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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는 역사 그대로 보아야 한다: 마르틴 루터 요약조회수 : 7338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7년 11월 17일 15시 41분 12초
  • 안녕하세요?
     
    오늘 전주의 김재근 목사님께서 귀한 글을 주셔서 소개합니다.
     
    "역사의 인물은 그가 살았던 역사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사람들은 늘 역사의 진행이 더디다고 생각한다. 100년의 삶도 확정할 수 없는 인생이 보기에 더딘 것이지 역사는 결코 더디지 않다."
     
    이 글을 읽으며 우리가 처한 역사 속에서 결기를 가지고 개혁자들이 전해 준 올바른 성경관과 국가관을 세워나가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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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역사 그대로 보아야 한다: 마르틴 루터 요약
     
    유명인의 죽음, 결혼, 제대. 오늘도 개인의 삶들이 모여서 역사가 만들어 지고 있다.
     
    10월 31일 할로윈데이. 장사치들이 들여온 서양의 저급 문화가 아이들을 지배하는 날이지만 10월 31일 오늘은 5백 년 전 신성로마제국 작센의 비텐베르크에 살던 한 명의 신학자를 기억하는 날이다. 그로부터 지금은 개신교라 불리는 프로테스탄트가 시작되었고 우리에게 익숙한 유럽 국가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유난히 맥주를 좋아했던 그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이다.
     
    1517년 루터가 공개한 95가지 논제는 로마 천주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비난받았지만 이것은 당시 교회가 행하는 악습 특히, 로마 베드로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에 대한 강력한 항의였다. 최초에 라틴어로 작성되었기에 지식인들만의 토론으로 그쳤을 뻔했던 루터의 망치질이 어떻게 이후 유럽과 교회의 역사에 그토록 대단한 영향을 끼쳤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1. 민중에게 성경을 선사했다.
     
    루터는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황제로부터 주장 철회를 요구받았으나 거부했다. 교회와 제국의 공동의 적이 되었지만 작센 제후의 도움으로 아이제나흐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 지냈고 거기서 독일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했다. 루터는 3개월 만에 그 일을 해 냈다. 70년 전 마인츠에서 시작된 인쇄혁명 덕분에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순식간에 히트 상품이 되었다. 루터 당대에 이미 수 십 만권이 판매되었다고 한다. 송아지 한 마리 값은 줘야 살 수 있었지만 민중이 성경을 독일어로 읽는다는 것은 혁명적 사건이었다. 제국 내 어느 가정에 단 한 권의 책밖에 없었다면 그 책은 틀림없이 루터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민중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당시에 대역죄에 해당한다. 그 위태롭지만 위대한 일을 마르틴 루터가 해냈다. 그리고 90년쯤 지나서 잉글랜드에서는 킹제임스 성경이 출간된다. 
     
     루터 성경
     
    2. 민중에게 언어를 선사했다.
     
    16세기 초 독일은 지금의 독일과는 전혀 다르다. 신성로마제국으로 묶여있기는 했지만 왕, 제후, 영주들이 자체적으로 통치하는 수 백 개의 나라가 실존하고 있었다. 당연히 언어에서도 큰 차이가 있었다. 북쪽 함부르크의 언어와 남쪽 스위스 언어는 소통이 불가한 상황이었다. 이때 루터는 지리적으로도 중간인 작센에 살면서 북쪽과 남쪽 지역이 모두 알 수 있는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그것도 집안의 여인과 거리의 아이들과 시장의 상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학문적이고 현학적 어휘로 가득 찬 카톨릭 교회의 성경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사제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 민중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언어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되었다. 루터 성경의 확산에 맞춰 루터 성경의 독일어가 표준 독일어로 자리 잡게 된다. 역사에 남는 독일 문학 찬란한 작품들이 루터가 번역한 성경 독일어를 기반으로 발전해 왔다. 루터를 존경하지 않는 독일인조차 루터 성경의 단어와 표현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3. 민중에게 음악을 선사했다.
     
    루터 이전의 교회 음악은 규율과 법에 묶여 있었다. 새로운 곡이 지어진다 해도 지금 그레고리안 찬트로 불리는 음악 범주에 머물러야만 했다. 교회에서는 연주할 수 없는 화성(하모니)도 존재했다. 더욱이 민중은 교회 미사에 참석하더라도 노래할 수 없었다. 교회로부터 인증 받은 전문 성가대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그때 루터가 회중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할 기회를 찾아주었다. 루터는 수십 곡의 음악을 직접 만들었고 회중과 더불어 노래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가 가장 유명하다. 교회 음악에조차 믿음의 자유를 가져온 루터는 이후 많은 음악가에게 음악적 영감을 제공했다. 아이제나흐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고 난 후 2백년쯤 지나서 아이제나흐에는 루터 성경을 읽고 루터의 음악을 듣던 한 소년이 있었는데 그는 자라서 세바스티안 바흐로 알려진다. 루터의 사상과 음악을 기반으로 멘델스존이 출현할 수 있었다. 그는 ‘종교 개혁 교향곡’(Reformation symphony)을 만들었다.
     
    <멘델스존의 ‘종교 개혁 교향곡’>: 25분 정도부터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가 나온다.
    https://youtu.be/otcrnrQAwD8
     
    바르트부르크 성
     
    4. 민중에게 자유를 선사했다.
     
    중세 유럽인들은 종교의 선택권이 없었다. 태어나서도 죽을 때도 죽어서도 교회의 권위 아래 놓여있었다. 성경을 읽을 권한은 고위 성직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고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을 읽는 일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민중에게 성경은 금서나 다름없었다. 이때 로마 교회의 권력에 항거하며 복음의 자유를 가르친 루터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상을 불어넣었다. 왕들과 제후들과 공작들이 루터의 사상을 지지했고 개인의 삶을 통째로 지배하는 교회 권력에 맞서서 싸웠다.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실제로 총칼을 들고 싸운 결과로 사람들은 스스로 종교를 선택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강요된 종교를 숙명으로 알던 민중들은 비로소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 일을 루터가 시작한 것이다.
     
    5. 루터의 역사적 평가
     
    역사의 인물은 그가 살았던 역사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16세기 초 신성로마제국 작센에 살면서 복음의 자유를 가르치던 로마교회 신학자를 21세기 혼란한 개신교 속으로 소환하게 되면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 루터는 농민전쟁을 싫어했고 유대인을 증오했으며 야고보서를 읽으면서 당황스러워 했고 맥주를 좋아했다. 그런데도 역사에서 그는 위대한 주인공이 되었다. 그것은 루터가 자기 시대에서 가장 필요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 소리 질렀고 하나님의 말씀을 민중의 언어를 사용해서 민중에서 들려주었고 교회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던 회중에게 노래할 기회를 제공했다. 1517년 루터의 망치질로부터 종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늘 역사의 진행이 더디다고 생각한다. 100년의 삶도 확정할 수 없는 인생이 보기에 더딘 것이지 역사는 결코 더디지 않다.
     
    샬롬
     
    전주 소망침례교회 김재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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