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금부터 9년 전에 교회를 시작하면서 저는 낸시 피어시의 완전한 진리라는 책을 소개받았고 교회에 소개도 하였으며 홍승대 형제님을 비롯한 몇 분이 완독하고 아주 좋다고 하였습니다.
낸시 피어시의 완전한 진리(복 있는 사람, 총 936쪽)
http://lifebook.co.kr/final/bookjumun.asp?gs_product=aa01070058802 책 표지 날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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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나서 그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책임을 인간에게 맡기셨다. 인간은 이 땅을 경작하고 만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은 창조의 동역자로 소명을 받았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창조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태초에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는 열심을 내지만, 교회 밖 문제에 대해서는 발언권이 없다.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에 대해 교회는 대체로 침묵하는 편을 택하고, 세상도 교회가 간섭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세상을 돌보고 다스릴 책임을 맡은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종교의 영역에 제한해서 이해하는 이원론에서 출발한다. 자연주의(natualism), 반실재론(anti-realism), 인간주의(humanism)로 대표되는 세속적 세계관은, 기독교는 종교의 영역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종교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사적인 선호의 문제라는 관점을 널리 유포시켰다.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러한 시각을 받아들인 결과, 기독교의 진리는 교회 안에서만 타당한 종교적 진리로 추락했고, 창조 세계 전체를 구속하라는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리게 되었다. 거룩한 영역과 속된 영역을 구분하고 공과 사를 나누어 세계를 보는 불완전한 세계관으로는,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이며 그것을 돌볼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낸시 피어시는 「완전한 진리」에서, 성경의 진리는 종교의 영역뿐 아니라 인생과 우주에 관한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 답하고 설명해 주는 가장 적실하고 유일한 진리임을 논증한다. 그 바탕 위에서 현대문화와 학문 세계와 세속의 모든 가치 가운데 견고하게 자리한 진리의 분열 현상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그 뿌리와 과정을 샅샅이 살핀다.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가 세속의 흐름을 받아들여 지성을 포기하고 가슴의 종교로 전락하게 된 경위를 정밀하게 드러내 보여 준다.
결국 믿음과 삶의 분열을 낳는 이층적 진리관을 통합하고 온전한 관점을 회복할 때 오늘날 기독교가 처한 진퇴양난의 미궁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성경이 제시하는 완전한 진리를 수용하고 거기에 삶을 던져 살아갈 때에야 비로소 복음이 문화 전체를 변화시키고 타락한 창조 세계를 다시 구속하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음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요즘 종교 개혁 이야기를 하다가 지난주에 저는 하나님의 진리는 Total truth라고 말하였고 우리는 Total truth를 전하고 행하는 Total church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낸시 피어시의 책 완전한 진리의 영어 제목은 Total truth입니다. 이것은 원래 총체적 진리로 번역함이 맞습니다.
피어시의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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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일련의 복수 형태의 진리들(truths)이 아니라 대문자 “T”로 시작하는 진리(Truth)이다. 즉 이것은 종교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 총체적 실재(total reality)에 관한 진리다. 성경적 기독교는 총체적 실재와 관련된 진리이며, 그 총체적 진리를 지적으로 붙들고 그 진리의 빛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 1981년 4월 노트르담 대학교 강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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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성도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나누며 기독교를 거룩한 것 안에만 가두어 놓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성도들은 늘 영혼 구원만 이야기하고 교회 안에서만 소금과 빛이 되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의 말은 “교회는 복음만 전하면 된다!”입니다. 그러나 피어시의 책에 있듯이 하나님에게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분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리는 만유에 적용되는 총제적인 진리입니다.
“만일 성경의 가르침이 참이라면 그것은 단지 영혼 구원과 우리의 내면생활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의 진리는 어떤 일에나 무슨 일에나, 신약 성경의 표현대로, ‘만유’에 적용될 것이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만유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일이다. 교회는 만유를 화해시키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함께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자신의 삶과 자신이 처한 삶의 각 영역에서 회복의 사역을 맡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이 우주적 계획을 수용한다면 기독교 신앙과 복음,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은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을뿐더러 이른바 ‘영적인 것’, ‘하늘에 있는 것’에도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은 개인적인 것을 넘어 이 세상 모든 것으로 확장된다. 이 세상 어느 것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이 죄 짓는 일이 아니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에 따라 마치 ‘주께 하듯’ 한다면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이 없다. 아이를 키우는 일을 하든지, 공무원 생활을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하든지, 이 일은 모두 하나님의 일이다.”(19-20쪽)
다음은 현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이중성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 하나의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그 세계관은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할 때라도 - 아니 특히 그러할 때- 우리 생각을 지배한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의도를 품은 악인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이를테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확신하고 교회에 충실히 출석하며 심지어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별도의 세계관에 젖은 나머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문제를 해결할 때는 기독교적 원칙을 쉽게 무시해 버리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의 경우, 기독교적 원칙을 자신의 내면 어느 한구석에 나름대로 성실히 간직하고는 있지만 실제적인 결정은 그 내면과 다른 방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고 믿으면서도 세상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느라 여념이 없다.”(25쪽)
이런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살기에 교회 다니는 청소년들이 대학에 진학하면 세상과 동회되고 나중에는 타락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육이라는 것도 우리 청소년들이 안전한 기독교 가정을 떠나자마자 반드시 직면하게 될 세계관적 도전에 대처하고 그것을 극복하도록 준비시켜 주지 못한다면 소득 없는 노력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아니 그런 도전은 믿는 가정에서 생활하는 중에도 기독교적 환경에서 교육을 받는 중에도 올 수 있는데, 미디어와 인터넷의 영향이 일상에 너무나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청소년이 아주 훌륭한 기독교적 원칙들을 배우며 자랐더라도 그런 원칙은 소위 ‘종교적 신념’이라는 특정한 범주에만 들어맞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조만간에 대학에 들어간 그 청소년은 불신자 교수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 교수들조차 은연중에 세상이 이렇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배울 때는 종교적 신념을 잠시 옆으로 제쳐 놓아야 한다고 가르칠 때, 서서히 그런 신념에서 멀어지는 것을 정상적인 성숙의 과정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세계관 분석에 대한 올바른 교육은 현대 그리스도인의 방어 체계의 기본요소다. 이는 과거에 신중한 여행객이 칼을 가진 강도의 습격을 막기 위해 몸에 지니고 다녀야 했던 방패와 비슷하다. 오늘날 지적인 약탈자들은 ‘만인이 알고 있는 것’ 혹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같은, 바람 따라 모양이 바뀌는 모래 위에 쌓은 논리를 앞세우면서 방심한 청소년들로부터 믿음을 빼앗아 간다. 따라서 청소년들은 든든한 반석을 찾아야 할 뿐 아니라 그 반석이 왜 든든한지, 그리고 세상은 왜 변화무쌍한 모래를 선호하는지 모두 알아야 한다.” (25-26쪽)
그래서 피어시는 신앙과 삶이 따로 놀아서는 안 됨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가 교회뿐만 아니라 음악, 예술, 과학, 시민 정부 등에 총체적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목표는 진리를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각 영역에서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을 우리의 행위로 구현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우리 마음의 중심을 주님께 드림으로써 그분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사 그분의 진리를 더욱 한결같이 구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자. 결국에는 거룩하고 사랑이 충만한 성품이야말로 초월적 진리의 실재를 가리키는 가장 설득력 있는 논증임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33쪽)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좌경화된 것들은 100% 버리겠다고 작심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학연, 지연, 혈연, 이념과 사상도 포함됩니다. 단순히 동성애와 진화론만 반대하면 안 됩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상 복지, 무상 의료, 무상 수당 등 하나님의 오른쪽의 가치와 상반되는 것은 모두 버려야 하고 그런 것을 조장하는 정부를 꾸미는 데 일조하면 안 됩니다. 그리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총제척인 진리를 수용한 좋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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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보면 복음주의자들은 첫째 기능, 곧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잘 수행해 왔다. 그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주변 세계를 해석하도록 돕는 일은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이는 과학·정치· 경제· 생명윤리 등과 같은 분야에 성경적 관점을 제공하는 렌즈와 같은 역할로서, 상호 연관된 일련의 개념들을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마티의 표현처럼, 복음주의자들은 흔히 ‘개인 경건과 개인 구원은 강조했지만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해석하는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사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세계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는 일을 더 이상 기독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티는 이것을 ‘근대의 분열’(Modern Schism, 이는 그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이라 부르면서,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기독교가 사적 영역에 갇힌 채 공적 영역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중단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이 같은 종교의 내면화 혹은 사유화는 이제까지 기독교 세계에서 일어났던 가장 중대한 변화 가운데 하나다’라고 또 다른 역사가인 시드니 미드(Sideny Mead)는 그의 책에서 말했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은 종종 분열되고 파편화되었으며, 우리의 신앙은 교회와 가정이란 사적 영역에 완전히 갇힌 채 직업을 비롯한 공적 영역에서는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예배의 감동은 일요일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고, 한주 내내 무의식적으로 세속적인 태도를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성도들은 두 개의 분리된 ‘세계’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종교 생활과 일상생활을 뚜렷이 분리시킨 채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72쪽)
--------- 하나님의 진리는 총체적 진리입니다. 즉 우주 공간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할 진리입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원하는 부분만 일부 취사선택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Total truth를 가르치는 Total church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올바른 세계관과 역사관을 가지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상에 대항하며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러려면 부모들이 먼저 하나님의 진리를 자기 마음대로 취사선택하지 말고 온전히 Total truth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만유에 적용되는 총체적 진리(Total truth)입니다.
이 총체적 진리 안에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