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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을 좀먹는 자들을 제거해야 나라가 살 수 있다조회수 : 7576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9년 8월 28일 10시 43분 27초
  • 안녕하세요?

     

    대한민국의 문제는 대한민국을 반대하는 자들이 정권을 잡은 데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시는 헌법에 명기된 대로 자유 민주주의 자유 시장 경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회주의로 바꾸려 하는 자들에 의해 나라가 혼동을 겪고 있습니다.

     

    다음 글은 우리 교인들이 기도할 제목을 잘 보여줍니다.

     

    주님의 큰 은혜와 긍휼이 대한민국과 교회 위에 풍성히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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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의 순간' 맞은 운동권 전체주의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본질은 조국 개인 아닌 그가 상징한 좌파 기득권 세력… 총체적 민낯
    국민은 '진보 콤플렉스' 벗어나 양비론(兩非論)의 강박과 중도론의 유혹에서 자유롭게 됐다

     
    개강 준비로 들뜰 무렵이지만 학교로 출근하는 발걸음은 별로 가볍지 않다. 이런 느낌의 기폭제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조국 교수다. 얼마 전 그가 교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부끄러운 동문' 1위를 차지하면서 교정은 뒤숭숭해졌다. '폴리페서'를 비판하는 입장과 '앙가주망'을 옹호하는 견해의 차이 때문이다. 최근 그를 둘러싸고 학교가 약간 더 술렁이는 듯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미동 아니면 약풍(弱風)이다. 아직도 대다수는 사태 추이를 지켜볼 뿐이다. 개입이나 참견 대신 '복지안동(伏地眼動)' 쪽을 택하는 것이다.

     

    '부끄러운 동문' 순위를 둘러싸고 대학 내부가 어수선한 것 자체가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다. 더 부끄러운 것은 같은 대학의 선배 학자가 낸 저서를 조 교수가 '쓰레기 같은 책' 또는 '구역질 나는 책'이라고 비난한 일이다. 이에 대해 당사자인 이영훈 명예교수는 학문 공동체에 걸맞은 형식과 금도(襟度)부터 갖추라고 대응했다. 서울대 역사상 초유의 교수 사회 공개 정면충돌이다. 그럼에도 학내에는 이와 관련된 논쟁이나 토론 하나 변변히 보이지 않는다. 민감한 정치적 이슈라면 판단하지도 않고 행동하지도 않는 것을 처세술로 여기는 경향 때문이다.

     

    과거 흔하디 흔한 연대 서명 하나 없고 숱하디숱한 시국 선언 하나 없는 것이 대학의 현주소다. 언제부턴가 교수들은 입조심과 말조심을 미덕으로 삼으며, 현실 정치에 대한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주변 경계와 자기 검열 및 자기 세뇌에 익숙해지면서 지사(志士)나 투사형 지식인은 천연기념물처럼 희귀해졌다. 악플과 신상 털기가 두려워 사회적 발언의 기회나 수위에도 극히 신중한 분위기이다. 이로써 지금은 전반적으로 지식인들의 책무 배임(背任) 시대다.

     

    '속삭이는 사람들' - 이는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열망한 볼셰비키 혁명기 소련의 평범한 개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올랜도 파이지스는 스탈린 치하 거대한 사회적 실험장에서 보통 사람들이 가족, 이웃, 동료로서 살아온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문제는 지금 우리나라에 이와 비슷한 징후가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학교, 직장, 공원, 교회, 시장, 식당, 술집, 등산로 등에서 공적 대화를 점점 더 삼가는 모습이다. 적당히 보호색(保護色)을 쓰면서 자신의 주장과 정체를 가급적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전체주의는 결코 흘러간 과거 악몽이 아니다. 히틀러나 스탈린, 김일성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전체주의 이후의 시대를 사는 것이 확실한가'라고 물었던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확실히 옳았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누구보다 성공적으로 이뤄낸 대한민국에 이런 날벼락이 떨어질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관제 이데올로기, 혐오와 배제의 정치, 배타적 민족주의는 디지털 모바일 시대의 감시 체제와 여론 조작, 언론 공모와 결합하면서 훨씬 엉큼해지고 은밀해졌다. 포퓰리즘의 만연은 전체주의 신드롬에 대한 자각조차 마비시키고 있다. 여기에 무기력한 야당과 해바라기 시민사회의 존재도 빠트릴 수 없다.

     

    행여 집권 세력으로서는 진심으로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섬긴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언필칭 '포용 국가'고 '국민의 나라'며, '사람이 먼저'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정작 현실은 정반대다. 자신만 진리인 위선적 권력일수록 또한 자신만 정의로운 오만한 권력일수록, 포용은 멀어지고 국민은 쪼개질 뿐 아니라 사람이 이념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집단적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사회는 한 명의 개인으로 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체주의의 진정한 해악은 안보나 경제 실패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 활기 및 체온 저하다.

     

    그런데 다행히 문재인 대통령의 조국 법무장관 지명을 계기로 '죽은 시민의 사회'가 소생하고 '죽은 개인의 사회'가 회생할 수 있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청문회를 앞두고 '운동권 전체주의'가 마침내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본질은 조국 지명자 개인이 아니라 그가 상징해 왔던 좌파 기득권 세력의 총체적 민낯이다. 이번 일로 많은 국민은 여태까지의 막연한 '진보 콤플렉스'를 벗게 되었다. 양비론(兩非論)의 강박 혹은 중도론의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다. 조국 후보자의 정치적 죽음과 삶은 이제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 한국 정치사의 결정적 변곡점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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