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짐승과 달리 글로 자기의 모든 것을 표현합니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쓰는 연습을 하면 평생토록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기계쟁이로 교육을 받아 글을 잘 못 씁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글의 묘미와 힘을 많이 느낍니다. 우리 근본주의 성도들 가운데서도 글을 잘 써서 하나님의 진리를 통괘하게 전달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면 좋겠습니다. 특히 우리의 아이들이 좋은 글을 잘 쓰면 너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제가 보는 전문 잡지에 다음의 글이 실렸습니다. 글쓰기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면서 한 번 읽어 보면 좋을 것 같아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
포스와 내공
강신호: 한전KPS(주) GT정비기술센터 고온부품팀장
요즘 흔하게 쓰는 말 중에 ‘포스가 느껴진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포스’는 선과 악의 균형을 다스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의 대명사로서 영화 스타워즈 중 대사에 등장한다. 말 그대로 외부로 발산되는 독특한 기운(氣運)이나 힘을 의미한다. 또 개성이나 의지, 심지어는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의 열망 등을 함축해서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기존에 널리 쓰이던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하지만, 카리스마가 지배구조의 수직성이나 권위로부터 나오는 힘이라면 포스는 수평적인 관계에서의 힘마저도 표현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다양하고 보편적이다. 비슷하게 쓰일 수 있는 말로 무협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공력(功力) 이나 내공(內功)이라는 단어도 생각할 수 있다. 공력이 안과 바깥 모두로부터 발휘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면 내공은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즉 실체를 알 수 없는 힘을 통칭하면서 ‘수양과 단련의 깊은 정도’를 표현하는 말일 게다.
갑자기 뜬금없이 영화나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단어들을 나열하고 있으니 글머리의 분위기가 다소 경직되는 듯도 하지만, 사실 진짜 의도는 언어를 통해 주고 받을 수 있는 의미들의 발랄함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싶어서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 중에는 굳이 ‘포스’나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도 의사소통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 ‘제법인데’라거나 좀 더 구체적으로는 ‘힘이 있네’ 라고만 해도 충분히 느낌을 표현할 수도 있고 알아들을 수도 있는데, 우린 굳이 색다른 단어를 찾아내어 쓰고야 만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포스는 외국영화를 통해서 알려진 단어이다. 공력이니 내공이니 하는 말도 무협소설을 통해서나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작품을 즐겼던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고 되새김되던 단어들이 언제부터인가 유행을 타면서 회자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대중들에게 단어가 주는 의미 이상의 상상력을 제시하고 있다. 대부분은 보편성과 일상적인 것으로부터의 탈피가 주는 즐거움과 통쾌함을 느끼게 해준다. 너무나 잘 알려진 어휘밖에 쓸 수 없다면 얼마나 따분하고 식상할 것인가.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서로 할 말만을 주고받는 행위일 뿐이라면 그런 관계는 너무 건조할 것이다. 마치 기계나 로봇 시스템을 제어할 때처럼 명령어 몇 줄 입력해주면 되는 식의 관계라면 그건 제대로 된 인간관계가 아니다. 다행히 인간의 지적 감성적 능력은 상대방의 혀끝으로 발음되는 몇 가지 단어들로도 많은 정보를 상상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다. 단지 상대방의 발음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구사한 단어들의 의미와 느낌으로부터 밝고 어두운 측면, 기쁘고 슬픈 측면, 선하고 악한 측면 등을 가려낸 뒤, 대응하기 위한 단어들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극도로 짧은 반응시간 내에 자신이 판단한 내용을 근거로 적절한 단어들을 조합해내고 얼굴 표정과 몸짓, 목소리의 톤을 바꾸어가면서 자신의 의도와 감정으로 표현한다. 이때 대화를 윤택하고 부드럽게 해주는 요소들을 얼마나 많이 담고 있느냐에 따라 대화의 질과 깊이가 달라진다. 다양하고도 기발한 아이디어를 담은 적당한 용언들을 분위기나 상태에 따라 제때에 사용할 수 있다면 그는 진정한 언어의 마술사이다. 그저 의미만을 전달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쉬우면서도 짧은 말로써 듣는 사람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더 바랄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무슨 시구처럼 미사여구를 섞어야 한다거나 은유법과 같은 기교를 부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진부하거나 사무적인 분위기로 흐르기 쉬운 대화 도중에 신선하면서 톡 튀는 단어로 상대방의 감성을 자극한다면 대화의 과정이나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자주 보는 TV 드라마들은 배우들을 통해 의도한 내용을 전달하는데, 화려한 대사로 시청자들을 웃게도 울게도 만든다. 유창하고도 논리 정연한 대화들이 오가면서 감정이 빠르게 전달되다보면 보는 이들은 어느새 극중 상황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배우들의 연기능력에 따라 감동의 깊이는 더해진다. 웃기는 장면에서는 기발한 대사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드라마나 개그프로그램 등을 통해 세상에 소개되는 유행어들은 시대적 상황을 담거나 대중 정서와도 일치할 때 더욱 반향이 크고 수명이 길어진다. 다양한 신조어나 줄임말의 등장과 활용 또한 사회적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를테면 핸드폰과 컴퓨터가 폭 넓게 보급되어 다양한 통신매체로서의 구실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러한 통신매체들은 온전한 문장을 주고받을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 속성을 지녔다. 시간과 비트(bit) 수를 제한하고 쓴 것만큼의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 속에서 기존의 질서가 갖는 헤게모니는 무의미하다. 만일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격식과 맞춤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못 박는다면 당장 컴퓨터와 핸드폰의 활용이 위축될 것이다. 때문에 현명한 유저들은 신조어나 줄임말과 같은 대안을 만들어 내었다. 가장 짧은 시간 내에 많은 단어와 감정을 전달하게 위한 온갖 궁리의 결과인 것이다. 이는 톡톡 튀는 창의력이나 감성의 순발력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며, 당시의 문화와 정서에 동화되어 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혹자는 인터넷 속어나 신조어가 난무하는 문화적 현상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법을 무시하면서 만들어진 만큼 우리말의 존속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위기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조어와 유행어가 담고 있는 재치와 새로운 정서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왜냐면 언어란 감정을 담는 그릇과도 같기 때문이다. 어떤 그릇을 만들어서 어떻게 쓸 것인가는 사회적 수요층의 공감대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물론 수요층이 다양한 만큼 모두의 공감을 얻지 못한 상태로 생겨난 그릇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그릇들은 밑이 좁거나 깊이가 얕아 많이 담지 못하는 그릇이다. 즉 그릇의 생김과 크기에 따라 담기는 감정의 양과 전달되는 형식이 달라질 것이고 대화와 교류의 성격도 달라질 것이다. 그럴 바에야 이왕이면 재미있고 식상하지 않은 그릇들이 많은 편이 사회를 밝게 만드는데 기여하는 게 아닐까. 여유와 재치가 넘치는 사람과의 대화가 좀 더 즐겁듯, 밝은 표정으로 늘 진지한 사람과의 만남이 더욱 기다려지듯이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만 그럴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의 재치와 유머 수준 자체가 동떨어져 있어서는 통할 수 없는 노릇이다. 상대방에 집중하는 총기 있는 눈빛과 매너를 통해서 만남을 유쾌하게 만들려는 진지한 의지가 마구 발산되어야 한다. 최소한 이 정도의 ‘포스’와 ‘내공’도 없이 남들이 그래주기만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