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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부입니까-뮤지컬 <요한계시록1> 관람 후기-조회수 : 6409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7년 8월 10일 15시 44분 43초
  • 안녕하세요?
     
    교회 밖의 한 분이 뮤지컬 <요한계시록1> 관람 후기를 보내 주셔서 소개합니다.
     
    좋은 내용의 뮤지컬 같아 소개합니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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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부입니까-뮤지컬 <요한계시록1> 관람 후기- 전O지
     
    1.
    복잡한 서울을 떠나 경기도 읍 단위 시골로 이사 온 지 한 달이 되었다. 그동안 도시의 콘크리트 벽에 갇힌 채 일에 바빠 자연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온 나에게 집 주변의 푸른 숲, 그 사이를 재잘거리며 날아다니는 새들의 우아한 날갯짓은 큰 기쁨을 선사했다. 그게 너무 좋아서 일하다 말고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곤 했었는데 이 꿈결 같던 자연과의 밀월이 불과 한 달 만에 깨졌다.
     
    다른 식물에 기어 올라타 군림하는 조폭 같은 덩굴류들(환삼덩굴, 칡덩굴, 가시박 등) 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푸른 것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었다. 인정사정없이 휘감고 올라가 세력을 형성한 덩굴에 파묻히면 원래 무슨 나무였는지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큰 나무들이야 어떻게든 버텨낸다고 하지만 작은 식물들은 자기를 뒤덮은 무거운 덩굴들을 견디면서 살아가기가 무척 힘겨울 것 같아 안쓰러웠다. 작은 나무들의 숨가빠하는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식물계에도 경쟁이 있어 힘 센 녀석들은 약한 것들을 꼼짝 못하게 덮어버리는데 덩굴손에 한번 걸렸다 하면 생존 자체가 어려워진다.
     
    특히 가시박 같은 외래종 덩굴류는 생존력과 번식력이 왕성해 무차별적으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는데 천적도 없고 땅 속에 종자은행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무슨 수로도 제거하기가 어렵다. 오죽하면 ‘식물 생태계의 저승사자’라고 불리며, 생태교란식물로 지정되었을까.
     
    모든 존재는 각기 제 나름의 목적과 이유가 있지만 나는 상생의 수준을 넘어서는 이것들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일단 이것들에게 뒤덮이면 식물의 자기 정체성이 흐려져 무슨 식물인지 식별이 어렵고, 자기 고유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영양분을 빼앗기고 햇빛도 차단돼 광합성이 어려워 꽃도 못 피우고 열매도 못 맺는다. 그러면 그 잎과 열매를 먹고 살던 곤충도 떠나고, 그 곤충을 먹고살던 새들도 떠난다. 자생식물들이 경쟁에서 우월한 가시덩굴에 점령당해 하얗게 병들고 잘 자라지 못하고 끝내 말라 죽으면 생물 다양성이 훼손된다. 그러면 생태계가 파괴된다.
     
    물론 가시덩굴들에 저항하다 보면 뿌리를 더 깊이 내리고 자생력이 길러질 수도 있겠고, 성분의 효능이라든지 내가 알지 못하는 유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약한 다른 식물들에게 해는 끼치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에 덩굴식물들이 미워진 것이다. 게다가 식물들도 병을 앓고, 해충들에게 시달리며, 인간문명이 주는 공해로 인해 몸살을 앓는다. 이렇게 식물계도 나름의 애환들이 있어 마치 인간의 삶의 단면을 보는 것만 같고, 로마서에서 언급한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이 느껴져 자연을 대하는 내 마음이 그저 편치만은 않았던 것이다.
     
    평화롭던 에덴에 사탄이 틈타 죄가 들어온 이후에 인간과 함께 땅도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났고, 그런 것이 나도록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이 땅을 뒤덮고 점점 자기 왕국의 세력을 확장시켜나가는 것을 보면서 다음세대의 영혼을 장악해가고 있는 세상의 악한 문화들이 오버랩되어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꼈다.
     
    특별히 이 시대 청소년들의 영혼을 잠식하는 것은 미디어다. 미디어의 배후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영들이 있다. 하나님의 성령은 미디어를 통해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가까이하게 만들지만 이 시대에 바벨론(세상) 문화를 리드하는 악한 영은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이 시대의 사탄은 고난과 핍박이라는 무기보다 문화라는 도구를 더 많이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린다. 그래서 그 전략의 하나로 미디어를 사용해 온전히 하나님께 초점 맞추고 마음중심을 드려야 할 우리의 마음과 시간을 빼앗아가고 정신을 산만하게 만든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 다른 것 다 못해도 오직 신랑을 향한 사랑만 있으면 1등 신부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마땅히 있어야 할 마음의 자리에 세상의 정신이 밀고 들어오면 그 신부는 신부로서의 가장 고결한 가치인 순결함을 잃은 것이다. 이런 세상의 바벨론 문화에 대한 대안은 건전한 기독교 문화를 일으키는 일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 전용극장 ‘광야(光野)’는 사탄의 악한 문화적 공격에 대한 대항마의 하나다.
     
    2.
    뮤지컬 <요한계시록1>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6장의 7대 재앙, 그리고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의 사랑이야기를 연결하여 다루며 바벨론(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왕국)의 영향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교회)가 종말의 시대에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고난과 유혹들과 함께 어떻게 그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지를 시사한다. 재미도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우며, 종말을 사는 성도의 자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신앙을 정비할 수 있는 좋은 뮤지컬이다.
     
    위대한 왕 샤다이(전능자)가 말 쿠트 샤마임 왕국(하나님나라)을 세운다. 평화롭던 왕국에 벨리앙(사탄 벨리알)의 반란이 일어나 백성들은 눈이 멀어 더 이상 왕과 왕국의 찬란함을 볼 수 없게 된다. 사랑의 왕 샤다이는 그들을 비참에서 건지고자 하나뿐인 아들 아도나이 왕자를 그들에게 보냈지만 백성들은 그를 몰라보고 오직 한 여인 ‘에클레시아(교회, 성도)’만이 그를 사랑하게 된다. 아도나이 왕자는 죄악과 탐욕에 눈 먼 백성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지만 죽음을 이기고 다시 에클레시아의 앞에 나타났다가,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샤다이 왕의 곁으로 돌아간다.
     
    홀로 남게 된 에클레시아는 아도나이가 보낸 심부름꾼 파라클레이토스(성령님)와 함께 과일 장사를 하며, 아도나이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바벨론(사단이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세상나라)의 일곱 도시(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순회하며 좋은 소식을 전한다.
     
    그들이 처음 간 곳은 에베소였다. 진리를 사수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첫사랑을 잃어버린 곳이다. 그들은 스스로 아도나이가 전한 진리를 철저히 지켜내고 있다고 자부하며 “We are solid!”를 외치지만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정죄하다보니 사랑을 잃었다.
     
    이 시대 교회는 많은 일을 하지만 사랑하지 못한다. 파라는 그들에게 “사랑하나요? 정말 사랑하나요?”라고 묻는다. 공의와 사랑은 균형 있게 가야 하며,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요구하시는 것이 일이 아닌 사랑임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두아디라에 갔을 때 에클레시아는 벨리앙의 유혹을 받아 세상의 문화에 물들어 아도나이의 신부로서의 정체성을 잃는다.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꾸미는 것을 기뻐하는 우상숭배자들이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쾌락과 향락을 누리며 믿는 이세벨의 가르침을 관용과 사랑의 미음으로 용납하였다. 벨리앙에게 미혹되어 순결을 흐린 에클레시아는 두아디라 출신으로 빌립보 교회의 창립멤버가 된 루디아를 통해 다시 돌이킨다. 믿음의 선배와 또래가 신앙의 지지대 역할을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하나님께서 내 주변에 붙여주신 귀한 지체들이 고마워졌다.
     
    버가모에 가 보니 안디바라는 충성된 증인이 심문을 받고 있다. 디도라바는 안디바와 같이 갇혔었으나 벨리알의 회유에 넘어가 세상 욕망에 넘어간 발람처럼 말씀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세상을 즐기며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 이미 구원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 모든 말씀이 비유로 되어 있다, 어머니 하나님이 있다, 예수님과 세상을 겸하여 숭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단의 교주들이 등장해 성도를 미혹한다. 종말의 때에 이단과 거짓교훈에 속을 위험을 시사한다.  
     
    에클레시아와 파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하리오스(‘순결’이라는 뜻)가 나타나 사데로 이들을 이끈다. 그러나 사데는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과 같은 교회다. 사데교회처럼 한국교회도 명성에 비해 내용이 없다. 나 자신도 남이 아는 나와 내 실상의 갭이 엄청날 거라고 생각한다. 주님의 책망을 받지 않을까 두렵다. 뮤지컬 요한계시록에서 그린 사데교회 교인들은 평안과 안전한 신앙생활을 추구한다. 요즘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안전과 평안을 추구하며 교회 안에서 자기들만의 리그에 갇혀 있다고 비판받는데 교회에 다니면서도 아는 사람들과만 교제하는 나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빌라델비아에서는 시사적인 이슈를 다룬다. 동성애부부의 웨딩케이크 제작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거액의 벌금형을 받고 동성애자들에게 공격받는 빵집 주인 부부가 등장해 정말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나?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오히려 성도가 소수가 되어 역차별을 당하는 이 종말의 시대에 성도가 말씀을 지키기 위해 겪게 될 고난들을 시사한다. 주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다. 죄가 인권으로 둔갑한 이 시대에 동성결혼과 동성애 합법화를 비롯한 포괄적 차별금지법 등 하나님의 진리를 훼손하는 것들이 법제화될 것 같은 기세다. 아마도 종말의 때에 고난이 닥치면 신사참배처럼 국법이라고 정당화하며 혼합주의화되어 고난을 피해갈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도 고난의 때에 불이익을 감수하며 고난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잘 지킬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부요한 자라 좋은 옷을 입고 풍족한 중에 “No problem!”을 외치지만 실상은 눈멀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영혼들이다. 하나님이 주신 부요로 인해 교만해지고 안 믿는 것과 방불한 교양 수준의 미지근한 믿음을 주님이 책망하신다. 부요한 이 시대에 하나님나라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없이 적당히 안락한 삶을 즐기며 스스로 만족해 신앙생활에 아무 문제를 안 느끼며 살아가는 이 시대 성도들을 비판한다.      
     
    서머나에서는 서머나 교회를 핍박하던 세상의 권력을 군대로 상징하여 나타냈다. Pax Babylon은 세상나라 바벨론의 거짓평화를 말한다. 바벨론은 국가의 법 등으로 성도를 위협할 수 있다. 바벨론의 무기와 미끼는 돈, 권력, 지위, 성(性), 지식 등이다.
     
    여기서 바벨론 문화에 굴복하지 않은 폴리캅 주교가 화형을 당한다. 사랑은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죽음처럼 강하다. 참으로 이 시대의 문화는 때로는 군대의 강력한 명령의 형태로, 때로는 온갖 좋고 아름다운 것들로 동화되기를 요구한다. 바벨론의 정신과 세상의 악한 문화들에 저항하며 사는 길은 순교자의 길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교회와 성도를 상징하는 에클레시아는 일곱 교회의 순례를 마친다. 그녀는 오랜 기다림에 지쳐 잠이 들기도 하고, 아도나이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소망이 흔들릴 때는 그의 사랑을 의심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하고, 세상의 유혹에 빠져 세속화되기도 하고, 자기를 찾아온 아도나이를 몰라보고 떠나보내기도 한다. 그때마다 파라는 그런 에클레시아에게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아도나이의 편지(성경)를 가지고 읽어주며 그의 변함없고 신실한 사랑을 일깨워준다. 때로는 요한계시록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잘 풀어서 가르쳐주기도 하며, 책망도 하고 때로는 위로하고 격려하고 권면도 하면서 에클레시아가 아도나이를 기다리며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돕는다.
     
    3.
    요한계시록은 먼 미래의 일만이 아니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도 기록하고 있다. 종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시작되었다. 일곱 교회는 이 시대의 교회이며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일곱 도시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이며, 일곱 도시에서 직면하는 삶과 믿음의 문제들은 곧 우리의 문제다. 주님이 일곱 교회에 하신 말씀은 이 시대에 우리 자신들과 교회를 향해 주신 말씀이다. 주님이 일곱 교회에 하신 공통적인 말씀은 잘 이기라는 것이다. 이기면 상급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 종말의 때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신부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첫째, 깨어있음이다. 주님은 기름을 준비하라고 하시지 않고 깨어있으라고 하셨다. 깨어있는 신부란 자신이 할 일이 언제 올지 모르는 그 신랑을 기다리는 일이며, 오셨을 때 혼인잔치를 밝혀야 하는 일임을 늘 상기하는 자이다. 그런데 교회에 잘 다니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신랑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교회에 잘 다니는 것이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스스로는 준비를 잘 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그날에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드러난 미련한 다섯 처녀에 속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운 마음으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둘째, 분별력을 통한 순결함이다. 사단은 교활한 속임수의 귀재다. 오늘날 세상의 문화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팍스바벨론의 형태로 우리에게 세속화를 요구하기도 하고, 강력한 매력을 지닌 모습으로 온갖 미끼를 던지며 달콤하게 미혹하기도 한다.
     
    세상을 점령한 이 바벨론 정신은 이미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있어 우리가 겸하여 섬길 때가 많다. 신부는 이것이 결국 장차 망할 바벨론으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하며 세상의 스피릿에 물들지 않는 순결함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세속으로부터 자기를 지켜 정결하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사모하며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쓰며,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분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받게 되는 고난을 성령으로 이기며 살아가는 것이 종말을 사는 성도의 바른 자세이다. 그런 성도가 주님 보시기에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신부일 것이다. 그 신부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서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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