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저는 크리스천의 아픔과 고난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50이 되니까 이제 믿는 것이 무언인지 알 것 같습니다. 어려움과 고남이 올 때 우리 주님이 함께함을 인식하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께서 들어주실 것입니다.
제 56 편
¶ 요낫엘렘르호김에 맞추어 악장에게 준 다윗의 믹담,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가드에서 붙잡은 때에 지은 시.1 오 하나님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 하고 날마다 싸우며 나를 학대하나이다.2 오 지극히 높으신 이여, 내 원수들이 날마다 나를 삼키려 하오니 나와 싸우는 자가 많나이다.3 내가 무서워할 때에 주를 신뢰하리이다.4 하나님 안에서 내가 그분의 말씀을 찬양하리라.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였은즉 육체가 내게 할 수 있는 것을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5 그들이 날마다 내 말들을 왜곡하나니 악을 행하려는 그들의 모든 생각이 나를 대적하나이다.6 그들이 내 혼을 기다리며 함께 모여 자기를 숨기고 내 발걸음을 지켜보나이다.7 그들이 불법을 써서 피하겠나이까? 오 하나님이여, 주의 분노로 그 백성을 내던지소서.8 내가 떠도는 것을 주께서 세시오니 내 눈물들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그것들이 주의 책에 있지 아니하나이까?9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하나님께서 내 편이시므로 이것을 내가 아나이다.10 하나님 안에서 내가 그분의 말씀을 찬양하리니 곧 주 안에서 내가 그분의 말씀을 찬양하리라.11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였은즉 사람이 내게 할 수 있는 것을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리로다.12 오 하나님이여, 주께 드리는 서원들이 내게 있사온즉 내가 주께 찬양을 돌리리니13 주께서 내 혼을 사망에서 건지셨나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산 자들의 빛 가운데로 다니게 하시려고 주께서 내 발을 건지사 넘어지지 않게 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눈물을 병에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주님 안에서 성취하려는 소원들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운 순간에 다음의 노래를 들어 보십시오. 나를 꼭 잡고 인도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소원과 함께 가사를 음미해 보십시오. 물론 위에 있는 시편 56편을 많이 읽고 묵상한 뒤 들어야 은혜가 될 것입니다. 참고로 파주에 계시는 이영호 목사님 사모님께서 예전에 이 노래를 부른 것이 기억납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나중에 다시 듣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Take my hand, precious Lord
When my way groweth drear
Precious Lord, linger near-ear
When my li-ight is almost gone
Hear my cry, hear my call
Hold my ha-and lest I fa-all
Take my hand, precious Lor-ord
Lead me on
Precious Lord, take my hand
Lead me on, let me sta-and
I am tired, Im weak, I am worn
Through the storm, through the night
Lead me on to the li-ight
Take my ha-and, precious Lor-ord
Lead me home
When my work is all done
And my race here is ru-un
Let me see-ee by the light
Thou hast shown
That fair city so bright
Where the lantern is the li-ight
Take my ha-and, precious Lor-ord
Lead me on
Precious Lord, take my hand
Lead me on, let me sta-and
I am tired, Im weak, I am worn
Through the storm, through the night
Lead me on to the li-ight
Take my ha-and, precious Lor-ord
Lead me home
2009-05-01 17:42:29 | 관리자
간절히 원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나비가 되죠?”“날기를 간절히 원해야 돼. 하나의 애벌레로 사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간절하게.”“죽어야 한다는 뜻인가요?”“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겉모습은 죽은 듯이 보여도 참모습은 여전히 살아 있단다. 삶의 모습은 바뀌지만, 목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나비가 되어 보지도 못하고 죽는 애벌레들하고는 다르단다.”
트리나 포울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렇게 현실의 안락함을 포기할 정도로 간절히 원한다면 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조용히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정말로 무엇을 혹은 어떻게 되기를 원하는가?"를.
저는 나이가 점점 들면서 좋은 인격을 갖춘 크리스천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전에는 지식 중심의 믿음 생활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야 한다는 것이 제 소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갈구해야 합니다. 나를 누르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령 충만을 갈구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야 성경의 글자가 살아 있는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서 일하게 됩니다. 토저의 말대로 '불타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추구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이런 것이 참된 근본주의입니다. 이런 펀더멘탈이 강해야 내가 살고 교회가 삽니다. 기억하십시오, 뜨겁게 주님을 추구해야만 함을.
2009-05-01 17:40:47 | 관리자
골프를 잘 치자(?)
저는 전혀 골프를 못합니다. 그런데 요 몇년 사이 주변에는 큰 골프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골프 이야기를 하고 골프 여행 계획을 세우고 합니다. 그러다 보닌 자연히 옆에서 동료들이 골프 장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곤 합니다. 새로 골프를 치는 사람들은 대개 장비가 좋아야 하는 줄 알고 비싼 가격으로 장비를 구입합니다. 그러고도 못치면 장비 탓을 합니다. 그런데 골프 고수들이 그때마다 주는 교훈은 골프 채가 아무리 좋아도 골프를 못치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근본주의, 침례교회, 바른 교리 등은 모두 좋은 골프 채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채를 가지고 있어도 골프를 못치면 소용이 없습니다. 일반 교회 성도들의 경우 골프 채는 조금 나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골프를 못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골프 채 자랑을 접고 이제는 골프를 잘 쳐야 합니다. 좋은 채로 골프를 잘 치지 못하면 소용이 없지요. 그래서 채는 좋은데 골프는 못치는 경우와 채는 좀 나빠도 골프를 잘치는 경우 중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물으면 참으로 고민이 됩니다. 물론 좋은 채로 골프를 잘 치는 것이 가장 좋겠지요. 그런데 제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게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글자와 교리에 갇혀서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사람과 교회의 부흥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다만 머리의 부흥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가분수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사람을 나누고 가르고 분열하게 만듭니다. 원래는 그렇지 않아야 하는데 실제는 대개 그렇습니다. 이것은 마치 율법과 같습니다. 율법도 원래는 선한 것인데 죄가 기회를 타서 나쁜 것으로 변질되곤 합니다.
교회 안에서 상식이 통하고 세상의 기본적인 법칙이 통해야 하며 특히 주축 멤버들이 기본적으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목사와 성도 모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또 그리스도는 흥하고 나는 쇠해야 합니다. 그런데 글자와 교리에 갇히면 이것이 안 되더군요. 저 자신의 경험입니다.
이제는 목사부터 성도에 이르기까지 바른 것을 가지고 바르게 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와 가정과 교회에 부훙과 활력이 없습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메마른 채로 완전히 말라 비틀어진 채 겨우 겨우 살다가 가게 됩니다. 이 땅의 삶에서도 기쁨이 있고 부흥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킹제임스 성경을 보는데 나는 이렇게 냉냉할까? 왜 우리 교회는 근본주의를 지향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냉냉할까?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머리뿐만 아니라 감성(affection)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즉 가슴이 뜨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찬송가 507장을 깊이 음미해 보기 바랍니다. 너무 좋지 않습니까? 이대로 해 봅시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주 모습 내 눈에 안 보이며 그 음성 내 귀에 안 들려도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가는 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 맘에 불평이 없어짐은십자가 고난을 이겨내신 주님의 마음 본받음이라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주 예수 세상에 다시 오실 그 날엔 뭇 성도 변화하여주님의 빛나는 그 형상을 다 함께 보며 주 찬양하리
주님의 마음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2009-05-01 17:40:02 | 관리자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은 뒤 처음으로 교회에 갔습니다. 구원의 감격에 빠져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천사일 것이라고 상상하며 노란 넥타이를 매고 예배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가만히 살펴보니 실제는 자기의 이상과 너무 많이 다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천사들은 많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전혀 닮고 싶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이게 실제 이 땅에 존재하는 대부분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의 리더들도 이 사람의 이상적인 착각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성도들이 모두 자기를 칭찬해 주기를 바라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나 다른 리더들이 이것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대하는 일에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리더들이 이런 함정에서 빠져나오려면 직언을 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즉 리더를 모니터링하고 사랑으로 직언을 해 주지 않으면 그 리더는 패망에 빠지기 쉽습니다. 교회니까 안 그럴꺼야 하고 생각하면 큰코 다치기 쉽습니다. 교회라는 것을 알게 모르게 악용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떳떳하다고 하는데 누가 무슨 말을 합니까? 그러므로 목사든 집사든 교사든 교회의 리더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잘 파악하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도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건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충정어린 마음에서, 사랑으로 잘못을 혹은 잘못될지 모르는 요소들을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서로의 신앙의 발전을 위해 또 교회의 성장을 위해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상누각이 될지 모릅니다.
다음은 어제 소개한 위대한 리더처럼 말하라에서 발취한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글이라 올리니 참조하기 바랍니다.
직언하는 아랫사람이 있는가?
자신을 좋아하거나 자신에 대해 배타적 감정이 없는 사람을 포용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자신과 스타일이 다르고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 자신의 방식에 대해 자주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 잘못된 일에 대해서 거침없이 쓴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기꺼이 포용하고 관용을 베풀 수 있는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쉽지 않은 그것이 진정한 포용이다.
평범한 샐러리맨은 물론 기업의 최고경영자도 가끔은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회의에 빠질 때가 있을 것이다. 잘 모르겠다 싶을 때는 “지금 회사에서 나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부하가 있는가?” 라고 반문하면 답이 나온다.
내가 아무리 뛰어난 리더라고 해도 나 혼자만 잘 해서 성공하는 일은 드물다. 대체로 한 사람의 훌륭한 인재 곁에는 차세대 인재인 충성스런 참모가 든든히 받쳐주고 있게 마련이다. 나에게 아부하는 참모가 아니라 자기 밥줄을 틀어쥐고 있는 내게도 쓴 소리를 할 줄 알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며 보좌해 주는 인재 말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승리한 사람들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인맥을 아주 중요시하는 나라다. 동료나 선배, 상사, 거래처 등 그 모든 인간관계 중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 부하직원이나 후배의 존재는 특히 중요하다. 부하직원이나 후배는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부하직원의 눈은 날카롭다. 업무적으로든 인간적인 면에서든 부하직원은 분명 한 가지 이상 존경할 부분을 가진 리더를 따르게 되어 있다. 리더 역시 빠르게 성장, 발전하며 따르는 부하직원이 있다면 그 부하직원을 의식하면서 자기 위치를 지키기 위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하직원은 나를 키워주는 또 하나의 스승이라 할 수 있다.
눈빛을 반짝이며 나를 따르는 부하직원이 눈에 띄면 그를 거울로 삼아라. 혹 당돌하다 싶을 정도로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귀를 열고 들어라. 리더에게 달콤한 소리보다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대단히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그 만큼 당신의 인격과 당신의 그릇을 신뢰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에 부응하여 수용과 조화를 중시하는 리더의 탁월한 면모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2009-05-01 17:38:23 | 관리자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면서 특별히 불쌍히 여기고 사랑을 베푼 무리들 - 주로 가나한 자들, 세리, 창녀 등의 소외 계층 - 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사정에 귀를 기울이였습니다. 즉 그들과 공감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인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우리가 교회나 사회에서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면 남의 말을 경청하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이 점에서 늘 실패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남편들은 아내의 말을 경청하지 않아 문제에 빠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리더들은 특히 듣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글을 쓰면서 제 자신에게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공해야 남을 리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람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정을 들어 주십니다. 귀담아 들어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저도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며 '위대한 리더처럼 말하라'(전미옥)에서 한 부분을 따서 올립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 판단해 보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남의 말을 듣는 일에서 확연히 다른 모습의 진보된 크리스천이 됩시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다섯 가지 스타일
- 무시하기 스타일: 내 생각이 늘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바탕에 있기 때문에 남이 이야기하는 것을 전혀 듣지 않는다.
- 듣는 척하기 스타일: 상대방을 인정하고 마치 듣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상대가 말하는 내용 중 10% 정도만 듣는다.
- 선택적 듣기 스타일: 상사가 부하의 말을 들을 때 자주 보이는 태도로, 어떤 것은 듣고 어떤 것은 안 듣는 것이다. 민주적 리더십보다는 전체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다. 상대가 말하는 내용 중 30% 정도를 듣는 셈이다.
- 적극적 듣기 스타일: 상대가 말을 하면 손짓 발짓해가며 맞장구를 쳐주고 적극적으로 들어 준다. 그러나 남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지만 귀로만 듣기 때문에 상대가 말한 내용 중 70% 정도만 듣는 데 그친다. 마음으로는 듣지 않기 때문이다.
- 공감적 듣기 스타일: 귀와 눈 그리고 온 가슴으로 듣는, 가장 바람직한 듣기 자세다. 상대의 말을 거의 90% 이상 듣는다. 연애를 할 때처럼 그야말로 ‘내 이야기’처럼 맘을 활짝 열고 듣는다.
2009-05-01 17:37:45 | 관리자
지난 번에 말씀 드린 대로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리더십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근본주의 진영에 들어와서 가만히 살펴보니 자기가 처한 분야에서 으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많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패기가 없이 겨우 직장을 얻어서 - 그것도 구걸하다시피 - 비실비실대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교회에는 대개 자매들이 형제들보다 교육, 믿음 면에서 더 뛰어난 경우가 많고 그래서 자매들은 결혼하는 데 어려움을 많이 당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데서는 환난 통과를 주장하면서 젊은이들이 세상 일에 열정을 쏟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산으로 들어가게 하는 일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일터에 있든지 산에 있든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면 다 데려가십니다. 산에 들어 가려고 애쓰지 말고 이 세상 일터에서, 가정에서 열심히 삽시다. 할렐루야!
사람은 한 번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쫀쫀하게 살다 가지 맙시다. 나는 가끔씩 비행기를 타고 가다 KBS TV 프로그램 - 이름은 모르고 주일 저녁에 하는 것으로 알고 있음 - 에서 가수들이 노래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가수들보다 그 뒤에서 춤추는 사람들이 더 열심이더군요. 아니 그렇게 별것 아닌 것 즉 TV에 얼굴 한 번 비치는 것을 위해 온 정열을 쏟고 일 주일 내내 그 일에 매진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크리스천들 - 특히 형제들 - 좀 각성해야 하지 않읗까요? 그런지 안그런지 한 번 TV 보기 바랍니다. 우리 제발 데데하게 살고 데데하게 믿지 맙시다. 목사는 최선을 다해서 심혈을 기울여 설교를 준비하고 열정적으로 설교해서 성도들을 기쁘게 해 주어야겠다고 어금니를 물고 거듭 거듭 다짐해야 합니다. 성도들도 어떻게 하든지 주님을 흥하게 하는 일에 온 정성을 쏟아야겠다고 거듭거듭 다짐해야 합니다. 이게 도대체 뭡니까? 열심을 가지고 살고 열심으로 믿어야 주님의 복이 임합니다. 우리 모두 각성합시다.
저는 지난 금요일에 강남에서 회의가 있어 전철을 탔습니다. 김우중씨의 책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집어들고는 오고가면서 책 읽는 기쁨에 빠져 다 읽었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최근 들어 읽은 리더십 책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세상의 돈을 벌기 위해서도 이렇게 애를 쓰고 혼심의 노력을 기울이는데 우리가 정말로 중요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있고 그분의 일을 한다면 어떻게 이렇게 미지근하게 살 수 있습니까? 이거 무언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이제 으뜸이 됩시다. 주님을 섬기는 모든 일에서, 세상 일에서, 가정 일에서 으뜸이 됩시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너희가 상속 유업의 보상을 주에게서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3-24).
김우중씨의 글에서 한 부분을 인용했습니다. 부디 주님과 그분의 일을 위해 으뜸이 됩시다.
으뜸이 되라
6.25 때 우리 가족은 대구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아버지는 이미 납치되어 안 계셨고 형님들은 군에 입대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우리 집의 가장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나는 신문팔이로 나섰다. 그때 내 나이 열네 살이었다.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열네 살짜리 사내애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신문팔이조차도 당시 신문사에 근무하던 아버지의 옛 제자가 만들어 준 일거리였다. 그때는 신문팔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신문을 받아서 주로 팔던 곳은 방천 시장이었다. 나는 신문을 받아들면 중간에서는 한 장도 팔지 않고 방천 시장까지 달려갔다. 방천 시장에는 사람이 많은데 중간에 몇 장 파느라고 다른 사람에게 그 좋은 장소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중간에서 한두 장 파느라 시간을 허비하면 다른 사람이 앞질러서 나보다 먼저 방천 시장에 달려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신문을 파는 사람들 중에 항상 맨 먼저 방천 시장에 도착했다. 항상 1등이었다. 그러나 1등으로 도착한다고 해도 그 시장을 독차치할 수는 없었다. 신문을 한 장 팔면 거스름돈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내가 아무리 맨 먼저 도착하여 열심히 신문을 팔더라고 3분의 1쯤 파는 사이에 뒤에 따라온 아이가 나를 앞질러서 팔아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에 100장을 팔아야 네 식구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집에는 어머니와 두 명의 어린 동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더 효과적인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것은 거스름돈을 미리 삼각형으로 접어서 주머니에 잔뜩 넣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언제나 1등으로 도착해 신문과 거스름돈을 던져 주고 돈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니 시간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그 시장 전체에 내 신문만 팔수는 없었다. 한 3분의 2쯤 가다 보면 또 뒤에서 다른 아이가 쫓아와서 앞서 나가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한 방법은 아예 신문 값은 받지 않고 신문만을 던져주고 나서 나중에 그 길을 돌아오면서 느긋하게 신문 값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니까 이제 아무도 나를 뒤쫓아 올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그러다가 신문 값을 떼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한두 사람에게 떼이더라고 신문을 다 파는 편이 더 이익이라고 나는 계산했다. 또 그 당장에 못 받은 신문 값도 며칠 후에 만나서 대부분 다 받아낼 수 있었다. 몇 달 동안 내가 이런 식으로 신문을 팔자 다른 신문팔이는 그 곳에는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방천 시장을 나 혼자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분야에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한번 도전했으면 반드시 으뜸이 되어야 한다는 나의 신념은 방천 시장의 신문팔이 시절에 이미 생겼는지 모르겠다.나는 이제껏 사업을 하면서 늘 으뜸이 되고자 애썼다. 물론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지만, 그런 대로 자랑할 만한 성과도 많이 거두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최선을 다한다. 그렇기 때문에 설혹 1등은 못한다 하더라도 2등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나는 안 돼.”, “나는 무능해”, “나는 1등을 할 실력이 못 돼.” 하고 포기해 버리면 그 사람은 어떤 일도 해내지 못하고 만다.
어떤 일을 하느냐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느냐이다. 정치를 하든 사업을 하든 또는 예술가가 되든 학자가 되든 정말로 자기가 택한 그 분야에서 으뜸이 되고자 노력하여야 한다.
1등을 하려고 애써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뒤쳐져도 상관없고 앞서는 것에 별로 흥미 없는, 그런 우유부단한 사람이 되지 말라. 목표는 언제나 1등이다. 1등을 목표로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최선을 다한 만큼 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1등을 차지한 사람은 으뜸이 되고자 최선을 다해 노력한 사람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저 놀면서 대충해서 1등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헝가리 출신의 유명한 축구 선수가 오래 전에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뒤 기자 회견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우승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그 선수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공을 찹니다. 공을 차고 있지 않을 때는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을 때는 축구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축구 선수가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아무나 1등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다가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 살아 온 사람만이 그 분야의 1등이 될 수 있다. 기적이란 없다. 대우의 급속한 성장을 두고 흔히들 ‘기적’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으뜸이 되기 위해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땀을 바쳐 왔는지를 몰라서 하는 소리이다.
나는 그리고 대우는 언제나 으뜸이 되려고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대우 가족들에게 어느 분야에서나 일단 도전을 했으면 반드시 1등이 되라고 격려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항상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고지를 향해 전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후회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의 목표는 언제나 1등이어야 한다. 어떤 분야에서나 으뜸이 되어야 한다. 미리부터 1등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려고 하지 말라.그것은 관용이 아니라 비굴이다. 그것은 희생 정신이 아니라 열등 의식이다. 행여라도 “너는 2등이면 족해.” 라든가, “내 분수에 1등은 무슨” 이라고 말하지 말라.1등의 자리는 바로 나의 것이라고, 1등은 바로 나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것이라고 마음먹어 보라.그리고 최선을 다하라. 반드시 보람이 있을 것이다.
2009-05-01 17:36:10 | 관리자
어려서부터 부모님들이 '공부해라, 공부해라!'해서 공부에 노이로제가 걸린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크리스천들에게 공부하라고 말합니다. '공부하다'는 영어로 'study'인데 킹제임스 성경에는 이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구절은 딤후2:15입니다.
Study to shew thyself approved unto God, a workman that needeth not to be ashamed, rightly dividing the word of truth(2 Tim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연구하다'로 번역했는데 원래 이 말은 '부지런히, 열심히 하라'는 뜻입니다. 크리스천들은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게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고 성경의 권고입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도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여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노라. 우리가 들으니 너희 가운데 질서 없이 걸으며 전혀 일하지 아니하고 참견하기만 좋아하는 자들이 더러 있다 하는도다. 이제 그러한 자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우리가 명령하며 권면하노니 그들은 조용히 일하고 자기 빵을 먹을지니라(살후3:10-12).
우리의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열심히 일합시다. 이것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네 손이 해야 할 일을 얻는 대로 네 힘을 다해 그것을 하라. 네가 가게 될 무덤 속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느니라(전9:10).
사람은 한 번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가게 됩니다. 그러니 혼신의 힘을 다해 바른 것을 추구하고 주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다가 부르시면 가야겠다고 굳게 작정하십시오. 또 자녀들에게도 철저한 정신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적인 모습 뿐만 아니라 생각과 속사람도 닮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공부하고 생각하고 바르게 사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김우중씨의 책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공부에 대한 좋은 글이 있어서 한 부분을 인용했습니다. 부디 주님과 그분의 일을 위해 열심히 삽시다.
취미가 무엇입니까?
나는 한 해에 200일이 넘는 날을 해외에서 보낸다.또 국내에서의 잦은 지방 출장까지 계산하면 집에서 지내는 늘은 더욱 줄어든다.그러다보니 내 생일은 물론 아내나 아이들의 생일까지도 깜박 잊고 넘어가기 일쑤다.
나는 누구보다도 바쁘게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처럼 나를 바쁘게 살도록 만드는 일감들을 앞에 놓고 오히려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더러 이런 나를 가리켜 일에 미쳤다고 말한다.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 아직까지 휴일을 하루도 가져 본 적이 없다. 가족과 함께 해수욕장을 가 본 기억도 없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후회한 적은 없다.
한 가지 일에 흠뻑 빠지지 않고 성공한 사람을 나는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 한 가지 일에 미칠 정도로 몰두하고서 실패한 사람을 나는 또한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김우중처럼 그렇게 일만 붙잡고 있으면 세상사는 재미가 있겠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적당히 놀아 가면서 살아야지 그렇게 일의 노예가 돼 버리고 나면 무슨 낙이 있겠느냐고 딱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참으로 일하는 즐거움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일에 몰두한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사람은, 특히 젊은이는 일에 몰두해 있을 때의 모습이 가장 보기 좋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소리이다. 어떤 일을 이루었을 때 가슴을 뿌듯하게 채워 오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그런데 왜 일하는 것이 짜증스럽고 지겹고 귀찮을까? 최근에 한 연구팀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요즘 우리나라의 고교생들은 일을 매우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을 ‘아니꼽다’, ‘스트레스’, ‘지겹다’, ‘억압감을 느낀다.' 와 같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학생들이 23.5퍼센트로, 일을 긍정적으로 보는 11.4퍼센트에 비해 두 배 이상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걸까?
그것은 일을 그저 생계의 수단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오직 먹고 살기 위해서만 일터에 나가는 사람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위장 속에 집어넣을 먹이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노릇인가? 더구나 큰 꿈과 야망에 가슴이 불같이 뜨거워야 할 젊은이가 그렇듯 안일한 정신 상태로 살고 있다면 정말 불행한 일이다. 물론 ‘일’에 그와 같은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긴 하지만 가지의 노동, 자기의 수고가 오로지 돈으로 환산될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모독하는 것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가 ‘일’ 에 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과 보람을 느낄 때 일은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일이 즐거워질 때 자부심과 보람은 더욱 뿌듯하게 가슴을 채운다.
공부도 마찬가지이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공부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몰두해야 한다. 책상 앞에 앉아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책을 읽는 학생의 모습은 보기가 좋다. 공부에 전념하고 있을 때 그 학생의 모습에선 빛이 난다. 무엇엔가 몰두해 있는 사람은 그처럼 아름다운 법이다.
그런데 억지로 마지못해 공부하는 학생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입에 풀칠을 하려고 내키지 않는 일터에 나온 사람만큼이나 추하고 안타깝고 비참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하면서 일하는 즐거움을 느껴야 하듯이 학생도 공부하는 즐거움을 스스로 발견해 내야 한다. 남이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보라. 남의 일을 떠맡은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이라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수업에 임하는 자세부터가 달라질 것이다. 공부가 재미있게 여겨질 것이다.
돈 때문에 일하거나 석차 때문에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 더 나아가 내가 속한 공동체의 복지를 위해 일하고 공부하는 것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어 보라. 어떻게 일이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공부가 하기 싫을 수 있겠는가?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난감해진다. 사실 취미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내게는 없다. 더구나 취미라고 하는 것이 그저 남은 시간을 때우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여길 때는 더욱 그렇다. 바둑을 조금 두지만 즐기는 편은 아니니, 바둑이 취미라고 하면 정말로 바둑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미안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그 흔한 골프 한 번 쳐보질 않았다. 다른 운동도 특별히 하는 것이 없다. 한가하게 연극이나 음악회 같은 데를 찾을 여유는 더욱 없다.
만일에 취미라고 하는 것을, 한 사람이 외부의 압력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그러니까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서 기꺼이 행하는 어떤 행위라고 정의한다면, 어쩔 수 없이 나의 취미는 ‘일하는 것’ 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나는 한 번도 일을 억지로 해 본 적이 없으며 누가 시켜서 한 적도 없고 일 속에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 있으니 취미가 아니고 무엇인가?
일이나 공부를 과업으로 여기는 데서 괴로움이 싹트는 것 같다. 그것을 취미로 삼으면 취미이기 때문에 재미가 있을 것이다. 재미가 있으니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게 되면 저절로 능률이 오른다. 능률이 오르면 결과가 좋아지는 것인 정해진 이치이다. 그렇게 되면 무엇인가를 이룬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으로 더 없이 행복해질 것이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기쁨 가운데 성취감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취미처럼 자발적으로, 기쁨을 가지고 일한다면 사업을 하는 사람은 작은 회사를 점점 키울 수 있을 것이고 시설을 하나 둘씩 늘릴 수 있을 것이다.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성적이 부쩍부쩍 올라서 그 대가로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거든 한 번 시도해 보기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한 가지 일에 미칠 정도로 몰두하지 않고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다. 한 가지 일에 미칠 정도로 몰두하고서 실패하기란 그만큼 어려운 법이다.
사업을 시작하기 이전 7년 동안 나는 한성 실업이라는 먼 친척 아저씨네 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다. 물론 친척이라지만 나는 월급쟁이였다. 그러나 나는 마치 주인처럼 내 할 일을 내가 알아서 처리했으며, 누군가 내게 명하거나 시키기 전에 일거리를 찾아다니며 했다. 휴일은커녕 늦잠도 자지 못했다. 성취하고 난 후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뿌듯한 행복감 때문에 나는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한다.
이런 내가 불행한가? 골프를 좀 못 쳐서? 신나는 영화 한두 편을 못 봐서? 그 재미 못지않게 해외에서 만만치 않은 인물들과 협상 테이블에 앉아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큰 주문을 따 냈을 때 느끼게 되는 재미도 여간 좋은 게 아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일을 가지고 접근할 때는 마음이 설레고, 마치 중요한 시합에 임하는 선수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도 한다. 그 시합이 어렵고 대규모일수록 내 주의력은 집중되며 흥미로움도 배가되는 것이다. 상대방의 숨겨진 카드를 읽어 내고, 내 뜻대로 협상을 성공으로 이끌었을 때의 승리감, 일을 원만히 해결하여 서로가 만족스런 얼굴로 악수할 때의 그 신선한 기쁨은 내게 솟구치는 활력과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
올해도 나는 가족과 함께 집에서 생일을 보내겠다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약속할 수가 없다. 나는 그 점이 늘 미안하고 이런 남편과 아버지를 이해해 주는 식구들이 고맙다.
2009-05-01 16:30:33 | 관리자
형제님은 고독을 아십니까?
다음은 토저의 글입니다. 규장에서 나온 임재 체험(토저 지음)을 보기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그들이 이 세상에 매우 잘 적응하여 편안하게 산다는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회'에 편히 적응하려고 노력하다가 그들은 그들만의 순례자적 특징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세상의 잘못된 도덕적 구조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그들을 보내셨지만 그들은 오히려 그 구조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려 세상은 그들을 인정해 주고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이다.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잠자기 전에 간단히 글을 드립니다. 샬롬.
2009-05-01 16:29:13 | 관리자
지난 학기에는 매주 아내와 함께 공자와 맹자 등을 가르치는 교양 수업을 2시간씩 저희 학교에서 들었습니다. 오랫만에 접하는 고전 공부는 김영 교수님의 매끈하고 성실한 강의로 인해 매우 신선했습니다. 물론 인생 공부도 많이 했고 사람을 보는 눈을 길렀으며 또 중국의 현인들의 사상도 많이 알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다음은 누구나 잘 아는 공자의 말입니다.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유붕자원래, 불역락호?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이것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배우고 그것을 계속해서 실천해나갈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뜻을 함께하는 좋은 친구들이 멀리서부터 찾아와 준다면 그 얼마나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옳은 길을 변함없이 갈 수 있다면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군자가 아니겠는가?
디모데 스쿨을 시작한 뒤 과연 사람들이 성경을 배우러 올까 하는 의구심도 생겼고 특히 어제는 밤에 비가 오고 추워서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을 가진 채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제가 맡은 바를 성실하게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녁 6시쯤에 전화가 왔습니다. 전주에 사는 K1 목사였습니다. 스쿨을 방문하려고 K2 목사님과 함께 전주에서 올라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비가 오고 사람이 많이 올 것 같지 않으니 주님께서 멀리 전주에서 응원군을 보내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가 넘쳤습니다. 또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12명이 와서 같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때에 공자의 말의 첫 부분이 생각났습니다.
배우고 그것을 계속해서 실천해나갈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날이 궂어도 성경을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모인 성도들이 있어서 정말로 기뻤습니다. 성경을 배우고 마음을 나누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스쿨이 끝나고 두 분과 함께 집에 가서 1시까지 이야기를 하면서 제 아내와 함께 너무나 즐거운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분이 한 목소리로 "아내를 기쁘게 하지 않는 목회를 하는 목사는 목회를 그만 두어야 한다"는 준엄한 메시지를 주어서 제 아내가 크게 기뻐했고 저도 죽을 때까지 귀에 담아 두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참고로 아내는 크게 은혜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와서 이 말을 꼭 상기시켜 줄 것을 그분들에게 부탁하더군요.) 오늘 아침에 이들을 보내면서 공자의 말의 두 번째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뜻을 함께하는 좋은 친구들이 멀리서부터 찾아와 준다면 그 얼마나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성경은 웃는 자들과 함께 웃어 주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 주라고 했습니다. 나도 이런 자세로 성도들과 교제하고 나누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이게 성도들의 모임이고 교회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두 분께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에는 어제 성경 공부로 은혜 받은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아내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내는 사람 걱정은 말고 내가 해야 할 일 즉 말씀을 먹고 온 몸으로 소화해서 성도들에게 전하는 일에만 신경을 쓰라고 충고를 했습니다. 이에 공자의 말의 세 번째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옳은 길을 변함없이 갈 수 있다면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군자가 아니겠는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도 이와 같이 고백했을진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사람이 사람의 의견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것을 느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현인들 이상의 꿈과 소망과 인품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또 오늘 저녁에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을 다 읽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책이 꿀같이 다네요. 저는 이 사람의 사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학문을 - 배움을 - 추구하기 위해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인생을 몰고가는 저력은 본받을 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학자 이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잠자리에 들기 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글을 씁니다. God bless you!
2009-05-01 16:28:27 | 관리자
예수님은 우리보고 세상의 -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무슨 큰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작은 일부터 예의를 갖추어 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기자의 글을 보고 저도 전적으로 동감하기에 올립니다. 혹시 예수 믿는 당신도 이렇게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닙니까? 우리부터 고칩시다. 산뜻한 맛을 주는 그리스도인, 그것이 주님이 원하는 것 아닐까요?
다음은 한 기자가 적은 글입니다.
어제 밤 9시30분에 부산역을 출발한 KTX 특실에 올랐다. 출발하자 말자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 '실내에선 전화를 걸지 맙시다' 따위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동대구역에서 20세 전후의 여자 두 사람이 올라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한 여자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대전역까지 오는 동안 쉬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옆 자리에 앉은 친구한테 "좀 조용히 하라"고 말했더니 말소리는 다소 약해졌지만 전화는 끊지 않았다. 바깥에 나가서 건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했다. 20세 전후의 나이에 특실을 탈 정도이면 수입이 많은 직장에 다니든지 부모가 부자일 것이다. 다행히 대전역에서 두 여자는 내렸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뚱뚱한 아줌마 두 사람이 탔다. 두 사람은 목소리가 문제였다.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실내가 쩡쩡 울렸다. 그 큰 목소리로 휴대전화를 걸고 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건 완전히 교정 불능의 수준이었다. 성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목소리를 작게 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크다고 한번도 경고를 받아 본 적이 없는 듯했다. 기고만장 그 자체였다. 야간열차여서 승객들은 거의가 잠을 자고 있었다. 두 아줌마의 목소리는 끝에서 끝까지 들렸다. 충고도 희망이 있을 때 하는 것이지, 저 수준이면 포기하는 것이 낫다. 다행히 두 아줌마는 천안역에서 내렸다. 20분 달리는 데 특실을 탈 정도라면 생활 수준이 상층에 속할 것이다. 오늘 내가 만난 문제적 인물 네 사람은 남한테 폐를 끼치고도 폐를 끼친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한국 교육의 실패를 보는 듯했다. 그런 아줌마 아래서 그런 20대 딸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교양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수준의 예절이고 언동이다. 민주주의를 잘못 해석하면 깽판 치는 자유를 뜻하는 것으로 여긴다. 한국 보수층의 자정 항목 중에서 예절도 들어가야 할 것이다. 예의 없는 보수층은 보수의 자격이 없다. 보수는 역사와 전통, 미풍양속과 예절감각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서울역에서 내려 집까지 모범택시를 탔다. 요금이 5100원이었다. 1만원짜리를 내면서 "4000원만 주세요"라고 했다. 택시 기사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없이 1000원짜리 네 장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으로 건네주었다(조갑제 기자).
2009-05-01 16:27:42 | 관리자
부끄럽지만 저는 독립침례교회의 목사입니다. 또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성경도 여러 차례 읽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공자의 글을 인용하고 불교의 인생관을 지지하는 듯한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책 - 학문의 즐거움 - 을 읽고 또 믿지도 않는 김우중이라는 사람의 글을 좋다고 하고 더더욱 장로교 선조들이 기록한 책들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고 추천하자 의아해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근본주의 침례교 목사라는 사람이 이렇게 타락할 수 있는가 하고 말하면서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 사이트에 접근하는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저의 생각과 글에 공감하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이 사람이 어느 정도 타락했는지 살펴보고 자기 담임 목사나 근본주의자들에게 비난거리로 알리려는 부류입니다. 즉 후자는 당신 일이 잘되는지 두고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지요.
오늘은 후자의 부류에게 권고의 글을 드립니다. 우물안의 개구리가 되지 마십시오.
자기들이 정해 놓은 틀 안에 사람들을 가두고 그것의 밖은 보지 못하게 만드는 시스템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이단들이 이런 시스템을 운영합니다. 멤버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자기들과 다르면 비난하기에 바쁩니다. 저 역시 한 때 이런 시스템을 운영한 적이 있었기에 이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획일화 된 그런 틀에 묶여서 넓은 세상과 성경을 보지 못합니까? 예수님은 독립침례교인들만의 예수님입니까? 놀랍게도 이렇게 믿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장로교인들과 감리교인들의 예수님도 됩니다. 바른 교회관을 갖지 못한 채 우리만 바른 교회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데 도대체 어디서 그처럼 두둑한 배짱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진리를 허락하셨습니다. 지난 학기에 들은 중국 고전을 살펴보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얻는 보편적 지혜는 거기에도 넘쳐납니다. 그리스, 로마 문학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주 공간의 해와 달과 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반 계시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 믿으니까 이런 것은 전혀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그러면 왜 학교에 갑니까? 대학 교육은 왜 받습니까? 이런 극단적인 생각에 매이게 되면 자기만 옳고 남은 다 틀린 것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무식하다, 교만하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치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자기 착각은 아닐까요?
훌륭한 목사치고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읽지 않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 만으로 족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믿지 마십시오. 게으른 것을 커버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책을 많이 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 참된 진리가 있는데 공자, 맹자, 김우중,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어떻게 그런 진리를 빼앗을 수 있습니까? 하지만 그들의 삶을 통해 얻은 보편적 진리는 예수님을 믿는 내게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유익하게 작용합니다. 왜 그런 저자들을 무서워합니까? 내 안에 유일한 진리가 있는데 무엇이 그리 무섭습니까?
최근에 어떤 신실한 형제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형제는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일은 반드시 지역 교회가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즉 신학교, 성경 학교, 크리스천 스쿨, 성경 번역/배포, 창조과학사역 등 이 모든 것은 반드시 지역 교회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형제의 순수한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과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러면 지금 장로교에서 운영되는 신학교는 몽땅 다 틀린 것일까요? 그 가운데서 배출된 목사들은 다 틀린 것입니까? 그것들은 다 교단 신학교가 아닙니까? 저는 결코 그들이 모두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영어 킹제임스성경을 어떤 지역 교회가 번역했습니까? 아니면 국가의 왕이 명령하여 번역하게 했습니까? 종교개혁을 지역교회가 했습니까? 웨슬리, 무디의 부흥 사역이 지역 교회에서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지역 교회도 쓰고 개인도 쓰고 교단도 쓰고 심지어 고레스같이 믿지 않는 이교도 왕도 쓰십니다.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을 제한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칼빈주의자도 쓰시고 세대주의자도 쓰십니다. 그러므로 획일화 된 틀로 사람을 가두는 것은 대개 이단들이 하는 일이므로 성숙한 크리스천들은 여기서 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바른 크리스천으로 살려면 넓게 사고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다 수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고를 넓게 해야 바른 사람, 큰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고 크게 소망을 품기 바랍니다. 이 세상 지혜자들의 글을 읽고 인생을 배우기 바랍니다. 저는 요즘 사마천의 사기를 읽습니다. 이것은 생생한 인간 역사이기에 이것을 통해 동양의 인간들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목사는 폭넓은 독서를 통해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목사가 속이 좁으면 성도가 그렇게 되고 목사가 획일화 된 사고의 틀 속에 살면 성도도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넓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성경을 그대로 믿는 비블리시스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세상의 학문과 지혜와 문학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을 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을 통해 사람과 인생을 배우면서 더 넓은 교제을 하게 되고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좋은 문학 작품과 - 한국의 대표적 수필집들 - 기독교 고전을 읽기 바랍니다.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이 풍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제는 획일화 된 로보트 구조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과 저의 삶이 풍성해지기를 원합니다. 같이 노력합시다.
2009-05-01 16:26:12 | 관리자
사람들은 이것을 운(luck)이라고 불렀다.
낮에 열심히 일하고 밤에도 부지런히 일했다.노는 것과 많은 즐거움을 포기했다.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재미없는 책을 읽었다.승리를 얻기 위해 조금씩 선두로 나섰다.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꾸준히 노력했다.그러나 그가 승리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존 맥스웰의 성공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임).
“가치가 있는 성공에는 모두 가격표가 붙어 있다. 문제는 항상 그에 대한 대가, 즉 힘든 노동, 희생, 믿음, 그리고 인내 등을 기꺼이 지불하는가 하는 것이다.”라는 맥스웰의 지적처럼 성공을 위한 대가를 미리 지불하겠다는 각오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각오하고 말을 잘해서 능력 있게 복음을 전달해야겠다고 작정하면 주님께서 도와줄 것입니다.
2009-05-01 16:25:09 | 관리자
요즘 저는 우리말과 글을 바르게 읽고 바르게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이 복음 선포에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바울도 모두 말을 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 감화 감동을 받으려면 말에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므로 당연히 한국 말을 잘해야 합니다. 요즘 영어를 배우러 미국 사람이 있는 교회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영어 중요하지요. 그런데 영어에 앞서 우리말을 잘 알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말로 시원스럽게 전달되는 설교에는 관심이 없고 아이들 영어를 위해 교회를 선택하는 사람들을 보면 심성이 어찌 그리 얄팍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혹시 교회를 마케팅 수단으로 혹은 자기 성장 장소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는 영적 성장을 위한 장소입니다.
설교자는 특히 말에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2000년 교회 역사를 통해 가장 훌흉한 설교자로 꼽히는 스펄전은 자기 말에 능통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고 말을 잘하는 것이 목사의 가장 큰 덕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설교 시간에 성도들이 졸면 그 책임은 성도들에게 있지 않고 목사에게 있습니다. 얼마나 냉담하게 설교를 하면 그 중요한 시간에 딴 생각하고 졸겠습니까? 우리 모두 말 연습에 힘을 씁시다.
다음은 저와 절친한 한 목사님이 보내 준 글입니다(일단 익명으로 올림). 이분도 한때 교리 교리 외치고 다녔지만 이제 목회의 본질을 깨달으면서 좋은 설교자가 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와 글이 변해야 교회가 삽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노력하는 형제들에게 하늘의 능력을 부어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언어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언어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자의 언어가 아니라, 듣는 자의 언어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보라, 말하는 이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우리 각 사람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우리 언어로 듣게 됨이 어찌된 일이냐?” [사도행전 2:7-8]
“…그들이 우리 언어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 [사도행전 2:11].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날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꾼들이 반드시 실행해야 할 좋은 본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1장을 읽으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잡아 죽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 군대 대장의 개입으로 목숨을 건진 후에, 바울 사도가 성난 군중 앞에서 히브리말로 설교하자, 그들은 한 동안 바울의 설교에 경청했습니다. “그가 히브리말로 자기들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들이 더욱 잠잠 하거늘…” [행 22:2]. 이것이 바로 듣는 자의 언어로 진리를 전파할 때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한국에 온지 8개월째를 접어드는 앳된 몰몬교 선교사와 짧은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혼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위한 그의 ‘열정’과 ‘헌신’ 앞에 내 자신이 오히려 분노와 함께 비장함을 느꼈습니다. 그의 열정은 서투른 한국말로 이야기하기를 힘들어하지 않는 모습에 흠뻑 묻어났습니다. 지옥의 자식들도 자신의 확신을 전파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사실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지옥의 자식들만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순수한 교회의 역사를 추적하다 보면, 주께서 맡기신 말씀을 주께서 보여주신 방법대로 전파하고자 전 생애를 걸었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생애를 읽어보면 주님을 위한 삶이야말로 최고의 인생임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일꾼들이 갖추어야 할 열정과 헌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그는 버마에서 사역한 선교사로서 영어-버마어 사전 편찬에 힘썼고, 버마어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버마에서 죽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그는 중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중국말을 하며, 중국옷을 입고서 중국식으로 살았습니다. 심지어 머리를 밀고 ‘변발’까지 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죽었습니다.
호레이스 언더우드 :그는 북장로교 선교사로 1885년 조선에 왔습니다. 그는 영한사전, 한영사전과 영어 문법책을 출판했으며,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했습니다. 우리를 이 땅에 왔던 초기 장로교 선교사들을 향해서 병원 짓고, 학교만 세웠다고 비방하지만 그들을 능가하는 열정과 헌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윌리암 케리 :그는 인도에서 사역한 인도선교의 아버지로서 수많은 인도 방언과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 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지역 언어 문법책과 사전 편찬 작업에 수고 했습니다.
윌리암 카메룬 타운젠 :“가장 훌륭한 선교사는 선교지 현지인의 언어로 쓰인 성경이다. 성경은 선교사들처럼 안식년도 필요 없고 외국인이라고 배척 받는 일도 없다.” 이와 같은 명언을 남긴 그는 위클리프 성경 번역 선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중미 과테말라 지역의 한 인디언의 한 마디가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신네 신이 그렇게 똑똑하다면서 우리말도 모릅니까?”
많은 신자들이 존경하는 충성스러운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선교 현장의 말과 글에 관심을 가졌고, 선교 현장의 말과 글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외국인이 현지 언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과 함께 현지 언어 사전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말과 글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혼이 담겨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주님의 일꾼들은 선교 현장에 있는 영혼들을 향한 자신들의 사랑을 그들이 사용하는 말과 글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한 언어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자기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헌신한 사람들을 잘 새겨두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며” [고린도전서 9:20]
2009-05-01 16:24:04 | 관리자
오늘 아침에는 저와 제 아내가 어려서부터 대학교까지 다니던 감리교회에 다녀왔습니다. 그 교회를 개척하고 수고하신 박점덕 목사님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즘은 장례식에 가는 일이 늘어나고 갈 때마다 인생을 많이 배웁니다. 그 목사님은 93세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제 아버님 표현에 따르면 '목사 중의 진실한 목사'였습니다. 요즘 목사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 이 목사님의 삶은 희생과 사랑 그리고 기쁨이었습니다.
아침에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라고 하는 타이틀은 가진 제 모습이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목사는 양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람인데 과연 내가 그러한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온 가족과 성도들 - 이분들은 정말로 30-40년 동안 제가 잊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 이 하늘가는 밝은 길이 찬양을 부르는데 정말 천국 같았습니다. 살면서 이런 예배를 통해 영혼을 정화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습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 하여도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내가 걱정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 중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내가 천성 바라보고 가까이 왔으니아버지의 영광 집에 가 쉴 맘 있도다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영광 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
어려운 일 당할 때 이 찬송의 가사를 음미해 보기 바랍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신 박점덕 목사님!
눈물 흘리며 기도해 주신 것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 역시 최선을 다해 그 길을 가렵니다. 사랑합니다.
다음은 이 찬송에 대한 유래입니다. 참조하기 바랍니다.
이 찬송은 외국 사람이 한국 성도들을 위하여 한국에서 작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곡을 작사한 분은 한국에 와서 사역하시던 윌리엄 스왈른이라는 미국 선교사입니다.
한국 이름은 소안련 선교사입니다. 48년간 한국에서 사역하신 분이십니다.
많이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아주 신실한 한국인의 친구였습니다.
한국을 사랑했으며 이 땅을 사랑했던 선교사입니다.
그 분은 일제치하에서 버림받고 고통받고 괴로워했던
한국 성도들의 모습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국 성도들의 모습에 너무도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붓을 들어 작사한 찬송이 바로 이 찬송입니다.
작사는 했는데 작곡할 실력이 없으니 스코틀랜드 민요에다가 붙인 찬송입니다.
결국 이 선교사는 일본사람들에게 추방을 당해 한국 땅을 떠나 갑니다.
그러나 이 분이 남긴 이 아름다운 찬양은 우리 성도들이 고통의 세월을 살 때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2009-05-01 16:20:11 | 관리자
부부가 무엇인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결혼한 지 만 24년이 지난 지금, 아이들을 생각하며 다음의 글을 또 읽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미물에 지나지 않는 황새만도 못한 사랑을 하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런데 실제로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 가정들이 거의 전쟁 상태로 지내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믿음이 효력을 나타내었으면 좋겠습니다. 결혼할 나이의 아이들과 함께 읽어 보기 바랍니다.
거룩한 본능 - 김규련
동해안 백암 온천에서 눈이 쌓인 구슬령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서면, 산수가 빼어난 고원 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겨우내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첫 고을인 수비면으로, 대구에서 오자면 차편으로 근 다섯 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다.
이 고을 어귀에는 높고 가파른 재가 있다. 이 재를 한팃재라 한다. 이 한팃재를 분수령으로 하여 마을 쪽에 내리는 눈은 왕피천으로 녹아 흘러 성류굴 앞을 지나 동해에 이르고, 재 밖으로 빗나간 눈은 낙동강으로 녹아 내려 남해로 흐른다.
어쩌다 나그네가 이곳을 찾게 되면, 그 우람한 태백산맥의 산세며 깊은 계곡, 한없이 펼쳐진 눈 덮인 울창한 숲, 맵고 맑은 공기, 얼음 바위 틈으로 흐르는 깨끗한 물,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연에 우선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발길을 돌려 그냥 되돌아간다면, 그는 무긍한 산정을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없으리라.
왕피천으로 흐르는 석간수를 따라 휘몰아치는 눈바람을 가르며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를 한 나절쯤 걸어가면, 화전민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여기저기 산비탈에 농가가 몇 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난한 자연 촌락이다. 이 근방에는 천혜의 절경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 고장 사람들 자신이, 그 절경을 이루는 웅장한 산이며 기암 절벽이며 눈 덮인 수림이며 산새며 바람 소리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이들의 주된 생업은 채소 농사와 담배 농사지만, 철 다라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송이버섯을 따들이기도 한다. 어쩌면, 바보가 아니면 달관한 사람만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첩첩 산중의 마을이다.
어느 해 봄, 이 마을에 뜻밖의 황새 한 쌍이 날아 들어왔다. 꿩이나 산비둘기가 아니면 부엉이나 매 같은 산새들만 보아 온 이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그 황새가 신기했다. 희고 큰 날개를 여유 있게 훨훨 흔들며 노송 위를 짝을 지어 유유히 날아다니는 품이 정말 대견스러웠다. 붉은 주둥이와 긴 목, 새하얀 털로 날개 밑으로 쭉 뻗어 내린 검붉은 두 다리, 황새의 자태는 과연 군자의 모습이었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빗물처럼 쏟아지는 늦은 봄의 오후, 마을 사람들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황새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이들은 이 황새가 길조라고 믿고, 무엇인가 막연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금년엔 찻길이 뚫리겠지, 올해는 꼭 전기가 들어오겠지 하고......,
그런데, 변이 생겼다. 낙엽이 질 무렵의 어느날 아침, 이 마을을 지나가던 밀렵군이 그 황새를 보고 총을 쏜 것이다. 총 소리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아침을 먹다 말고 황새 둥지가 있는 노송 숲으로 뛰어 모였다. 밀렵군은 도망을 가고, 황새 한 마리가 선지피를 흘리며 마른 억새풀 위에 쓰러져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황새는 한쪽 날개가 못 쓰게 될 만큼 다쳤으나, 죽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 황새를 안고 돌아와 온갖 정성을 다해 치료를 했다. 그리고, 날개의 상처가 아물고 힘을 되찾을 때까지 그 황새를 물레방앗간 옆 뜰에 있는 소나무 밑에 두고 보호하기로 했다. 이들은 곧 바로 둥우리도 만들고 모이 그릇도 마련했다. 그러나, 황새는 쓰러져 움직이질 못했다.
그 날 밤, 동장 집 사랑방에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밤이 이슥하도록 황새를 살려 볼 궁리를 했다. 그리고, 밀렵군을 저주하다가 드디어 인간의 잔인한 일면을 저마다 나름대로 매도 하기도 했다.
그 며칠 뒤였다. 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지창에 갈잎이 날려와 부딪쳤다. 그런데, 조금은 귀에 익은 황새의 울음소리. 탁탁탁 타르르 탁탁. 사랑방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은 가슴을 도리는 듯한 이 처절한 울음소리를 듣고 모두 말없이 마당으로 나왔다. 가을 밤, 밤 하늘에 찬란한 별들, 그 별빛에 흰 깃을 번쩍이며 황새 한 마리가 물레방앗간 주위를 이리저리 애타게 날고 있지 않은가. 총소리에 놀라 도망갔던 황새가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황새는 인제 인간이 두려워서, 쓰러져 누워 있는 자기의 짝한테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가슴이 뭉클해진 마을 사람들은 자리를 피해주려고 저마다 묵묵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황새는 연신 부리가 멍들어 부서지도록 울어 댔다. 탁탁탁 타르르 탁탁......, 그 날 밤엔 늦도록 화전민 후예들의 지붕 밑에 호롱불이 꺼지질 않았다. 날이 밝자, 이들은 그 부상당한 황새를 그들의 둥지가 있던 노송 아래에 가져다 놓았다. 가련한 황새가 사람이 없는 곳에서 서로 어울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며칠 뒤, 무서리가 몹시 내린 어느날 아침, 기이하고 처참한 변이 또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도 알뜰히 보살펴 온 그 한 쌍의 황새가 서로 목을 감고 싸늘하게 죽어 있지 않은가. 마을 사람들은 이 슬픈 광경을 보자 숙연해졌다. 그리고, 저마다 무엇을 느꼈음인지 착잡한 심정으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황새도 영물일까? 날씨는 무섭게 추워지는 데, 짝을 버리고 혼자 떠날 수 없었던 애절한 황새의 정, 조류에 따라서는 암수의 애정이 별스러운 놈도 있지만, 그것이 모두 그들의 생태요 본능이라 했다. 그러나, 하찮은 그 본능이 오늘 따라 인간의 종교보다 더 거룩하고 예술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2009-05-01 16:18:54 | 관리자
성경에 따라 바른 것을 믿고 있습니까?
믿음대로 행하고 있습니까?
오늘은 미국 유타 주의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다. 토저의 글을 읽으면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잘 믿고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는 무엇이 잘 믿는 것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다. 이곳은 몰몬교도들의 본부가 있는 곳이다. 그들의 역사 박물관과 템플을 방문하곤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런 시스템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좀처럼 믿기질 않는다. 그런데 수십만의 추종자가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다시 한 번 믿음의 힘이 놀라움을 느낀다. 성경대로 믿어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도시 자체가 영적으로 죽어 있음을 느끼고 있다. 많은 아이들이 입술에도 구멍을 뚫어 링을 매달고 다닌다. 인도에서 나온 힌두교 관습이 기독교 국가라는 곳에서 흥왕하고 있음을 보면서 이제 미국의 끝이 점점 더 가깝게 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런 현상은 예전에 덴버를 갔을 때도 느낀 적이 있다. 그곳도 뉴에이지가 판을 치는 도시가 아니던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차이를 확연히 느껴 볼 수 있는 여행이다.
2009-05-01 16:16:59 | 관리자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는 대단히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또 다시 미국 출장을 갔습니다. 6월과 7월에 출장을 가면서 두 번이나 교회를 비우게 되어 대단히 죄송했습니다. 이제 돌아왔으니 나와 내 가정과 성도들에게 좋은 영의 양식을 주도록 노력해야지요.
이번 여행을 하면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설교와 설교자를 가지고 갔습니다. 500여 페이지의 책을 들고 행복에 젖어서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기계공학 박사가 되면서 또 교수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전공 책을 봤지만 책을 요약해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설교와 설교자는 요약/정리해서 마음 속에 넣어야 할 책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나는 대로 요약해서 머리 속에 넣어야겠습니다.
설교가 교회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는 그분의 말씀에 100% 동감하면서 좋은 설교자가 되고 싶다는 야심찬 꿈도 가져 보았고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성경과 설교에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바른 성경과 바른 설교를 통해서 오는 부흥이야말로 하나님의 부흥입니다. 확신이 없이 달콤한 예화나 이야기만으로 사람의 혼을 홀리는 설교는 죽은(사탕발림) 설교이지요. 열정이 없는 설교 역시 죽은 것이지요. 듣는 사람이 다 압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설교했을까요? 바울의 심정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야겠다는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운동이 필요합니다.
이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며 하나님의 설교의 권능을 추구하는 목회자들이 이 땅에 넘쳐나면 좋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아이들의 앞날을 위해 좋은 설교자들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함당한 자들을 주시도록 같이 기도합시다.
확신에 찬 설교, 권능에 찬 설교가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입니다.
2009-05-01 16:15:21 | 관리자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우연히 잡지 코너에 있던 머니투데이라는 신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평생에 주식 투자 같은 것을 해 본 적이 없으므로 특별히 경제 신문을 보지 않는데 마침 비행기를 타서 이 신문이 있기에 읽게 되었습니다. 7월 21일자 신문의 첫 면에는 '다시 한 번 꿈을 보여주세요'라는 제목으로 이 대통령께 드리는 글이 있었습니다. 별 생각 없이 쭉 읽어 봤는데 내용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맨끝에 가서 제 눈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마감하는 글이 로마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내용도 좋았지만 끝이 너무 좋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글은 이명박 대통령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 모두가 특히 목사들이 관심을 두고 음미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련이 좀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오길 소망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 사회 생활을 하는 크리스천 기자가 이렇게 로마서를 인용한 용기에 감사를 드렸고 우리의 아이들이 앞으로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글을 올립니다.
다시 한 번 꿈을 보여주세요.
저는 요즘 이명박 대통령이 530여만표라는 사상 최대 표차로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경제'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꿈'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 오히려 빈곤을 느껴왔습니다. 청년 백수들이 백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조기 퇴직으로 거리로 몰리는 장년층이 늘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는 없고 밥 먹고 사는 일은 팍팍해졌습니다.
10대, 20대는 열심히 공부해도 좋은 직장에 들어가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잃어갔습니다. 중장년층은 열심히 일해도 실업자가 돼 긴긴 노후를 비참하게 보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쌓여 갔습니다.
지난해 대선 때 우리는 대통령에게서 꿈을 봤습니다. 이 대통령은 살아있는 신화입니다. 하루 한끼 먹기도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대기업 사장을 지내고 서울시장을 거쳐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대통령은 지금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워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산증인입니다.
가난해도 좋은 대학 갈 수 있다는 꿈, 노력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 꿈, 아이디어를 현실화시켜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는 꿈,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꿈, 노력하면 안락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는 꿈을 대통령에게서 봤습니다.
정당한 노력으로 성공하고 돈 번 사람들이 대우받는 분위기가 정착되리라는 꿈을 봤습니다. 때문에 대운하라는 논란 많은 공약을 내세웠어도, BBK 사건으로 도덕성에 흠집이 갔어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함께 일할 사람으로 타고난 부자, 부의 형성 과정이 의심스러운 부자, 대통령과 연고가 있는 대학이나 지역의 사람들만을 택했습니다. 우리는 "역시 출세하려면 돈이 있든지, 연고가 있어야 해"라는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지금은 못나고 어려워도 역전할 수 있는 기반, 정직한 성공이 대우받는 여건,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는 공정한 자본주의를 실현시켜주리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영어와 '비즈니스 프렌들리'만 강조할 뿐 가난한 학생들, 공부에 흥미가 없는 학생들, 취업이 불안한 젊은이들에게 어떠한 기회와 미래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은 "경제가 어렵다, 위기다" 말씀하시지만 어려운 건 벌어 먹고 사는 우리들이 더 잘 압니다.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은 지금은 어렵지만 앞으로 이런 정책을 통해 최소한 정직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은 보상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비전입니다.
생활필수품의 가격을 관리하거나 대기업이 인력을 10% 더 채용하게 만들겠다는 약속은, 이런 단기적이고 선언적인 정책들은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이 어려움이 지나간 뒤 과연 어디에 가 있을지 불안할 뿐입니다.
부디 지난 실패에서 깨달음을 얻어 대통령을 선택한 국민들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살피시길 바랍니다. 1년에 20만원 남짓 되는 세금을 환급 받으려 대통령을 찍었는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 초심으로 돌아가 젊은이든 늙은이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십시오. 모험정신을 갖고 창업이든, 공부든 도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십시오. 한 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환경을 닦아 주십시오.
그래서 누구든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꿈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개천에서 용 났다'는 성공모델이 많이 탄생하는 토대를 구축해 주십시오.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 오히려 눈치보고 주눅들지 않게 부와 성공이 정당하게 평가받는 사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저는 대통령이 성공하기를 누구보다 열렬히 희망합니다. 대한민국은 저와 저의 가족이 살고 있는 조국이기에 그렇습니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 급락한 지지율,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독도 문제 등 잇따라 터지는 악재에 자신감을 잃어가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앞으로 4년 반, 역전할 수 있다는 꿈과 자신감으로 '해피 엔딩'을 만드시길 기원합니다.
'인내는 연단(단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룹니다.'(성경 로마서 5장4절) 그리하여 대통령과 우리 국민 모두가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성경 욥기 8장7절)해질 것을 희망하고 또 믿습니다.
2009-05-01 16:14:34 | 관리자
이 글 역시 우연히 읽게 된 '머니투데이'(7월 21일)의 기사로 인해 쓰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외수라는 작가를 알지 못합니다. 그의 글을 하나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 기사를 읽으면서 믿지 않는 사람도 각고의 노력을 해서 뛰어난 작품(세상 사람들에게)을 남기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영부영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내는크리스천들이 한둘이 아님을 보면서 좀 이런 글에 도전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글을 적습니다. 거의 무가치한 일에 이처럼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 허다한데 어찌하여 우리 크리스천들은 가치가 있다고 믿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을까요? 무언가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저 역시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열심히 주님을 위해 내 삶을 불태우겠노라고.
"저처럼 '한 놈만 패겠다'는 생각으로 올인하십시오. 그것이 장점이 돼 열등감을 가려버릴 겁니다."
전국적으로 장대비가 내렸던 19일. 안개가 자욱이 낀 강원도 화천 감성마을 내 모월당에서 만난 소설가 이외수(62ㆍ사진)는 거침이 없었다. 예스24와 해냄 출판사가 주최한 '이외수 지금 만나러갑니다' 행사에 참석한 30여 명의 독자들은 글쓰기와 세상살이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그는 20대에 노숙생활을 했을 만큼 힘들었던 시기를 겪은 후 '꿈꾸는 식물(1978)' '들개(1981)' '칼(1982)' 등 작품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황금비늘' '장외인간' 등 최근작은 출간만 되면 40만~50만부가 팔린다. 그에게 성공이란 어떤 가치일까. 그는 "가치관 철학, 인생관의 흔들림이 성공을 방해한다"고 말했다.
"감자농사를 짓는 사람은 농사만 제대로 지으면 감자가 돈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돈에 관심을 가지고 농사를 하면 돈이 안됩니다.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이 돈 안되면 어떡하지?'하고 고민만 하는데, 사실 돈이 안 되는 분야는 없습니다. 어느 분야에서건 제대로 해서 상위 10%안에 들어가면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한 때는 방문을 뜯어내고 감옥 철문을 달 정도로 작가에 대한 굳건한 신념으로 글 쓰는 일을 고집했던 그는 집중과 끈기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30대 때부터는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일어나서 10년을 바쳐야합니다. 아무리 감각이 둔하고 머리가 둔하더라도 3년을 집중하면 기초가 다져집니다. 그 다음에 7년을 깎아 바치면 그 분야에서 존경을 받게 됩니다. 병뚜껑을 줍더라도 몇 십 년 동안 그것만 하면 사람들이 다 알아주는데 하물며 다른 일은 어떻겠습니까?"
이런 마음가짐은 그가 집필하는 모습에도 잘 드러나 있다. "글을 쓸 때는 누구보다 치열합니다. 가뜩이나 괴팍한 성격인데 글이 잘 안되면 어떻게 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될 때까지 한다고 합니다. 중간에 관두면 리듬이 끊어지기 때문에 물고 늘어져서 될 때까지 계속 합니다."
선택과 집중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하는 그는 진정한 성공이란 주변에서 함께 기뻐하고 행복해할 때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요새는 그 사람의 성공으로 인해 주변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는 처음에 하늘이 도와주다가 안 도와주는 경우가 많아요. 벼슬이 아무리 높아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성공하기 전에는 다 소망을 밑천으로 성공합니다. 가급적이면 소망을 키워나가세요. 그게 성공의 지름길이 됩니다. 훨씬 아름답고 더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게 돼있습니다."
2009-05-01 16:12:56 | 관리자
엊그제 박효종(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의 글을 읽었다. 거기서 '인지부조화'라는 단어가 하루 종일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분은 그것을 "알고 생각하는 것들 사이에 괴리가 생길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정의했다. 글 속의 사례들을 읽으면서 비로소 인지부조화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사회 속에서만 이런 인지부조화가 있는 것일까? 성경을 안다고 하는데 실제의 삶이 그렇게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이 인지부조화가 아닌가? 우리 예수님은 그것을 가리켜 위선이라고 하셨다. 즉 그것은 겉과 속이 따로 노는 것을 말한다. 바른 성경을 알지 못하는 교회들에서는 아예 인지부조화가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옳고 그른 것을 알지 못하므로 그런 현상 자체가 생기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들어 근본주의 킹제임스 성경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인지부조화가 만연해 있음을 보고 놀란다. 나를 포함한 우리는 대개 성경 지식이 충만한데 행동은 전혀 다르다. 예배에 참여하려는 열성, 바르게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열정, 섬김과 봉사를 위해 희생하려는 마음, 세상에서도 떳떳하게 빛과 소금이 되고자 애를 쓰는 모습이 결여된 것을 보게 된다. 일반 교회보다 훨씬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교회가 부흥하지 않아도 원래 좁은 길로 가는 무리는 수가 작은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 없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목사나 성도 모두 인지부조화에 빠지지 않았는지 깊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면 유익할 것이다.
다음의 글은 인지부조화를 설명하는 사례를 담았기에 참조하도록 올린다. 나는 결코 박 교수의 글이 100% 맞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 사람들도 바르게 보려고 노력하는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더더욱 성경에 비추어 바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글을 올린다.
인지부조화의 자기 모순
대선과 총선에서 참패하고 폐족(廢族)으로까지 몰렸던 좌파가 '촛불'을 계기로 기사회생하고 있다. 광장에서의 동원능력과 '다음' 아고라에서의 인터넷 동원능력도 막강해졌고 공권력도 우습게 여길 정도가 되었다. 여기에는 그들 편에 서서 힘을 북돋았던 좌파 언론들의 덕이 컸다. 하지만 세상 일은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5년 내내 켜고 싶은 촛불이었겠지만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작용했는지 그 촛불이 예전 같지 않다. 하기야 전략과 전술이 무궁무진한 좌파가 이 정도의 시련에서 의기소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좌파의 문제는 지독한 '인지 부조화'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알고 생각하는 것들 사이에 괴리가 생길 때 나타나는 것이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부자가 된 사람에 대해서는 강한 혐오를 드러낸다. 자신의 자녀는 미국으로 유학 보내면서도 미국산 쇠고기, 미국과의 FTA 등 미국과 관련된 모든 것이 증오의 대상이다. 자신의 자녀가 전교조 교사 밑에서 지도받는 것을 꺼리면서도 전교조에 대한 지지는 강렬하다. 북한에 가서 살기는 싫어하면서도 친북주의자나 종북주의자로 처신하고 있다. 투쟁과 경쟁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인데, 노사문제건 교육문제건 '투쟁'은 결사적으로 하면서도 '경쟁'만은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친다.
일련의 인지부조화 현상 가운데에서도 가장 현저한 것은 대한민국의 좌파로 살면서 그것을 가능케 한 대한민국의 성취는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와 인권, 시장과 민주주의가 꽃피는 나라이기에 좌파로서 권력도 10년 동안 잡는 등 왕족처럼 살아온 것이 아닌가. 북한에선 김일성주의자나 김정일주의자가 아니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런데도 건국 60주년을 기념하는 일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못해 냉소적이다. 건국을 기념하면 상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되며, 또 광복절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정말 그것이 고민이라면 걱정도 팔자다. 건국을 기념한다고 해서 상해 임시정부의 의미가 훼손되는 것도, 광복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진가가 더욱 더 빛날 뿐인데 웬 걱정인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된 것이 건국일진대 좌파든 우파든 경축하면 경축했지 질색할 이유는 없을 터이다.
흔히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이 헬멧을 쓰지 않아 큰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헬멧을 쓰지 않는 것은 단순한 안전 불감증 때문이 아니라 오토바이가 위험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이다. 위험한 것과 즐기고 싶은 것 사이에 인지부조화가 발생했을 때 오토바이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헬멧을 쓰지 않음으로써 자신에게 확신시키려는 것이다. 이처럼 좌파도 진실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이를 인정하면 행여 자신들의 존재감이 없어질까 봐 반미, 반건국 등 각종 '안티'를 고집하고 나서는 것이 아닐까.
한국의 좌파는 변해야 한다. '진보연대'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진보하지 않은 좌파들끼리 연대하여 법치를 무시하고 대중 동원으로 힘을 과시하면서 참여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기 전에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출범한 지 수개월도 안 된 정권 초기에 나라가 아수라장이 된 데는 이명박 정부의 잘못이 크다.
하지만 대선에서 참패하고도 권력 금단현상을 극복하지 못해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불복종으로 일관하면서 제대로 된 '실패학'을 쓰지 못한 좌파의 잘못도 결코 적지 않다. 돈을 세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세상에서 과거를 세탁하고 정체성을 세탁한들 무슨 큰일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래서는 미래가 없다. 자신들의 주장과 행동에서 인지부조화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문제를 정상적으로 풀어가고자 하는 진솔한 의지를 가질 때 비로소 건강성이 담보되는 좌파의 길이 열릴 것이다.
2009-05-01 16:11:48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