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설교>(Preaching): 도서출판 두란노
목차:
Part 1. 말씀을 섬기는 설교 ─ 설교자는 성경 본문의 진리를 향한 책임이 있다
Chapter 1. ‘성경 말씀’을 설교하라 전체 성경의 맥락 안에서 강해 설교를 하라
Chapter 2. 매번 복음을 설교하라 복음을 설교하는 건,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
Chapter 3.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본문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설교하는 6가지 실천법
Part 2.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설교 ─ 설교자는 청중의 삶을 향한 책임이 있다
Chapter 4. 몸담고 있는 문화를 향해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주위 문화와 공명하면서 저항하라
Chapter 5. 시대정신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후기-현대의 저변을 흐르는 문화 내러티브 검증하기
Chapter 6. 마음에 닿게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설교의 상황화가 이뤄지면 청중이 변한다
Part 3. 성령을 덧입은 설교 ─ 설교자의 삶과 인격에 성령이 오셔야 한다
Chapter 7. 설교가 ‘들리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설교’보다 ‘설교자로서의 삶’을 더욱 힘써 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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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켈러 목사의 책 <설교>의 서문과 같은 글입니다.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고민하는 이들에게>라는 제목과 내용이 매우 좋아 소개합니다.
팀 켈러는 현 시대 뉴욕에서 큰 부흥을 일으키는 목사입니다. 배울 것이 책에 상당히 많습니다. 좋은 설교자가 되기 원하는 분들이 읽으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고민하는 이들에게> 말씀 사역의 세 가지 레벨
호주 신학자 피터 애덤(Peter Adam)은 우리가 “설교”라고 부르는 것 즉 주일날 한자리에 모인 회중을 향한 공식적인 대중 연설이, 성경에서 유일하게 “말씀 사역”(행 6:2, 4 참조)이라는 표현을 쓴 형태라고 논한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현장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그분의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으실 것이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대언]할 것이다’라는 선지자 요엘의 말을 인용했다(행 2:17 참조),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신약 신학사전)에서 게르하르트 프리드리히(Gerhard Friedrich)는 영어 신약성경에 “preaching”(전도, 복음 전파, 설교) 혹은 “proclaiming”(복음 전파, 선포)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가 최소 33가지라고 밝힌다.
애덤이 조사한 바로는, 이 단어들 전부가 대중 연설 행위를 지칭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8장 4절은 사도들 말고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여기저기 다니며 메시아를 선포했다고 기록한다. 이 말은 모든 신자가 청중 앞에 일어서서 설교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집으로 데려와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명해 주었다(행 18:26 참조).
성경에서 우리는 최소한 세 가지 레벨의 ‘말씀 사역’을 구분할 수 있다. 바울은 모든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고, 또한 모든 지혜로 서로 가르치며 권면할 것을 당부한다(골 3:16 참조).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르침’(디다스칼리아, didaskalia; 무언가를 지도하는 활동을 지칭하는 헬라어)과 ‘권면’(누쎄테어, noutheteo;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강한 조언을 일컫는 헬라어)을 통해 성경의 교훈을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주로 일대일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며, 비공식적이지만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말씀 사역의 가장 기초 형태이다. 이 형태를 ‘레벨 1’이라고 부르자.
다양한 말씀 사역을 스펙트럼 모양으로 펼친다면, 보다 형식을 갖춘 공식적인 형태의 끝자락에 ‘설교’가 있다. 말하자면 회중을 항해 선포하는 대중 설교나 성경 강해인데, 이를 ‘레벨 3’이라고 부르겠다. 사도행전에 이런 형태의 설교가 많이 소개되어 있다. 대체로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가 이에 해당하고, 여기에 이스라엘 역사를 요약하는 스데반의 연설 정도가 추가된다. 사도행전이 워낙 많은 대중 연설을 소개하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의 관점에서 초대교회의 발전은 사실상 설교의 발전과 궤를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비공식적인 기독교적 대화’와 ‘공식적인 대중 설교’사이에, 말씀 사역의 ‘레벨 2’가 존재한다.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의 영적 은사에 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4:10-11)
베드로는 영적 은사에 관해 말할 때 두 가지 매우 일반적인 단어를 사용한다. 첫째는 말하기를 가리키는 헬라어 ‘랄레인’(lalein)이다. 신약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단어는 누구나 하는 단순하고도 일상적인 말을 지칭한다(마12:36; 엡4:25; 약1:19 참조). 설교 사역을 경우도 있는데, 예수님(마12:46; 13:10 참조)이나 바울(고후12:19 참조)의 설교를 서술할 때 사용된다. 그렇다면 위 말씀에서 베드로가 의미한 바는 무엇일까?
한편 로마서 12장, 에베소서 4장, 고린도전서 12, 14장에 소개된 바울의 은사 목록을 감안하면서 이 단락을 살펴보면, ‘말씀 사역의 은사’라는 총체적인 범주 안에는, 주일날 회중을 향해 선포하는 대중 설교 방식 외에, 다양하게 기능하는 은사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권면이나 상담, 전도, 개인 혹은 그룹 단위의 교육이 포함된다.
성경학자 피터 데이비즈(Peter Davids)는, 베드로가 ‘말하기’의 영적 은사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리스도인 사이의 일상적인 대화를 말하는 게 아니고 ……[목회자]나 다른 교회 직분자들의 활동만을 일컫고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상담과 지도, 가르침과 복음저도와 같은 여러 “언어적 은사”를 가진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결론짓는다. 이 사역의 범주 안에는 설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과 대화가 포함되고, 토의를 인도하는 것도 포함된다.
베드로는 대중 앞에서 말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여타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그들의 과업을 신중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을 가르칠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 같이”(벧전4:11) 말해야 한다. 데이비즈는 “‘같이’(as)라는 단어가 그들 자신의 말과 하나님 말씀 사이에 미세한 간격을 띄운다”라고 지적한다. 누구도 자신의 가르침을 성경 계시와 동일한 권위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베드로는 한 가지 놀라운 주장을 내놓는다. 성경의 가르침을 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단지 그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서는 안 되며,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 설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진리를 전할 때면 그들이 이해한바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 전해야 한다. 그렇게 성경의 의미를 충실하게 설명한다면, 듣는 이들은 그 강해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듣는 이가 단지 인간적인 재주의 산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만남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을 풀이하고 적용해 줄 수 있을 만큼, 성경의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레벨 1). 멀리 설교(레벨 3)까지는 아니더라도 레벨 2 수준의 말씀 사역을 수행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거기에는 더 심도 있는 준비와 전달 기술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레벨 2에는 글쓰기, 블로그 활동, 성경공부반이나 소그룹 인도, 멘토링, 신앙적 이슈에 관한 공개 토론회 진행 등을 들 수 있다.
이 책의 목표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전달하려는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레벨 2와 레벨 3 수준에서 전하려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이다.
대체할 수 없는 설교만의 사명이 있다.
오직 설교만이 말씀 사역이라는 비성경적인 믿음에 사로잡히는 것은 위험하다. 피터 애덤이 말하듯,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짐, 즉 성경이 다른 모든 형태의 말씀 사역에 기대하는 과업을 오로지 설교에 부담 지우는”격이 될 것이다. 어떤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모든 삶의 변혁(요 17:17; 골 3:16-17; 엡 5:18-20 참조)이 오직 설교를 통해서만 나온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최고의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아 갈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우리 곁에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딤후 2:15) 우리를 격려하고, 지도하고, 위로해 줄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다. 또 글로 우리 신앙의 성숙을 도와줄 기독교 작가들의 책도 있어야 한다. 교회 바깥에 복음이 필요한 자들에게 다가갈 방도가 오직 설교라고 기대하는 것도 옳지 않다. 내가 신앙을 갖게 된 것도 누군가의 설교나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책을 통해서였다. (혹 이 말에 놀란 사람이 있는가?) 우리는 교회 말씀 사역의 모든 짐을 주일 설교가 홀로 감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교회 사역에 있어 설교에 너무 과도한 짐을 지우고 있다는 애덤의 지적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그런데 어쩌면 오늘날 교회가 당면한 가장 큰 위험은 이게 아닌지도 모른다. 우리는 권위에 대해 극도로 저항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공적 선포에 드리운 자그마한 권위의 향취에도 많은 이가 저항감을 드러낸다.
‘진리’라는 말 자체에 과민 반응을 보이기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선 상당한 전달 기술이 요구된다. 혹여 이런 현실 자체가 복음 사역을 위해 교회가 굳게 지켜내야 할 설교의 중대한 본질을 이미 놓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은지 심히 우려스럽다.
에드먼드 클라우니(Ednund Clowney)는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 대해 쓴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정인이 아니라-옮긴이 주)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말씀에 대해 경의를 품고 분별하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며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하나님의 말씀을 …… 설교하기 위해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는 이들이 있다. ……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고 먹이는 특별한 직무를 위해서 말이다(벧전 5:2 참조). 교권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자칫 교회가 양무리의 부목자(under-shepherds)로 부름 받은 이들이 담당하는 말씀 사역의 중요성을 망각할 위험이 있다.
여기서 크라우니는 회중을 향해 말씀을 선포하는 것과, 단지 소그룹 성경 공부를 인도하는 것 사이의 ‘아무런’ 질적인 차이를 보지 못하는 처사를 경고한다. 이 둘의 차이는 단지 형식이나 절차상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참석한 사람의 숫자나 모임 장소의 규모, 혹은 연사의 발성이나 말의 빠르기가 차이 나는 게 아니다.
청중을 향해 설교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설교와 성경공부, 나아가 설교와 강의 사이에는 무언가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감지한다. 사도행전에 소개된 베드로와 스데반, 바울의 연설을 살펴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 같이”(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옮긴이 주) 메시지를 선포했을 때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나타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공식적인 예배 모임에 부여하신 고유한 권위를 통해 나타나는 능력이다.
다양한 형태의 말씀 사역이 늘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라는 특별한 공식적 사역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피터 애덤은 교회의 복음 사역은 “강대상 중심이되, 강대상에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정리하며 절묘하게 균형을 맞춘다.
이렇듯 말씀 사역에는 세 종류의 레벨이 있다. 셋 모두 중요하고 서로를 지지한다.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그리스도를 공식적으로 설교하는 것(레벨 3)은, 하나님이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백성을 세우시는 고유한 방식으로서 레벨 1과 레벨 2에서 더욱더 유기적인 말씀 사역이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마련한다. 마찬가지로, 레벨 1과 레벨 2에서의 충실하고 숙련된 소통은 주님의 백성이 설교를 보다 더 잘 받아들이게 준비시킨다.
이 책은 갈수록 회의적인 시대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에게 삶을 변화시키는 성경의 진리를 전할 방도를 고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이다. 특히 현장 설교자들과 교사들을 위한 개론과 입문서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