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고전의 글들을 읽고 있습니다.
참으로 배울 것이 많습니다.
어제 읽은 글을 소개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이 글을 주고 싶습니다.
잘 읽어보기 바랍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 유념하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패스터
밝은 날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백일막허도) 청춘! 그 가슴 설레는 말은 불행히도 이미 지나간 다음에야 더욱 진하게 다가온다. 영원할 줄 알았던 청춘은 한순간에 지나고, 그러고 나서야 얼마나 뜨거웠던 시기였는지를 추억한다. 주자는 “봄풀은 아직 깨지도 않았건만 오동나무 잎은 가울 소리를 전해준다”라고 읊었다. 봄의 맛을 음미하기도 전에 가을이 오고 마는 것이다. 세월은 나를 위해 기다려주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은 여전히 많은데 이룬 것도 없이 머리는 희끗해지고 잔주름만 늘어간다. 현재를 살면서 지난 세월에 연연하다가 세월은 덧없이 흘러만 간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는 세월의 무상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신은 쉬 소모되고 세월은 빨리도 지나가 버린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애석한 일은 오직 이 두 가지뿐이다.” 우리는 하루살이의 삶을 비웃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삶도 결국 하루살이일 뿐이다. 시간은 너무도 빠르고 기력은 쉬이 쇠한다.
“백일막허도, 청춘부재래”
“밝은 날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안중근 어록)
이 문장은 독립지사인 안중근의 어록 가운데 하나이다. 백일이란 밝은 대낮을 뜻하는데 인생에 비유하면 창창한 젊은 시절을 의미한다. 허도란 헛되게 보낸다는 뜻이다. 목표 의식도 고민도 없이 어영부영 쓸데없이 시간만 때우는 것을 말한다. 안중근 의사는 젊은 시절을 헛되게 보내지 않았다. 가장 숭고한 대의를 위해 자신의 온몸을 기꺼이 바쳤다. 비록 서른한 살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쳤지만, 그 이름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문장의 본래 출전은 예전 초학들의 교재였던 <추구>에 실려 전한다. 해당 시를 옮겨본다.
“꽃은 다시 피는 날이 있지만, 사람은 다시 젊어질 수 없다.
밝은 날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3~4구를 그대로 옮겨온 셈인데, ‘보낼 송’ 대신 ‘건널 도’로 바뀌었을 뿐 나머지 구절은 똑같다. ‘보내다’라는 말 대신 ‘건너다’라는 말을 쓰니, 인생이란 한번 건너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는 뉘앙스가 강해졌다.
꽃은 지더라도 봄이 되면 다시 핀다. 그러나 사람은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아무리 애석해한들 한번 지나면 그뿐이다. 어느 시의 구절과 같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하며 후회한들 소용없다. 그때 공부를 더 열심히 했어야 하는 건데, 그때 더 열심히 준비했어야 하는 건데, 그때 더 열정적으로 살았어야 하는 건데 등등 많은 미련을 이야기하지만 다 부질없다. 인생의 큰 비극은 한번 경험한 삶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선인들은 세월을 아끼라는 권면을 많이 남겼다. 도연명은 <잡시>에서 “젊은 시절 다시 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은 두 번 오지 않는다. 늦기 전에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라.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라고 권면했다. 또한 주자는 <권학문>에서 “젊음은 쉽게 늙고 배움은 이루기 어렵다. 순간의 시간을 가벼이 보내지 말라”라고 당부했다. 당나라의 시인인 임관 역시 <소년행>에서 “밝은 날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라고 하여 앞의 문장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한결같이 젊은 날의 헛된 삶을 충고하고 의미 있게 살아갈 것을 말하고 있다.
수많은 인생의 단면 가운데에서 특히 청춘의 시기를 아쉬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청춘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꿈을 꿀 수 있으며, 무엇이든지 도전할 수 있는 나이이다. 아무런 고민 없이 방탕하게 노닐다가 ‘어?’ 하는 사이 젊음은 순식간에 가버리고 눈가엔 주름이 자글자글해진다. 아름다운 얼굴은 푸석푸석해지고 높았던 꿈은 이미 접어버린 지 오래다. ‘더’ 열심히 살았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영국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였던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떠올려 보라.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새기고 싶은 명문장> (웅진 지식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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