가 구원 받을 자로 예정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전도자로선 처음부터 끝까지 간절히 그 영혼의 깨어짐을 위해 기도하면서 전해야 합니다. 전도에서 신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1-5)

    3/2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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