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소식, 감사합니다~
영적 핍박을 받는다고 하시니 안타깝기도 하지만,
주님 안에서 넉넉히 이기리라 믿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주님이 주신 소망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가시길
소망합니다.
2019-04-24 19:17:36 | 심경아
안녕하세요?
하와이 힐론의 샬롬 침례교회에소 귀한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이 교회를 위해 생각날 때마다 기도해 주세요.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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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침례 교회 소식
목사님,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저희는 매 주 세번씩 (일요일 두 번,수요일 한 번)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에 대한 많은 지식들을 전달해주시는 목사님의 열정과 하나님을 향한 충성에 저희도 도전을 받습니다.
전에는 저희가 프로젝터를 통해서 영상을 보았지만 화질이 좋지 않아서 작년에 UHD 티비를(75 인치) 구입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의 감동을 여기서도 느끼는 듯 합니다.
몇 주 전에는 항상 목사님의 강의를 들어오던 감리교회의 자매 한분이 저희 교회로 옮기는 결단을 내리고 현재 저희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있습니다. 남편도 함께 따라왔는데 한국말을 몰라서 통역을 해주고 있습니다.
한국말 모르는 사람이 두 사람이 있어서 인터넷으로 송수신기를 구입하여 문제가 해결이되었습니다. 제 동생이 통역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설교의 pdf file을 제가 받아서 설교를 제가 먼저 듣고 말씀 성구들을 킵 바이블에 들어가 영어로 찾아 프린트해서 동생에게 주면 그것으로 목사님의 전 설교를 통역합니다.
이제 저희는 열 한명이 모입니다. 아직도 이곳에서는 다른 교회의 입김이 강해서 저희가 영적 핍박을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도 저희는 구원의 확신과 휴거와 부활의 소망 가운데 낙심치 않고 기쁨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진리안에서 걷는 연습을 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형제자매들이 있어서 용기가 납니다.
올해도 전에처럼 미디어 선교 사업에 동참하고 싶군요.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샬롬
2019-04-24 13:38:51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제 우리는 좌승희 박사님을 모시고 애국 강연회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아닌 그분께서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들어 경제 원리를 설명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이에 대한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경제 원리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성경에서 찾는 세계경제문제의 해법
요즘 세계는 저성장과 양극화라는 전대미문의 경제난제에 부딪쳐 있다, 성장은 선진국평균이 거의 0% 정도에 그치고 일부 고성장후진국들도 점차 성장 동력이 꺾이고 있다. 그뿐 아니라 소득 분배도 모두 악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더구나 곤혹스러운 것은 그동안 모든 나라들이 적어도 지난 50-60여 년 동안 소위 동반성장과 행복한 경제를 위한 경제정책을 추구해 왔음에도 결과는 정반대의 저성장과 양극화에 봉착하여 모두가 불행하다고 하고 있으니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 원인이 바로 사회주의 이념의 보편화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 동안 사회주의경제실험이 다 실패하였지만 그 이념은 그동안 민주주의와 만나 사회민주주의로 둔갑하여 전 세계 자본주의경제를 잠식하고 있다.
사회주의 이념의 핵심은 간단히 표현해서 성과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한 경제적 결과를 향유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는 정반대로 성과에 따라 차별적 대접을 받는 것이 정의롭다는 서양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잠언과 동양의 “신상필벌”의 법가 사상으로 표현된다. 이것이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삶의 현장에 체화된 것이 소위 “시장의 차별화기능”인 것이며 이것이 바로 경제의 성장발전을 이끌어내는 힘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의 마테복음 25장은 세상의 차별화기능을 우화화한 흥미로운 하늘나라의 법을 전해 준다. 주인이 길을 떠나며 세 종에게 능력에 맞게 각각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씩 나눠주고 떠난다. 주인이 귀가했을 때 그 동안 첫째 종은 5달란트를 잘 투자하여 10달란트로 불렸고, 둘째 종도 2달란트를 잘 투자하여 4달란트로 불렸지만 1달란트를 받은 종은 돈을 땅에 파묻어 놓기만 하고 더 불리지 않았다. 이를 본 주인은 첫째, 둘째 종은 칭찬과 더불어 크게 대접하였으나 돈을 더 불리는 데 실패한 셋째 종은 거리로 내 좇으면서 “여봐라, 저 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일갈하였다.
이는 바로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법임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도 시장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적 거래 행위가 바로 이 법을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장의 차별적 선택행위가 모두에게 성장과 발전의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성장과 발전을 유인해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법에 비춰보면 사회주의란 반대로 예컨대 세 명의 종에게 그 노력과 성과에 관계없이 모두 각각 5달란트씩 동등하게 나눠 주는 것이 정의롭다는 이념에 기초하고 있다. 만일 이런 규칙이 시행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모두가 돈을 땅에 파묻어놓고 손꼽아 불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만일 국가사회가 이런 사회주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시장의 차별화기능을 무력화시키는 나눠 먹기 식 평등주의적 규제나 정책을 시행하면 어떻게 될까? 국민들은 성장의 유인을 잃고 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경제의 저성장과 하향평준화를 통한 양극화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사회주의는 망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한국이나 세계의 경제난국도 바로 그 동안 사회민주주의나 수정자본주의, 혹은 경제민주화라는 유사 사회주의 이념이 보편화되면서 인간의 성장과 발전의 동기를 무력화시킨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저성장과 양극화의 근본원인이 바로 하느님의 율법, 즉 시장의 차별화기능에 반하는 평등주의적 경제정책운영의 결과임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의 개발연대 초고속 동반성장은 주류경제학이 아직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세계사의 불가사이중의 하나다. 그런데 당시 새마을운동을 포함해서 많은 정책들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시장의 율법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게을렀던 종의 1달란트 마저 박탈했던 법처럼 새마을운동의 성과에 따른 차별적 지원방식이 모두를 성공으로 이끎으로써, 하나님의 법이 바로 “버린다 함으로써 역으로 모두를 일으켜 세우는” 발전의 원동력임을 증명하였다. 오늘날의 한국은 물론 세계경제문제의 해법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시장의 차별화 법을 실천하는 데 있음을 깨닫게 되길 바란다. (참고로 필자는 기독교인이 아님을 밝힌다.)
2019-04-22 10:00:20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즘 정부는 하는 일마다 안 되니까 이제는 반대편 사람들을 친일파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즉 친일파라는 허수아비를 만들고 계속 때려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박정희 등 위대한 사람들을 다 친일파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진실 앞에 겸허히 서야 합니다.
다음은 귀한 글이라 소개합니다.
이들에게 이승만의 진짜 '죄'는 무엇일까
조선일보양상훈 주필
가장 反日 이승만… 美에 맞서 국익 지킨 그를 '친일' '미국 괴뢰'라 매도 日 패망 후 소련 공산주의와 싸워 대한민국 건국한 것이 이승만의 진짜 '죄'일 것
공영방송에서 이승만을 '친일파, 미국의 괴뢰'라면서 '무덤에서 파내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더니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을 기념해 선정한 독립운동 인물에도 이승만이 빠졌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다. 이승만만 빠진 인물화들이 걸려 있는 정부청사를 보면서 이 나라가 사실을 뻔뻔하게 왜곡하는 세력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현실을 절감한다.
이승만에 대해 알게 되면서 필자는 그가 너무 지나치게 반일(反日)적이라고 생각했다. 거의 피해망상 수준이었다. 일본 군국주의만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심성 자체를 증오했다. 일본인들이 겉과 속이 다른 민족성으로 언제든 우리에게 칼을 들이댈 것이라고 경고하고 또 경고했다. 일본을 저주하고 망하기를 바라지 않은 날이 없었고 어떻게든 미국이 일본을 공격해 파괴하기를 기원했다. 이승만은 일본이 도발해 미국과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론적 근거에 앞서 미·일 전쟁이 반드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다.
그 신념으로 쓴 책이 '일본의 내막(JAPAN INSIDE OUT)'이다. 이 책에서 이승만은 머지않아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몇 달 뒤 실제로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했다. 그 책에서도 이승만은 일본인의 민족성에 대해 미국인들에게 경각심을 촉구하고 있다. 이승만은 하야 후 하와이에서 죽음을 맞았다. 병약해져 의식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도 갑자기 "일인(日人)들은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에게 반일은 본능이었다. 이 정권이 얼마나 반일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승만에 비하면 조족지혈일 것이다.
이승만이 내각에 친일 인사를 많이 기용했다고 '친일'이라고 한다. 이 정권 사람들이 인정하는 친일파 연구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이승만 정부 내 일제 관료 출신은 32%인데, 이 대통령 하야 후 수립된 장면 4·19 혁명정부 내각의 60%가 부일 협력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4·19 혁명정부는 아예 일본 하위 기관인가. 모두가 헛된 논쟁일 뿐이다. 2016년 독일 언론 조사에 의하면 2차 대전 패망 후 서독 법무부 간부의 53%가 히틀러 나치당 당원이었다. 많은 국·실에서 간부의 70% 이상이 나치당원이었다. 악명 높은 나치스돌격대(SA) 출신도 20%에 달했다. 한 나라에 해방과 패망은 과거와의 급작스러운 단절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세상은 돌아가야 하고 사람은 살아야 한다. '과거'와 '미래' 사이를 잇는 '현실'은 일정 기간 불가피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미래로 가느냐이다. 한국과 서독은 모두 미래로 갔다. 미래로 간 나라는 과거를 가장 확실하게 청산하고 극복한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의 힘과 시스템을 부러워하고 존경했지만 미국에서 너무나 많은 좌절과 쓰라림을 겪었다. 미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받기 위해 피눈물 나게 노력했으나 미국인들은 철저하게 무시했다. 미국 사람들은 일본인을 좋아하고 신뢰했다. 김구 등 많은 독립운동가가 현실적 필요 때문에 거주 중인 국가의 국적을 취득했다. 이승만은 끝내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무국적 망명객으로 머물렀다. 온갖 불편을 감수했다. 그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미국이란 국가는 높이 평가했지만 미국 정치인들에 대해선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일본의 내막' 서문에서 '미국인들은 일본인들의 아첨을 좋아하며 뇌물에 속아 넘어간다'고 했다.
이승만은 2차 대전 후 미국이 한국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절대 낙관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미국 정부가 소련을 대일(對日)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소련군의 한반도 진군을 허용할 것이라고 보았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 총회 때 이승만은 '미국이 얄타회담에서 한반도를 소련에 넘기기로 밀약했다'고 폭탄 발언을 했다. 미 국무부는 즉각 부인했지만 그 후의 역사는 실제 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승만은 통일 없는 6·25 휴전을 거부하며 한·미 동맹 조약을 요구해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정신착란자'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1953년 미군은 이 대통령을 감금하고 한국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작전계획까지 수립했다. 이런 그를 '미국의 괴뢰'라고 하는 사람들은 정말 누구의 괴뢰인가.
이들은 이승만이 친일파나 미국 괴뢰가 아니라는 사실을 정말 모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이승만을 이토록 싫어하는 근본 이유는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이승만의 적은 일본이었다. 일본 패망 후 이승만의 적은 소련과 공산주의였다. 소련 사람들은 유엔 창립 총회장에 온 이승만 등 한국 대표단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김일성 정권 수립과 한반도 석권을 계획하고 있던 그들에게 이승만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한국 내 지식층에 압도적이던 좌익 인사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소련은 결국 6·25 남침까지 승인했다. '반(反)이승만'의 뿌리는 여기에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친일' 등은 엉터리로 씌운 모자일 뿐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17/2019041704187.html
2019-04-19 18:51:54 | 관리자
안녕하세요?
블랙홀을 보게 되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흥분합니다.
조갑제 선생님은 이공학도는 아닌 것 같은데 지식이 풍부해서 저는 존경합니다. 물론 의견이 다른 것도 있습니다(5.18 등).
그러나 고상한 지식인인 것은 확실합니다.
조갑제 선생님의 블랙홀과 아인슈타인 기사는 짧지만 우리의 상식을 위해 필요한 것 같이 여기에 올립니다.
아이들과 함께 참조하기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블랙홀의 필연성을 예언한 아인슈타인, 정작 그 자신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블랙홀의 존재가 이틀 전 처음으로 사진에 찍혔다. 블랙홀의 존재를 예언한 이는 아인슈타인이다. 그의 상대성 이론은 중력에 의하여 시간과 공간이 변형된다는 원리를 제시하였는데 이 공식을 우주에 적용하면 블랙홀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의 공식으론 우주가 팽창해야 하는데 이것도 그는 믿지 않았다. 다른 학자들의 연구로 우주는 팽창하고 블랙홀은 실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아인슈타인 공식의 위대성이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확인 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名言도 많이 남겼다.
*위대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용기를 내어 知性을 발휘하여도 평범한 정신을 가진 이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을 위하여 사는 것만이 가치 있는 삶의 방식이다.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이 최고의 知慧와 아름다움으로 구현되고 있다는 것, 부족한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확실히 知覺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진정한 종교심의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매우 신앙이 깊은 사람이다.
*대부분의 교사는 학생들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질문을 한다. 이것은 시간 낭비이다. 정말 좋은 질문의 기술은, 학생이 무엇을 아는가, 또 무엇을 아는 것이 가능한가를 알아내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전문 기능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람들은 그것을 통하여 쓸모 있는 기계처럼 되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調和 있는 人格을 얻을 수는 없다. 아름다운 것과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에 대한 뛰어난 감수성을 함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문기능을 갖고 있는 것뿐으로서, 잘 훈련된 개처럼 될 수밖에 없다.
*나는 평화주의자일 뿐 아니라 전투적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므로 평화를 위해서 기꺼이 싸울 것이다.
*질문하기를 중단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호기심은 그 자체로서 존재 이유가 있다. 영원성과 생명, 그리고 경이로운 현실의 구조가 지닌 미스터리를 명상할 때마다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에 한번씩이라도 이 미스터리의 작은 부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聖스러운 호기심을 절대로 잃지 말라.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경험은 신비함이다. 이것은 모든 진정한 예술과 과학의 원천이다.
*우리들 과학자는 人類를 모두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따라서 잔학한 목적을 위하여 이 무기가 사용되는 것을 全力을 다하여 막는 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절대적 의무이다.
*사람들의 偏見과 다른 의견을 냉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少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의견을 가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나는 내가 유대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지만 유대인이 神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높은 수준에 도달하면 과학과 예술은 美的으로나 형식적으로도 융합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超一流의 과학자는 항상 예술가이기도 하다. *깊게 파고들수록 알고 싶은 것이 많아진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항상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의 말들은 아름답다. 그는 아름다움을 하나님의 속성으로 여겼다. "우주는 너무나 아름답고 원리는 심플하다. 그러니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神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면서 절대적 존재를 믿었던 이다.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盲目(맹목)이다"는 말도 남겼다. 그는 과학 만능주의를 이렇게 비꼬았다.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을 重力 탓으로 돌릴 순 없다. 첫 사랑과 같은 중요한 생물학적 현상을, 세상에, 어떻게 화학이나 물리학으로 설명할 것인가? 당신의 손을 1분 동안 난로에 갖다 대 보라, 한 시간처럼 느껴질 것이다. 특별한 여자와 한 시간을 함께 해보라, 1분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상대성이다."
(Gravitation cannot be held responsible for people falling in love. How on earth can you explain in terms of chemistry and physics so important a biological phenomenon as first love? Put your hand on a stove for a minute and it seems like an hour. Sit with that special girl for an hour and it seems like a minute. That"s relativity.) ,,,,,,,,,,,,,,,,,,,,,,,,,,,,,,,,,,,,,,,,,,,,,,,,,,,,,,,,,,,,,, 상대성 이론 발표 100주년에 붙여(2015년 12월 기사)
1차세계대전이 주전장인 프랑스 동부에서 지긋지긋한 진지전으로 치러지고 있던 1915년 12월 2일 아인슈타인은 베를린에서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였다. 그해 11월 프러시아 학술원에서 한 네 차례의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이번 週는 重力이 時空間을 변형시킨다는, 우주를 탐구하는 인간의 시각을 바꾼 위대한 발견 100주년이 되는 기간이었다. 아인슈타인은 그 7년 뒤 노벨상을 받았다.
정치인들이 노벨 평화상에 미치면 國益을 팔아 평화(물론 가짜)를 산다. 천재는 받지도 않은 노벨상을 저당 잡혀 위자료를 만든다. 아인슈타인의 경우이다.
1918년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첫째 부인과 이혼을 하게 되었다. 부인은 수학에 능통하여 아인슈타인이 1905년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할 때 도와주었다. 이혼에 즈음한 위자료가 부족하였던 아인슈타인은 파격적 제안을 하였다.
"언젠가는 나의 연구 성과가 인정되어 노벨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때 받는 상금을 다 주겠다. 그러니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다오."
첫째 부인은 며칠 생각하더니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인슈타인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것은 그 4년 뒤인 1922년이었다. 상금은 당시의 달러로 환산, 3만2250 달러였다. 약속대로 이 돈을 이혼한 부인에게 다 주었다. 부인은 건물을 몇 채 샀다.
자신이 노벨상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이나, 그 말을 믿고 가다려준 사람이나 다 대단하다. 아인슈타인이 발명한 공식 중 유명한 것은 E=MC²이다. E는 에너지, M은 질량, C는 빛의 속도이다. 원자폭탄을 만든 원리이다.
1939년 8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한 달 전 미국 프린스턴 대학 교수 엘버트 아인슈타인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헝가리 출신 물리학자 레오 스질라드였다. 아인슈타인처럼 나치를 피해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온 유대인 과학자였다. 그는 나중에 이탈리아 출신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부인이 유대인으로서 무솔리니의 탄압을 받자 미국으로 피신)와 함께 흑연을 減速材(감속재)로 이용, 최초의 연쇄반응을 성공시켜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원자로를 만든 사람이다.
스질라드는 친구인 아인슈타인에게, 나치 독일의 과학자들이 핵분열에 성공하였으며 연쇄반응 실험에 몰두하는 것 같다면서 가공할 新武器(신무기)를 만들 위험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발견한 질량-에너지 等式(등식)인 E =MC² 가 핵폭탄 개발의 원리가 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친구의 설명을 듣고는 곧 깨달았다. 핵분열과 연쇄반응이 핵폭탄 제조로 연결된다는 것을. 스질라드는 미국도 대응책을 세워야 하니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올리자고 했다. 초안은 스질라드가 쓰고, 아인슈탄인은 교정을 보고 서명하였다. 이 편지는 아인슈타인-스질라드 편지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어떻게 편지를 전달하느냐였다. 스질라드는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 국민적 영웅이 된 찰스 린드버그의 도움을 받으려 하였으나, 그가 고립주의자이고, 親나치 인물임을 알고는 포기하였다. 이 편지는 결국 알렉산더 삭스라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구를 통하여 전달되었다.
맨해턴 계획
1939년 10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 직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 명의의 편지를 받은 루즈벨트는 군사문제 고문인 와트슨에게 이를 건네면서 "행동이 필요해"라고 했다. 과학자들로 急造(급조)된 위원회는 대통령에게 대응책을 건의, 육군이 관할하는 핵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턴 계획"이 시작되었다. 뉴멕시코주 로스알라모스의 연구소를 중심으로 전개된 맨해턴 계획엔 한때 13만 명이 종사하였고, 20억 달러(요사이 가치로는 230억 달러)가 들어갔다. 90%가 原子爐(원자로) 등 시설을 짓는 데, 10%가 폭탄 제조, 설계 등에 쓰였다.
아인슈타인은 당초의 핵개발 계획이 느리게 진전되자 1940년 3월 다시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썼다. "베를린에선 우라늄 프로젝트가 급진전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신속한 대응을 촉구하였다. 대통령은 긴급 대책 회의를 소집하고, 아인슈타인도 참여시키도록 지시하였으나 그는 감기에 걸렸다면서 자리를 피했다. 1945년 3월이 되자 종말이 가까워진 독일이 핵폭탄을 개발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미국의 핵개발에 핵심적 역할을 한 스질라드는 원자폭탄의 파괴력을 알고 있었으므로 사용을 중단시키려고 했다. 그는 다시 아인슈타인을 찾아가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스질라드 등 과학자들을 만나 줄 것을 건의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대통령은 전달된 편지를 읽지 않았다. 루즈벨트가 4월12일에 죽은 뒤 이 편지가 집무실에서 발견되어 트루먼 후임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그는 편지를 번스 국무장관에게 주었고 번스는 스질라드를 만났으나 건의를 묵살했다.
原爆 사용 반대 건의
스질라드는 독일이 망한 후 핵폭탄이 일본에 투하될 것임이 확실해지자 맨해턴 계획에 참여한 70명의 과학자들로부터 서명을 받아 1945년 7월17일에 트루먼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냈다.
이 탄원서에서 스질라드는 "우리가 개발한 원자폭탄은 첫 단계에 불과하고 앞으로 이를 발전시킬 경우 거의 무한한 파괴력을 갖게 될 것"이라면서 사용하기 전에 먼저 일본에 최후통첩을 할 것을 건의하였다. 즉 미국이 일본에 요구하는 조건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뒤 일본이 이를 거부하면 그 이후 신중하게 판단, 사용을 검토해달라고 하였다.
이 탄원서는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원자폭탄을 쓰지 않고 재래식 무기만 가지고 일본에 상륙전을 펼 경우 미군 피해는 1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미국 정책 결정자들은, 전쟁이 끝난 뒤 원자폭탄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사용하지 않아 엄청난 人命 피해가 났다는 비난을 정치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맨해턴 계획을 지휘하던 글로브 장군은 스질라드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고, 서명자 거의 전원을 해고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죽기 전에 핵폭탄 제조 요청 편지를 쓴 걸 후회하면서도 독일의 핵개발 정보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려 했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맨해턴 계획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FBI가, 그의 평화주의적 성향 때문에 보안에 위험을 주는 인물이란 판정을 하였던 것이다.
출처: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82575&C_CC=BB
2019-04-12 12:18:47 | 관리자
이상한 대한민국, 우리만 모르는
2019년 10월의 어느 날, 광고회사에 다니는 김진실씨는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1년 전 프랑스 배낭여행에서 만났던 영국인 친구 윌리엄이 한국에 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나라도, 성(性)도 달랐지만 둘은 죽이 너무 잘 맞았다. 게스트하우스 주방에서 우연히 만나 컵라면을 먹으며 시작된 둘의 대화는 밤새도록 이어졌고 다음 날부터는 마치 십년지기처럼 파리 시내를 쏘다니며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다. 귀국 후에도 가끔 이메일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던 터라 재회의 기쁨은 남달랐다. 황혼이 깔린 인사동에서 만난 두 사람은 파전에 막걸리를 곁들이며 밀린 수다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다음은 요약한 둘의 대화.
윌리엄 : 한국의 가을은 정말 아름답네. 도시가 마치 잘 그린 풍경화를 보는 것 같아.
김진실 : 하하, 원래 남의 것이 좋아보는 법이랍니다.
윌리엄 : 좀 전에 광화문을 구경하다 왔는데 거긴 어떤 곳이야?
김진실 : 경복궁이라는 궁궐의 정문이야. 옛날 왕이 살던 궁궐이지.
윌리엄 : 아, 그렇구나. 광화문 앞에서 동상을 두 개 봤는데 그 사람들은 누구?
김진실 : 의자에 앉아 책 들고 있는 사람은 세종대왕이고 칼을 차고 있는 서 있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 영국으로 치면 넬슨 제독 같은 인물이지.
윌리엄 : 어째 포스가 남다르다 했네. 그럼 세종대왕이 대한민국을 만든 사람인가?
김진실 : 아니, 세종대왕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그 전 봉건 왕조인 조선의 왕이야.
윌리엄 : 그럼 진실이가 예전에 말했던 헬조선의 왕?
김진실 :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아 그게...헬조선은 그 조선이 아니라...대한민국을 말하는 건데...
윌리엄 : (놀라며) 여기가 헬조선이라고?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김진실 : (더듬더듬) 아, 그게 다 잘 사는 게 아니라...힘들고 못사는 사람들도 많거든.
윌리엄 : 모든 사람이 다 잘 사는 그런 나라가 세상에 있나? 그건 그냥 이상향일 뿐이잖아.
김진실 : 뭐 그렇기는 하지만...
윌리엄 : 그럼 대한민국을 건국한 사람 동상은 어디 있어?
김진실 : (또 말문이) 없어. 그게..저...독재를 하다가 쫓겨났거든. 우리 민족이 원래 민주주의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까. 하하하.
윌리엄 : (갸우뚱) 독재를 했든 뭘 했든 나라를 세운 건국의 아버지인데 내가 보기엔 좀 이상하네. 그럼 이순신 장군도 조선이라는 나라의 장군이야?
김진실 : (환해지며) 응, 우리나라를 일본의 침략에서 구한 인물이지.
윌리엄 : 둘 다 조선시대 사람들? 그럼 광화문 광장에 대한민국과 관련된 인물은 없어?
김진실 : ...뭐 그런 셈이지.
윌리엄 : 이렇게 잘 사는 나라를 만든 사람들의 동상이 없다고?
김진실 : (갑자기 술이 마구 당긴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런 얘기 하지 말고 우리 건배~.
윌리엄 : 하하, 그러지 뭐 (잔 들다 말고 갑자기 생각난 듯) 그런데 광화문 광장에서 내가 목조건물을 하나 봤거든. 뭐래더라? 무슨 기억 공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김진실 : 아, 그건 기억, 안전 전시 공간이라고, 사람들을 추모하는 장소야.
윌리엄 : 오우, 멋지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기리는 나라가 진짜 선진국이지.
김진실 : (아, 대화가 자꾸 왜 이렇게 가냐) 그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건 아니고...
윌리엄 : ...?
김진실 : 세월호라고,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윌리엄 : 선박 사고로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라고?
김진실 : 그렇지....뭐...
윌리엄 : (또 갸우뚱)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광화문 광장은 대한민국의 얼굴 같은 곳이잖아. 세계인들이 대한민국을 방문하면 제일 먼저 찾는 상징적인 장소인데 그런 조형물이 있다는 건 좀 납득이...
김진실 : (드디어 할 말이 생겼다) 희생자들이 억울하게 죽었거든. 대통령이 안 구하는 바람에.
윌리엄 : 쯧쯧, 그랬구나. 그럼 대통령이 잠수부 출신이야?
김진실 : (살짝 미칠 것 같다) 아, 그건 아니고...
윌리엄 :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중이지만 쉽지 않다) 그 대통령은 어떻게 됐어?
김진실 : 감옥에 있어. 기업인들에게 뇌물을 받았거든.
윌리엄 :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정치인들이 뇌물을 받는 건 절대 용서 못하지. 그런데 뇌물은 얼마나 받았어?
김진실 :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없다) 음, 그게..얼마더라....몰라, 하여간 받았대.
윌리엄 : (진땀을 흘리는 진실을 보니 슬슬 미안해진다) 내가 괜한 걸 물었나보네. 우리 딴 얘기하자.
김진실 : (아이고 살았다) 그래, 자, 건배~.
그날 저녁 김진실씨는 수없이 건배를 외친 끝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의식불명 전 김진실씨가 윌리엄에게 들은 마지막 말은 ‘대한민국은 참 이상하지만 매력 있는 나라’였다. 며칠이 지나자 ‘매력 있는 나라’라는 말은 희미해지고 ‘이상한’이라는 형용사만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 이 글은 가까운 미래 어떤 날을 가상으로 써 본 것이다.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천막이 철거되고 추모시설이 조성된다. 이 시설은 목조건물 형태로 내부에는 세월호를 추모하는 전시물이 놓인다고 한다. 서울시는 내년 초부터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사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추모시설을 임시로 둘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지만 유족들은 상설화를 주장하고 있다. 글쎄다. 아무리 임시라지만 설치했던 시설을 들어내는 것이 과연 쉬울까. 어쩌면 우리는 참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알지만 우리만 모르는, 앨리스도 없는 그런 이상한 나라에서.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출처: 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18140
2019-04-12 11:32:10 | 관리자
마지막 말씀에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미국 LA에서도 얼마나 현 상황이 안타까웠으면 이렇게 애절한 심정을 보여주시는지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맞습니다. 이 자유대한민국이라는 배가 기우는 줄도 모르고 희희낙락하는 사람들,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친중반미를 외치는 일부 국민들을 보면서 같은 마음으로 개탄스러움을 금할수가 없습니다.
주한미군철수는 결단코 온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막아야합니다. 하노이회담이 트럼프대통령에 의해 무산 되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종전선언과 함께 고려연방제, 주한미군철수의 순서는 저들의 각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국제사회에서 밀려나고 있는 현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모두 정신을 차려야합니다.!
2019-04-11 18:54:51 | 이명석
미국 LA 교민이 보내온 가슴 아픈 글
과거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필리핀 대통령이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무시하여 영빈관 숙소조차 안내어 주어 가면서 나의 영원한 조국인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조차 만나 주지 않은 채, 격을 낮춰 필리핀 총리가 대신 만나게 했던 적이 있다.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던 나라, 6.25 동란(動亂) 중에 우리에게 육군을 파병해 주고, 6.25 동란 후에는 우리에게 경제 원조까지 해 주었던 우리가 선망했던 필리핀이라는 나라
그런 나라가 반미 좌파정권이 완전히 장악한 이후 오늘날 과연 어떤 나라로 변신되어 가고 있는지,
내 조국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께서는 부디 똑똑히 두 눈을 부릅뜨면서 잘 살펴보기 바란다.
1980년대 중반 필리핀의 마르코스가 미국으로 망명해서 귀국하는 정적 아키노 상원의원을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하였고 이에 분노한 좌파 국민들의 엄청난 시위로 인해, 마침내 마르코스가 권좌에서 쫓겨났다.
그 사건을 피플 파워로 미화하여 한국의 DJ가 1987년 대선에서 이를 이용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때 필리핀 시위 군중이 들었던 노랑리본과 입었던 노랑셔츠의 색깔을 DJ가 평화민주당 기본 색깔로 썼고, 바로 노무현을 거쳐, 오늘날 세월호 리본으로까지 계속적으로 연계되었다.
마르코스가 축출되고, 아키노의 부인인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이 되면서 ... 필리핀도 민주화를 내세워 건방을 떨기 시작했는데,
그 첫 번째가 "양키 고우 홈"이었다.
(얼마 전 우리나라 광주 시내에 "미군놈들 물러가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영상매체를 통해 이곳 미국에서 시청해 보면서 과거 필리핀을 보는 것 같아 그만 소름이 끼쳐 미쳐서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음.)
한편 아이러니한 것은 아키노 대통령 역시 대 사탕수수밭의 지주로서 필리핀의 대부호라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말해, 오늘날 한국의 "강남 좌파" - (강남에 살고 있는 부유한 좌파 판검사와
국회의원, 정치인들) - 인 것이다.
필리핀의 반미정책에 식상한 미국이 1992년 거주 인원만 무려 수백만 명에 이르는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를 단번에 철수하면서 필리핀에서 빠져 나갔다.
미국이 전략상 절대로 빠져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그동안 큰 소리를 치면서 속으로 "설마"해 왔던 좌파들은 정말로 미군이 빠져 나가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허탈감과 무력함에 빠져 들었으며, 곧바로 이에 대한 효과가 초래되었다.
미군이 철수하자 마자, 필리핀의 바로 코앞에 있는 스카보로섬을 중공이 무력으로 강탈해 갔다.
필리핀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여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공이 오히려 그 섬에다 아예 군사 활주로까지 만들어 현재 남중국해 군사 요충지로 사용 중이다. 이것은 '국제관계는 힘의 논리일 수밖에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보여 준다.
이를 직시하지 못하는 나라나 민족은 결국에는 쇠퇴와 멸망의 길로 퇴출되어 나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이 무엇보다도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게다가 미군 철수와 함께 필리핀에 들어와 있던 외자(外資)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면서 필리핀 경제는 하루아침에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등 멋모르고 건방을 떤 대가를 톡톡히 치렀고, 지금도 7백만 명이나 되는 필리핀 여성이 외국에 나가 가정부(옛날 식모) 등으로 돈을 벌고, 몸까지 팔아 가면서 번 돈으로 겨우 나라를 지탱해 나가고 있는 실정인데,
더 웃기는 것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외국에 가정부 등으로 나가는 여성들이 대부분 대졸 출신의 고학력 출신으로 좌파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드 가지고 장난치는 걸 보니,
한미동맹 파괴와 주한미군 철수가 목표인 것은 확실한 것 같고,
솔직히 아쉬울 것도 없는 미국도 이제 ...
대충 이제 맘을 정리하는 것 같다.
미군이 철수하면 경제적 추락은 차치하고,
당장 우리 조국의 안보가 작살날 것은 분명하다.
북한이 쳐 내려 올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나, 그건 그만 제쳐두더라도,
서해는 중공의 바다와 어장으로 변하고,
동해는 일본 바다가 되고,
독도에 일본 해군이 주둔하는 건,
그야말로 시간 문제라 할 수 있다.
중공은 지금도 서해를 인구와 땅덩어리 기준으로 3/4이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고 있는데, 만약 주한 미군이 철수하면, 해병대가 지키고 있는 백령도를 무력으로 '점령하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주한미군이 없으면, 일본이 독도를 무력으로 빼앗으려 들어도 속수무책일 것이다.
일본과 한판 붙는다면 해상전이 될 텐데,
지금의 우리 해군 전력이면,
우리 해군은 일본에 반나절이면,
괴멸된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와 있다.
이런 일이 소설 같고, 영화에나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교만한 매국노로서 IT SHOULD BE COMING SOON! 이다.
나는 이곳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평안히 살면서도, 배가 기우는 줄도 모르고 희희낙락하는 선객들로 가득한, 나의 영원한 조국인 내 나라 우리 대한민국에 대해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내가 지금 우리 조국에 가서
간증이라도 하고픈 절박한 심정이다.
2019-04-11 18:03:19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우리 교회에서는 4월 7일(주일) 오후 4시에 이강호 선생님을 모시고 애국 강연회를 갖습니다.
이강호 선생님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노무현 대통령 당시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뒤 현재는 미래한국 편집위원,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강호 선생님은 장신대 김철홍 교수님처럼 80년대 공산주의 좌익 학생 운동을 극렬히 하던 분인데 이제는 완전히 전향해서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분의 공산주의 좌익 체험 및 전향 증언을 통해 혼돈 속에 있는 이 나라의 많은 분들이 하나님과 진실의 편에 서기를 원합니다.
매우 귀중한 강연이 될 것입니다.
다음은 2019년 4월호 원간 조선에 이분이 기고한 글입니다.
샬롬
패스터
그들의 민주주의와 우리들의 민주주의_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빨갱이”가 일본말인가?
이건 정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뜬금없는 얘기였다. “빨갱이”라는 말이 친일잔재라는 것이었다. 문재인의 3.1절 경축사에서였는데, 그는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다,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고 했다. “빨갱이”라는 말은 다 알다시피 공산주의자 등의 좌익세력을 속되게 일컫는 용어다. 그런데 그 유래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일제에서 찾는다? 우선 일제 총독부관리가 누구를 애써 우리말로 “빨갱이”라고 불렀을지 생각해 보자. 일본인이라면 발음하기도 힘들었을 터이고, 그래도 굳이 그렇게 부르고자 했다면 아마 “빠루갱이”라고 해야 했을 텐데 그런 말은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만사 일제잔재 친일잔재 타령’에 젖어 있던 버릇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너무 막 던지는 얘기다. 그런 식으로 말과 용어에서 소위 일제잔재를 문제 삼고 싶다면 그런 말, 정말 많다. 조희연 교육감이 “유치원(幼稚園)이라는 용어는 일제잔재니 유아학교로 바꾸자”고 했는데… 맞기는 맞다, 유치원은 일본말이다. 허나 따지자면 교육감(敎育監)이라는 그의 직책도 그렇고 학교(學校)라는 말도 사실 일본식 한자어다. 학교라는 용어의 우리식 한자어를 찾자면 학당(學堂)이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등… 근대초엽의 우리의 교육기관들의 이름이다. 그래서 모든 학교를 학당이라고 바꾸어야 할까? 여론조사를 해보지는 않았으나 국민들이 그러자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국민(國民)’도 사실 일본말이다.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명이야말로 일제잔재의 범벅 아닌가?
좋든 싫든 지금 한국인이 쓰고 있는 한자어 조어의 상당 정도는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다. 특히 근대 문물과 관련된 용어들은 모두 일본식 한자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유치원도 빨갱이도 다 일제잔재”라며 소동을 벌이는 이 사람들은 그런 사실은 전혀 모르는 듯하다. 그렇게 말과 용어에서의 일제잔재를 문제 삼으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욕하는 게 되는데 그들이 알고도 그럴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잘 모르겠지만 빨갱이라는 말은 일본말이 아니지만 그 빨갱이들이 만든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따지자면 나라이름부터가 일제잔재의 범벅이다. 그 국명의 민주주의(民主主義), 인민(人民), 공화국(共和國) 모두가 일본이 번역하여 만든 한자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법대로면 북한은 일제잔재 청산 차원에서 나라이름을 뜯어고쳐야 한다.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라는 기치에 민족적 공감을 아끼지 않는 이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우리 민족끼리”의 민족(民族)도 일본이 만든 말인데 이건 또 어쩔 것인가?
소극(笑劇)이다. 일제시대 역사와 관련하여 벌이는 많은 소동들이 대개 그렇지만 말과 용어를 붙들고 벌이는 일제잔재 운운은 이렇듯 특히 더 우스꽝스러운 결론을 맞게 된다. 하지만 덕분에 드러나고 포착된 문제들을 짚어보는 건 의미 없는 일이 아니다.
‘民族’의 함정
우선 ‘민족’이라는 용어부터다. 독일어로는 ‘Volk’ 영어로는 ‘nation’에 해당하는 말을 민족(民族)이라고 번역했다. 한국인은 그 말에서 누구나 당연하게 종족주의적 함의를 느낀다. 하지만 적어도 nation은 종족(tribe) 종족적(ethnic) 의미보다는 국민(國民)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메이지 시대 근대 일본의 건설자들이 그렇게 번역을 한 데는 약간은 희망성 오역의 혐의가 있다. 일본인의 고유성을 강조하고 그렇게 하여 강한 통합을 이루고자 한 바람이 반영돼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종족주의적 함의가 어떤 위험을 갖는지는 ‘Volk’를 종족적으로 강조한 나치독일의 인종주의적 폭주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당시 일본도 그런 폭주의 길을 좇아 갔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일제시대가 끝난 지 7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반일친일 소동이 위세를 부린다. ‘반일’이 권력이 돼 있고 ‘친일’이라는 딱지는 그 어떤 것보다 강한 주홍글씨가 되곤 한다. 북한은 스스로를 ‘김일성민족’이라고 규정짓는다. 대한민국 국민은 김일성민족이 아니다. 그런데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 앞에선 그냥 허물 허물해진다. 이건 국민의 실종이다. 착오와 고의가 뒤엉켜 작동하면서 빚어지는 일이다. ‘민족’이라는 용어가 내포하게 된 관념의 틈새에 의도를 품은 정치적 작용이 파고들어 만들어낸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誤譯
민주주의라는 용어도 그런 문제를 갖고 있다. 이것은 더 분명하게 오역이다. 민주주의는 영어로는 ‘democracy’인데 이것은 그리스어 ‘democratia’에서 비롯된 말로 대중(大衆)을 뜻하는 ‘demos’와 정체(政體)를 뜻하는 ‘cracy’의 복합어다. 그래서 민주정(民主政)이나 민주정체(民主政體)로 번역해야 맞다. ‘cracy’는 이념이나 사상을 뜻하는 ‘ism’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의(主義)로 번역하면서 ‘democracy’가 그 자체로 사상 이념으로 여겨질 수 있게 했다.
물론 ‘democracy’가 그렇게 받아들여진 점이 없었던 건 아니다. 마치 그 자체로 특별한 가치를 가진 것처럼 강조된 적이 있기는 했다. 프랑스혁명의 경우가 특히 그러했다. 자코뱅의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정치도덕의 원리에 관한 보고서>에서 “오직 민주정 하에서만 국가는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의 조국이 된다”고 언명하여 그 특별한 의의를 강조했다. ‘왕정과 귀족정’이라는 앙시앵레짐을 부정하며 등장한 프랑스혁명으로서는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근대 민주정의 역사에서 프랑스에 못지않게 아니 사실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위상을 갖는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영국은 민주정이 곧바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 왕에 대해 의회의 권한과 비중이 확대 강화돼 나가는 과정을 밟아가며 근대 의회민주주의 체제의 한 전형을 구축해갔다. 그리고 미국은 독립혁명을 통해 처음부터 왕이 없는 공화정체를 구축하면서도 동시에 민주정의 폭주가 초래할 수 있는 중우(衆愚)정치의 위험성을 예방할 수 있는 대의(代議)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여 또 다른 정치적 전형을 만들어갔다.
‘democracy’가 ‘主義’가 될 때…
그런데 영미의 경우와는 달리 민주정의 의의를 특별히 강조한 프랑스혁명은 다른 전개양상을 보였다. 로베스피에르가 민주정을 말하던 그 때는 바로 공포정치가 극으로 치닫던 시기(1793년 9월 5일~1794년 7월 27일)이기도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민주정의 이름으로 앙시앵레짐의 구세력뿐 아니라 혁명에 함께 했던 이들까지 수없이 단두대로 보냈다. 그리고 그러다 결국 자신도 1794년 7월 28일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고 말았다. 프랑스의 경우는 ‘democracy’가 그 자체로 정체(政體) 이상의 주의(主義)처럼 받아들여지고 작동하게 될 때 어떻게 되는지를 미리 보여주는 일종의 역사적 선행(先行) 사례였다.
프랑스혁명 이래 그것을 모범으로 삼거나 혹은 찬양하며 진행된 모든 혁명들이 예외 없이 그런 일탈을 보여주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라 칭한 19세기 이래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로 이르는 20세기까지의 모든 시대에 발생했던 혁명이 다 그러했다. 분식(粉飾)과 덧칠로 어느덧 신화화(神話化)된 프랑스혁명은 혁명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조장했지만 그 모범을 따라간 실제의 혁명들은 덧칠 속에 숨겨진 프랑스적 혁명의 유혈과 공포정치를 반복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러시아혁명이었으며, 그를 뒤따라간 모든 좌익혁명이 다 그랬다. 그 혁명들은 하나같이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적 민주의 깃발을 흔들어댔다.
한국현대사는 ‘민주 對 反민주’의 역사?
이렇듯 ‘democracy’는 그 자체로도 이미 그 같은 폭주의 깃발이 될 수 있는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처음부터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이념과 가치의 용어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되면 내포된 속성은 최소한의 경계도 없이 더 증폭될 수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그렇게 내세워지면서 건국 초부터 끊임없이 진통을 선사했으며, 지금도 그 요동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성공적으로 이룩한 드문 나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른바 민주진영은 건국 이래 대한민국의 역사를 거의 전적으로 ‘민주’에 방점(傍點)을 두고 설명한다. 그들에 따르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주 對 반민주’ 투쟁의 역사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성취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마침내’ 이룩한 민주화다. 그들의 입장에선 산업화의 성취는 누가 했더라도 당연히 이루어질, 저절로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그들에겐 오직 민주화야말로 독재 정권에 맞서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이룩한 가치 있는 성취다.
이른바 민주진영의 뿌리의 하나라는 한국민주당부터가 그랬다. 그들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처음부터 ‘민주’를 흔들어대며 정치적 공격을 가했다. 한민당은 건국 당초부터 내각제를 주창하고 이후 줄곧 그 입장을 견지했다. 대통령제가 독재이거나 내각제가 유일한 민주정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짓고 내각제만이 유일한 민주정인 듯 내세우며 공격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내각제 정치에 대한 이해가 조선왕조시대 양반 붕당(朋黨)정치적 발상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었을까? 이들이 4.19 이후 정권을 잡은 뒤 보인 정치행태는 그런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에 더해 더없이 무능하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그 정권은 여하튼 민주정권이라 강변하고 그 무능과 혼란을 종식시킨 박정희의 5.16은 그저 반민주적 정변이라 규정했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 내내 그들은 늘 그랬듯이 민주를 앞세우며 독재를 공격했다. 그들의 입장에선 박정희 시대는 그저 민주 대 반민주의 투쟁의 시대일 뿐이다. 그 시대에 이룩된 한강의 기적은 그들의 민주논리 앞에선 어쨌든 이루어질 수 있었던 자연적 발전일 뿐이다.
민주 깃발만으로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을까?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0.26 직후의 상황은 ‘서울의 봄’이며 그 끝인 5.18 사태는 짓밟힌 민주항쟁이다. 그리고 전두환 시대는 아무리 괄목할 경제성장이 이루어졌어도 그 또한 저절로 이루어질 일이었으며 여하튼 또 한 번 되풀이 된 군사독재의 시대일 뿐이다. 그 기나긴 정치적 암흑의 시대가 1987년 6월의 민주쟁취로 마침내 끝내게 된 게 그들의 입장에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논법은 그들의 주관적 믿음일 뿐이다. 산업화의 성취는 결코 저절로 이룩된 게 아니다. 그 성취는 당연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이루어진 게 아니라 도저히 이루어질 전망이 보이지 않는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때 그 시절, 이 같은 성취가 가능하다고 본 사람들은 나라 밖에도 없었지만 나라 안에도 없었다. 모두가 “안 된다”고 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끊임없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거듭하며 수시로 전진의 발목을 잡았다. 그런 자들이 흔들어대는 민주의 깃발만으로 ‘한강의 기적’이 과연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런 점에서 그들은 결코 동의하지 않겠지만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지던 그 시절의 정치는 결코 본질적으로는 反민주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분식의 위선에 현혹된 환상이 초래할 위험을 방지하는 고삐였을 뿐이다.
좌익의 民主論
민주(民主)는 주의(主義)가 아니라 정체(政體)다. 즉 그 자체로 절대가치를 갖는 게 아니라 하나의 형식, 즉 이념과 가치를 담는 그릇이다. 물론 그릇 자체도 그 나름의 가치를 갖기는 한다. 하지만 정치적 형식으로서의 그릇은 거기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운명 자체가 달라진다. 이 점을 잊으면 민주라는 그릇은 자칫 毒杯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전형적인 경우가 좌익이념이 구사하는 민주론이다. 공산주의를 비롯한 모든 좌익이념들은 하나같이 먼저 스스로를 진짜 민주주의라 내세운다. 그 목적은 자유에 대한 공격이다.
자유는 곧 소유권이다.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의 소산에 대한 침해를 받지 않는 온전한 소유가 곧 자유다. 소유권은 경제적으로는 재산권이며 재산권의 보장이 자유의 보장의 핵심이다. 때문에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체제는 경제적으로는 자유시장경제체제가 된다.
공산주의는 이를 공격하기 위해 진정한 민주주의 운운의 논법을 구사하며 이러저러한 민주주의를 내세우곤 한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소비에트 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신민주주의 따위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것도 있다. 해방공간 당시의 남북한 좌익들이 그런 표현을 동원했다. 좌익들에 대한 지지가 꽤 있었다곤 하지만 사실 공산주의의 적색 이미지는 이미 “빨갱이”라는 말로 경원시의 대상이 돼 있었다. 그래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썼다. 그런데 그 어떤 수식을 붙이든 본질은 간단했다. ‘자유의 삭제’였다. 자유 없는 그런 민주가 결국 무엇을 뜻하는지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사례로 충분하다. 시진핑이 사실상의 황제로 등극한 중공은 신민주주의를 내세웠으며, 김가 일족 삼대 지배체제의 북한도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자유의 반대편에 선 그들의 민주주의란 결국 그처럼 압제체제를 포장하는 기만적 장식물로 전락할 뿐이다. 자유와 이별 당한 민주는 자신도 파괴하면서 反민주가 돼 버리고 만다. 그래서 자유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민주를 지키기 위해서도 민주주의는 반드시 자유민주주의이어야 한다.
민주와 자유
자유는 민주라는 집(형식, 政體)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민주라는 집도 반드시 자유를 주인으로 해야 한다. 자유가 떠나 빈집이 돼 버린 민주는 더 이상 살만한 집으로 남아있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주인이 떠난 집에는 원치 않는 불청객이 들게 되니, 가장 흔히 찾아드는 것은 사기꾼과 도적들이다. ‘민중(民衆)’을 앞세우며 그럴듯한 말, 달콤한 말을 떠들어대며 세상을 속이고 훔치려는 ‘빨간’ 무리이다. 그들은 인간의 얼굴을 했지만 사실은 악령(惡靈)이다. 자유가 떠나버린 민주라는 집은 그렇게 사기꾼과 도적의 소굴이 되었다가 결국에는 악귀들만 남는 흉가가 된다.
민주는 자유의 보금자리다. 그러나 개인의 삶이 그렇듯 자유민주체제의 국가라 해도 처음부터 좋은 집을 바랄 수는 없다. 지하 단칸방이나 옥탑방에서 시작했지만 땀 흘려 노력해 점차 부를 쌓아 좀 더 좋은 집을 갖는 것처럼 자유체제의 보금자리 민주도 그렇게 성장하는 가운데 점차 나아지는 것이 이치다.
이승만ㆍ박정희 시대의 한국의 민주정치는 분명 선진국의 그리고 오늘의 한국인들이 당연시 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시대에도 대한민국이 건국 때 선택한 자유민주체제의 기본 원칙은 지켜졌다. 물론 당시의 민주정치의 구현 수준은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이들을 만족시킬 만큼은 되지못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정치를 아무리 나쁘게 말한다 해도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따위가 달고 있는 ‘민주’라는 간판의 기만성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아무리 그 시대의 위정자들을 독재자라 질타한다 해도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등에 비할 바는 못 된다.
1948년 8월 15일은 ‘자유의 생일’
오늘날 한국인들은 ‘자유’를 당연시 한다. 온갖 난장(亂場)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정작 ‘자유의 삭제’에는 아무런 긴장을 갖지 않을 만큼 당연시 한다. 그러나 이 ‘당연한’ 자유를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한반도의 휴전선 이남에만 존재한다. 그런데 이 절반만의 자유도 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 남쪽 5000만 명이 누리는 자유에는 분명한 생일이 있다. 1948년 8월 15일이다. 지금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바로 그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과 함께 한반도에 자유가 강림(降臨)했다. 자유를 이념으로 한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구체적 제도와 체제로서의 자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민국의 생일은 동시에 한반도에서의 자유의 탄생일이다.
다른 모든 나라의 자유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우도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해방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의 3년, 격렬한 정치적 진통이 이어졌다. 해방의 감격에 뒤이은 소박한 민족주의적 열망이 팽배했던 때였다. 어떻든 남북 단일의 하나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선택의 문제가 있었다. 우리 민족이 앞으로 어떤 이념과 체제로 살아갈 것인가의 선택이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편한 대로 택하거나 사이좋게 조화시킬 수 있는 그런 선택이 아니었다. 운명을 건 선택이요 양립 불가능한 생사의 선택이었다. 이후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했다. 북한은 결국 현존하는 지옥도가 되었지만 대한민국은 유례없는 번영의 길로 나아갔다. 북한은 ‘공산’을 택했지만 대한민국은 ‘자유’를 택한 결과였다.
“반공 민주 정신”은 反민주가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문재인 정권의 사람들은 민주를 자신을 과시하는 신성의 깃발로 앞세우면서도 자유는 헌신짝 다루듯 한다. 아니 아예 자유민주에서 자유를 삭제하는데 혈안이다. 자유를 덜어낸 민주에 무엇을 담으려는 것인가? ‘붉은 독(毒)’을 담으려는 것인가?
형식에는 집착하면서도 붉은 독을 막는 것 즉 반공은 잊은 민주는 결국 자신도 그 독에 의해 부식되고 파괴당하게 된다. 1968년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은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라고 갈파(喝破)했다. 국민교육헌장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린 지 오래고 반공도 어느덧 꼴통의 유물 취급을 받고 있다.
하지만 동서세계 모든 나라의 현대사는 “반공 민주 정신”이 없는 민주주의는 결국에는 민주주의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국의 자유민주체제는 더없이 취약하고 허약한 상태에서 출발했지만 “반공 민주 정신”을 굳건히 했기에 지켜지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른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체제가 다시 능멸당하고 훼손되는 장면을 목도하고 있다. “김일성 만세도 표현의 자유”라고 하는 자가 설치더니, ‘김정은 위인 맞이 환영단’이 등장하고, “나는 공산당이 좋아요”라는 현수막을 앞세운 자들이 광화문 광장을 활개 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걸 이대로 내버려두어도 되는가?
2019-04-04 19:28:21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즘 마태복음 강해, 성경의 주요 예언 강해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왕국을 주러 오셨지만 그들이 이것을 거부하여 결국 왕국의 실현이 재림 때로 연기되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만일 유대인들이 왕국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고 묻는 분들이 더러 있어 글을 적습니다.
사실 이런 질문은 한두 개가 아닙니다. 한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1. 하나님이 마귀를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3. 사람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등....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사람의 자유의지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또한 교회와 왕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런 것은 이미 100년 전에 클라렌스 라킨이 저 유명한 책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Rightly dividing the word>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우리 출판사가 이미 오래 전에 <성경바로보기>로 출간한 바 있습니다.
<성경 바로 보기>는 무료 PDF 책으로 볼 수 있으니 다운 받아서 4장 교회와 왕국, 그리고 22장 선택과 자유 의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http://keepbible.com/Pds1/View/4S5?stype=snc&keyword=%EC%84%B1%EA%B2%BD%20%EB%B0%94%EB%A1%9C
다음 목차에서 보듯이 이 책은 참으로 진귀한 진리를 잘 요약해서 보여 줍니다.
정신을 집중해서 이 책을 잘 읽고 이해하시면 정말로 성경을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진리를 찾고자 하는 모든 분들에게 영적 분별력을 충만히 내려주시기를 원합니다.
참고로 킵바이블 자료실에는 여러 가지 다른 책들이 무료 PDF 책으로 들어 있습니다.
http://keepbible.com/Pds1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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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바로 보기 목차
제1장 성경을 바로 보자 17제2장 시대와 경륜 27제3장 유대인과 이방인 42제4장 교회와 왕국 54제5장 네 복음 67제6장 초림과 재림 70제7장 영의 세계 84제8장 사탄 94제9장 사탄의 삼위일체 100제10장 두 신비 104제11장 그리스도의 부활 119제12장 성경의 부활 125제13장 성경의 심판 132제14장 두 아담 144제15장 속죄와 구속 157제16장 죄와 구원 164제17장 율법과 은혜 172제18장 믿음과 행위 178제19장 두 본성 183제20장 그리스도인의 위치와 상태 191제21장 새로 태어나는 것과 침례 196제22장 선택과 자유 의지 205제23장 그리스도와 신자의 내주 관계 211제24장 그리스도의 세 사역 220제25장 유월절 어린양 그리스도 230제26장 천국과 지옥 240제27장 유대교와 기독교 255제28장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들 267
2019-03-26 17:04:35 | 관리자
문재인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가 문측에서 소송을 걸어서 재판까지 하신 분이시죠.
판결은 무죄로 나왔습니다.
고 영주 변호사는 공안검사 출신으로 누구보다도 주사파와 종북주의자들의 실체를
잘 알고 계신 분으로 귀한 강연이 될거 같습니다.
2019-03-22 19:31:41 | 권 효중
미래 비전이 없는 지도자는 과거에만 집착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것은 전문가가 아닌 이상 힘든 일이지만 과거를 자기들의 잣대로 '정의구현'한다는 미명아래에 단죄하는 것은 쉽고, 소위 정의병에 걸린 한국인들을 선동하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지요. 이념병에 걸린 현 위정자들을 보면서 젊은 세대로서 다음세대가 너무도 걱정됩니다.하노이 미.북 회담 결렬 뒤 더 심각해지는 한.미 동맹의 균열, 북한 미사일 발사 재개 움직임. 20-40대 최대 고용악화, 탈원전에 이어 4대강 보해체까지 밀어붙이는 모습, 장관 후보자들의 비리 의혹이 저토록 심각한데 밀어붙이는 모습 등등 정작 해결해야할 현실적인 문제는 산더미 처럼 있지만 해결할 능력이 없다보니 떨어지는 지지율을 자신들이 잘하는선동하기 정책으로 국민을 우롱하는 모습을 보고있자니..정말 속이 타들어 가고..절박한 심정입니다.공의로우신 하나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2019-03-22 14:49:55 | 오광일
안녕하세요?
우리나라에는 세상을 거꾸로만 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한 1% 정도).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면 나만 이상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래를 위해 힘을 합쳐도 살기가 힘든데 이런 쓸데 없는 일에 국민 세금을 쏟아부으려는 시도를 보면서 주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국민들이 속히 깨어나도록...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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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피해 보상 추진…여당 입맛따라 역사 소환?
인천시의회가 2019년 3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피해를 본 ‘월미도 원주민’ 또는 상속인에게 생활안정지원금을 지급하는 내용의 ‘과거사 피해 주민 생활안전 지원 조례안’을 통과시킨 게 정치권의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인천시 의회는 1950년 9월 15일 벌어진 인천상륙작전 때 당시 유엔군의 폭격으로 월미도 주민들이 사망하거나 고향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보상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인천 지역의 일부 시민단체들은 인천상륙작전 당시 유엔군이 무리하게 한 작전 감행으로 피해가 컸다며 피해보상을 주장해 왔다. 2006년 열린우리당 한광원 의원 등이 ‘월미도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 주민 보상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하면서 피해보상이 본격 논의됐다. 하지만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자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는 2011년 2월 인천지방법원에 “국방부와 인천시, 미국 정부, 유엔은 월미도 원주민 가구당 300만원씩 모두 1억3500만원을 배상하라”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다. 정부는 “원주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월미도에 살았다는 토지대장 등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고, 월미도 원주민 측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자료가 소실됐다”고 맞섰다.
인천시 의회가 피해보상 조례 제정을 시도한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안병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해 2011년과 2014년 두 차례 조례 지정을 시도했지만 상위법과 충돌한다는 이유로 부결됐다. 하지만 올해 법제처가 ‘월미도 피해자 중 인천 거주자에 대한 생활안전 지원은 지자체 업무’라고 유권해석을 내리자 이를 근거로 조례를 제정했다. 현재 인천시의회는 37명 의원 중 민주당 의원이 34명이며, 이 조례를 통과시킨 기획행정위원회는 7명 전원이 민주당이다.
그러나 이런 조례 지정에 대해 ‘과도한 피해보상 적용’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역사전문가는 “제2차 세계대전 때도 군사작전으로 벨기에 등이 쑥밭이 됐지만 이 때문에 피해보상을 한 적이 없다”며 “6·25 전쟁으로 전 국민이 피해를 보았는데 유독 인천상륙작전에 대해서만 피해를 보상하라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전희경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면 그에 앞서 6·25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야기시킨 북한 정권에 대해 피해보상을 청구해야 옳다”며 “전범인 북한엔 아무 말도 못하면서 우리를 도운 유엔군에 피해를 보상하라는 시민단체 측의 목소리에 보조를 맞추는 게 문재인 정부가 말하는 정의로운 사회냐”고 비판했다.
이에 앞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9월부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를 만들어 유족 등록 업무에 나선 것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이는 노무현 정부가 2004년 관련 기념사업을 벌여 3644명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1만567명의 유족을 참여자 및 유족 명부에 등록한 것에 대한 후속 작업이다. 호남 지역 의원들은 “동학혁명 희생자가 20만~30만 명에 이르는데 1만여 명 등록은 너무 적다”며 등록 신청 기간 제한을 해제한 개정안을 상정해 통과시켰다.
하지만 무려 124년 전 조선시대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 세금을 투입해 명예회복에 나서는 것이 적절한지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한국당 관계자는 “이러다간 임진왜란 피해 보상이나 4대 사화(士禍) 피해자 명예회복 얘기가 나올 판”이라며 “민주당이 민생은 나아지게 할 자신이 없으니 과거사에만 매달린다”고 주장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418367
김진태 의원의 답변: "인천상륙작전 피해 보상? 北김일성이 가장 좋아해"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22일 최근 인천시의회에서 인천상륙작전 피해보상 조례를 제정한 것에 대해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 가장 좋아할 사람은 지하에 있는 김일성"이라고 비판했다.
김 의원은 이날 입장자료를 내고 "적화통일을 목전에 두고 뜻을 이루지 못한 김일성의 한을 풀어주는 데 국민혈세를 쓰겠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없었다"며 "차라리 왜 했냐고 따지는 게 솔직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패전국을 상대로 전쟁배상금을 받아내는 일은 있지만 국가가 자국민에게 보상하는 일은 없다"며 "6.25로 인한 피해보상을 해주려면 전 국민에게 해줘야한다. 전쟁의 피해를 겪지 않은 국민이 어디 있느냐"고 지적했다.
김 의원은 이날이 서해수호의 날인 것에 대해 "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으로 사망한 원혼을 달래야한다"며 "국제사회는 북한 연해를 봉쇄해서 북한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고 있는 마당에 우린 69년 지난 일에 매달려 있다"고 덧붙였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0322_0000596030&cID=10301&pID=10300
2019-03-22 14:06:59 | 관리자
안녕하세요?
저희 교회에서는 2019년 3월 24일 주일 오후에 예배를 마친 뒤 고영주 변호사님을 모시고 애국 강연회를 진행하려 합니다.
제목: 공산주의 좌경화 세력의 실체와 민주 시민들의 대응책
시간: 2019년 3월 24일 주일 오후 4시
연사: 고영주 변호사
오랫 동안 공안 검사를 하신 고영주 변호사님께서 우리나라 좌경화 세력의 실체를 잘 보여 주시고 이에 대한 민주 시민들의 대응책을 설명해 주실 것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들으시면 애국의 길이 무엇인지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들이 바른 것을 가르치고 계몽해야 할 때입니다.
국가를 사랑하고 살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지금 해야 할 일입니다.
다음 주 같은 시간에는 한 분의 국회의원을 모시고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 들으려고 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9-03-22 10:40:02 | 관리자
안녕하세요?
오늘 아침에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의 한 교회 목사님께서 교회 소개를 부탁하셔서 간단히 글을 올립니다.
교회 이름은 ‘애틀랜타 사랑침례교회’ (Atlanta Love Korean Baptist Church)이고 이 교회는 20년이 넘는 교회 역사를 가진 조그만 교회로서 현재 10여 명의 형제자매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이분들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함을 믿으며 목사님은 댈러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세대주의 교리를 따라 문자 그대로 성경을 믿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애틀랜타 지역에 계신 성도들 가운데 같이 교제하며 교회를 이루실 분들은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이 교회의 이름이 저희 교회와 같지만 저희 교회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저도 목사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방문해서 살펴보시고 좋으시면 정착해서 좋은 교회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뜻이 맞는 성도들끼리 지역 교회를 이루어 주님의 일을 수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뜻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성도들을 바르게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1. 애틀랜타 사랑침례교회(Atlanta Love Korean Baptist Church), 지정호 목사님
2. 주소:285 Main St, Lilburn, GA 30047
3. Cell phone: (678) 662-9529
Grace b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from the Lord Jesus Christ.
2019-03-22 10:06:26 | 관리자
사회주의자 예수,군주주의자 예수,무산자 예수,혁명가 예수,부드러운 시인 예수..이런류들은
성경을 자기 이데올로기에 맞도록 예수님을 날조해서 나온 것이고 예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거짓 영이 하는일인데..진리 즉 하나님과 예수님의 진리를 사물,이념,견해,교조,철학,과학,경험,실재(리얼리티)로
변형시켜며,실재를 허울뿐인 진리로 변형시킵니다.
신약성경에서 거짓이란 사소한 거짓이나 죄책의 부정,잘못,자료의 위장등..우리가 일반적으로 거짓이라 부르는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예수님에 대해 그릇된 사상을 선언하는것이 거짓입니다.
이걸 거짓 영..마귀,사탄이 하는것이기에..교회는 대적해야 됩니다. 거짓영이 선포되는것에 대해..
예수님은 그 자신안에서 그 인격속에서 유일한 진리이십니다.
민중신학,해방신학 ..이런 거짓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에 교회가 앞장서서 싸워야 됩니다.
다행히도 사랑침례교회가 그 동안 맘몬과 세상권력,거짓되고 변질된 복음에 취해 진리를 벗어난 한국교회 대신 진리 수호에 앞장서서
많은 일들을 하는것이 얼마나 귀한지 ..늘 감사합니다.
2019-03-15 21:40:40 | 권 효중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 뭔지 분명해지면 어서 빨리 돌아오는게 그분께 도리라는 생각을 합니다.몰랐으면 모를까 가르친대로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힘들지만..하나님 것이 무언지(적어도 하나님 것에 가까운게 어떤 것인지) 생각하는 아이로, 그것을 당당하고 부드럽게 전하는 아이로 키우다 보면..기쁘게 하나님 만날 날 오겠지요.."잘 살기 시작한지 별로 안 되는 구나"큰애 말처럼 감사하며 애국가 울리면 괜히 울컥하는 멋진 애들로 키우고 싶어요..
2019-03-15 20:51:43 | 목영주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동원하기 위해서는 폭로가 중요하다. 그래야 대중들은 좌익의 실상과 위험성을 자각하게 된다. 좌익의 사상과 이들의 잘못된 역사관, 방법론에 대한 지속적인 폭로가 있어야 한다.이념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힘은 우리가 가진 사상과 방법이 정당하다는 도덕적 확신에서 나온다."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여 정점을 찍고 결국은 그 사상을 버리기까지의 글들을 보면서,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이 구구절절 와 닿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올바른 역사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9-03-15 15:54:30 | 이명석
안녕하세요?
2019년 3월 17일 주일 오후 4시에는 이동호 선생님을 모시고 80년대 주사파들의 실체와 자유 민주주의 전향 체험 강연을 듣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예수님이 민중 신학/해방 신학을 선포한 분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연세대학교 전대협 연대부장을 지내며 골수 주사파 활동을 하던 연사의 체험이 이 나라를 살리는 데 큰 기여를 하기 바라며 그분의 증언을 올립니다.
아이들과 함께 오셔서 강연을 들으시면 역사의 좋은 체험을 듣고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를 좌익 세력으로부터 지키는 것이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이 지고 가야 할 부담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같이 기도합시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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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산주의 활동가의 자기 고백
이동호(미래한국 편집위원)
1.
공개적 자기 고백이란 참 어려운 활동이다. 과거 자신의 활동을 스스로 비판하고, 그 활동이 잘못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자백해야한다는 것은 나에 대한 정신적 고문이다. 너무 힘든 과정이다. 과거 내가 믿었고, 그 믿음에 근거해 활동했던 활동이,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공동체에 큰 해악을 끼쳤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더욱 그렇다. 나의 청춘 거의 전부의 기억을 부정해야 하는 지점에 이르면 거의 실신 상태에 이르게 된다.
꼬박 10년이 걸렸다. 공산주의와 주체사상, 혁명에 대한 나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철학과 역사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 나의 결론은 나는 틀렸다 이었다. 따라서 나는 내 청춘 시절 전부를 부정해야 했다. 참 오래도 망설였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았다. 특히 인간관계가 걸렸다. 내가 나의 활동이 잘못되었다고 자기 고백하면, 나와 그 시절 함께 동고동락하며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 어떻게 될까?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내가 나의 조국에 끼친 해악이 너무 컸다. 내가 숨기고 가만히 있다면 다시 한 번 조국에 죄를 짓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결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자기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
나는 인류 역사 발전의 법칙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인류 발전 법칙을 따른 다면 모든 인류는 행복한 천국의 나라에 살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나는 역사 발전 법칙을 먼저 깨달은 선각자였다. 이 깨달음을 널리 전파해야할 사명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이 사명을 위해서는 나는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았다. 아직 역사발전법칙을 모르는 무지한 대중을 선도하는 길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무지한 대중을 선도하는 길은 공산주의 혁명의 길이었다. 나의 공산주의자의 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의 대학생활의 시작은 예수를 따르는, 특히 약자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준 ‘억눌린 자를 위한 예수’를 따르는 길로 선택한 길이었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 교회 전도사를 통해서 ‘민중신학’의 세례를 받은 상태였다. 억눌린 자들의 해방을 위해 오신 예수! 자신의 전부를 희생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나의 신앙이었다. 대학에서 민중을 위하는 학생운동에 접하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당시 독재정권이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민중의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보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대학 서클에 등록했다.
대학 서클 활동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했다. 당시 대학 서클 활동은 대부분 공산주의 서클이 장악한 상태였다. 공개적으로 내건 것과는 상관없었다. 우선 시각 조정이라는 명목의 학습활동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이제까지 내가 알던 역사적 사실들은 전부 부정당했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였다. 그의 미국에서 독립활동은 동포들로부터 활동자금을 받아 호의호식한 위선자로서 대한독립을 위한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미국이 소련을 비롯한 공산세력의 화장을 막는 전진기지를 위해 시도한 한반도 분할에 앞장선 분단의 원흉이었다. 그는 일제 부역자들을 대거 국정운영에 동원함으로서 대한민국이 민족적 정통성을 회복하고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길을 방해한 사람이었다. 독재로 일관하다 말년에 이르러 국민들의 저항에 외국으로 탈출한 독재자였다.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대한민국은 일제에 협력하던 친일파들이 장악한 나라였다. 일제에 붙어 호의호식하던 친일파들이 이승만의 친일파 기용으로 다시 해방공간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반공을 빌미로 역으로 애국자들을 탄압하고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을 장악했다. 반면 독립군의 후예들은 해방된 공간에서 그들의 공로가 제대로 인정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해방되었지만 해방된 것이 아니었다. 치욕의 나라였다. 정통성이 없는 사람들이 이끄는 나라였다. 친일파들이 주역이 되어 대한민국은 독재의 나라로 전락했다. 정통성이 없는 자들이 대한민국을 이끌다 보니 정상적인 방식으로 대중을 설득하기는 어려웠다. 강압의 방식만이 가능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일상적인 통치방식이 되었다. 박정희는 친일파의 대표자 였다. 일제 만주군의 장교로, 독립군을 핍박하던 박정희는 해방이 되자 조국에 돌아와 군인이 되었다. 그는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독재의 화신이었다.
한국경제사를 공부했다.
조선은 자주적으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자본주의 맹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이로서 자주적인 발전의 길은 막히고 식민지로서 수탈의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식민지로서 한반도는 해방과 분단 이후 한반도 남단에서는 미국이 식민지 종주국으로서 지배하기 시작했다. 남한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미국 제국주의로 그 주체만 바뀌었지 식민지 수탈체제로서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미제국주의는 식민지 민중들의 반발이라는 여건의 변화를 반영하여 식민지 지배방식을 바꾸었다. 직접 지배방식에서 간접 지배방식으로 전환이다. 이것을 ‘신식민지주의’라고 불렀다. 한반도 남단은 미국이 주인이 되어 식민지 민중을 수탈하는 체계였다.
미국은 한반도 남단에 진입하자마자, 그들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노골화 했다. 그 때 처음 미군 사령관은 포고문을 보았다.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한다.” 시종일관 위압적인 어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점령군 사령관다운 말투였다. 반면 소련의 포고문은 친절했다. “조선 인민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여러분들의 수중에 있다. 여러분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렸다. 붉은 군대는 조선인민이 자유롭게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만들어 놓았다. 조선 인민은 반드시 스스로 자기 행복을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포고문은 정반대였다. 누가 점령군이며 누가 조선을 도우러 온 군대인지 분명해 보였다.
미국은 한반도 분단의 원흉이었다. 38도선을 제안한 것이 미국이었다. 그리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구성한 것도 미국이었다. 미국은 애초 한반도 통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소련의 극동지역 팽창을 억제하는 대소전진기지로서 미국은 한반도 분할에 나선 것이다. 미국은 자신의 충실한 대리자를 남한의 지배자로 내세웠다. 이승만이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남한지배를 대리하는 정권이었다. 미국의 식민지 지배의 통치도구가 이승만 정권이었다. 미국은 정치 뿐 만아니라 경제도 장악했다.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을 자신들의 남한 통치에 동조하는 동조자들에게 분배하여 이들을 남한 지배의 도구로 사용했다. 이렇게 성장한 것이 남한의 자본가 계급이었다. 남한의 자본가 계급은 미국의 한반도 지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협력자였다. 그들은 미국에 협력하는 대신 남한에서 자신들의 계급적 지배를 보장받았다. 6.25 이후 미국의 원조는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남한의 경제를 미국에 의존하게 만드는 식민지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도구였다. 미국에 의존하는 원조경제로 남한의 경제는 자립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영원한 예속의 길로 들어섰다.
미국은 대한민국을 군사적으로도 강점했다. 한미동맹은 미국이 대한민국의 안보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군사력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리고 소련과 북한의 침략을 위한 도구였다. 지금까지 미국은 한미동맹을 통하여 한국의 군사력을 지배하고 있다. 군사적인 독자성을 갖지 못한 나라가 독립국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미국은 대한민국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실질적 지배자였다.
철학을 공부했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계급투쟁론을 공부했다. 이제까지 철학은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이었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계급적 지배를 은폐하기 위하여 관념론을 유포했다. 현실의 질서는 신이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지배계급의 계급적 지배는 은폐되거나 정당화 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르면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졌다. 또한 세계는 변화 발전한다.
기본법칙을 알게 되었다.
제1법칙 : 양질전화의 법칙. 사물은 변화한다. 변화는 서서히 양적으로 변화하는 것과 급격하게 비약적으로 질적으로 변화하는 혁명적 형태가 있다. 양적인 변화가 쌓여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이를 사회 발전 과정에 적용하면 폭력혁명은 정당화된다. 질적인 변화는 극적이고 격렬하게 이루어진다. 사회변화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서서히 양적으로 변화 발전하다가 일정한 시기에 이르러서는 급격히 질적으로 비약적인 변화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가 사회혁명의 시기에 해당된다. 사회혁명은 사회의 변화 발전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제2법칙 : 부정의 부정의 법칙. 사물은 발전하기 위하여서는 현존 상태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현존 상태를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부정한 것을 다시 부정하여 보다 더 발전된 긍정의 상태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사물의 발전은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현재를 부정하는 것은 당연한 발전의 과정이다. 현재를 부정하는 혁명은 언제나 발전의 편에 서있는 정당하고 고귀한 것이다.
제3법칙 :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 사회가 발전하기 위하여서는 사회의 낡은 통일이 파괴되고 새로운 통일이 이룩되어야 한다. 대립물이 서로 투쟁하여 낡은 통일을 파괴하고 새로운 통일을 이룩함으로써만 사물의 발전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회의 낡은 통일을 유지하려는 지배 계급을 반대하는 피지배 계급의 계급투쟁이야말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이다. 계급적 대립은 사회 발전의 원천이었고 계급투쟁은 사회발전의 절대적 동력이었다.
주체사상을 공부했다.
김정일이 썼다는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읽고 또 읽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 졌다고 했다. 따라서 혁명에서 물질적 기초의 변화를 살피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상식은 사회운동에서 인간의 정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주체사상은 물질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운명과 역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새로운 철학이었다. “주체사상이란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다.” 이 명제를 좀 더 일반화하여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상이다.” 혁명의 주체를 노동계급으로 한정하여 그 폭을 좁히지도 않고, 인간의 역할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부분이 약간 걸리기는 했다. “인민대중의 이익은 수령이 가장 이상적으로 대표하기 때문에 인민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입장은 곧 수령을 옹호하는 입장이다”라고 하는 부분에서다. 약간 걸리긴 했지만 혁명에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마지막 단계로 혁명론을 공부했다.
북한의 대남 혁명방송인 ‘구국의 소리 방송’에서 대한민국 혁명론을 강의했다. 소위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론’이다. 방송 내용을 청취 활자화해서 서로 돌려보고 돌려보았다. 운동권 서열이 높으면 복사 상태가 양호한 것을 보았다. 서열이 낮을수록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여 잘 보이지 않는 복사본을 가지고 공부했다.
대한민국은 미제국주의의 식민지 였다. 미국은 대한민국을 정치, 경제, 군사 등 전 분야에서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세력이었다. 군부독재 세력은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대리하는 대리권력 이었다. 따라서 한국사회는 미국의 식민지적 수탈과 지배로 자본주의도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왜곡된 자본주의로서 한국사회는 ‘식민지반자본주의 사회’였다. 식민지 지배를 받는 민족모순과 자본주의 사회로서 계급적 지배를 받는 계급모순이 중첩된 사회가 대한민국이었다. 한국사회의 혁명을 위해서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진보적 지식인이 주력군이 되어 민족자본가, 중소상공인, 애국적 종교인 등이 보조동력을 참여하는 혁명이 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통일전선이 필수적이었다. 이 혁명을 위한 3대투쟁과제도 도출되었다. 반미자주화 투쟁, 반독재민주화 투쟁, 통일촉진 투쟁 등이 그것이다. 이를 소위 자주, 민주, 통일 투쟁이라고 불렀다. 이 3대투쟁 중 가장 우선되는 투쟁은 반미자주화 투쟁이었다. 모든 투쟁은 반미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광우병 시위 미선이 효순이 시위 등 반미투쟁은 일어나지만 반중투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다.
3.
서클에서 활동은 공산주의 사상과 이론, 공산주의 운동사와 혁명론 등을 공부하는 학습과 이를 실천하는 시위 참가 활동의 결합이었다. 공산주의 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실천을 통하여 실체에 더 가까운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실천은 학습의 당연한 결론이었다. 실천은 우선 투쟁에 동참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선배들의 손에 이끌리어 우선 교내 시위에 동원된다. 시위에 동원되고 나서는 반드시 술자리를 겸한 평가회를 갖는다. 이 평가회가 실천에 대한 반성의 시간인 것이다. 투쟁이 수위는 점차 높아진다. 학내 시위에서 학교 밖의 가두시위로 동원된다. 시위 참여 방식도 점차 높아진다. 처음에는 단순한 동원이다. 그러나 시위 참여 횟수가 늘어나고 학년이 높아져 감에 따라서 사람마다 차별이 있지만 그중 일부는 시위를 이끄는 그룹으로 참여하게 된다. 혁명의 전사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참여 횟수가 늘어날수록 대범해 진다. 활동 범위도 처음에는 서클에서 활동하는 수준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학년이 높아지고 단위에서 인정받으면 활동 범위가 넓어진다. 단위 서클에서 서클의 연합단위로, 서클 연합단위에서 학교전체를 총괄하는 단위로, 최상층은 학교 단위를 넘어 학생운동 전체를 총괄하는 범위로 확장하게 된다.
나는 서클 내 성원들과 선배 그룹의 인정을 받았다. 서클 내에서 후배들을 교양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처음 서클에 들어와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들에게 내가 교양 받은 것처럼 한국근현대사 공부를 통해서 시각을 교정하고, 공산주의 철학을 가르치고, 공산주의 투쟁사와 혁명론을 가르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후배들을 시위에도 데리고 다녔다. 어느 날 서클을 대표하여 비밀 대회에 참여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서클의 각 단위 대표들이 비밀리에 참여하는 회의였다. 한 해의 투쟁을 평가하고 새로운 투쟁을 비밀리에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서클 연합단위 회의에서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제 학교 전체를 대표하는 비밀회합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각 단과대학의 비밀 대표들이 그 회합에 참여했다. 그곳에서는 사상과 투쟁 방식에 대한 적극적인 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한해 대학의 비밀 조직을 이끌 대표를 선출했다. 나는 그곳에서도 4인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4인 중앙위원은 총책임자와 총학생회 책임자, 학내 투쟁 책임자, 학내 선전 책임자로 역할을 나누었다. 나는 총학생회 지도담당 책임자였다. 이때부터 나는 총학생회로 출근했다. 물론 공식 명칭은 총학생회 기획부 차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총학생회의 비밀 리더였다. 중앙위원회에서 결정된 사항을 전달하고 총학생회가 할 일을 지도했다. 그리고 각 부서의 활동계획을 보고 받아 이를 중앙위원회에 전달하여 토의했다.
87년 6월 투쟁은 비밀지도부에 의해서 지도된 투쟁이다. 당시 각 대학을 지도하는 비밀 지도그룹이 있었다. 반미청년회가 그것이다. 반미청년회는 각 대학의 핵심 혁명분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학교 간 연대선을 구축하고, 통일적인 투쟁을 지도했다. 4.13호헌 조치에 반대해서 각 대학교 총학생회 주도로 반호헌 투쟁을 벌였다. 그 와중에 연대에서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 이 소식은 각 대학교 비밀연락선과 총학생회를 통해 각 대학에 알려졌다. 반미청년회는 각 대학 간 연대투쟁을 지도했다. 이른바 명동성당 투쟁이었다. 각 대학은 대학별로 학교에서 투쟁결의 대회를 하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명동으로 향했다. 이 때 투쟁구호와 각 대학별 집결지점 등이 비밀 연락선을 타고 내려왔다. 명동 투쟁에 나가기에 앞서 학생들은 구호와 집결지, 투쟁 방식들을 전달 받았다. 이때 위에서 내려온 구호가 “호헌 철폐! 독재 타도! 군부독재 지원하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등 이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는 반독재민주화 투쟁에 해당하는 구호다. 그리고 군부독재 지원하는 미국놈들 몰아내자는 구호는 반미자주화 투쟁에 해당하는 구호다. 각 투쟁의 구호에도 그냥 만든 것이 아니라 혁명론에서 학습한 대로 3대투쟁 과제를 적절히 결합한 것이다.
중앙위원으로 활동 후 나는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으로 활동 범위를 옮겼다. 중앙위원 활동을 마치고 단과대학에 내려와 있던 나에게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나의 중앙위원으로서 활동을 잘 지켜보았노라고 했다. 자신을 ‘콤’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나에게 자신과 더 많은 사업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는 이른바 ‘조통그룹’의 수장이었다. 그는 연대 출신으로 86년 연세대 비밀 학생조직인 연대구국학생동맹의 맹원이자 지도그룹이었다. 건대사건으로 경찰의 추적을 받아 감옥에 수감되었다. 특사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연대를 중심으로 ‘조통그룹’을 결성했다. 나는 그 그룹을 대표해서 전대협에 파견된 것이다. 후일 이 그룹은 임수경을 북한에 파견하는 활동을 벌렸다.
1988년 각 대학에 나붙었던 북한 관련 대자보는 북한의 대남 공작 지도부서인 한민전이 지시한 것을 방송으로 청취해 이를 대자보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87년 발생한 KAL기 폭파사건의 진실이었다. 북한은 이 사건은 남한이 대선을 승리하기 위하여 조작한 사건이라고 선전했다. 우리는 이를 북한 방송에서 청취하여 다음날 성실히 대자보로 옮겼다. 후일 노무현 정부 시절 공영방송에서 KAL기 폭파사건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물론 그 내용은 당시 우리들이 북한의 주장을 대자보로 옮긴 것들을 반복한 것이었다.
4.
학생운동을 그만 둔 직후 나는 조직으로부터 원래 내 전공인 기독교로 침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신학교로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험 당일 내가 가려고 했던 신학교는 학내 분규로 시험을 보지 못했다. 그해 유일하게 학부 때 성적으로 뽑았다. 나의 학부 성적은 바닥이었다. 1학년 이후 제대로 수업에 들어가 본 기억이 거의 없다. 학점이 좋으면 이상했다. 당연히 신학교 진학에 실패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생계를 위해 학원 강사에 나섰다. 영어 강사로 나선 것이다. 대학 진학당시 나의 영어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다. 학원 강사를 하면서 나는 많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보았다. 이들은 열심히 살고 있었다.
내가 대학에서 배우고 학습한 것은 대한민국 사회는 미국과 자본가 계급의 이중 착취로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극심한 가난과 절망에 빠져 있어야 했다. 그 절망이 혁명의 동력이 된다. 그런데 내가 사회에 나와서 본 일반 국민들은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의 희망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한민국은 미국과 자본가 계급 그리고 이에 결탁한 독재정권에 의해서 신음하고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정반대로 보였다.
이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아니 내가 책에서 배운 이상사회가 사회주의 사회였다. 그런데 동독의 국민들은 동독의 폭정과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서독으로 탈주를 감행했고 마침내 동독 공산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소련의 실상을 참담했다. 인류 최고의 낙원은 어디가고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가공할 독재와 독재자들만이 그 낙원에 있었다. 책으로 본 사회주의와 실제 현실 사회주의는 극과 극이었다. 소련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당시 나의 충격은 대단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사상과 철학, 혁명론에 따른 실천이 인류를 이상사회로 인도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사회는 내가 가장 증오하던 자본주의 사회보다 훨씬 아니 비교조차 불가능한 공산독재자들에 의한 최악의 착취와 독재사회였다.
그래도 버텼다. 소련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는 북한이 아직 대안으로 남아있었다. 북한은 다를 것이다. 스스로 자위했다. 그 자위가 무너져 내리는 데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주체사상의 창시자로 알려진 황장엽씨가 망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즈음 북한의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세습은 이해할 수 있었다. 김일성의 지도력을 이어받은 김정일이 뛰어난 지도력과 성과를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곧이어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말하는 대기근의 참상이 북한을 탈북한 사람들에 의해서 알려졌다. 황장엽씨 입에서 나온 북한의 참상은 나의 상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나의 사상과 철학, 실천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했다. 지금도 황장엽씨가 월간 조선에 인터뷰한 내용을 읽을 때의 충격이 생생하다. 어디에서부터 나의 사상을 재검토해야 하나 막막했다. 처음에는 동양철학에 매달려 보기도 했다.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서양철학사를 다시 공부했고 내가 그토록 경멸했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을 읽은 나는 다시 충격에 빠졌다. 그 사상에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자각과 인류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기 위한 지혜와 고민의 결과물들이 수 없이 많이 있었다. 그 즈음 나는 버크의 보수주의 사상에 주목했다. 버크는 인간의 한계에 주목했다. 한계를 가진 인간이 사회를 함부로 개조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를 프랑스 혁명의 경우를 들어 설명했다. 사회제도나 풍습 등을 개선하는 행위는 신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제도와 풍습에는 수많은 세월 전해져 내려온 인간의 지혜와 노력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개조하려면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개조했을 경우 성공할 방법이 있는가에 대한 확신 등 고려할 사항이 많기 때문이다. 버크에 따르면 공산주의 사상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자각이 없는 무모한 것이었다. 실패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역사를 다시 공부했다. 대한민국은 성공한 역사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들 가운데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였다. 민중들을 수탈해 도탄에 빠진 나라가 아니었다. 제3세계 나라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성공사례였다. 이승만을 공부하고는 마지막 순간 울음을 울었다. 하늘이 이 조그만 조선이라는 나라에 이승만이라는 훌륭한 지도자를 준비하고, 그를 통하여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위협에서 건져내고, 자유민주공화국 번영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소련이 무너지고 스탈린의 기밀문서들이 해제되었다. 해방 공간 당시 구체적 정황이 속속 드러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역사적 왜곡과 공격은 무너졌다. 한반도 분할 정책을 시도한 것은 스탈린 이었다. 스탈린은 미국 영국과 전후 처리 협상이 결렬되자 소련 극동군 사령관에게 38도선 이북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이 1946년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훨씬 전인 45년 11월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정부 조직을 구성하고 실질적인 정부활동에 들어갔다. 한미동맹은 미국에로 예속의 결정판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온 디딤돌이었다. 미국은 동맹을 맺고 싶지 않아했다. 전쟁을 빨리 끝내고 미국 본국으로 철수하고 싶어 했다. 오히려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가 한미동맹을 강요했다.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이승만의 위협에 마지못해 승낙한 것이었다. 조선이 망하던 당시 8900여명이던 군대는 미국의 도움과 군사원조 덕분에 세계4위의 군사대국으로 거듭났다.
박정희는 제3세계 나라에서 유일하게 산업혁명을 이룩한 창의적이고 실천적인 지도자였다. 당시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신생 독립국들은 선진국이 권유한 대로 수입대체형 산업화 전략을 따랐다. 물론 우리도 처음에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실행 과정에서 이를 평가하여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이라는 새로운 길로 대한민국을 안내했다. 6.25 전쟁 직후 세계 최빈국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적 공업국으로 성장한 것에는 박정희라는 거대한 지도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쳐 보이지 않았다. 대한민국 사회가 극단적인 부익부 빈익빈 사회로 가리라던 공산주의자들의 예언을 틀렸다. 오히려 산업혁명 시기 열심히 일한 많은 국민들은 자신들의 바람대로 중산층으로 진입해 있었다. 여기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많았다.
나는 나의 잘못을 고백하기고 결정했다. 그것은 조국을 헐뜻고 배신한 나에게는 의무였다. 그간 맺었던 나의 관계들이 모두 끊어지고 외롭고 고독한 길이라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뉴라이트운동이라는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물론 기대만큼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나의 생 중에서 공산주의의 해악을 경고하고 증언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조국이 나에게 내린 준엄한 명령과 같은 것이다.
5.
대한민국은 전쟁 중이다.
나와 같은 시기 나와 같은 경험을 했던 이들이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어느새 대한민국 구석구석으로 진출해 있었다. 언론계, 문화계, 학계, 종교계, 공무원, 교사, 심지어 정치 지도자로 성장한 이들도 있었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이들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이들은 그들이 영향을 미치는 곳곳에서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2015년 교과서 전쟁은 이들의 기존 질서 뒤흔드는 작업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우리 사회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들은 어느새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그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만들었고 우리 학생들은 그 방향에서 배우고 있었다. 그들은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는 친일파들이 만든 나라이며,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정의가 실패하고 소수 기득권세력의 독재와 부패로 점철된 잘못된 오욕의 역사라고 교과서에서 버젓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대학시절 가졌던 역사관에서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좌익이 이념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대한민국을 번영으로 이끌었던 세력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일부는 수구꼴통으로 낙인 찍혔다.
좌익과 보수 세력은 대한민국의 방향을 놓고 서로 다른 이념으로 바라보고 있다. 좌익들은 대한민국이 소련과 동구에서, 그리고 북한에서 실험한 실패한 길로 가자고 용감히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위험하다. 이들이 바라는 길로 간다면 해방 이후 우리 선배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만든 이 위대한 나라 대한민국이 망하는 길로 갈 것은 너무도 명확하다. 이 전쟁에는 제3의 길은 없다. 황장엽은 정책이 다른 것을 타협할 수 있어도 이념이 다른 것은 타협할 수 없다고 했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곳에 대화와 타협이 낄 자리는 없다.
좌익과 이념전쟁에서 승리하는 길 만이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출하는 유일한 방도다. 이념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상대방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많은 대중들이 왜 좌익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념투쟁은 대중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전쟁이다. 대중이 우리의 주장에 동조하고 기꺼이 따르고자 한다면 그 전쟁을 승리할 것이다. 대중을 우리 편으로 동원하기 위해서는 폭로가 중요하다. 그래야 대중들은 좌익의 실상과 위험성을 자각하게 된다. 좌익의 사상과 이들의 잘못된 역사관, 방법론에 대한 지속적인 폭로가 있어야 한다.
이념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힘은 우리가 가진 사상과 방법이 정당하다는 도덕적 확신에서 나온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이 교육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우리의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을 ‘헬조선’ 운운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역사와 우리가 가진 이념이 정당하고 고귀하다는 사실을 힘들여 가르쳐야 한다. 수구꼴통은 우리가 아니라 모두 실패한 좌익의 길을 아직도 가자고 악쓰는 저들이다. 저들이 가는 길은 다 같이 망하자는 길이다.
질러가는 지름길은 없다. 어렵고 힘들어도 그 길을 가야만 한다. 그 곳에 대한민국의 살길이 있기 때문이다.
2019-03-15 15:14:30 | 관리자
목사님들 만이라도 나라를 걱정하는 옳바른 설교를 하면 이 나라가 이지경까지 되지 않을 텐데요.
목사님과 우리교회 1천명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수호하는 remnant '남은 자'입니다.
2019-03-13 11:56:30 | 장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