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2019년 3월 17일 주일 오후 4시에는 이동호 선생님을 모시고 80년대 주사파들의 실체와 자유 민주주의 전향 체험 강연을 듣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예수님이 민중 신학/해방 신학을 선포한 분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연세대학교 전대협 연대부장을 지내며 골수 주사파 활동을 하던 연사의 체험이 이 나라를 살리는 데 큰 기여를 하기 바라며 그분의 증언을 올립니다.
아이들과 함께 오셔서 강연을 들으시면 역사의 좋은 체험을 듣고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를 좌익 세력으로부터 지키는 것이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이 지고 가야 할 부담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같이 기도합시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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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산주의 활동가의 자기 고백
이동호(미래한국 편집위원)
1.
공개적 자기 고백이란 참 어려운 활동이다. 과거 자신의 활동을 스스로 비판하고, 그 활동이 잘못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자백해야한다는 것은 나에 대한 정신적 고문이다. 너무 힘든 과정이다. 과거 내가 믿었고, 그 믿음에 근거해 활동했던 활동이,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공동체에 큰 해악을 끼쳤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더욱 그렇다. 나의 청춘 거의 전부의 기억을 부정해야 하는 지점에 이르면 거의 실신 상태에 이르게 된다.
꼬박 10년이 걸렸다. 공산주의와 주체사상, 혁명에 대한 나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철학과 역사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 나의 결론은 나는 틀렸다 이었다. 따라서 나는 내 청춘 시절 전부를 부정해야 했다. 참 오래도 망설였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았다. 특히 인간관계가 걸렸다. 내가 나의 활동이 잘못되었다고 자기 고백하면, 나와 그 시절 함께 동고동락하며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 어떻게 될까?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내가 나의 조국에 끼친 해악이 너무 컸다. 내가 숨기고 가만히 있다면 다시 한 번 조국에 죄를 짓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결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자기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
나는 인류 역사 발전의 법칙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인류 발전 법칙을 따른 다면 모든 인류는 행복한 천국의 나라에 살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나는 역사 발전 법칙을 먼저 깨달은 선각자였다. 이 깨달음을 널리 전파해야할 사명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이 사명을 위해서는 나는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았다. 아직 역사발전법칙을 모르는 무지한 대중을 선도하는 길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무지한 대중을 선도하는 길은 공산주의 혁명의 길이었다. 나의 공산주의자의 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대학생활의 시작은 예수를 따르는, 특히 약자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준 ‘억눌린 자를 위한 예수’를 따르는 길로 선택한 길이었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 교회 전도사를 통해서 ‘민중신학’의 세례를 받은 상태였다. 억눌린 자들의 해방을 위해 오신 예수! 자신의 전부를 희생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나의 신앙이었다. 대학에서 민중을 위하는 학생운동에 접하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당시 독재정권이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민중의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보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대학 서클에 등록했다.
대학 서클 활동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했다. 당시 대학 서클 활동은 대부분 공산주의 서클이 장악한 상태였다. 공개적으로 내건 것과는 상관없었다. 우선 시각 조정이라는 명목의 학습활동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이제까지 내가 알던 역사적 사실들은 전부 부정당했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였다. 그의 미국에서 독립활동은 동포들로부터 활동자금을 받아 호의호식한 위선자로서 대한독립을 위한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미국이 소련을 비롯한 공산세력의 화장을 막는 전진기지를 위해 시도한 한반도 분할에 앞장선 분단의 원흉이었다. 그는 일제 부역자들을 대거 국정운영에 동원함으로서 대한민국이 민족적 정통성을 회복하고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길을 방해한 사람이었다. 독재로 일관하다 말년에 이르러 국민들의 저항에 외국으로 탈출한 독재자였다.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대한민국은 일제에 협력하던 친일파들이 장악한 나라였다. 일제에 붙어 호의호식하던 친일파들이 이승만의 친일파 기용으로 다시 해방공간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반공을 빌미로 역으로 애국자들을 탄압하고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을 장악했다. 반면 독립군의 후예들은 해방된 공간에서 그들의 공로가 제대로 인정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해방되었지만 해방된 것이 아니었다. 치욕의 나라였다. 정통성이 없는 사람들이 이끄는 나라였다. 친일파들이 주역이 되어 대한민국은 독재의 나라로 전락했다. 정통성이 없는 자들이 대한민국을 이끌다 보니 정상적인 방식으로 대중을 설득하기는 어려웠다. 강압의 방식만이 가능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일상적인 통치방식이 되었다. 박정희는 친일파의 대표자 였다. 일제 만주군의 장교로, 독립군을 핍박하던 박정희는 해방이 되자 조국에 돌아와 군인이 되었다. 그는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독재의 화신이었다.
한국경제사를 공부했다.
조선은 자주적으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자본주의 맹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이로서 자주적인 발전의 길은 막히고 식민지로서 수탈의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식민지로서 한반도는 해방과 분단 이후 한반도 남단에서는 미국이 식민지 종주국으로서 지배하기 시작했다. 남한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미국 제국주의로 그 주체만 바뀌었지 식민지 수탈체제로서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미제국주의는 식민지 민중들의 반발이라는 여건의 변화를 반영하여 식민지 지배방식을 바꾸었다. 직접 지배방식에서 간접 지배방식으로 전환이다. 이것을 ‘신식민지주의’라고 불렀다. 한반도 남단은 미국이 주인이 되어 식민지 민중을 수탈하는 체계였다.
미국은 한반도 남단에 진입하자마자, 그들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노골화 했다. 그 때 처음 미군 사령관은 포고문을 보았다.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한다.” 시종일관 위압적인 어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점령군 사령관다운 말투였다. 반면 소련의 포고문은 친절했다. “조선 인민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여러분들의 수중에 있다. 여러분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렸다. 붉은 군대는 조선인민이 자유롭게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만들어 놓았다. 조선 인민은 반드시 스스로 자기 행복을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포고문은 정반대였다. 누가 점령군이며 누가 조선을 도우러 온 군대인지 분명해 보였다.
미국은 한반도 분단의 원흉이었다. 38도선을 제안한 것이 미국이었다. 그리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구성한 것도 미국이었다. 미국은 애초 한반도 통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소련의 극동지역 팽창을 억제하는 대소전진기지로서 미국은 한반도 분할에 나선 것이다. 미국은 자신의 충실한 대리자를 남한의 지배자로 내세웠다. 이승만이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남한지배를 대리하는 정권이었다. 미국의 식민지 지배의 통치도구가 이승만 정권이었다. 미국은 정치 뿐 만아니라 경제도 장악했다.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을 자신들의 남한 통치에 동조하는 동조자들에게 분배하여 이들을 남한 지배의 도구로 사용했다. 이렇게 성장한 것이 남한의 자본가 계급이었다. 남한의 자본가 계급은 미국의 한반도 지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협력자였다. 그들은 미국에 협력하는 대신 남한에서 자신들의 계급적 지배를 보장받았다. 6.25 이후 미국의 원조는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남한의 경제를 미국에 의존하게 만드는 식민지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도구였다. 미국에 의존하는 원조경제로 남한의 경제는 자립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영원한 예속의 길로 들어섰다.
미국은 대한민국을 군사적으로도 강점했다. 한미동맹은 미국이 대한민국의 안보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군사력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리고 소련과 북한의 침략을 위한 도구였다. 지금까지 미국은 한미동맹을 통하여 한국의 군사력을 지배하고 있다. 군사적인 독자성을 갖지 못한 나라가 독립국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미국은 대한민국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실질적 지배자였다.
철학을 공부했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계급투쟁론을 공부했다. 이제까지 철학은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이었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계급적 지배를 은폐하기 위하여 관념론을 유포했다. 현실의 질서는 신이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지배계급의 계급적 지배는 은폐되거나 정당화 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르면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졌다. 또한 세계는 변화 발전한다.
기본법칙을 알게 되었다.
제1법칙 : 양질전화의 법칙. 사물은 변화한다. 변화는 서서히 양적으로 변화하는 것과 급격하게 비약적으로 질적으로 변화하는 혁명적 형태가 있다. 양적인 변화가 쌓여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이를 사회 발전 과정에 적용하면 폭력혁명은 정당화된다. 질적인 변화는 극적이고 격렬하게 이루어진다. 사회변화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서서히 양적으로 변화 발전하다가 일정한 시기에 이르러서는 급격히 질적으로 비약적인 변화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가 사회혁명의 시기에 해당된다. 사회혁명은 사회의 변화 발전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제2법칙 : 부정의 부정의 법칙. 사물은 발전하기 위하여서는 현존 상태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현존 상태를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부정한 것을 다시 부정하여 보다 더 발전된 긍정의 상태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사물의 발전은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현재를 부정하는 것은 당연한 발전의 과정이다. 현재를 부정하는 혁명은 언제나 발전의 편에 서있는 정당하고 고귀한 것이다.
제3법칙 :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 사회가 발전하기 위하여서는 사회의 낡은 통일이 파괴되고 새로운 통일이 이룩되어야 한다. 대립물이 서로 투쟁하여 낡은 통일을 파괴하고 새로운 통일을 이룩함으로써만 사물의 발전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회의 낡은 통일을 유지하려는 지배 계급을 반대하는 피지배 계급의 계급투쟁이야말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이다. 계급적 대립은 사회 발전의 원천이었고 계급투쟁은 사회발전의 절대적 동력이었다.
주체사상을 공부했다.
김정일이 썼다는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읽고 또 읽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 졌다고 했다. 따라서 혁명에서 물질적 기초의 변화를 살피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상식은 사회운동에서 인간의 정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주체사상은 물질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운명과 역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새로운 철학이었다. “주체사상이란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다.” 이 명제를 좀 더 일반화하여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상이다.” 혁명의 주체를 노동계급으로 한정하여 그 폭을 좁히지도 않고, 인간의 역할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부분이 약간 걸리기는 했다. “인민대중의 이익은 수령이 가장 이상적으로 대표하기 때문에 인민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입장은 곧 수령을 옹호하는 입장이다”라고 하는 부분에서다. 약간 걸리긴 했지만 혁명에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마지막 단계로 혁명론을 공부했다.
북한의 대남 혁명방송인 ‘구국의 소리 방송’에서 대한민국 혁명론을 강의했다. 소위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론’이다. 방송 내용을 청취 활자화해서 서로 돌려보고 돌려보았다. 운동권 서열이 높으면 복사 상태가 양호한 것을 보았다. 서열이 낮을수록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여 잘 보이지 않는 복사본을 가지고 공부했다.
대한민국은 미제국주의의 식민지 였다. 미국은 대한민국을 정치, 경제, 군사 등 전 분야에서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세력이었다. 군부독재 세력은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대리하는 대리권력 이었다. 따라서 한국사회는 미국의 식민지적 수탈과 지배로 자본주의도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왜곡된 자본주의로서 한국사회는 ‘식민지반자본주의 사회’였다. 식민지 지배를 받는 민족모순과 자본주의 사회로서 계급적 지배를 받는 계급모순이 중첩된 사회가 대한민국이었다. 한국사회의 혁명을 위해서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진보적 지식인이 주력군이 되어 민족자본가, 중소상공인, 애국적 종교인 등이 보조동력을 참여하는 혁명이 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통일전선이 필수적이었다. 이 혁명을 위한 3대투쟁과제도 도출되었다. 반미자주화 투쟁, 반독재민주화 투쟁, 통일촉진 투쟁 등이 그것이다. 이를 소위 자주, 민주, 통일 투쟁이라고 불렀다. 이 3대투쟁 중 가장 우선되는 투쟁은 반미자주화 투쟁이었다. 모든 투쟁은 반미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광우병 시위 미선이 효순이 시위 등 반미투쟁은 일어나지만 반중투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다.
3.
서클에서 활동은 공산주의 사상과 이론, 공산주의 운동사와 혁명론 등을 공부하는 학습과 이를 실천하는 시위 참가 활동의 결합이었다. 공산주의 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실천을 통하여 실체에 더 가까운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실천은 학습의 당연한 결론이었다. 실천은 우선 투쟁에 동참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선배들의 손에 이끌리어 우선 교내 시위에 동원된다. 시위에 동원되고 나서는 반드시 술자리를 겸한 평가회를 갖는다. 이 평가회가 실천에 대한 반성의 시간인 것이다. 투쟁이 수위는 점차 높아진다. 학내 시위에서 학교 밖의 가두시위로 동원된다. 시위 참여 방식도 점차 높아진다. 처음에는 단순한 동원이다. 그러나 시위 참여 횟수가 늘어나고 학년이 높아져 감에 따라서 사람마다 차별이 있지만 그중 일부는 시위를 이끄는 그룹으로 참여하게 된다. 혁명의 전사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참여 횟수가 늘어날수록 대범해 진다. 활동 범위도 처음에는 서클에서 활동하는 수준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학년이 높아지고 단위에서 인정받으면 활동 범위가 넓어진다. 단위 서클에서 서클의 연합단위로, 서클 연합단위에서 학교전체를 총괄하는 단위로, 최상층은 학교 단위를 넘어 학생운동 전체를 총괄하는 범위로 확장하게 된다.
나는 서클 내 성원들과 선배 그룹의 인정을 받았다. 서클 내에서 후배들을 교양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처음 서클에 들어와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들에게 내가 교양 받은 것처럼 한국근현대사 공부를 통해서 시각을 교정하고, 공산주의 철학을 가르치고, 공산주의 투쟁사와 혁명론을 가르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후배들을 시위에도 데리고 다녔다. 어느 날 서클을 대표하여 비밀 대회에 참여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서클의 각 단위 대표들이 비밀리에 참여하는 회의였다. 한 해의 투쟁을 평가하고 새로운 투쟁을 비밀리에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서클 연합단위 회의에서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제 학교 전체를 대표하는 비밀회합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각 단과대학의 비밀 대표들이 그 회합에 참여했다. 그곳에서는 사상과 투쟁 방식에 대한 적극적인 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한해 대학의 비밀 조직을 이끌 대표를 선출했다. 나는 그곳에서도 4인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4인 중앙위원은 총책임자와 총학생회 책임자, 학내 투쟁 책임자, 학내 선전 책임자로 역할을 나누었다. 나는 총학생회 지도담당 책임자였다. 이때부터 나는 총학생회로 출근했다. 물론 공식 명칭은 총학생회 기획부 차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총학생회의 비밀 리더였다. 중앙위원회에서 결정된 사항을 전달하고 총학생회가 할 일을 지도했다. 그리고 각 부서의 활동계획을 보고 받아 이를 중앙위원회에 전달하여 토의했다.
87년 6월 투쟁은 비밀지도부에 의해서 지도된 투쟁이다. 당시 각 대학을 지도하는 비밀 지도그룹이 있었다. 반미청년회가 그것이다. 반미청년회는 각 대학의 핵심 혁명분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학교 간 연대선을 구축하고, 통일적인 투쟁을 지도했다. 4.13호헌 조치에 반대해서 각 대학교 총학생회 주도로 반호헌 투쟁을 벌였다. 그 와중에 연대에서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 이 소식은 각 대학교 비밀연락선과 총학생회를 통해 각 대학에 알려졌다. 반미청년회는 각 대학 간 연대투쟁을 지도했다. 이른바 명동성당 투쟁이었다. 각 대학은 대학별로 학교에서 투쟁결의 대회를 하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명동으로 향했다. 이 때 투쟁구호와 각 대학별 집결지점 등이 비밀 연락선을 타고 내려왔다. 명동 투쟁에 나가기에 앞서 학생들은 구호와 집결지, 투쟁 방식들을 전달 받았다. 이때 위에서 내려온 구호가 “호헌 철폐! 독재 타도! 군부독재 지원하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등 이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는 반독재민주화 투쟁에 해당하는 구호다. 그리고 군부독재 지원하는 미국놈들 몰아내자는 구호는 반미자주화 투쟁에 해당하는 구호다. 각 투쟁의 구호에도 그냥 만든 것이 아니라 혁명론에서 학습한 대로 3대투쟁 과제를 적절히 결합한 것이다.
중앙위원으로 활동 후 나는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으로 활동 범위를 옮겼다. 중앙위원 활동을 마치고 단과대학에 내려와 있던 나에게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나의 중앙위원으로서 활동을 잘 지켜보았노라고 했다. 자신을 ‘콤’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나에게 자신과 더 많은 사업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는 이른바 ‘조통그룹’의 수장이었다. 그는 연대 출신으로 86년 연세대 비밀 학생조직인 연대구국학생동맹의 맹원이자 지도그룹이었다. 건대사건으로 경찰의 추적을 받아 감옥에 수감되었다. 특사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연대를 중심으로 ‘조통그룹’을 결성했다. 나는 그 그룹을 대표해서 전대협에 파견된 것이다. 후일 이 그룹은 임수경을 북한에 파견하는 활동을 벌렸다.
1988년 각 대학에 나붙었던 북한 관련 대자보는 북한의 대남 공작 지도부서인 한민전이 지시한 것을 방송으로 청취해 이를 대자보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87년 발생한 KAL기 폭파사건의 진실이었다. 북한은 이 사건은 남한이 대선을 승리하기 위하여 조작한 사건이라고 선전했다. 우리는 이를 북한 방송에서 청취하여 다음날 성실히 대자보로 옮겼다. 후일 노무현 정부 시절 공영방송에서 KAL기 폭파사건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물론 그 내용은 당시 우리들이 북한의 주장을 대자보로 옮긴 것들을 반복한 것이었다.
4.
학생운동을 그만 둔 직후 나는 조직으로부터 원래 내 전공인 기독교로 침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신학교로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험 당일 내가 가려고 했던 신학교는 학내 분규로 시험을 보지 못했다. 그해 유일하게 학부 때 성적으로 뽑았다. 나의 학부 성적은 바닥이었다. 1학년 이후 제대로 수업에 들어가 본 기억이 거의 없다. 학점이 좋으면 이상했다. 당연히 신학교 진학에 실패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생계를 위해 학원 강사에 나섰다. 영어 강사로 나선 것이다. 대학 진학당시 나의 영어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다. 학원 강사를 하면서 나는 많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보았다. 이들은 열심히 살고 있었다.
내가 대학에서 배우고 학습한 것은 대한민국 사회는 미국과 자본가 계급의 이중 착취로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극심한 가난과 절망에 빠져 있어야 했다. 그 절망이 혁명의 동력이 된다. 그런데 내가 사회에 나와서 본 일반 국민들은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의 희망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한민국은 미국과 자본가 계급 그리고 이에 결탁한 독재정권에 의해서 신음하고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정반대로 보였다.
이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아니 내가 책에서 배운 이상사회가 사회주의 사회였다. 그런데 동독의 국민들은 동독의 폭정과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서독으로 탈주를 감행했고 마침내 동독 공산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소련의 실상을 참담했다. 인류 최고의 낙원은 어디가고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가공할 독재와 독재자들만이 그 낙원에 있었다. 책으로 본 사회주의와 실제 현실 사회주의는 극과 극이었다. 소련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당시 나의 충격은 대단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사상과 철학, 혁명론에 따른 실천이 인류를 이상사회로 인도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사회는 내가 가장 증오하던 자본주의 사회보다 훨씬 아니 비교조차 불가능한 공산독재자들에 의한 최악의 착취와 독재사회였다.
그래도 버텼다. 소련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는 북한이 아직 대안으로 남아있었다. 북한은 다를 것이다. 스스로 자위했다. 그 자위가 무너져 내리는 데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주체사상의 창시자로 알려진 황장엽씨가 망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즈음 북한의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세습은 이해할 수 있었다. 김일성의 지도력을 이어받은 김정일이 뛰어난 지도력과 성과를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곧이어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말하는 대기근의 참상이 북한을 탈북한 사람들에 의해서 알려졌다. 황장엽씨 입에서 나온 북한의 참상은 나의 상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나의 사상과 철학, 실천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했다. 지금도 황장엽씨가 월간 조선에 인터뷰한 내용을 읽을 때의 충격이 생생하다. 어디에서부터 나의 사상을 재검토해야 하나 막막했다. 처음에는 동양철학에 매달려 보기도 했다.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서양철학사를 다시 공부했고 내가 그토록 경멸했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을 읽은 나는 다시 충격에 빠졌다. 그 사상에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자각과 인류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기 위한 지혜와 고민의 결과물들이 수 없이 많이 있었다. 그 즈음 나는 버크의 보수주의 사상에 주목했다. 버크는 인간의 한계에 주목했다. 한계를 가진 인간이 사회를 함부로 개조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를 프랑스 혁명의 경우를 들어 설명했다. 사회제도나 풍습 등을 개선하는 행위는 신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제도와 풍습에는 수많은 세월 전해져 내려온 인간의 지혜와 노력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개조하려면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개조했을 경우 성공할 방법이 있는가에 대한 확신 등 고려할 사항이 많기 때문이다. 버크에 따르면 공산주의 사상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자각이 없는 무모한 것이었다. 실패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역사를 다시 공부했다. 대한민국은 성공한 역사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들 가운데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였다. 민중들을 수탈해 도탄에 빠진 나라가 아니었다. 제3세계 나라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성공사례였다. 이승만을 공부하고는 마지막 순간 울음을 울었다. 하늘이 이 조그만 조선이라는 나라에 이승만이라는 훌륭한 지도자를 준비하고, 그를 통하여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위협에서 건져내고, 자유민주공화국 번영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소련이 무너지고 스탈린의 기밀문서들이 해제되었다. 해방 공간 당시 구체적 정황이 속속 드러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역사적 왜곡과 공격은 무너졌다. 한반도 분할 정책을 시도한 것은 스탈린 이었다. 스탈린은 미국 영국과 전후 처리 협상이 결렬되자 소련 극동군 사령관에게 38도선 이북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이 1946년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훨씬 전인 45년 11월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정부 조직을 구성하고 실질적인 정부활동에 들어갔다. 한미동맹은 미국에로 예속의 결정판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온 디딤돌이었다. 미국은 동맹을 맺고 싶지 않아했다. 전쟁을 빨리 끝내고 미국 본국으로 철수하고 싶어 했다. 오히려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가 한미동맹을 강요했다.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이승만의 위협에 마지못해 승낙한 것이었다. 조선이 망하던 당시 8900여명이던 군대는 미국의 도움과 군사원조 덕분에 세계4위의 군사대국으로 거듭났다.
박정희는 제3세계 나라에서 유일하게 산업혁명을 이룩한 창의적이고 실천적인 지도자였다. 당시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신생 독립국들은 선진국이 권유한 대로 수입대체형 산업화 전략을 따랐다. 물론 우리도 처음에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실행 과정에서 이를 평가하여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이라는 새로운 길로 대한민국을 안내했다. 6.25 전쟁 직후 세계 최빈국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적 공업국으로 성장한 것에는 박정희라는 거대한 지도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쳐 보이지 않았다. 대한민국 사회가 극단적인 부익부 빈익빈 사회로 가리라던 공산주의자들의 예언을 틀렸다. 오히려 산업혁명 시기 열심히 일한 많은 국민들은 자신들의 바람대로 중산층으로 진입해 있었다. 여기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많았다.
나는 나의 잘못을 고백하기고 결정했다. 그것은 조국을 헐뜻고 배신한 나에게는 의무였다. 그간 맺었던 나의 관계들이 모두 끊어지고 외롭고 고독한 길이라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뉴라이트운동이라는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물론 기대만큼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나의 생 중에서 공산주의의 해악을 경고하고 증언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조국이 나에게 내린 준엄한 명령과 같은 것이다.
5.
대한민국은 전쟁 중이다.
나와 같은 시기 나와 같은 경험을 했던 이들이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어느새 대한민국 구석구석으로 진출해 있었다. 언론계, 문화계, 학계, 종교계, 공무원, 교사, 심지어 정치 지도자로 성장한 이들도 있었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이들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이들은 그들이 영향을 미치는 곳곳에서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2015년 교과서 전쟁은 이들의 기존 질서 뒤흔드는 작업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우리 사회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들은 어느새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그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만들었고 우리 학생들은 그 방향에서 배우고 있었다. 그들은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는 친일파들이 만든 나라이며,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정의가 실패하고 소수 기득권세력의 독재와 부패로 점철된 잘못된 오욕의 역사라고 교과서에서 버젓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대학시절 가졌던 역사관에서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좌익이 이념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대한민국을 번영으로 이끌었던 세력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일부는 수구꼴통으로 낙인 찍혔다.
좌익과 보수 세력은 대한민국의 방향을 놓고 서로 다른 이념으로 바라보고 있다. 좌익들은 대한민국이 소련과 동구에서, 그리고 북한에서 실험한 실패한 길로 가자고 용감히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위험하다. 이들이 바라는 길로 간다면 해방 이후 우리 선배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만든 이 위대한 나라 대한민국이 망하는 길로 갈 것은 너무도 명확하다. 이 전쟁에는 제3의 길은 없다. 황장엽은 정책이 다른 것을 타협할 수 있어도 이념이 다른 것은 타협할 수 없다고 했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곳에 대화와 타협이 낄 자리는 없다.
좌익과 이념전쟁에서 승리하는 길 만이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출하는 유일한 방도다. 이념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상대방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많은 대중들이 왜 좌익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념투쟁은 대중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전쟁이다. 대중이 우리의 주장에 동조하고 기꺼이 따르고자 한다면 그 전쟁을 승리할 것이다. 대중을 우리 편으로 동원하기 위해서는 폭로가 중요하다. 그래야 대중들은 좌익의 실상과 위험성을 자각하게 된다. 좌익의 사상과 이들의 잘못된 역사관, 방법론에 대한 지속적인 폭로가 있어야 한다.
이념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힘은 우리가 가진 사상과 방법이 정당하다는 도덕적 확신에서 나온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이 교육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우리의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을 ‘헬조선’ 운운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역사와 우리가 가진 이념이 정당하고 고귀하다는 사실을 힘들여 가르쳐야 한다. 수구꼴통은 우리가 아니라 모두 실패한 좌익의 길을 아직도 가자고 악쓰는 저들이다. 저들이 가는 길은 다 같이 망하자는 길이다.
질러가는 지름길은 없다. 어렵고 힘들어도 그 길을 가야만 한다. 그 곳에 대한민국의 살길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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