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를 앞두고 8.15의 진정한 의미를 성찰한다_이동복(李東馥)
앞으로 닷새 후 대한민국은 또 한 차례 8.15라고 하는 국정기념일을 맞이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이 8.15가 무엇을 기념하는 날이냐 하는 문제에 관하여 국민적 합의가 없다. 정부는 금년에도 공식적으로는 이날을 ‘광복절(光復節)’로 기념할 모양이다. 1945년8월15일을 기점(起點)으로 하여 ‘제74회 광복절’로 기념할 작정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왜냐 하면, 8월15일을 ‘제74회 광복절’로 기념하려면 대한민국이 지금부터 74년 전인 1945년8월15일 “광복을 이룩”했어야 하는 데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광복’이라는 국어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챙겨 보면 자명해 진다. 모든 국어사전은 ‘광복’의 의미를 “잃었던 국토(國土)와 국권(國權)을 회복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즉 ‘독립’을 이룩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1945년8월15일 우리나라는 ‘독립’을 이룩했는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이 날 ‘국토’와 ‘국권’ 가운데 어느 것도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1945년 이 날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戰犯國)인 제국(帝國) 일본(日本)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한 날일 뿐이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따라 한반도는 일본에 의한 35년간의 강점(强占) 상태로부터 ‘해방(解放)’되었다. 그러나, ‘해방’이 곧 ‘독립’은 아니었다.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제2차 세계대전의 4대 연합국들은 1943년11월의 카이로 정상회담에서 ‘세계대전 전후처리 방안’의 일환으로 한국 문제에 관하여 “적절한 시점에 독립시킨다”는 원칙에 합의한 뒤 테헤란, 얄타, 포츠담 등지에서의 후속 ‘정상회담’에서 그 같은 ‘원칙’을 거듭 재확인했지만 “어떻게 독립시키느냐”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합의도 이룩하지 못한 채 일본의 항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따라서, 1945년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의 시점에서 한반도의 법적 지위는 일본의 강점 상태에서 ‘해방’은 되었지만 곧바로 ‘독립’을 이룩하지 못 한 채 북위 38도선을 경계선으로 하여 남북으로 분할 진주한 미∙소 양국군에 의한 ‘군사적 점령’ 상태가 계속되었다. 따라서, 1945년8월15일의 시점에서 대한민국은 ‘해방’은 되었지만 ‘광복’은 이룩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의 ‘독립’ 문제는 1945년12월의 모스크바 3상 회의(미국∙영국∙소련)에서 이루어진 합의를 이행하는 문제를 놓고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서 서울에서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차원에서의 해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한국의 독립 문제는 1947년9월 유엔총회 안건으로 상정되었고 1947년11월14일 유엔총회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라는 제목의 총회 결의 제112호가 가결됨으로써 해결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유엔은 “유엔 감시 하에 인구 비례에 입각한 자유 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이라는 ‘독립’ 방안을 ‘처방(處方)’한 것이다.
그러나, 난관(難關)은 이로써 해결되지 않았다. 북한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던 소련과 소련의 앞잡이들인 공산주의자들이 유엔 총회 결의의 수용을 거부하고 유엔이 파견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지역 입경(入境)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유엔은 1948년2월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열린 ‘소총회’에서 “우선 유엔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하라”는 결의를 채택했고 이에 의거하여 한반도의 38도선 이남 지역에서 1948년5월10일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총선거를 통하여 구성된 ‘제헌국회(制憲國會)’가 7월17일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 공포했고 이 헌법에 의거하여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한반도의 38선 이남 지역에서는 ‘독립국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로써, 한반도 남쪽 절반의 땅에서는 ‘절반의 광복’이 이루어졌다. 이 지역에서는 ‘국토’와 ‘국권’의 회복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에도 불구하고 전체 한반도 차원에서의 ‘광복’은 여전히 미결의 과제로 남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1948년9월9일 북한 지역의 평양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의 별개의 ‘정부’ 수립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에서는 남쪽의 대한민국 정부와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사이에 어느 쪽에 ‘정통성’이 있느냐를 가려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유엔총회가 흑백(黑白)을 가리는 역할을 맡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유엔총회는 1948년12월12일 역시 “한국의 독립 문제”라는 이름의 총회 결의 제195-III호를 채택하고 이를 통하여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선포했다.
유엔총회는 이 결의문 제2항에서 “한반도에서 대다수(전체 한국인의 2/3)의 인구가 거주하고 유엔임시위원회가 감시하고 자문할 수 있었던 지역에 대하여 유효한 관할권을 행사하는 (대한민국이라는) 합법적 정부가 수립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이 정부는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이루어진 해당 지역 유권자들의 자유의사의 정당한 표현인 선거를 통하여 수립된 정부”이기 때문에 이 정부는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그 같은 유일한 정부’)”라고 선포했다.
[유엔총회 결의 제195-III호의 영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이 같은 유엔총회 결의 제195-III호 ②항의 의미는 “대한민국이 한반도 상의 유일한 합법 정부”이며, 비록 명시적으로 그렇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북한 땅에 임의로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불법국가’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유엔총회 결의 제195-III호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 ④의 ⒜ 및 ⒞항에서 “한반도의 통일”과 “군대의 통합”은 “1947년11월14일자 총회 결의 제112-II호에 명시된 원칙에 따라서 유엔임시한국위원회의 감시와 자문 하에 모든 한국인들의 자유롭게 표시된 의사에 기초한 대의제(代議制) 정부를 실현시키는 방법으로 이룩하라”고 요구함으로써 향후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은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되는 자유선거를 통하여 완성할 것”을 명시적으로 주문했었다.
대한민국이 1948년5월10일의 제헌국회 선거 때 “북한 지역에서 앞으로 선출될 의원용으로 100석의 의석을 공석(空席)으로 남겨 두었던 것”이나 1963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6.23 선언’을 발포할 때까지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되는 북한 지역에서의 자유선거”를 정부의 공식 통일방안으로 고수했던 것은 그 근거가 바로 유엔총회 결의 제195-III호 ④항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유엔총회 결의 제195-III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⑨항에서 “유엔 회원국과 그 밖의 다른 국가들이 앞으로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때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로 선포한) 이 결의 ②항의 내용을 반드시 고려하도록 권고한다”고 명시하기까지 했었다.
이상의 경과는 대한민국의 ‘독립’이 유엔총회 결의 제112-II호(1947)에 의거하여 1948년5월10일의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와 이에 입각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8월15일)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이 같은 사실이 유엔총회 결의 제195-III호에 의거하여 국제적으로 공인(公認)된 것임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따라서 1948년8월15일은 대한민국이 ‘독립’을 이룩한 날이라는 사실에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이에 따른다면, 대한민국은 금년 8월15일을 ‘제74회 해방 기념일’인 동시에 ‘제71회 독립기념일’로 기념해야 마땅한 것이다.
대한민국이 남북의 7천5백만 한민족 전체의 차원에서 ‘광복’을 기념하는 것은 휴전선 북쪽의 2천5백만 동포들이 3대째 계속되고 있는 김가일문(金家一門)의 전근대적인 전제왕조(專制王朝)로 탈바꿈하고 있는 사이비 공산독재(共産獨裁)의 학정(虐政)하에서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것이 한반도의 역사적 현실이다. 한반도 전역에서 ‘광복절’을 기념하는 것은 그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리(事理)가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허무는 것은 물론 5천년 민족사상(民族史上) 전례 없는 발전과 번영(繁榮)의 금자탑(金字塔)을 쌓아 올린 그 동안의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성취를 무너뜨리면서 오히려 잔인무도한 전쟁범죄자이고 민족반역자이자 평화파괴범인 북한에게 대한민국 국민들의 운명을 예속(隸屬)시키기 위해 광분(狂奔)하고 있는 문재인(文在寅) 씨의 ‘종북∙주사파’ 정권이 ‘해방’과 ‘독립’ 및 ‘광복’ 등 민족역사의 이정표(里程標)들을 훼손, 변질시키는 역사 왜곡의 현장이 전개되고 있어서 뜻 있는 국민들로 하여금 망연자실(茫然自失)하게 만들고 있다.
대한민국의 애국 시민들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1910년의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35년간 이 나라가 제국(帝國) 일본에게 강점되어 있는 동안 샹하이(上海)에서 충칭(重慶)까지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과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유랑생활(流浪生活)을 감내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간판을 지켰을 뿐 아니라 국내외의 도처에서 영웅적인 항일(抗日) 독립운동의 맥(脈)을 이었던 독립운동가들의 공훈(功勳)을 기리는 데 인색할 수 없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전개된 대한민국 ‘독립’의 과정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던, 이들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적 노력과는 상관없이 ‘자력(自力)이 아니라 타력(他力)에 의해 전개된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6년간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명맥을 유지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심지어는 쟝제스(蔣介石)의 중화민국 정부를 비롯하여 세계 어느 나라나 국제기구로부터도 법적 승인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1945년 일본의 항복 후 귀국할 때도 ‘임정(臨政)’은 ‘단체’나 ‘기구’의 입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임정’ 요인들이 뿔뿔이 개별적으로 귀국해야 하는 처지를 감수해야만 했었다. 이 때문에 ‘한국의 독립’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 사이에 ‘전후처리’ 방안의 차원에서 해결되는 길마저 막힌 채 결국 유엔이라는 신생(新生) 국제연합 기구의 주선을 통해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일본과 연합국 간의 전쟁 종결을 공식화한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조인에 참가한 51개국의 ‘전승국’ 반열(班列)에도 끼지 못해서 ‘전승국’의 차원에서 한일관계를 재정립하는 역사적 기회를 상실했었다.
이제 며칠 뒤로 임박한 또 한 번의 8.15를 맞이하여 애국적인 대한민국 국민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성찰해야 할 것 같다. 이들이 명심해야 할 첫 번째의 과제는 8.15의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에 바탕하여 8.15를 이용하여 병적인 ‘반일 감정’을 선동하고 이를 내년 4월에 있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전에 이용하여 야당 진영과 유권자 사이를 이간하려는 문재인 정권의 불순한 획책을 저지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오는 8월15일 서울에서는 문재인 씨가 이끄는 ‘종북∙주사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자유 애국 시민들의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예정되어 있다. 모쪼록 이들의 함성이 우레처럼 청와대 안으로 울려 퍼지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