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들은 잘 보내셨는지요 ? 사진을 보니 무척 알차게 보내신 것 같더군요.
(저는 정회원이 아니라 대략적으로 밖에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도 잘 보내었구요, 근래에 책을 한 권 소개받게되었고 아울러 텍스트 파일을 같이 받을 수 있어서 공유하고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복음 (제프리 윌슨)”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오래전에 비매품으로 나왔었던 소책자입니다.
현재 이 소책자는 국내에서 절판이라 귀한 자료입니다.
소책자의 내용이라 분량이 좀 되므로, 시간을 내어 천천히 음미하시며 읽으시기를 바라며 취하실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원제 : The Authentic Gospel (by Jeffrey E. Wilson. Banner of Trust, 1990) : 영문판은 품절아님
(정태윤 목사님 번역 : “짐승위에 탄 여자”을 번역하신 목사님이십니다.) 서문:
이 논문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 증거들을 볼 때 현대 기독교가 성서적 뿌리에서 멀리 떠나 버렸다는 확신 속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사실 빗나간 정도가 신약 성경에 나타난 참 기독교에서 너무 멀어져 버렸기 때문에 겨우 밖으로 보기에만 닮은 모습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저는 이 논문을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를 마음에 두고 작성하였습니다. 1. 신약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참 복음을 제시하고 수십 년 동안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 수많은 사람들이 수용해온 거짓 복음의 내용 의 실상을 밝힐 것입니다. 2. 솔직하게 가짜 기독교의 특성들을 폭로하고 참 기독교의 핵심과 특성들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저는 특별히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 거짓 복음과 그 복음이 제공한 거짓 기독교 체험으로 속임을 당하고 위로를 받고 있는 분들은
그들의 영적 미혹에서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 * 진정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참 복음을 깨닫고 전 하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 것을 인식하며 오늘날 이 불경건한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인식하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주와 구원자 (Lord and Savior) 전 세계의 기독교를 면밀하게 분석해 보면, 현재의 기독교에는 어떠한 교묘한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날의 "기독교"는 혼란 상태에 있으며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해마다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물이 섞여가고 있으며 누구나 다 들어와서 최대한의 숫자를 확보하기 위한 공통분모에 도달하도록 타협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본질적으로 인본주의적, 물질주의적, 세속적으로 되어가고 있으며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를 손상하는 잡종 기독교로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타락은 오늘날 전 세계에 퍼져가고 있는 잘못된 복음 때문입니다. 수십 년 동안 확산되어온 이 복음은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이 가르쳤던 말씀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값싼" 복음, 혹은 "쉬운" 복음 등으로 호칭해 왔고 그 결과 "쉬운 믿음"(easy believism)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비극적인 일은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 교회와 근본주의 교회들에서도 이러한 "복음"이 제시되고 있으며 많은 선교사들, 라디오 방송이나 TV 설교자들, 기독교 선교 단체들, 기독교 켐프, 많은 "기독교" 문서들에 의해서도 이런 "복음"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이 복음은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저 단순히 예수를 자신의 구원자로 “믿기만”하고 "신뢰하기만"하고 "받아드리거나 영접하기만" 하거나, 혹은 그 분이 자신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믿기만 하거나, 혹은 그분의 값없이 주신 영생의 "선물"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 "쉬운 복음"은 회개에 대한 어떠한 요구도 없고 죄에서 돌이켜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께 나와야 한다는 어떠한 요구도 없습니다. 또한 이 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님으로서 그에게 헌신해야한다는 요구도 없고 그에게 완전히 복종하여 따라야한다는 진지한 소원도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한 구원자"로 얻고 행복해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흥분해 들떠 있으며 그래서 천국 갈 확신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불과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조건에 따라 그들을 다스리며 그들의 삶의 모든 분야를 통제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구를 제시하지 아니한 요즘 복음은 광범위한 환영을 받고 있으며 점증하는 "긍정적" 반응을 받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인기 있는 복음은 사람들에게 천국 갈 수 있도록 예수님을 "구원자"로만 영접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구원은 다만 미래의 형벌로부터의 구원만 입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후에 또 다른 요구가 따로 제시되고 있지요. 이 두 번째의 요구는 예수님을 이제 주로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주창자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않는 것이 완전히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곧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거나, 얼마간 따르다가 포기해 버리고도 천국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뚤어진 복음의 논리를 따르면, 이러한 사람도 구원받았고 훗날 지옥의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언젠가 예수님을 진지하게 "자신의 개인 구원자"로 영접한 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천국에는 들어가지만, 상급은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요약하면, 이 복음의 핵심인즉 예수님의 절대적 통치에 대한 헌신이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저 "한 선택"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주장과는 반대로, 신약의 참 복음은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원자"로 모셔드리고 그에게 삶을 바쳐야한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가 장래 죄의 형벌로부터만 구원받으라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이 참 복음은 우리가 현재의 죄와 그 결과들로부터도 동시에 구원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죄의 종으로부터 해방되어 예수님을 순종하여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요 8:31-36) 이 참 복음은 신자들이 제자의 삶과 신약에 기록된 계명과 원리들에 순종하여 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예수님의 복음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이러한 요구를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는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들어가리라 고 말씀하십니다.(마 7:21) 마찬가지로, 요한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만이 영원히 거한다"는 것입니다.(요일 2:17)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명령은 "가서 제자를 삼으라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어느 민족이든지 간에 참 그리스도인이란 처음부터 자신을 예수님께 바친 자들만이 본질상 그의 제자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후속적 선택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수많은 구절들이 신약에 있습니다.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구별하는 사람이 만든 신학적 발명품은 분명하게 비성서적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벧후 1:11, 2:20, 3:2, 3:18) 그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십니다. 그 분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 분은 사람이 자신의 죄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 지금부터 영원까지 자신을 의탁해야할 오직 한 분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 고 바울은 빌립보 간수에게 말했습니다.(행 16:31)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골 2:6) 구원이란 원칙적으로 주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입니다. "믿는다."는 말의 의미
어떤 분들은 다음 설명에 대하여 어리둥절하게 생각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참 복음이나 거짓 복음이나 간에 구원을 위한 기초가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확실히 검토되고 해결되어야할 핵심 문제는 신약에서 "믿는다"는 말의 의미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되며 정의(定義)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이 자신에게 적용될 때 대단히 신중하게 규정하셨다는 것을 주목해야합니다. 첫째는,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 곧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믿음은) 또한 예수님이 인간을 대신해서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죄 값을 지불하시기 위해서 (죄의 형벌을 받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현대 대중 복음이 와서 멈추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제시한 복음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에 대한 오늘 날 유행하는 복음은 구원은 "값없는 선물"이고 사람이 아무 값도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과는 정반대되는 주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앉아서 "비용을(the cost) 예산하라"고 말씀하십니다.(눅 14:26-33)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구원은 그 사람의 "전부"를 요구합니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복음서 안에 대단히 많이 나타나있습니다. (마 16:24-27, 막 1:14-15, 눅 14:25-33, 눅 18:18-30, 요 12:24-2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 16:24-27)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1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5-33)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18-3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4-26)]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당연히 자신의 부인과, 자신의 소유를 버리는 것과, 회개 즉 자기 중심과 죄에서 떠나 온전한 헌신으로 주님께 돌아가는 것, 확실한 의지로 예수님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 등을 포함합니다. 여기에 바로 누구든지 구원을 받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이 고려해야할 "대가"가 있습니다. 1세기에 그랬던 것 같이, 오늘 날에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무거운 대가를 지불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가르치셨던 같이, 오늘날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것"은 사실입니다. 현대인의 표현으로 설명한다면, 어떠한 세대나 민족에게나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복음에 응하는 사람은 항상 소수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많은 말씀 중 한 좋은 예는 "부자 청년"입니다.(눅 18:18-25)
이 사람은 진실로 영생을 찾아 나선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자신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켜 왔노라고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과 동기를 알고 계셨지요. 그는 부자였고 아마 재산에 인생을 의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실제적 구도자 (active seeker)"에게 손쉬운 복음 1, 2, 3 단계를 제시했나요? 분명히 그렇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의 뿌리에 들어가서 회개하고 그의 재물에 의존하는 자신의 끈을 단절해버리고 예수님께 돌아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와서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을 들은 "그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였더라"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사람은 비록 영생에 대한 그의 소원이 진지했다. 할지라도 이 세상 삶 이후의 영생에 대해서는 분명한 비젼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보장(保障)은 이 세상의 재물과 소유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제시하는 조건에 복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불해야할 대가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소유를 사랑하였고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고 가르치신 바 있습니다.(마 6:24) (독자들은 지금 저자가 행여 "행위 구원"을 옹호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성서적 구원의 믿음(saving faith)"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이 젊은 관원에게 그가 원하는 영생을 자신의 조건에 따라 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조건에 따라 구하지 않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구하고 있습니다. 두 주인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해온 것처럼, 이 청년을 격려해서 거짓 고백의 결정을 내리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 청년을 떠나가게 했고 조금도 설득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죄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에서 오는 회개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며 전적으로 예수님을 추종할 상태가 아닌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의 정의에 따른 "믿음"으로 예수를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서방 세계에 이 청년만큼 재산을 가진 수백만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로 "결정"을 내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젊은 청년에게 하신 말씀과 똑 같은 내용의 말씀으로 충실하게 이 부자들에게 전도했다면, 그들의 반응은 이 부자 청년의 반응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불할 대가를 계산해 보아야 했을 것이고 불과 소수를 제외하고는 다.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들의 탐욕과 시샘과, 재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지 않은 채, 또한 하나님 보다 세상 재물을 더 의뢰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은 채, 돌아 설 것입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는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슬픈 현실은 이 부유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약화시켜 왔습니다. 대부분의 서방 세계 사람들은 (제 3 세계의 사람들에 비해서)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들은 대가(cost)도 희생도 요구하지 아니하는 복음에 많이 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심장을 바칠 아무런 심각한 의지도 없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그들의 재물에 대한 사랑과 끈을 놓지 않고 있으며 그 재물이 제공하는 보장과 세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영접해 주셨으며 그러므로 영생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을 영접하시지 않은 것처럼 이들을 영접하시지 않은 것은 대단히 분명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돌려보내신 것처럼, 오늘날 전도자들과 교회들에 의해서 돌려보내어 졌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뻔했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것처럼 착각 속에서 영접 받는 것 보다는! 우리가 신약 성경을 정직하게 조사해 보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죄와 자신으로부터 돌아서는 회개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구원의 믿음은 자신의 생명과 영원한 운명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아무 조건을 달지 않고 바치는 헌신입니다. 사실, 헌신이란 믿음의 본질입니다. "믿음"이라는 헬라어 "피스튜오"는 영어로 번역할 때 "믿는다." "헌신한다." "위탁한다." "신뢰한다."는 말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Thayer가 저술한 Greek-English Lexicon에 의하면, "피스튜오"란 한 마디로 "믿음으로 자신을 바친다.(혹은 넘긴다.) (to give oneself up to in faith)" 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것이 그 근본적 정의인 것을 주목해야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되는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며 (나 위에 군림하는) 그 분의 권위를 인정함으로, 그 결과, 신자의 삶 가운데 그 분의 통치와 성품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은 지체 없이 다소의 사울과 같이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할 것입니다. (행 9:6)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헌신이 진정한 중생에 절대적 필요 요소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원자로 영접하여 그 분의 제자 될 것과 온전하게 순종할 것에 신실하게 헌신하지 아니한 사람은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제자의 삶과 예수님의 주되심을 온전하게 다. 알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의미를 배우는 것은 일생에 걸쳐 배워야할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어린 아이의 이해와 같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은 그것이 진실한 믿음이라면, 어떠한 의식적 유보(留保)없이 헌신하는 믿음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부연(敷衍)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 전부(全部)이거나 혹은 전무(全無)이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성령님의 내적 역사가 있어야합니다. 성령님은 죄를 뉘우치게 하고 사람이 자아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과 의로 향하게 하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님은 인간에게는 죄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는 의에 대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죄란 하나님의 의로우신 규정들에 대한 범행입니다.) 또한 성령님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이러한 일을 하십니다.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살전 1:5]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뉘우침을 알게 하시면 그 때 우리는 부름을 받습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그리고 영적으로 우리를 살리셔서 회개하게 하시고 믿게 하십니다. (살후 2:13, 14)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후 2:13,14] 그리고 우리는 복음의 부르심에 응하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 하리라" (요 6:37)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구원으로 부르는 자마다 죄책을 깨닫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한 죄를 깨닫게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특별한 죄뿐 아니라 자아 중심의 본성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거룩성에 비추어 보아 인간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깨닫게 하시고 자아로부터의 구원과 죄의 결과들로부터의 구원이 얼마나 시급한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이 죄들로부터 돌아서고 영원히 버리고자 원하는 갈망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적 회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의 종살이와 죄가 초래한 결과로부터 해방되어 구원을 받기 위한 유일한 소망으로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헌신하게 되고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님께 순종할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적 헌신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단호하게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와 우리의 자기중심을 버리게 됩니다. 이 땅의 모든 보장(保障)을 버리고 우리는 우리의 전부를 그리스도의 통제로 이전합니다. 분명한 이해가 아직 결여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분연히 예수님을 따르고 순종할 것을 결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 분만이 우리의 절박한 상황에서 구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신 것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복종할 소원이 없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곧 우리가 계속해서 죄 가운데 거하고자 원한다는 뜻입니다.(요일 3:3,9)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그것은 또한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한 적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되돌려 생각하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진정으로 뉘우침을 가진 적이 없었으며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곤고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깨달은 적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밖으로는 구원에 관심을 보였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약 죄 안에 여전히 거하고 있다면 우리는 죄로부터 진정으로 구원받기를 원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상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에게 여전히 불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주님을 복종하는 일에 어떠한 주저함이 있거나, 어떠한 것이나 또한 어떠한 죄나 버리지 못할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구원을 위해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준비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을 격려하여 "구원 받을 결정"을 내릴 것을 촉구한다면, 아마 그 사람은 결정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아무리 진지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중생은 아닙니다. 요약하면, 헌신은 진정한 믿음 안에 항상 내재하고 있어야하는 요소입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했을 때 사람이 반드시 보이는 반응입니다.
그러한 죄책의 깨달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를 느끼게 하고 이 필요는 예수님에 대한 조건 없는 헌신을 바치게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영적 중생을 산출하고 그 중생은 변화된 삶 가운데서 보이게 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중생의 결과들
가장 귀한 진정한 중생의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사귐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제 이 연합으로부터 자라게 됩니다.(요일 1:3)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자극하고 이 사랑은 또한 예수님에 대한 헌신과 순종을 초래합니다.(요 14:15, 20, 21, 15:4, 5) 이러한 헌신과 순종은 한 순간에 완전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이 처음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때 그가 예수님께 진정으로 순종하고자 한다. 할지라도 이 새로운 관계가 자신의 매일의 삶 가운데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곧 이해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하여 새 삶을 얻었고 새로운 순종은 살아가는 동안 계속 성장하는 과정이 됩니다. 성령께서 이 사람의 삶 가운데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님의 통치에 대한 헌신과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계속됩니다.(롬8:2-16)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전진하는 영적 성장입니다. 영적 출생이 있었다면, 영적 생명이 있고 생명이 있으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서서히, 때로는 빨리, 하늘나라를 위한 준비를 해 가는 동안 계속해서 자라갑니다. 그러나 만약 성장이 없다면 생명도 없습니다. 신약 성경은 이러한 성장 과정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이 성화는 중생과 함께 시작합니다. 성화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당신을 향해 분리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입니다. 성화를 정의(定義)하면, "거룩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적 성화는 세 개의 국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성화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는 (성화)되었고 (고전 6:11), 현재 성화되어 가고 있으며 곧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롬 6:22, 엡 5:26) 장래에, 그는 주님을 향해 완전히 성별될 것입니다. 죄는 온전하게 제거되어 버릴 것입니다.(롬 8:23, 30, 엡 5:27) 우리가 만약 주님을 향해 영원히 성별될 정당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성화의 과거와 현재의 국면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4 절 말씀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는 내용은 성화의 현재 국면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의 현재 성화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시고 있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예수님의 간구는 참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순종을 인하여 실질적 거룩성이 자라가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도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골 1:9, 10) 바울의 기도는 골로새 교인들이 거룩한 삶을 살고 주께 헌신하여 일상의 모든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 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실질적 경건이 자라가는 많은 예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랑과 헌신 같은 그리스도인들과 또한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 세상의 풍속을 좇지 아니하는 것 (우리의 마음은 복음으로 새로워 졌기 때문에) 검소하고 단정한 삶, 희생적 헌금으로 영원한 것에 투자하는 것 등,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와 그리스도께 헌신된 삶을 사는 동안 넘어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령님께서 뉘우치게 하고 필요하면 징계하고 몸의 행실을 죽여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 살도록 역사하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들은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히 12:7-11, 롬 8:9-14, 갈 5:16-23, 요 14:26, 요 15:4, 5)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는 물론 우리들의 책임을 무효화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님의 죄를 책망하심과 징계에 대하여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옛 것"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것"을 입어야합니다. (롬 8:12, 롬 12:2, 엡 4:22-24)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일하고 계시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빌 1:6) 그러나 바울은 그의 모든 편지마다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책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는 하나님이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니라" (빌 2:12, 13) 이러한 것들이 바로 오직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진리들입니다. 이제까지 진술한 바와 같이,
오늘날 인기 있는 교훈, ‘즉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그의 삶에 구원의 증거가 반드시 나타나야 할 필요가 없다’라는 주장이나, ‘분명한 삶의 변화가 없을 수 있다’는 주장, ‘영적 생명은 가지고 있지만 영적 성장은 없을 수도 있다’는 주장, 혹은 ‘알고도 죄의 삶을 계속 살아도 결국은 구원받는다’는 등의 주장은 신약 성경에서 정죄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 했습니다. 구원의 확신과 증거
위에 언급한 주장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누구나 진정으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바친 사람은 결정적이고 확인할 수 있는 마음의 변화와 성품의 변화를 체험했고 그러한 변화를 보이는 진정한 증거가 있다는 것을 확정해야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오직 예수님만을 계속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주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의 소원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매일의 소원하는 것은 그의 삶의 모든 분야에 이르러 주님의 계명을 배우고 행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어떠한 희생도 기꺼이 지불하고자 합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기록된 성령의 열매를 점진적으로 맺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죄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혐오하게 되고 죄로부터 해방되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믿는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화의 또 다른 증거입니다. 롬 8:14-15절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13절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자들') (이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죄짓는 것을 "용이하게 피할" 수는 없습니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죄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합니다.(갈 5:17) 이 죄에 대한 뉘우침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내적 "증거"의 일부입니다.(롬 8:16) 일단 성령께서 죄에 대한 인식과 뉘우침을 일깨우시면 (하나님의 자녀는) 회개를 실천하여 죄로부터 떠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물론 우리는, 죄와의 싸움이 항상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죄의 삶을 계속 살 수는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중생한 사람은 그의 매일의 삶 속에서 의의 삶이 그의 목표와 습관이 됩니다. (요일 2:29, 3:9) 또 다른 증거 곧 진정한 중생과 하나님 아버지와 나와의 새로운 관계를 나타내는 증거는 하나님의 징계 (discipline)와 교정 (correction)입니다.(히 12:4-11) 그리고 이 하나님의 징계와 바로잡으심에 대한 우리의 순종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이와 같은 증거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확신의 한 원칙적 근거입니다. 내가 이것을 "한 원칙"이라고 말하는 것은 삶에서의 증거만이 구원의 확신의 유일한 증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알기 전에 나를 위해서 (이미 일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그 사람의 구원의 확신의 제1차적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갖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보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달려 있습니다. 이 은혜가 인간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을 이루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현재도 중보를 해 주시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히 7:25, 롬 5:2, 8:34) 그러나 물론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구원의 확신이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견고한 관계가 단절 없는 믿음과 매일의 삶에서 중생과 성화의 모습이 증거 되어야합니다. 신약의 많은 성경 구절들이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구원 확신에 연관하여 과거의 어떤 "결정"이나 "경험"뿐 아니라 현재의 증거가 제시되어야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후 13:5, 요일 2:3-6, 15-17, 29, 3:7-9, 11, 14, 15, 약 2:14-26, 갈 5:19-24, 6:7, 8, 벧후 1:4-11, 히 10:36) (참고: 제임스 보이스, 로마서 강해, p.1964-65 참조) 헌신: 결신과 과정 최종적 구원에 이르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은 2중적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의 결신과 계속적 과정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죄로부터 구원한 구원자와 또한 자신의 주로 받아드리기 위하여 회개하고 그 분에게 자신을 의탁한다는 것은 극단적 헌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결정의 순간 이전까지 이 사람은 자기의 삶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자신이 통제해 왔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드디어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포기하여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을 온전히 다스리시게 하는 결정을 내렸을 때 이 사람에게는 심각한 전환이 발생한 것입니다. 바로 이 제1단계의 봉헌으로부터 이제 헌신이라는 과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계속되는 소원과 기도는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빌 3:10), 나의 마음과 삶이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의 끊임없는 도움으로 "현재"의 성화 과정과 제자의 삶은 우리들의 이 세상 나그네 여정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헌신의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성경 말씀은 롬 12:1-2 절 말씀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에서 설명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근거해서 이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통치와 다스림에 온전히 헌신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헌신의 동기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한 감사입니다. (고후 5:14-15 말씀 참고) 그는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 헌신은 변화된 삶과, 범사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함으로 나타난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한 뜻은 하나님의 방법들은 세상의 방법들과 철저하게 반대된다는 것이고 이 세상은 사탄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마음이 "새롭게 됨으로" 변화를 받을 것이며 자신의 삶의 어떤 특정한 분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prove)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됩니다. 그 말씀의 교훈으로 그리스도인은 점점 더 성령의 조명을 받아 자신의 삶 가운데 어떠한 부분에서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의 정욕을 다 버려야할 것이며"(딛 2:12) 주님의 통치에 나를 내 맡겨야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이란 실제 삶의 현장에서 또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완전히 "새롭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 향한 헌신이란 단회적 결정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일이나 주님께 헌신과 순종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일생 계속되는 과정입니다.(롬 12:1-2) 불행하게도 이 구절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는 것과 그 다음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구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잘못 오용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해석할 때, 그리스도에게 삶을 헌신한다는 것은 오직 중생한 후에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그렇게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믿음이 동시에 헌신이라는 것은) "행위"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말하기를 바울은 이미 전에 "복음"에 대한 교리적 설명을 제시한 바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12장의 내용은 이 복음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응한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로마서 12장 1절은 그리스도께 삶을 헌신하라는 첫 번째의 언급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구원을 주는 (이미 전에 언급된) 믿음의 일부분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바울은 (헌신 없는) 믿음으로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이제는, 그리스도께 헌신하라고 권면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1절의 해석은 바울의 간절히 바라는 호소는 그저 이들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헌신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은 수도 있다는 논리밖에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로마서 6장 13-22절의 주요 메시지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분명하게 두 종류의 헌신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생 (곧 구원)에 이르는 헌신이고 다른 하나는 사망에 이르는 헌신을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미 로마서 3-5장에서 설명한 구원의 믿음에 대하여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6절과 22절이 그 예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우리가 이미 전에 주목한 바와 같이, 로마서 8장 2-16절 또한 주에 대한 헌신은 참된 구원 경험에 필수적이며 본원(本源)적인 것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보낸 로마 그리스도인들은
"믿어 순종에 이르는"(롬 1:5) 복음을 받아들여 이미 주께 그들 자신을 헌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확실히 헌신의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1:8) 그리고 그들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려" 알려져 있었습니다.(16:19) 로마서 15장 14-15절에서 바울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주께 헌신하고 주께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매우 잘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생각나게" 하는 점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편지 전체에서 수많은 권면을 기록하고 있으며 로마서 12장 1-2절도 그 일부인 것입니다. 이 이단을 요약하면
오늘날의 수많은 소위 복음주의 교회들과 단체들은 타락한 복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전파자들은 사람이 "단순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단순한 믿음"은 그들 자신이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은 표를 굳게 쥐고 천국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의롭다함"을 받았으며 혹시 "거룩함"은 앞으로 받을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가정된 중생 후에, 이제는 성화를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자신을 헌신하고 그 분의 제자가 되고 그 분을 따르며 순종하여 자기 몸을 산제사로 드리도록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런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자신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께 온전히 헌신하고 복종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그리스도께 온전히 헌신하지도 않고 불순종하며 죄 속에서 그리스도를 거역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후자의 사람들을 "육적인 그리스도인 혹은 뒷걸음치는 그리스도인(backslidden Christians)" 이라고 분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하늘에서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육신적" 삶을 계속 살고 있거나 범사에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상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하늘나라에 들어 갈 확신은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느 한 때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믿고"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간단한 결정"을 내린 후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한 불순종의 삶을 살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연한 결과로 이러한 삶에 대한 "교리적" 설명이나 정당화가 발명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학적 주장이 탄생했습니다. 그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혼잡이며 (혹은 왜곡이며) 철저한 이단입니다. 사탄은 그것을 이용하여 성서적이며 역사적 기독교를 전 세계적으로 허물어 가고 있습니다. 이 이단의 결과들
신약 성경의 진리를 이렇게 왜곡하는 이단 사상의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풀어 죄인들을 돌아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진술해온 교리들로 인해 많은 "결정 (결신)들"이 이루어져 왔고 이러한 결신들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중생은 아닌 것도 분명합니다. 슬픈 일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 자신이 중생했고 영생은 보장되었다고 가르침을 받고 있지만 자신의 삶의 모습은 그들의 고백이 거짓이라는 것을 확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천국 갈 것이라고 믿고 있으나 실제로는 갈 수 없는 거짓 확신 속에 내 팽개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이단의 비극적 결과 중 하나입니다. 어떠한 분량이든지 이와 같은 악한 기만에 가담한 자는 책임을 면치 못합니다. 누구든지 부지중에라도 이러한 거짓 복음을 제시하거나 장려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 책임을 지게 될 것이고 고전 3:10-15 절 말씀에 따라 정당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단을 의도적이고 지속적으로 가르쳐 온 사람은 그들의 신분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혹은 그들이 기독교 안에서 얻은 명망이 어떠했든지 간에, 그들 자신도 이 이단의 결과물이며 그들은 거짓 교사들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 8-12 절에서 엄숙하게 선언 한 바와 같이, 비극적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거짓 복음을 분별할 책임이 있으며
잘못된 말들과 순진하게 보이는 유혹을 피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 현재의 더 많은 전도자들(evangelists)이나 앞으로 나올 전도자들이 참으로 복음적인 말씀을 전파한다면 훨씬 더 적은 "예수를 믿겠다는 결정들(decisions for Christ)"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 결과 이 이단이 초래한 점점 증가하는 결과들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소위 "육적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거짓 보장에 스스로 속임 당한 것을 깨닫고 참 겸손과, 회개와, 참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성서적으로 정확한 복음을 제시해야할 책임이 있음을 명심해야합니다. 조기(早期) 결정을 부추기지 않도록 조심해야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자가 전도 대상자의 영적 축복을 진실로 간절히 원할 때 갖게 되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오직 성서적 말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탄생하도록 주님께 온전히 의뢰함으로 만족하고 인내하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 것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복음의 미혹으로부터 초래되는 거짓 결신과 거짓 확신의 비극적 결과들 외에 그리고 그 이상으로 비극적인 결과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권자되신 주님에 대한 모욕 행위입니다. 그 모욕이란 아직 자기중심으로 살고 있는 죄인에게 그리스도에게 대한 "단순" 믿음으로 당신은 영원히 구원받았으며 그를 구원해 주셨다는 분에게 의식적으로 불순종하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에게 이상과 같은 확신을 약속해 주는 일입니다. 이 잘못된 신학적 논리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하나님의 은혜와 거룩성에 대하여 이보다 더 큰 모욕적인 행위는 없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6-29절 말씀은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받을 무서운 결과에 대하여 불을 보는 것 보다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고 그는 경고하고 있습니다.(갈 6:7-8) 이 구절에 대한 메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의 예리한 통찰력 있는 해설을 보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는 결국은 자신만 속이는 자입니다. 영적 위선은 가장 큰 죄악일 뿐 아니라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위선을 뚫고 심장을 살피며 훗날 그 사람을 심판하실 때, 그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그의 살아온 삶을 따라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고백의 증거는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의 말, 행실 등에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이 이단의 마지막, 그리고 가장 큰 결과는
이 이단이 생산해 낸 타락한 형태의 기독교입니다. 너무 광범하게, 그리고 너무 흔하게 퍼져 버렸기 때문에, 이 이단은 이제는 "정상적" 기독교로 취급되어져 버린 것입니다. 새로운 종교 이 이단이 산출해낸,
수준 미달의, 처량하게 불완전한, 이 잡종 기독교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 기독교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기본적으로 말하면, 오늘날 광범하게 퍼진 이 인기 있는 복음은 하나의 이상한 종교입니다. 그것을 "기독교" 종교로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한 (표면적으로는) 정통 신앙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부활, 재림, 천국과 지옥,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기초한 복음, 중생 등등. 이와 같은 외형적으로 보기에 건전한 기초로 말미암아, 이 "종교"는 훨씬 더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으며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종교는 오직 성경에만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성경은 압도적으로 희석된 성경이며 세속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왜곡되고 타협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이 종교의 교훈은 그들이 아무리 성경으로부터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거의 대부분이 다. 사람의 작품이며 사람의 해석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 기독교에 새로운 모양과 새로운 의미를 주는 종교입니다. 이 기독교의 종교 운동은
수많은 설교자들, 선생들, 전도자들, 선교사들, 그리고 필객들의 추종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교들, 성경 학교들, 그리고 각종 기독 단체들이 년 간 헤아릴 수없이 많은 사역자들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문서들도 대량 출판되고 있으며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성장으로 말미암아 세계적인 영향력도 막강해 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이 오직 이 "기독교" 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것이 비성서적이라는 지적은 오히려 미친 사람의 말처럼 들리거나, 비판적 혹은 이단적으로 까지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 말씀과 정상적인 기독교 역사에 비추어 보면 이 세속적이고 인간 중심의 조작된 기독교는 완전히 심판의 대상입니다. 현실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의미는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 근본주의, 심지어는 자유주의 교회 안에 수많은 소위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몰몬이나, 여호와 증인들이나 회교도들이나, 기타 여러 종교 운동의 멤버들로서 그 회에 속한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추측하건데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복음 제시에 응하여 "결단"을 내린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형태로든지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속하게 자기가 속한 지역 교회에서 그들의 종교 방식과 용어들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종교의 "진리들"을 배우고 "영적" 문제들에 대하여 대화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들의 종교적 경험에 대해서 진지하고 열정적입니다. 많은 "종교적" 일들을 행하고 "활동적" 참여자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높은 수준의 열심을 가지고 그 "복음"을 전파합니다. 또 많은 이들이 자기 교회 내 같은 부류의 모임에 큰 위로와 만족감을 느끼고 있으며 깊은 사회적 필요가 채움을 받고 있습니다. 감정은 이 종교 단체 안에서 때로 큰 역할을 합니다.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지금 언급한 특성들은 물론 이 크리스천 종교의 특유한 것들은 아닙니다. 어떤 특성들은 전 세계적으로 어느 종교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자들은
자신이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수년간 전파되어온 잘못된 정의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에 자신이 중생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성인 인구 중 45% 내지 50%의 국민이 스스로 "중생한" 자 혹은 복음주의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료가 제시하지 않고 있는 내용은 "중생"이란 성서적 의미가 다 상실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혹자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내린 결정이 비록 거짓 복음에 따라 내린 것이라 할지라도 진실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진지함을 보아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상 모든 종교는 진지한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지함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탄의 기묘한 미혹 전술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이 정말 중생했는지 아니면 "중생한" 종교에 그저 소속해 있는지를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온전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중생한 사람은 그들이 맺는 성령의 열매로 알 수 있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증거와 빛이 우리 마음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분명하게 있는지? 진정으로 자신을 부인하는 마음이 있는지? 주님을 사랑하는 신실한 사랑이 있는지? 주님을 항상 기쁘게 해 드리고 자 원하는 간절함이 있는지? 세상 물질과 그것에 기대는 마음에서 정말 떠나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금하는 세상 쾌락을 실제로 피하고 있는지? 세월을 아끼는 삶을 살고 있는지? 실질적 경건의 증거가 있는지? 참 그리스도인 형제에 대하여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신약 성경 말씀에 저촉되는 일을 알고 저질렀을 때 진정한 죄책감과 뉘우침이 있었는지? 죄에 대한 진정한 혐오감이 있고 모든 죄악으로부터 떠나고자 원하는 소원은? 악은 그 모양이라도 피하고자 원하는 (TV 화면에서 보는 것 까지도) 소원이 있는가? 만약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이 긍정적일 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이며 단순히 "기독교의 종교"에 속한 한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요일 2:29, 3:9, 4:7, 5:1-4) 결론
우리는 지금 기독교에 대한 전대미문의 혼란된 상태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강력한 명확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아에게 하나님께서 건설하고 심고하시기 전에 먼저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셔야 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렘 1:10) 그와 같은 것이 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