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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세기 신롤라드들의 출현을 기대한다-뮤지컬 ‘더 북’ 관람 후기-조회수 : 7036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7년 8월 3일 9시 12분 21초
  • 안녕하세요?
     
    2017년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해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뮤지컬 더북이 1년 내내 공연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교회 밖의 한 자매님께서 뮤지컬을 보시고 후기를 보내 주셔서 소개합니다.
     
    휴가 시즌에 가족끼리 혹은 성도들끼리 같이 관람하면 좋을 것 같아 소개합니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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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신롤라드들의 출현을 기대한다
    -뮤지컬 ‘더 북’ 관람 후기- 전O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공연인 뮤지컬 ‘더 북(The Book)’은 롤라드들과 가톨릭교회와의 진리 전쟁을 그리고 있다. ‘롤라드’(Lollard, ‘중얼거리며 암송하는 자’, ‘독버섯’이라는 뜻)는 종교기득권자들이 경멸의 의미로 부른 명칭이다. 롤라드들은 교회의 교리나 관행보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을 사랑하여 목숨 걸고 진리를 전파했으며, 가톨릭교회는 성경보다 종교적 관습과 전통을 더 중시하며 그들을 이단자로 낙인찍고 박멸하려 하였다. 종신선교사로 헌신한 배우들이 열연한 ‘더 북’은 롤라드의 이야기를 통해 평신도들이 진리를 분별할 필요성과 아울러 진리를 위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시사한다.
     
    기독교는 “한 권의 책(The Book)의 종교”로 일컬어진다. 롤라드 운동이나 종교개혁의 중심에는 ‘그 책(The Book)’이 있다. ‘그 책’을 특권층의 전유물로 삼았던 종교기득권자들에 대항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만민에게 펼쳐 놓은 사건이 종교개혁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성경을 성직자들만 읽으라고 주셨겠는가.
     
    1517년에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은 웬만한 사람은 알 만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 종교개혁 100년 전부터 이미 가톨릭교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오직 성경’을 외치며 종교개혁의 마중물 역할을 한 롤라드 운동은 그만큼 알려져 있지 않다. 
     
    중세암흑기로 불리던 당시에는 성경이 귀족과 식자층만 알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평민들은 성경에 접근할 수 없었는데 이는 교회의 권위를 교황에게만 두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가톨릭사제들은 교회의 제도와 교리와 관행을 따라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고, 교황은 십자군 원정비용과 베드로 성당의 건축기금을 충당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해 구원을 돈으로 사게 만들었다. 또 고해성사로 사제에게 사죄나 처분권을 주어 사람이 예수님을 대신하게 만들고, 회개를 위선적이고 피상적으로 만들어 죄사함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성경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길과 예수의 피로 말미암는 죄사함의 길을 분명하게 제시하지만 사람들이 성경에 무지했기에 교회의 제도와 관행을 따르는 것이 구원의 길인 줄로만 알았다. 그 외에도 중세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타락한 종교지도자들 아래서 평신도들도 영적으로 타락해갈 때,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에 저항하는 평신도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의 제자들에 의해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접하고 진리에 눈을 뜬 자들이었다. 천 년의 전통을 깨고 영어로 성경이 완역되어 읽히면서 사람들은 변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영어로 번역된 성경의 확산을 막기 위해 번역 성경을 지닌 자들과 전하는 자들을 무참히 고문하거나 화형에 처했다. 번역 성경을 지니기만 해도 목숨을 위협받던 롤라드들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성경 66권의 이름을 취한 후 한 권씩 외우기 시작했다. 그들이 감찰사제의 눈을 피해 특정한 비밀 장소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한 권씩 암송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 적어 퍼뜨렸다. 성경을 지키고 전하기 위해 저마다 스스로 워킹바이블이 된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쉽게 성경을 다운받아 볼 수 있고, 가족의 전화번호조차 못 외우는 디지털 치매 환자들인 현대인들에게는 성경 한 권은커녕 한 장도 제대로 암기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롤라드들이 성경을 암송한 것은 들켜서 죽을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 성경을 전해야 했던 절박함 때문이었다. 대체 그 말씀을 전파하려는 열망이 얼마나 컸으면 한 사람이 성경 한 권을 통째로 다 외운단 말인가.
     
    게다가 그들은 아는 것, 외운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목숨 걸고 전파하며 그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썼다. 롤라드들의 말씀 사랑의 정신과 삶의 태도는 신앙에서조차 쉽고 편함을 숭배하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경외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어떤 것의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보기 쉽다. 밥 한 그릇 안에도 그게 식탁에 밥이 되어 오르기까지는 우리를 먹이시기 위해 햇빛과 비를 주시고 곡물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씨 뿌려 가꾸고 수확하는 농부의 노고, 도정과 판매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고를 거쳐, 가족을 부양하려는 가장의 수고와 정성껏 밥을 짓는 주부의 수고가 들어갔다는 사실은 잘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이 성경이 이렇게 우리말로 번역되어 우리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은 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성경책을 아무런 방해나 박해 없이 자유롭게 마음 편히 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생명 걸고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도록 번역한 사람들과 생명 걸고 그 번역된 성경을 전파한 롤라드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 선배들이 물려준 최고의 유산은 번역된 성경이다. 지금은 휴대가 가능한 크기로 얇고 예쁘게 제본되고 인쇄되어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지만 불과 500년 전만 해도 성경을 사려면 1억 가까운 돈을 줘야 하고, 말 두 대가 이끄는 수레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성경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세기 성도가 아닌 것을 감사한다. 
     
    게다가 누구나 하나님을 자기 나라의 말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성서가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으며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는 한, 성서는 성직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 나라의 언어로 존재해야 한다.”라는 모토 아래 진행된 성경번역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구적이고 혁명적이었다.
     
    종교개혁 역시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미 그 이전부터 불씨들이 있어왔고, 루터는 그 도화선이 되었을 뿐이다. 종교개혁은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닌, 평범하지만 결코 진리와 믿음에 타협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바로잡으시기 위해서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마르틴 루터 등의 사제나 신학자들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구두수선공, 타일제조공, 푸줏간 주인, 가정주부 등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사용하셨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는 목숨 걸고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 번역된 성경을 전하기 위해 애썼던 무수한 롤라드들의 물밑작업이 있었던 것이다. 
     
    극심한 카톨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롤라드는 학교를 세워 롤라드를 양성해 영국 전역에 보냈다. 그들은 개인 성경공부를 장려하고, 성령의 인도에 의지하며, 제도권이 내세우는 신조가 아닌 독자적인 믿음을 갖도록 격려했다. 또 모든 신자는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의 개념을 확고히 하고, 교황과 추기경들이 교회를 이룬다는 가톨릭의 정통 교리를 거부하고 본질적인 교회는 신자의 집합체라고 보았고, 설교와 성례 등을 공동으로 진행하였다. 회개와 제자도, 단순한 삶을 강조하고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며, 개인의 갱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재정립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롤라드의 지도자들은 이동하며 지속적으로 새로운 그룹을 만들고, 구성원들은 가정방문, 술집 전도, 시장 등 공공장소에서의 설교, 식탁대화, 성경방 초대 등을 시도하였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창안으로 롤라드의 성경보급운동은 더욱 확산된다. 이러한 롤라드들의 활동은 많은 평신도들에게 기독교 본질에 관해 눈을 열어주었으며 훗날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존 위클리프가 비판한 대로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이며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다. 예수님께서도 “기록되었으되...”, “성경이 뭐라고 말하느냐?”라고 하시면서 성경을 기준으로 가르치셨다. 누구든지 그 무엇이든지 말씀보다 더 우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가 교황이라도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말을 할 때는 믿어선 안 된다. 사실 예수님은 교황도 세우지 않았고, 종교제도도 만들지 않으셨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따를 대상은 교황도 교회도 총회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뿐이고 성경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교회에 다니면 구원 받는 줄로 안다. 봉사를 좀 하거나 교회의 제도나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 확신이 더하다. 그러나 성경을 펼쳐 읽지 않으면 그는 영적 소경이다. 뮤지컬 ‘더 북’에서도 롤라드의 수장 윌리엄의 가르침으로 성경의 진리에 눈을 뜬 아이린이 제화공인 아버지 토마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려고 애를 쓰지만 가톨릭 교리에 세뇌되어 온 아버지는 완강하게 거부하고, 아이린은 이단 감찰사제 베르나르에게 쫓기다가 끝내 붙잡혀 죽는다. 가톨릭교회의 제도에 순응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으면서 롤라드를 이단시하던 토마스는 딸을 잃고 나서야 딸의 유품인 번역성경을 읽으며 비로소 진리에 눈을 뜨게 된다.
     
    또 다른 가톨릭 이단감찰 사제인 로버트는 롤라드들에게 자신과 다른 신앙의 생명력이 있음을 느끼고 주교의 명령을 거부하고 롤라드들을 변호한다. 그는 롤라드의 지도자인 윌리엄 사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중심에 성경이 있음을 알게 되고, 진정한 진리를 갈망하게 된다.
     
    그런데 로마가톨릭 산하의 교회는 롤라드들이 전하고자 한 것이 진리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기득권이 더 중요했기에 그들을 기만하고 이단시하고 탄압한 것일까? 진리를 몰라서 탄압한 것일까? 주님은 진리의 말씀이 온 땅에 전파되기를 원하시는데 누구보다도 그 일에 힘써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진리를 전파하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화형에 처했다면 그것은 주님이 아닌 자신을 섬긴 것이다. 로마와 결탁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죽인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믿음의 선진들이 죽음을 불사하며 성경을 번역해 전해주었고 그 안에 모든 좋은 약속이 다 들어있는데도 우리는 성경을 읽지 않아 중세시대 성도들처럼 무지하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국 자기를 섬기는 것이다.
     
    이렇게 어렵게 전해진 성경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고 읽고 전하는 일을 해야 한다. 말씀은 2000년이 넘는 역사 가운데 거듭 검증되면서 오늘날까지 왔다. 150년 전에 유럽 교회가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부인하자 그 산산이 찢어진 말씀과 함께 교회가 다 망하고 말았다.
     
    이 시대의 종교개혁은 누구를 대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가? 교회는 물론 개개인의 심령에도 부단히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종교개혁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항상 현재진행형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 세속화와 무신론화, 다원주의, 자유주의 신학 등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는 이 시대에 워킹 템플, 워킹 바이블이 되어 말씀을 살아내고 복음을 바르게 전해 줄 21세기의 신롤라드들을 주님은 애타게 찾고 계실 것이다. 이 종말의 때에 머지않아 우리가 성경을 갖고도 펴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성경을 펴서 읽을 수 있을 때 펼쳐 읽고 펼쳐 가르치고 전해야 한다. 
     
    성경은 만인의 것이며, 지금은 만인제사장의 시대다. 신학을 하지 않은 평신도에게도 주님은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고 그 깨달은바 말씀을 맡은 종이 되도록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신다. 그들이 바로 이 시대의 롤라드들이다. 600년 전 롤라드들이 100년 후의 종교개혁을 촉진했다면 21세기 신롤라드들은 마치 담쟁이덩굴처럼 이 땅을 복음으로 덮어 예수님의 재림을 촉진시킬 것이다. 
     
    뮤지컬 ‘더 북’을 보고 나오면서 나는 경외감과 두려움 속에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오늘날의 교회는 개혁이 필요하지 않은가,
    당시의 타락한 가톨릭교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진리를 분별하는 힘이 있는가,
    나는 얼마나 진리의 말씀에 눈 떴나,
    나는 성경의 가치를 얼마나 아나,
    나는 그 말씀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나,
    나는 얼마나 말씀을 알고 얼마나 외우며 얼마나 전하고 싶어 하나,
    나는 말씀을 온 몸으로 살아내는 21세기의 신롤라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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