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다음 글은 오늘 아침에 신학원 학생들에게 보낸 글입니다.
이 글은 모든 성도들 특히 교회의 리더들에게 필요하므로 공유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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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원 형제/자매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한두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어 글을 드립니다.
먼저 간단한 것 말씀드릴게요.
이번에 계시록 듣는 분들은 <요한계시록 바로 알기>가 아니라 <천주교의 유래>를 읽기 바랍니다. 이렇게 정정합니다. 교회 서점에 가져다 놓겠습니다. 계시록은 후에 숙제로 드리겠습니다. 계17-18장의 바빌론을 이해하려면 <유래>를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교회는 지식을 들고파는 곳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오시거든 신학원 과목 혹은 다른 교회/사이트의 특정 주제(일루미나티, 신사도 등등) 등에 대해 신학원생들 혹은 지식 탐구를 원하는 분들과만 지식의 교제를 나누지 마시고 두루두루 여러 성도들과 인간적인 교감의 교제를 나누기 바랍니다.
혹시 목회를 하실 분들이 있을지 몰라 말씀드립니다. 목회는 지식으로 되지 않고 인간관계로 됩니다. 이 말에 놀라지 말기 바랍니다. 지식만 추구하는 모임 혹은 교회는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바로 바라보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노력할 때 교회가 발전합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바른 말씀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이루어졌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지식 추구의 장으로 여기지 마시고 인간 교제의 장으로 여기고 섬기는 일을 실천하면 좋을 것입니다. 따라서 집요하게 무언가를 파기 위해 교회에 오지 마시고 다른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겠다는 심정으로 오셔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도 시간이 남으면 교회에서 다른 분들과 지식을 탐구하는 교제를 나누기 바랍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바를 잘 이해해 주세요. 다만 밴드 등에서 지식 탐구 교제 등을 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다만 교회에서 Off lin으로 모일 때는 인간이 지식보다 더 중요함을 인식하고 성도들과의 좋은 교제/섬김을 나누는 일에 매진하시기 바랍니다.
결혼한 분들은 배우자에게도 이 문자를 공유하셔서 부부가 이런 모습을 보이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샬롬
패스터
2015-05-06 11:55:36 | 관리자
안녕하세요?
가정의 달인 5월이 왔습니다. 달의 이름에 맞게 부모님, 아이들을 한 번 더 보살피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저희 교회는 이제 8년 차로 접어듭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 교회를 사용하시는지 살펴보고 그 목적에 맞게 겸손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 좋겠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주신 목적은 ‘단순한 지식의 함양’이 아니라 ‘말씀을 통한 인격의 변화’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신약시대 성도로서 성령님의 전으로 합당하게 생활하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몸이 아픈 분들이 많습니다.
이인술 어르신, 오늘 심장 질환 정밀검사를 위해 입원하십니다.이근제 어르신(허광무 형제님 모친), 천식으로 고생하고 계십니다.김동구 형제님, 머리 수술받고 회복 중에 있습니다.박성옥 목사님, 경미한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습니다.고정숙 자매님, 발이 아픈 가운데 있습니다.임미정 자매님, 게실염(장염)으로 입원했다가 퇴원했습니다.그 외에 갑상선 수술 이후 지속적인 치료를 받는 강미선, 강경희 자매님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제 40여 명이 새롭게 회원 등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잘 성장하도록 기존 멤버들이 많이 섬기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도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교회와 성경 사역을 대적하는 일들로 인해 요즘 많이 낙심하곤 합니다. 제가 이렇게 연약한 사람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쓴다는 사람들의 무례함과 비상식적인 언행이 저를 괴롭게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가 제 고민 주제입니다. 또 저의 무익함과 연약함이 문제의 원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리저리 고민하며 제 자신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간섭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잘 진행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 학교가 잘 운영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교사들이 지치지 않도록 늘 기도해 주십시오. 집사, 지역 인도자들 역시 지치지 않고 직무를 잘 수행하도록 도와주십시오.
‘관념적 믿음’이 아니라 ‘선한 행위로 나타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5월 16일, 산본 수리산 등산 일정이 사이트에 떴으니 많이 참가하면 좋겠습니다.
http://new.cbck.org/OtherMeetings3/View/zF
다음 주는 미디어 선교 헌금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해 주신대로 최선을 다해 참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운동회가 있습니다. 많이 참석해 주세요.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news&write_id=1578
왜 우리를 성도로 부르셨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는 한 달이 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5-04 11:45:49 | 관리자
안녕하세요?
오늘 사랑하는 한 형제님께서 위로의 글을 보내와서 나눕니다.고난 중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님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원합니다.
마귀가 우리의 일을 어렵게 할 때, 하나님의 긍휼과 간섭이 필요한 때입니다.
시편 31편이 힘이 되는 날입니다. 20절처럼, 우리 주님께서 혀의 말다툼에서 우리를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샬롬
패스터
13 내가 많은 사람에게 모함을 들었사오니 두려움이 사방에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하면서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14 그러나, 오 {주}여, 나는 주를 신뢰하며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였나이다. 15 내 때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의 손에서 나를 건지시고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16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긍휼로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17 오 {주}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사악한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시고 무덤 속에서 잠잠하게 하시며 18 거짓 입술들은 잠잠하게 하소서. 그것들이 의로운 자들을 대적하여 교만하고 무례하게 가혹한 것들을 말하나이다. 19 오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하여 주께서 쌓아 두신 주의 선하심 곧 사람들의 아들들 앞에서 주를 신뢰하는 자들을 위하여 주께서 이루신 그 선하심이 어찌 그리 큰지요! 20 주께서 그들을 주 앞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교만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그들을 은밀히 천막 안에 두사 혀의 말다툼에서 벗어나게 하시리이다. 21 {주}를 찬송할지어다. 그분께서 견고한 도시에서 자신의 놀라운 친절을 내게 베푸셨도다. 22 내가 황급한 가운데 말하기를, 주의 눈앞에서 내가 끊어졌나이다,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 소리를 주께서 들으셨나이다. 23 오 {주}의 모든 성도들아, 너희는 그분을 사랑하라. {주}께서 신실한 자는 보존하시되 교만히 행하는 자는 넘치게 되갚아 주시느니라. 24 {주}께 소망을 둔 모든 자들아, 너희는 크게 용기를 내라. 그분께서 너희 마음을 강하게 하시리로다. <위험한 소명 中>
우리는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서 싸움이 격렬해지면 우리는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 안식, 위로, 평화, 격려, 지혜,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도망쳐야 한다. 참된 보호와 안식과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뿐이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면 사람들에게로 도망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이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가 되어 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중략)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피난처와 능력을 제공하신다. 그분만이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수 있고,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 주는 관계들을 바르게 회복시킬 수 있다.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다.
오직 그분만이 시련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은혜를 베푸실 수 있고 지혜를 허락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고 우리를 위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진정한 피난처이시다. (당신은)하나님께로 도망치고 있는가? (중략) 세상에 살며 사역 하는 동안에는 갖가지 어려움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피할 곳을 찾아 어딘가로 도망쳐야 하고, 희망과 도움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그분께로 도망치라. 더 이상 어려움이 없는 날이 올 것이라는 약속을 기억하라.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 싸움이 여전히 격렬하게 진행 중이다.목회자들이여, 깨어 준비하는 지혜로운 군사가 되어 우리의 대장이신 주님께로 도망치고 있는가? 우리를 구원하고 용서하고 변화시키고 강하게 해주는 은혜를 그분께 구하고 있는가? <은혜와 근성의 사람-바울 中>
바울은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만을 의뢰하고 의지할 수 있었다. 위험한 때에 바울은 위를 올려다봄으로 초자연적인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주님 바로 이 순간 저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저는 적절한 사람이 못됩니다. 이 압박감을 이겨낼 확신이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아니 주님만을 의뢰합니다.” 우리에게는 인생 최악의 폭풍을 대면할 능력이 없다. 우리 힘만으로는 굴복하고 만다. 어떤 상황에 처했든 우리에게 필요한 힘은 오로지 하나님에게서만 온다.바울은 ‘고통 받고’, ‘어찌할 바를 모르며’, ‘핍박받고’, ‘쓰러지며’ 등의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사역을 묘사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의 바울의 삶이었다. 바울은 모든 고난을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으로 받아들였고, 극한점에 도달했을 때 이 고난의 순간을 하나님께서 넘겨주시도록 하나님을 신뢰했다. 차가운 마음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불은 이 세상에 없다. 차가운 마음은 고난에 고정되어 있고 현재 너머에 있는 것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바울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믿음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그래서 바울은 극심한 압박감 중에서도 자신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어떤 외적 고난도 바울의 내면 깊숙한 곳을 차갑게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그의 내면의 불꽃을 더 타오르게 했다. 핍박이 계속되면 될 수록 하나님을 향한 그의 불꽃은 더 뜨거워졌다.
주위의 모든 것이 무너질 때, 바울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영원한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한 분, 그분께만 초점을 두었다.
고난은 우리를 강하게 하고, 의심을 녹여 버리면서 두려움과 불신앙의 불순물을 불살라 버린다.
2015-05-01 15:30:04 | 관리자
안녕하세요?
교회를 시작한 지 이제 만 7년이 되었습니다. 5월부터는 8년차로 접어듭니다.
저희 교회 역사를 잘 아시는 홍승대 형제님께서 지난 주 오후에 ‘사랑침례교회 역사’라는 제목으로 지나간 7년 동안의 이런 저런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최근에 교회에 오신 분들은 이번 기회에 이것을 듣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 등을 정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의도하지 않게 저에 대한 내용이 많이 있어 부담이 되지만 이것은 저와 함께 교회를 이끈 형제님의 개인적인 증언이니 그리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더욱 힘을 합쳐 좋은 교회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샬롬
패스터
사랑침례교회 역사(홍승대 형제)
http://new.cbck.org/Series17/View/4WF
2015-04-30 13:22:35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즘 킵바이블 사이트에서 재창조 문제로 인해 뜻하지 않게 논쟁이 오고 갔으며 저는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상황 설명을 했습니다.
<작금의 논쟁 배경 설명>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675
그런데 설명을 하다 보니 우리 교회 성경 암송반 이야기도 나오고 저와는 다른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로 인해 염려하신 분들이 있다고 하여 간단하게 글을 씁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유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그 자유 안에 굳게 서고 다시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제가 여러 번 강조했듯이 우리 교회의 가장 큰 가치는 영혼의 자유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저와 여러분의 자유를 막지 못합니다.
모이는 자유, 말씀을 해석하는 자유, 교제의 자유, 도서 선정의 자유 등등.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의 자유를 막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도 저도 모르게 제가 그렇게 한 일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시정하겠습니다.
이번 일이 있었어도 저는 성경 암송반 형제/자매님들과 현재까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성경을 암송하는 것은 얼마든지 해야 할 것이며 또 논쟁의 대상이 된 분의 글을 읽었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계속해서 모여 성경을 암송하시며 말씀의 유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저희 교회에도 개별적으로 재창조를 믿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의 믿음을 교회나 목사는 간섭할 필요도 없고 간섭할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교회나 다른 성도들에게 그것을 전파하고 확신시키려고 노력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저나 교회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허구입니다.
또한 과격한 언행은 교회가 허용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함으로써 덕을 세우는 귀한 성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qt&write_id=776
앞으로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자유롭게 하시고 혹시 문제가 될 일이 있거든 집사 형제님들이나 제게 와서 의논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함께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책임이 없으면 방종에 빠져 결국 패망에 이르게 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부르심을 받아 자유에 이르렀으나 오직 자유를 육신을 위한 기회로 쓰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라(갈5:13).
결론의 말씀 드립니다.
저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성도님들의 영혼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 암송, 찬양, 등산 등 무슨 교제든 원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저의 진정한 마음임을 다시 알려드립니다.
사랑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4-17 09:07:59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제는 솔로몬의 배은망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입니다.지혜와 능력이 많아도 자신을 의지하면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성경은 잘 보여 줍니다. 그래서 성경의 메시지는 매우 단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처럼 다 안다고 하면서 호언장담하고 남을 무시하면 결국 패망에 이릅니다.
이번 주에는 왕상6-왕하4를 읽으면서 솔로몬을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요즘 킵바이블 사이트에서 창조/재창조 논쟁이 일고 있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672
이 논쟁은 편향된 사고로 성경을 보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상식과 이성적 판단을 잃으면 많은 지식이 여러 사람을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매일같이 성경을 탐구하는데 삶의 변화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불신자 이상의 나쁜 언행이 나타납니다.
이런 사람을 보거든 그가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조심하고 속히 물러날 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깃털이 같은 새들이 함께 모인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런 일에 열심을 내는 분들 보면 대개 성격이 거칠고 언행이 안하무인입니다. 목회자의 경우 자기 아내와 가족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 잘 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저도 자유롭지 못하지만 늘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식의 교만을 드러내며 남을 비하하고 쓸데없는 논쟁을 일삼는 사이트에 들어가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가능하면 좋은 사이트를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신문, 검색을 빼고는 인터넷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1주일에 한두 번 ‘이 세대가 가기 전에’라는 블러그에 들어가 세상의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http://blog.naver.com/esedae/
이 블러그는 일반 교회 목사님이 운영하는 것인데 전 세계의 마귀 숭배 추세를 매우 잘 보여 줍니다. 어떤 때는 너무 과한 면도 있지만 성도들이 거를 것은 거르고 가끔씩 보면 좋은 내용이 많습니다. 특히 세상 욕심이 불현듯 일어나거나 교만한 맘이 생기거나 남을 비하하려는 맘이 생기면 거기의 뉴스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재림의 징조를 보면 그런 악들을 버리고 제대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자동으로 들 것입니다. 저도 어제 지난주의 글들을 보고는 더욱더 바르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도 이렇게 귀한 정보를 매주 업데이트 해 주는 블러그는 거의 없습니다.
여기에 푹 빠지지는 마시고 가끔씩 보면서 경각심을 갖기 바랍니다.
주님의 큰 평안이 넘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4-13 16:47:16 | 관리자
정확하게 교회안에서 부부간의 호칭 문제를 정리해 주시니 너무 좋습니다.
저도 전에 교회에서 15년간 써오던 우리 형제님 이란 호칭이 입에베어서 호칭문제에 조금 어려움이 있었는데 정확하게 정의내려 주시니 앞으로는 정확한 호칭으로 부를수 있겠습니다.
2015-04-13 15:58:51 | 이정희
생각해보니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하오 체를 쓰셨네요.
오늘부터 다들 약속하고 연습하느라 조-금 어색하겠네요^^
기대가 됩니다 ㅎ
2015-04-10 14:03:45 | 이수영
긴글 잘읽었습니다.^^ 평상시에 느끼고 있던 내용이라서 더욱 공감되고 남존여비의 근본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했는데 역시나 일제의 잔재가 그원인이로군요....앞으로는 더욱 서로를 아끼며 존중하는 부부가 되도록 존대말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4-10 11:52:00 | 김성응
부부 관계에서의 언행까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네요. 특히 말 한 마디로 아내에게 상처 주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샬롬.
2015-04-10 11:06:03 | 김지훈
잘 읽었습니다. 일상 생활 중과 교회 생활 중에 우리가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사용하여야 할 언어 생활 습관의 중요한 내용들이라 생각합니다. 내용 감사합니다~
2015-04-10 10:21:29 | 한원규
안녕하세요?
지난주에는 제가 성도의 언행에 대해 글을 올렸습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qt&write_id=776
언행이 좋아야 한다는 것은 상스러운 말, 험한 말을 안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쓰는 것도 포함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형제/자매라는 호칭을 쓰다 보니 남편이 무슨 말을 할 때에 “제 자매가 그러더군요.”라고 하거나 자매가 “제 혹은 우리 혹은 우리 집 형제가 그랬어요.”라는 형태의 말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부부가 교회에서 자기 아내와 남편을 가리킬 때 형제/자매 호칭을 쓰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제 아내가 그러더군요.”“제 남편이 그랬어요.”가 자연스럽습니다.
어떤 분은 남편을 높이느라고 사람들 앞에서 극존칭을 쓰곤 합니다.
“제 남편이 그러셨어요.”
이것은 밑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말 오염입니다.
“제 남편이 그랬어요.”로 해야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아내를 하대하면서 이름을 부르거나 반말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 역시 보기에 심히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의 언어 습관을 살펴보고 고치기 위해 ‘아빠와 부인’, ‘아내에게 존댓말을 씁시다’의 두 글을 올립니다. 저도 실천해 보려고 하니 우리 가정에서, 교회에서 해 보도록 합시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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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부인’ 여성칼럼 (김초혜)
아내가 남편을 가리키는 말로 ‘아빠’가 흔히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분명 잘못 쓰여지고 있음에 대하여 전문가들이 지적한 글을 더러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여성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리 아빠’나 ‘아빠’를 남편에 대한 지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빠’는 호칭이지 지칭이 아니다. 굳이 ‘아빠’를 지칭으로 쓰려면 ‘우리 애 아빠’라고 하거나 ‘우리 돌이 아빠’라고 해야 옳은 국어사용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남편이 자기 아버지가 되어 버리고 자기가 남편의 딸이 되는 망측한 결과가 생긴다.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남편을 존대하는 ‘-하시고’와 함께 여성들의 ‘아빠’ 오용은 국어 파괴와 국어 오염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남편을 존대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좋은 일이나 자기 남편보다 연상인 분 앞에서 남편을 존대하는 것은 더없는 결례고 몰상식한 것이다. 친구 앞에서도 “아빠는 술을 드시느라고 아직 안 들어 오셨어요" 하면 듣기가 매우 민망스럽다.
부부관계 호칭에 있어 여성들만이 국어 파괴 작업에 열성인 것은 아니다. 남성들도 마찬가지로 ‘오염 작업’에 열중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기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부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부인’은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국어는 한 민족의 영혼의 집합이며 정신의 총체이다. 국어의 오용은 단순히 개인적인 무식이나 무교양을 나타내는 것만이 아니라 민족의 혼을 마멸시키고 침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말을 그릇 사용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들이 말을 바르게 사용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평생을 안락하게 해 주는 것은 돈이나 명예일지모르나 한 민족의 장구한 미래는 말을 제대로 지키는 것에서 비롯됨을 잊어서는 알 될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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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존댓말을 씁시다.
아내에게 존댓말을 씁시다.
어느 사이에 우리나라는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로 말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이 당연한 권리처럼 바뀌었습니다. 제 주변에서 많이 보는 유형은 다음과 같죠. 남편: 누구야. 물 한 잔만 가져와라.아내: 예. 알았어요. 그렇지만 반말 들어서 기분 좋을 아내 한 명도 없습니다. 자신이 남편에게 존댓말을 쓰는 이상 아내도 존댓말을 받고 싶습니다. 부부는 동격이고 0촌간이며, 일심동체니까요. 결혼 전에도 결혼 이후에도 저는 아내에게 존댓말을 씁니다. 극존칭은 아니고 '시'가 가끔 들어가는 '해요'체에 가까운 존댓말입니다. '여보, 물 한 잔만 갖다 주세요.' (또는 '갖다 줘요')'예. 알았어요.' 내외간에 존댓말을 쓰는 것이 당연한데도 신혼부부가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면 이상하게 쳐다봅니다. 반응은 대개 두 가지입니다. 남자: 어? 아내에게 존댓말을 써요? 왜 써요? (신기해서 물어봄. 남자가 왜 아내에게 존댓말을 쓰냐는 표정임.)여자: 어? 남편이 존댓말을 써요? 좋겠다. (부러워서 물어봄. 나도 남편이 존댓말 써주면 좋겠다는 표정임.) 이런 반응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깥에 나가서 아내에게 존댓말을 쓰면 대개는 한 번씩 물어봅니다.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들도 신기해서 물어봅니다. '어머, 부인에게 존댓말을 쓰세요?'
제가 왜 집사람에게 존댓말을 쓸까요? 집사람을 존경하고 존중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존경할 때 아내도 남편을 존경합니다. 그래서 과거부터 우리 조상은 내외간에 존댓말을 썼습니다. 존댓말을 써야 하는 이유는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부부가 동격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쓰던 내외라는 말의 의미부터 동격 아닙니까. 안과 바깥. 우리나라는 100년 전까지 부부 사이에 존댓말을 썼습니다. 서로의 역할과 영역을 존중해주기 때문이죠. 이는 사극에도 그대로 반영됩니다. 사극을 보면 어떻게 나오죠? 대감이 마님에게 '야, 물 한 잔 가져와라'라고 말하던가요? 아닙니다. '여보 마누라, 물 한 잔 갖다 주오.'라고 '하오'체를 쓰거나 '부인 이번에는 포를 보냅시다'와 같이 '시' '합쇼'체를 씁니다. 지체 높은 왕이나 대감, 선비들까지도 아내에게 존댓말을 썼습니다. 아내 역시 남편에게 같은 말투를 썼죠.('대감 이번에는 포를 보냅시다.' '여보 여기 나무 좀 들어 주오') 존댓말을 쓰는 것이 상류층만의 문화일까요? 아닙니다. 일반 서민들도 다 아내에게 존댓말 썼습니다. 대학 시절 공부했던 춘향전 심청전 등은 19세기에 작성된 판본(완판본이나 경판본 등)인데 여기에도 명백하게 부부끼리는 '하오'체로 대화를 나눕니다. '뺑덕 어멈 물 한 잔만 주오.'라고 말하죠. 100년 전까지 우리나라는 아내에게 존댓말을 썼고 아내를 존중한 나라입니다. 유교가 남존여비를 고착화시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불교나 유교, 도교 모두 고대의 무지한 당시 환경으로부터 여성의 지위를 좀더 향상시키기 위해 나온 사상들입니다. 석가모니나 공자, 장자, 주자가 여성은 짓눌러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는 야만적인 현자들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겠죠. 불교는 사성계급이 투철한 인도에서 여자도 출가할 수 있고 성불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남녀평등을 주장한 종교입니다. 유교 역시 인간 존중 사상을 담고 있죠. 유교가 남녀를 동등하게 존중한다는 사실은 정도전의 경국대전으로 확립된 조선 초기 제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까지 딸은 아들과 똑 같이 돌아가면서 부모의 제사를 모셨습니다. 당연히 재산 분할권도 동등하게 가졌죠. 결혼 이후에도 여성이 성을 가지고 있는 이유 역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권리가 무너진 시기는 조선 중기의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입니다. 수십 년간의 전쟁으로 나라와 가정이 파괴되면서 가계 계승에 대한 위기를 느꼈고 이때부터 한 사람 몰아주기가 나타납니다. 그 결과 장자 계승이 주요 흐름으로 자리 잡고, 이때부터 둘째 이하 아들이나 딸들의 권리가 대폭 줄어들죠. 또한 전쟁을 통해 왜구의 못된 문화가 많이 유입되는데 대표적이 것이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다루는 문화입니다. 즉 조선 후기에 남존여비 문화가 널리 퍼지는 부분은 유교 때문이 아니라 왜란을 통해 왜구에게서 도입된 문화의 영향 때문입니다. 하여간 그래도 여전히 부부는 내외지간으로 동격을 형성했고 조선말까지 부부는 상호 존칭을 썼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겪으면서 이 문화가 사그리 사라집니다. 일본의 남존여비 사상이 확실하게 국내에 보급되죠. 그래서 일제 시대부터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반말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의 남존여비 사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를 들죠. 제 선배 여동생이 일본 남자에게 시집갔습니다. 그 여동생이 일본 가서 처음 겪은 상황은 남편의 안하무인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침에 밥상을 차리면 부부가 같이 마주 보고 먹죠. 그런데 일본은 남자가 밥 먹는 동안 여자가 무릎 꿇고 기다립니다.(요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일본도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아주 오래된 이야기도 아닙니다. 80년대 이야기죠.) 이것까지는 좋다 이겁니다. 기가 막힌 것은 남편이라는 작자가 방에 누워 팔로 머리 고이고 TV 보면서 밥을 먹는 겁니다. 우리나라 같은 밥상이 아니라 소반 형태이므로 가능한 일이죠. 이것을 본 여동생 눈에 불이 확 나죠. '감히 아내가 힘들게 밥을 해줬는데... 같이 먹지는 못할망정 누워서 TV 보면서 먹어?' 가만히 있을 한국 여성이 아니죠. 몇 년 뒤에 선배가 갔더니 겸상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_^ 하여간 우리나라의 못된 문화는 일본에서 영향 받은 바가 큽니다. 부부라는 말부터가 그리 좋은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100년 전까지 사용하던 내외(內外)라는 말은 안과 바깥이라는 동등한 말로 구성되었습니다. 반면 부부(夫婦)는 하늘 같은 지아비와 빗자루 들고 청소하는 하녀라는 한자로 구성된 낱말입니다. 아내는 빗자루 들고 청소나 하는 종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죠. 내외와 부부라는 말은 이처럼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부부라는 말이 굳어진 상태이니 어쩔 수 없죠. 말은 사회의 반영인 동시에 사회에 영향을 주는 가장 직접적인 문화 재료입니다. 100년 전까지 우리 선조가 사용한 말은 무엇이든 남을 배려하고 긍정적으로 보는 말이었으며 사람 관계를 평등하게 보려고 했습니다. 형제라는 말은 위아래를 구별해 상하복종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권리도 형이 많이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동기라는 말은 형도 아우도 모두 같은 권리를 가지고 동등하게 대접해야 할 존재로 인식시켜주죠. 그래서 동기라는 말을 사용하던 조선시대에는 형도 아우에게 존댓말을 썼습니다. 이때도 역시 동기간에는 상호 존칭을 썼죠.(사극 봐도 '여보게 아우님. 술 한 잔 하시게'라고 나오죠.) 형제라는 말 역시 일본에서 건너온 말로 동기라는 말을 밀어내고 오늘날 자리 잡았습니다. 일본인은 맹인(눈 먼 사람)이라는 말로 사람이 못 갖춘 것을 드러냈지만 우리 선조는 판수(셈을 잘하는 사람)라고 추켜세웠습니다. 사람이 못 갖추었다고 업신여기지 않고 뛰어난 점을 내세워 긍정적으로 보고자 했죠. 그렇지만 내외, 동기, 판수가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부부, 형제, 맹인이라는 말로 바뀌면서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하고, 형은 동생에게 반말하고, 일반인은 맹인을 눈멀어 아무 것도 못하는 존재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말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부부 간에는 서로 존댓말을 써야 하는 겁니다. 혹은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로 존댓말 쓰면 거리감 느껴지지 않나요?''서로 반말로 하면 동등해지지 않나?' 존댓말 쓴다고 거리감 느껴질 이유 없습니다.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서로 반말 하는 것은 서로 상대방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에게 존댓말을 쓰기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존중받고 사랑받는다는 감정을 늘 가집니다. 반면 반말을 쓰면 똑 같은 말이라도 듣는 환경에 따라 기분 상해 부부싸움으로 발전하고 이혼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가 커피를 쏟았다고 합시다. 그때 제가 기분이 상한 상태라도 존댓말을 쓰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커피 좀 잘 들고 오지 그랬어요. 조심해야죠.' 존댓말을 쓰니 험한 소리를 입에 못 담습니다. 말부터 순화된 말을 쓰게 되죠. 그렇지만 반말을 쓰는 부부의 경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야, 바보야. 커피도 하나 제대로 못 들고 오냐' 보통 때는 '야 바보야.'라는 말이 친근감의 표시로 사용될 수 있지만 반말은 반말입니다. 반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방에게 굴욕감을 느끼게 합니다. 더구나 감정이 서로 상하거나 가라앉은 상태에서는 별 것 아닌 말조차 큰 상처를 주기 마련입니다. 남자가 '야, 바보야. 커피도 하나 제대로 못 들고 오냐'라고 말할 때 여자가 존댓말을 쓰는 환경이라면 굴욕감을 느낄 것이고, 같이 반말을 쓰는 상황이라면 '그러는 너는 실수 안 하냐'고 맞받아치기 쉽죠.둘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둘이 싸우는 장면 한 번 재현해볼까요? [존댓말 부부]'커피 들고 올 때 조심해야죠. 왜 그렇게 실수해요.''하고 싶어서 하나요. 그러는 당신도 가끔 실수 하잖아요.''내가 언제 실수했어요? 나는 당신처럼 실수 잘 안해요.''무슨 소리여요. 당신도 가끔 실수하잖아요.' [반말 부부]'야, 커피도 못 들고 오냐. 너는 왜 그렇게 실수만 하냐.'(일단 '야'로 시작)'야, 나는 뭐 하고 싶어 하냐. 그러는 너도 실수하잖아'(상대방도 '야'로 시작)'뭐야, 내가 언제 실수했어. 나는 너처럼 실수 안 해 임마.''웃기는 소리 하네. 너도 실수하잖아.' 존댓말을 쓰다보면 감정이 상해도 험한 소리가 안 나오게 됩니다. 'xxx놈께서 하셨잖아요.'라는 말이 나올 수 없죠. 그래서 우리 부부는 상대방에게 욕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반말을 하는 부부라면 아마 욕을 자주 하게 될 겁니다. 남자들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바빠서 밥도 못 먹고 들어왔는데 아내가 '밥이 없어서 미안해요. 바깥에서 좀 들고 오시지 그랬어요.'라고 말하는 경우와 '밥 없어. 니가 바깥에서 먹고 왔어야지. 바보야.'라고 듣는 경우가 같을까요? 아내에게 반말로 듣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무지 기분 나쁠 겁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에게 듣는 반말 좋아하는 아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에게 존댓말 써주세요. 오히려 부부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들어줍니다.여자에게 존댓말 어떻게 쓰냐고요? 사실 남자들이 결혼 전에는 여자들에게 존댓말 잘 하지 않나요? 미팅이나 소개팅, 선 볼 때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여자에게 반말 하는 남자들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영희라고 해요.''아, 그래. 나는 홍길동인데. 영희 너 직업이 뭐냐?' 처음 본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남자 없겠죠. 아마 다음과 같이 말할 겁니다. '안녕하세요. 김영희라고 해요.''아, 그러세요. 저는 홍길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희씨 직업은 뭡니까?' 소개로 만났다면 대개는 이렇게 동등한 관계에서 상호 존댓말을 쓰면 만납니다.(동아리에서 선후배 관계로 만나는 경우 등은 제외하고) 처음 본 이성에게 서로 존댓말을 쓰는 이유는 서로 인간으로서 인격적인 존중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혼하면 남자는 반말 하고 여자는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바뀝니다. 이 말은 곧 여성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죠.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일제 시대에 들어온 무척 나쁜 문화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반말 하면 나도 반말을 하는 것이 남녀평등이라고 주장하지 마십시오. 서로 반말하는 것은 남녀평등이 아니라 상호 비하 관계일 뿐입니다. 처음 선 본 자리에서 만난 것처럼 결혼 이후에도 서로 존댓말을 쓸 때 인격 평등, 남녀평등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보는 분 중에 앞으로 결혼을 앞두고 있다면 꼭 서로 존댓말을 쓰는 부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는 이미 결혼해서 아내에게 반말을 하는 남편이 있다면 오늘부터라도 아내에게 존댓말 써주기 바랍니다. 혹 이렇게 묻는 사람 있을 겁니다. '그 동안 반말로 했는데... 쑥스럽게 갑자기 어떻게 존댓말을 쓰나.' 아닙니다. 아내하고 제안해보세요. 저는 결혼하고 집사람에게 존댓말을 써야 하는 이유(이 글에서 말한 내용들)를 말하고 서로 존댓말을 쓰자고 제안했습니다. 물론 집사람도 제 제안을 수용했고요. 오늘 집에 가서 아내와 상의해보세요. '여보 이런저런 글을 읽었는데, 우리도 앞으로는 서로 존댓말을 씁시다'라고 말하고 앞으로 존댓말 쓰면 됩니다. 존댓말을 쓰면 부부 관계만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 교육에도 좋습니다. 우선 집에서 반말을 못 듣기 때문에 아이들이 존댓말을 저절로 씁니다. 또한 어른들도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습관이 생겨 아이들의 생각을 존중하게 됩니다. 물론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서로 존댓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남녀는 서로 존댓말을 쓰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며 자랍니다. 남녀의 인격평등 교육은 부부가 서로 존댓말을 쓰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죠.부부 사이에 존댓말을 씀으로써 손해 볼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얻는 것은 많습니다. 부부 사이의 존경과 사랑, 교육 등에서 많은 것을 얻습니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오늘부터라도 존댓말을 쓰자고 아내와 상의하면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 아내에게 존댓말을 써주세요. 자신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아이를 위해서 좋습니다.
http://m.blog.naver.com/rainow/40001148931
2015-04-10 09:56:17 | 관리자
Another priceless teaching!
I thank you with all my heart.
2015-04-04 00:36:28 | 김항수
안녕하세요?
오늘 성경을 공부하다 보니 좋은 내용이 있어서 글을 드립니다. 위어스비 목사님의 가르침입니다.
에베소서 2:8-10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3개의 일이 나옵니다.
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0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8-9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for us) 행하시는 구원의 일을 보여 줍니다. 10절 초반의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라는 말에서 작품은 원래 workmanship입니다. 이것은 구원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in us) 일하시는 것으로 보통 성화라고 합니다. 그 뒤에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through us) 선한 행위(일)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많이 내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받고 그 뒤에 성화가 있어야 합니다.
성화는 한 마디로 인격의 변화입니다. 인격의 변화가 없으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썩은 일이 나옵니다.
이 인격의 변화를 위해 아브라함은 25년을, 모세는 40년을, 다윗은 13년을, 바울 10년을 고난과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품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 우리가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온라인, 오프라인에서의 우리의 대화가 건전해야 합니다.
한번 우리의 말을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너희 말을 소금으로 간 맞추어 항상 은혜롭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 사람에게 어떻게 마땅히 대답해야 할지 알게 되리라(골4:6).
부패한 대화는 결코 너희 입 밖으로 내지 말고 오직 세워 주는 일에 쓸 좋은 것만을 말하여 그것이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예수님의 말씀을 드립니다.
36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라. 37 네 말들로 네가 의롭게 되며 네 말들로 네가 정죄 받으리라, 하시니라(마12:36-37).
샬롬
패스터 정동수
(*) 참고로 말을 잘하려면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그래서 카톡 등의 SNS를 이용하는 것도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자제해야 합니다. 너무나 쓸데 없는 말들이 오고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신문 기사입니다.
참조하세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4/02/2015040202571.html
2015-04-03 13:36:50 | 관리자
전철에서 읽다 진지하게 읽고 싶어 접어두었는데 이 글을 찾느라 한참 애먹었어요. 저는 리더를 돕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한 권의 책을 다 읽은거 같아요.
2015-04-01 03:28:40 | 유금희
안녕하세요?
광고 드린 대로 언젠가 시간을 내서 리더십 강해를 하려고 합니다.
그때 교과서로 참조할 책은 <사람들이 따르고 싶은 리더의 조건>입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book&write_id=51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부족하기에 성도 여러분과 함께 성장하려고 이런 책을 보고 강해하며 삶을 나누려고 합니다.
다음은 한 형제님이 이 책의 12장과 부록을 요약해 주었습니다.
참조하면 좋겠습니다.
샬롬
리더의 성공 척도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 바울의 생각을 차지한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리더가 키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값진 자산은 사람이다. 대다수 위대한 리더들의 리더십 수완은 멘토의 영향력 덕이다. 그들은 자기가 닮고 싶은 심령의 소유자에게 배운다. 모든 참된 리더는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디모데 같은 영적 자녀들, 자신의 복제품을 주실 때 감사할 줄 안다. 변절과 저버림을 경험하지 않는 리더는 거의 없다. 바울의 반응을 주목하라.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많은 악을 행하였으니 주께서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갚으시기를 원하노라.”<딤후 4:14>. 바울이 디모데에게 당부한 것은 알렉산더를 응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의하라는 것뿐이다. 리더의 자리에 있거나 사역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말씀을 대적하며 우리에게 해를 입히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신실한 교사들을 바보나 거짓말쟁이나 사이비 따위로 보이게 만들어 평판을 더럽힌다. 알렉산더도 데마처럼 바울이 견뎌낸 배반의 살아 있는 예였다.
부록: 참된 리더의 26가지 특성.
1. 리더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2. 리더는 주도권을 행사한다.3. 리더는 건전한 판단력을 구사한다.4. 리더는 권위를 가지고 말한다. 5. 리더는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6. 리더는 낙관적이고 열정적이다. 7. 리더는 절대 기준을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8. 리더는 장애물이 아니라 목표에 집중한다.9. 리더는 본을 보여 능력을 부여한다.10. 리더는 충성심을 심어준다. 11. 리더는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한다. 12. 리더는 깨끗한 양심을 지킨다. 13. 리더는 확실하고 단호하다. 14. 리더는 마음을 바꾸어야 할 때를 안다. 15. 리더는 권위를 남용하지 않는다. 16. 리더는 반대에 부딪힐 때 자기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다. 17. 리더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18. 리더는 자신의 한계를 안다. 19. 리더는 칠전팔기의 기백이 있다. 20. 리더는 열정이 있다. 21. 리더는 용감하다. 22. 리더는 영적 분별력이 있다. 23. 리더는 훈련된 사람이다. 24. 리더는 강인한 정신력이 있다. 25. 리더는 위임할 줄 안다.26. 리더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다.
2015-03-27 14:06:19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즘 교회에 사람이 늘면서 다른 데서 재창조 이론을 수입하는 분들이 있어 우려가 되기에 글을 썼습니다.
참조하세요.
샬롬
창조인가요, 재창조인가요?(간극 이론, 갭 이론)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72
2015-03-25 16:13:53 | 관리자
안녕하세요?
미국 칙 출판사(www.chick.com)의 대니얼스 형제가 만든 동영상을 올립니다.
시애틀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신 김항수 형제님께서 번역하고 자막을 넣어 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카톡 등으로 보내 주시면 유익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사실인가 음모론인가? (David W. Daniels)- https://youtu.be/MFlTFCda6F0
성경의 지도까지 변개? (David W. Daniels)- https://youtu.be/kPrYow6c2Xs
원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David W. Daniels)- https://youtu.be/fUN24CnbdSc
성경신자인가 짝퉁신자인가? (David W. Daniels)- https://youtu.be/bvM-K12-V6Y
2015-03-25 10:44:59 | 관리자
안녕하세요?
겨울이 다 지나간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날은 쌀쌀합니다.환절기에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란 원래 양들의 사정을 깨닫고 좋은 데로 인도하여 좋은 꼴과 물을 먹이는 목자를 뜻합니다. 부족한 사람이 목사라는 직무를 맡아서 성도 여러분의 개인 사정을 다 알지도 못한 채 목자 노릇을 하려니 종종 마음이 무겁습니다.
물론 제게는 이 일 외에도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도 일차적으로 목사로서 여러분 모두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함을 인정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 전도사님과 집사, 지역 인도자 형제님들이 있으니 필요한 것들을 그분들과 먼저 상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형제님들과 의논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요즘 매주 4편의 강해와 1편의 설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에 비해 이런 일이 제게는 쉽지만 그래도 늘 버겁습니다. 저의 상황이나 환경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바울의 심정으로 전달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최근에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를 강해하며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저 스스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시간을 내셔서 이런 강해들도 들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도(saint)의 의미를 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도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언행에서 맺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저와 함께 그리스도의 거룩함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면 좋겠습니다. 아이들도 함께 하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몸이 아픈 지체들이 있으니 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천의 강미선 자매님은 갑상선 수술받고 회복 중입니다. 의왕의 김진용 형제님은 대장암 치료받고 있습니다.평촌의 강경희 자매님은 다음 주 19일경에 갑상선 수술받을 예정입니다.
암과 같은 큰 병에 걸리면 얼마나 두렵고 또 아프겠습니까? 그분들의 심정을 생각하고 기도해 주세요.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큰 평안(great peace)이 있나니 아무것도 그들을 실족하게 하지 못하리이다(시119:165).
29일 오후부터 질의응답(Q&A) 시간을 오후에 가지려 하니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사이트에 이황로 목사님께서 강의해 주신 근본주의의 역사 1,2를 올렸으니 꼭 보시기 바랍니다.
근본주의 역사 01http://new.cbck.org/Broadcast5/View/4WC
근본주의 역사 02http://new.cbck.org/Broadcast5/View/4WB
믿음의 여정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922
늘 교회 학교 교사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오늘도 한 걸음씩 내딛는 인생의 발자국이 주님 안에서 평강의 발자국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3-14 12:11:14 | 관리자
목사님의 초심이 변치않길 기도드립니다. 실제로 뵙고 더욱 확신할 수 있었고 풍성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을 알게 되어 저희 가족은 너무나 기쁩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주안에서 평강이 깃드시길 기도드립니다.
2015-03-02 16:17:17 | 노경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