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어느 독자가 보내 준 송인규 교수님의 글입니다. 우리들 교회의 현실을 보여 주고 있지요. 읽고 많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질문을 할 수 없다고요(송인규 교수의 한국교회 신앙진단).
질문이란 단순히 어떤 사안에 대한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푸는 수단 정도가 아닙니다. 질문은 질문하는 당사자의 생각과 입장을 확실히 정리하도록 돕는가 하면, 또 자신의 질문 내용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바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자극하고, 때로 질문자의 숨은 의도를 여지없이 보이기도 합니다.
질문은 이렇게 당사자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질문은 그 대상인 답변자에게 궁극적인 자극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질문으로 자신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고, 나의 의견이 상대방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점검할 수 있습니다. 또 앞으로 전개해 나갈 논의의 타당성과 적실성을 빠르게 타진하게 되며 만약 질문자와 답변자가 함께 청중들을 대하고 있는 경우라면, 청중들도 그와 같은 효과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질문’이 어려운 교회
이토록 질문의 유익이 많음에도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질문’은 그다지 친근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 이유를 기독교 안팎에서 찾아보면, 우선, 교회 외적으로 한국 특유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한국의 교육 분위기는 질문(및 답변)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학습 태도가 아닌 것으로 말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수직 구조에서 수행되는 강의, 필기, 암기의 반복일 뿐 교사와 학생, 또는 학생 간 상호 교류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바람직한 교육이라면 마땅히 질의와 응답이라는 교육적 수단을 포함해야 함에도 시간과 공간의 문제, 과밀한 학생 수, 그에 비해 열악한 교사 수 등의 현실과 타협했던 것입니다.
둘째, 학습장을 감싸고 있는 심리적 압박이 질문과 대답을 편안하게 유도하기 못합니다. 많은 교사들은(특히 나이가 든 옛 세대일수록) 학생들의 질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학생이 질문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는 그것을 상급자에 대한 도전이나 공격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자에 대해서도 다른 학생 편에서 “짜식! 혼자 되게 잘난 척하네.”라고 반응하곤 합니다. 물론 질문자중에는 예의조차 갖추지 않고 시건방진 태도로 질문하는 이도 있고, 자기 과시를 위해 질문하는 경우도 적잖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교육 환경은 질문과 대답이라는 학습 수단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교회 내적 요인 또한 자유로운 질문의 풍토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신앙의 강조점 믿음에의 독려와 권면은 자연히 질문을 경시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가 믿음을 강조하면 할수록 자연히 질문(및 답변)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각을 형성하게 됩니다. 의문점의 제기는 곧 불신, 불순종, 반역 등과 동일시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 나라의 교회 모임은 질의 및 응답이라는 교육 방식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소그룹 활성화가 목회와 연관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정도일까......그 전까지는 모든 모임이 주로 예배와 같은 대그룹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예배나 기도회에서는―그것이 크든 작든―성경의 가르침이나 설교 내용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가 주도하는 소그룹 제자 모임도 아직은 모든 교회에 보편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질문과 응답의 학습 방식이 공동체의 삶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질의와 응답에 대한 성경의 예시
성경은 질문(및 답변)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질문과 관련하여 무슨 명령을 내린다든지(“너희는 궁금할 때마다 질문을 하라.”), 아니면 무슨 약속을 제시한다든지(“질문을 하면 주께서 깨닫게 하시리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구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전례와 모범은 질문(및 답변)의 중요성을 말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깨우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다름 아닌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에 대해서건(창 3: 9, 11), 하와에 대해서건(창 3: 13), 아니면 가인에 대해서건(창 4: 6, 7, 9, 10)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들도 종종 질문의 형태를 빌려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곤 했습니다. 이 점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지혜를 전할 때든지(사 40: 12~14), 예레미야를 통해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을 경고할 때든지(렘 23: 33~34), 에스겔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돌이켜 회개하기를 호소할 때든지(겔 18: 2, 10-13, 19, 24, 25, 29, 31) 한결같이 나타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역시 많은 경우 질의와 응답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12세에 지혜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에 바로 질의와 답변을 사용하였습니다(눅 2: 46~47). 공생애 내내 질문의 형식을 통해서 제자들이나 듣는 이들을 가르치셨습니다(마 16: 15; 막 10: 9; 눅 10: 36; 요 8: 46). 또 사람들의 수많은 질문들에 일일이 대답하심으로 그들을 깨우쳤습니다(마 11: 2~6; 19: 16~22; 21: 23~27; 22: 15~22; 23~33; 막 2: 16~28; 8: 27~38; 9: 10~13; 10: 1~12; 13: 3~37; 눅 10: 25~36; 12: 41~48; 요 3: 4~15; 4: 10~15; 6: 28~65; 8: 1~11; 9: 1~7; 13: 36~14: 7). 사도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도 질의와 응답의 형식으로 사명―복음 전도, 변증, 양육, 교육 등―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비신자에 대한 책임과 관련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벧전 3: 15)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과거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받을 때 이런 식의 답변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행 4: 7~12).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도 재판 과정 중 자신이 기소 당한 이유를 답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행 22: 1; 26: 1). 특히 로마서를 통한 이신칭의의 진리는 수없이 많은 질문과 답변의 형식으로 전달되었습니다(롬 2: 4~5, 21~23, 26~27; 3: 1, 3, 5, 6, 7~8, 9; 6: 1, 2, 3, 15, 16, 21; 8: 24, 31, 32, 33, 34, 35; 11: 34, 35).
질문 풍토 개선의 길
이처럼 중요한 ‘질문(및 답변)’이 한국 교회 내에 굳건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먼저 열린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먼저 질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우들을 깨우칠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질문을 던지고 교우들로부터 답변을 유도해야 합니다. 신앙의 교육과 훈련 과정 중에 질의와 응답의 방식을 적절히 사용해야 합니다. 교우들이 신앙의 주제와 관련하여 질문을 하거나 의문을 품을 때 정죄하거나 냉소로 반응하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때로 질문자의 태도나 내용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정성껏 답해야 합니다. 질문이 어려워 당장 답변하기 힘들 때에는 그렇다고 시인해야 하며, 후에 답변을 해 주겠다고 약속한 뒤 꼭 지켜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다시 살피고 관련 서적을 읽으며 해당 주제를 끊임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둘째, 질문과 답변이 필요하고 가능한 형태의 모임들은 공동체에서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미 각종 리더 모임과 제자 훈련을 위한 소그룹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십시오. 일방적인 강의만 하지 말고, 질의․응답 시간을 의도적으로 두십시오. 또 질의․응답을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모임들―세미나, 강좌 등―을 만들어 내십시오. 이런 모임들을 활성화시켜 질의와 응답이라는 학습 수단을 그리스도인 각자와 공동체에 귀중한 자원으로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체질 개선의 의지가 깨어난다면 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