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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태어남의 진정한 의미 (요3:1~15)조회수 : 9261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년 12월 31일 13시 14분 9초
  • 다시 태어남의 진정한 의미 (요3:1~15)
     
    김대용 형제님께서 다음 설교를 녹취하여 이 글을 작성해 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창조하신 여러 창조물 중에서도 인간에게만 부여해 주신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신체의 발화기관(發話器官)을 통해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매우 독특하고 월등한 능력입니다.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견이나 생각이나 사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은 말을 통해 타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도 하고 때로는 영원한 멸망의 길에 갇혀 있게 만드는 등 엄청난 일들을 하게 됩니다.
     
    한국의 기독교인이면 누구에게나 친숙한 개역성경은 문장이 수려하고 간결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더불어 고풍스러운 웅장함은 읽는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의 치명적 약점 중 하나가 성경의 진리를 나타내는 용어를 잘못 선택해서 그 잘못 선정된 말들로 인해 사람을 오히려 타락의 구덩이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 중에 하나가 ‘거듭나다’라는 동사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많이 들어 보았을 ‘거듭나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듭나다. : 지금까지의 방식이나 태도를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다.
     
    이를 우리가 흔히 쓰는 다른 말로 바꾸어 보자면 ‘개혁하다’와 비슷한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다.’의 예문을 들어 보겠습니다.
     
    “검찰총장은 대한민국 검찰을 인류 검찰로 거듭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김 아무개 군은 지금까지의 부랑아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렇다면 ‘거듭’의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거듭 : 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이렇게 어떤 일을 되풀이 하는 것을 표현할 때 ‘거듭’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런 잘못된 말이 개역성경에 기록되다 보니 구원받은 이후에도 교회에 나아와 자꾸 거듭나고 또 거듭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한자어로는 ‘중생’(重生)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른 구원은 단 한 번 다시 태어나는 것이지 여러 번 거듭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이런 모호한 말을 전부 물리치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로 구원의 진리를 확고히 하였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개혁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례로 미국 3대 성인잡지 중 하나의 발행인으로 유명한 래리 플린트(Larry Claxton Flynt)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한때 “저는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태어났습니다.”라고 세상에 공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는 이후에도 변함없이 사악한 음란잡지를 발행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또한, NIV성경의 편집자 중 한 사람인 몰렌코트 박사(Virginia Mollencotte)는 자신이 거듭났다고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 “동성연애는 나의 일부분이 되어 왔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세상에 공개해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절체절명의 모든 것이 걸린 ‘다시 태어남’의 진정한 의미를 예수님보다 더 잘 설명할 이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요한복음 3장에 기록된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시 태어남’의 진정한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대인들의 치리자더라. 바로 그가 밤에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께 이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기적들을 아무도 할 수 없나이다, 하매(요3:1-2)
     
    한낮의 뜨거운 태양과 더위가 물러가고 산들바람이 불 던 중동의 어느 날 밤,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던 바리새파 사람 니고데모는 이제 갓 서른 살의 청년 랍비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홀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많은 사람이 머리를 조아릴만한 권세와 명성을 가지고 있는 그이지만 자신만이 알고 있는 마음속의 의문과 갈증을 풀기 위해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여 조용히 얘기 나눌 수 있는 한밤에 청년 랍비인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함께 당시 유대인의 3대 당파 중 하나였던 바리새파는 그 명칭에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건하고 엄격한 종교인이었으며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현시대의 크리스천들은 흔히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위선자를 연상합니다. 물론 많은 바리새인들이 위선자이고 탐욕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위선자요, 악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중에는 성경에 명시된 율법 외에도 무려 600가지나 되는 전통들을 지키며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니고데모의 마음속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의 한계에 대한 종교적 갈등이 극심했습니다. 더불어 요한복음 3장의 예수님과 대화 속에서 나타난 그의 영적 무지는 자신의 사회적, 종교적 위치와 비교해 너무도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권력가이자 종교적 열심과 지식으로는 최고의 경지에 있다는 바리새파의 핵심인물이었지만 구원에 대한 가장 기초적 지식도 알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께서 행한 놀라운 기적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요2:23) 급기야 자신의 내면에 해결되지 않는 신앙의 갈등과 고민을 들고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겉은 그럴듯하지만, 갈등과 무지함 속에서 방황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분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요3:3).
     
    니고데모의 입장에서는 마치 동문서답과도 같은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회적 명망가였던 그의 고름 가득한 부패한 내면을 가르는 날카로운 수술용 칼과도 같았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람의 출생이라는 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통해서 니고데모에게 구원의 장중한 원리를 명료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첫 출생이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탯줄을 끊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라면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경험하는 둘째 출생 곧 다시 태어남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신비한 영적 출생임을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학자로서 성경과 율법에 정통하다는 니고데모는 계속해서 하늘의 관점이 아닌 육적 관점에서 이해하려 노력하며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게 됩니다.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그가 자기 어머니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 하매(요3:4)
     
    지금 우리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출생, 초자연적인 출생, 하늘로부터 임하는 출생,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신비한 출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소경인 니고데모는 오히려 엉뚱하게도 눈에 보이는 육적 출생만을 이야기하며 예수님의 진리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세계적인 석학으로 존경받는 학자들,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는 정치가, 엄청난 재력을 과시하는 재력가,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인기인, 삶의 다양한 경험을 축적한 노련한 지혜자 등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부와 능력과 지식과 경험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영적으로 무지하다면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니고데모처럼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로 착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수십 년간 신앙생활을 했고 집사요, 장로요, 심지어 목사라고 하며 자신이 몇 대째 믿음의 명문가라고 자랑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또한, 자신은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아끼지 않고 교회의 일이라면 두 팔 걷고 충성을 다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런 사람들 중에는 다시 태어난 현실을 경험하지 못한 명목상의 기독교인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제 이처럼 답답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임하는 신비한 출생 곧, 다시 태어남에 대해 다시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이르기를, 너희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리라, 한 것에 놀라지 말라. (요3:5~7).
     
    여기서 5절 ‘물에서 나고~’는 절대 물 침례나 세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물은 사람이면 누구나 어머니 뱃속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자궁 안에 차 있는 양수(羊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약 침례나 세례를 말하는 것이라면 구약의 성도들은 모두가 물에서 나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또한, 십자가상에서 구원받은 강도도 마찬가지가 되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실현될 수 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첫째 출생 즉 육적 출생을 위해서는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출생 즉 하늘로부터 임하는 거룩한 영적 출생도 이처럼 두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진리로서 선포되면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그 마음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확증해 주십니다. 이렇게 두 부분이 결합하여 한 사람 안에서 작용할 때 비로소 사람이 다시 태어나며 구원받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첫째 출생을 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본성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성격이나 식성, 외모 등이 부모와 저절로 닮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둘째 출생을 현실로 경험하는 사람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성이 그의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하여 구원받은 사람 안에서 옛 본성(옛사람)과 새 본성(새사람)이 공존하게 되는 신비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은 육적인 본성에 의해서 식성(食性)이 달라집니다. 부모가 육식을 좋아하면 자녀도 그렇게 되고 부모가 채식을 많이 하면 자녀도 자연스럽게 채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처럼 둘째 출생 즉 거룩하게 다시 태어남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본성을 입어 그 사람이 추구하는 영적인 식성이 달라집니다. 과거 세상의 유흥과 불경건한 오락을 즐기던 자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것들을 찾고 누리며 즐기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태어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갔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 사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걷고 행하는 모든 것에서 영적 식성의 변화가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새롭게 다시 태어난 신자는 영적으로 성장하며 점진적으로 장성한 분량까지 변화해 가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께서 은혜로우신 것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2~3).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도 첫째 육적 출생처럼 성장의 단계를 거칩니다. 아기가 성장하면서 젖을 먹다가 이유식을 먹고 나중에 밥을 먹게 되듯이 다시 태어난 영적 아기들은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고 찾게 되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영적으로 성장하여 후에는 장성한 사람의 음식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기가 혼자의 힘으로 출생하지 못하고 외부의 힘이 작용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아기인 구원받은 신자도 혼자서는 둘째 출생을 할 수 없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함께 일하심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과거의 기억도 경험도 또한, 그것으로 인한 고민과 걱정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아기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면 과거의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잊히고 아버지께서 기억조차 안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중요한 것은 어떤 특정한 방법이나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특정 훈련 프로그램이나 혹은 특정 목사가 꼭 있어야 다시 태어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출생은 오직 모든 인간들의 조건을 초월해 바른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불매 네가 그것의 소리는 들어도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 하시니라(요3:8).
     
    바람이 불면 사람이 그것을 느끼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해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령님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와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신비(mystery)입니다. 실제 사람의 아기가 태어나는 것도 신비이듯이 주님 안에서 영적 아기로 태어나는 것도 사람이 그 현실을 일일이 규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요한복음 3장의 당시 이스라엘 최고의 지식인 중 한사람인 니고데모의 반응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는 영적 소경이요 어둠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많은 지식과 높은 명성을 소유하였으나 오직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어 다시 태어난다는 영적 원리는 전혀 알지 못했고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3:10)”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땅의 것들로 설명해도 진리의 말씀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니고데모의 모습을 가엽게 여기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해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불 뱀과 놋 뱀 사건’을 통해 다시 태어남과 구원의 진리를 이해시키시려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3:14~15).
     
    니고데모에게 구약의 민수기 21장(4~9절)을 상기시키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 불 뱀에 물렸던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죄라는 뱀에게 물려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불 뱀에게 물려 그 독으로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이들은 동일한 뱀인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는 것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처럼 죄는 죄로 퇴치해야 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롬8: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놋 뱀처럼 땅 위로 솟아오르신 뒤에 “다 이루었다.”고 하실 때에 그분은 스스로 죄가 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바로 예수님께서 죄 많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직접 죄 덩어리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인간의 죄 문제를 깨끗하게 영원히 해결하신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는 모두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3:15).
     
    우리 모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바라보면 바로 그 순간 누구든지 영존하는 생명을 얻는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경험이 반드시 있어야 다시 태어난 사람이 됩니다.
    또한, 구원받은 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타락한 육신을 입고 있기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럴 때에도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우리는 삶 속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즉, 구원받은 사람도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더더욱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기 전의 옛 본성(옛사람)과 구원받은 이후에 생긴 새 본성(새사람) 사이에 계속해서 갈등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죄에 대한 민감함이 점점 늘어나게 되고 이전에 아무렇지 않게 짓던 죄들을 점차로 멀리하고 거룩하고 선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이와 같은 특징이 있는 사람들을 성경은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래의 특징들을 잘 참고하십시오.
     
    구원받은 사람의 본성과 영적 식성(食性)의 변화
     
    1. 두 번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애타게 구한다(벧전2:2-3).
    2. 두 본성으로 인해 심한 갈등이 생긴다.
    3. 두 번 태어난 사람은 죄에 대해 매우 민감해진다(롬6:1-2).
    4. 그래서 구별된 삶을 사랑한다(요일2:15-16; 5:4).
    5. 두 번 태어난 사람은 믿음의 모임에 나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기 원한다(요일3:14).
    6. 두 번 태어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혼을 사랑한다(롬9:1-3; 10:1; 고후5:14).
     
    자! 이제 지금까지 읽은 모든 내용을 생각하며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나는 아직 다시 태어난 경험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요한복음 3장을 통해 알게 된 진리를 통해서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봅니다. 이제 내가 나의 인간적인 행위나 치적이나 공로나 어떤 좋은 장점이나 강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오직 유일한 나의 구원자가 되심을 깨닫고 영접하게 될 때 내가 다시 태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께 나아가기 원하시는 분은 지금 이 시간 마음속으로 “주여, 저를 구원해주소서.”라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하였노라, 하시나니, 보라, 지금이 받아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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