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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나쁜 사람 .좋은 부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요즘 결혼과 가정 시리즈 설교를 들으면서 애초 인류가 너무 단순하고 분명한 하나님 말씀에 신실했더라면 이렇게 복잡하게 꼬이지 않았을 텐데 이 엉킨 실타래를 풀려니 어렵고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되네요.혹시 설교 주제가 자신에게는 적용이 안 된다 할지라도 지금 누군가에게는 가장 귀한 메시지로 다가갈 것을 생각하니 내 자신만 생각할 계제가 아닌 거 같네요. 우리 자녀들이 이 귀힌 하나님의 법을 잘 지켜 행복한 인생을 꾸려나갔음 좋겠습니다.
2014-03-17 13:42:28 | 오혜미
그림을 보며 나는 어느쪽에 속하는가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나쁜부부는 아닌데 그렇다고 헌신,희생,용서,용납의 좋은부부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네요. 그래도 요즘 가정과 결혼 시리즈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가정, 좋은부부의 모습을 생각해보게되고 그런 가정의 모습을 지향하게 되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2014-03-17 11:43:00 | 이정희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적절한 비유입니다. 위의 그림을 보면서, 가정을 세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옳음을 가지고 빈틈없고 흠없는 낙원을 세우겠다는 생각과 습관부터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제 자신의 완벽주의가 아직 덜 깨졌구나, 하고 스스로를 한 번 더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2014-03-15 22:53:12 | 임원섭
그림이 글보다 나을 때가 많습니다.   요즘 결혼과 가정 공부를 하다 보니 나누고 싶은 그림 두 장이 있어서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샬롬   패스터   -------------- 나쁜 부부 -------------       -------------- 좋은 부부 -------------  
2014-03-15 17:13:00 | 관리자
대형 교회 비리들이 여기저기서 드러나네요. 참조하세요. 샬롬 패스터 십일조와 헌금을 못하면 교회 생활도 못하게 된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733 3000억 호화 예배당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726 목사님 찬가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725
2014-03-10 14:02:32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느 분이 고 옥한흠 목사님의 아들 옥성호 형제가 지은 "서초 교회 잔혹사"라는 책을 알려와서 소개합니다. 성도들의 교육을 위해 교회에 몇 권 가져다 놓겠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719   또 동시에 온누리 교회 잔혹사라는 글도 들어 왔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720   교회의 타락이 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때가 가까이 온 것 같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성도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03-07 10:24:28 | 관리자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열심히 일하는 것=가정을 섬기는 것 으로 알지요. 정말 중요한 것은 놓쳐버리고..... 하나님을 어긋난 방향으로 섬기다가 자신과 가족이 어려움 겪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나 아픕니다. 진솔하게 공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형제님의 가정이 속히 회복되도록 저절로 기도가 되네요.
2014-03-06 22:29:37 | 이수영
안녕하세요?   한 성도님이 결혼과 가정 설교에 참고하라고 글을 주셨습니다. 정갈하게 메모 된 글을 읽고는 모두가 읽으면 좋을 것 같아 허락을 받고 무명으로 올립니다.   샬롬   패스터   --------------------    결혼과 가정에 대한 소고   기독교인라면 누구나 결혼식에서 주례사로 창2:18, 엡5:22-33, 고전7장 말씀 강해를 많이 듣습니다. 결혼하여 새로 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길러 또다시 새운 가정을 이룸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창1:28에서 첫 부부에게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고 축복하셨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청춘남녀는, 철썩 달라붙는 자석처럼, 어떤 힘(물론 하나님이 주신)에 끌려 한 쌍을 이룹니다. 모두 처음엔 하나님이 정해 주신 것처럼 결혼합니다. 단순한 이유 - 사랑하기 때문에 우린 결혼했어요! 기쁨의 외침이지요.   그런데 인간사 대부분의 어려운 문제가 또한 가정을 이룬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성적으론 사랑이 충만했지만 거의 모든 것에 남녀 간 갈등이 대립합니다.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결혼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복 주신 제도이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칭찬과 감탄의 말씀을 들었어야 하는데…저는 하나님과 이웃 모두에게 부끄럽기만 합니다.   저는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었어요.이 점은 대한민국 기본교육의 문제이기도 해요.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12년 동안 선생님들로부터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는 격려의 말씀에 늘 고무되어 열심히 학교 공부는 했는데, 막상 대학교에선 전혀 그런 좋은 말씀은 없고, (저는 제 재능과 적성에 맞지 않는 상과 대학을 졸업했어요.) 무역회사에 취직하고 보니, 정직하게 교과서적인 모범생은 오히려 이 사회에선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더군요.   목사님! 저는 젊은시절 다니던 무역회사 과장님의 권유로 사내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고, 아이들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어리석은 기독교 종교생활 때문에 무척 어려운 가정생활이 되었어요. 목사님께서 이번에 “결혼과 가정” 주제로 말씀을 전하실 텐데, 저의 어려운 결혼생활 경험이 참고될까 하여 이 글을 씁니다.  결혼은 했지만, 적당한 권모술수, 서로 눈감고 저지르는 조직적인 부정부패가 만연한 직장, 돈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현대 경제사회가 저를 쫓아내더군요. 그리고 저의 어리석은 기독교 종교 생활이 더욱 이 세상 사회를 등지게 했지요. 양립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리고 직장 생활을(아무리 제 깐엔 열심히 해도 구조적으로 도태되고, 회사는 망하고…한창 돈 벌어 먹고사는 기본 바탕이 절실한 사회 초년병 시절인데…)다 때려치우고 교회 사무 집사가 되어 아예 교회에 들어가 살았지요.  물론, 아내를 사랑하지만, 너무 어려서부터 아마 10살 때부터 동네 여름성경학교 - 대전 OO침례교회-에 재미들이고 12살 때부터 박모 장로 전도관에 빠졌거든요. 사이비 이단에서 종교생활 하다 보니, 세상과 사탄이 지배하는 사회생활(경제·정치 등)에 등을 돌리게 되니, 경제적 안정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젊은 아내가 중학교 앞에서 책방을 하다가 빚만 지고 망했고, 저는 교회 생활에만(그것도 사이비) 열중하니 어떻게 행복한 가정이 되겠어요.   여자가 직장생활 하는 것은 문제가 많고 여러 가지로 심각합니다.여자 위주의 사회가 되면 모를까, 남자 위주의 사회에선 구조상 여자는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학교에선 모범생이었고, 열성적인 기독교인이었던 제가 현재 이 세상 구조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결론적으로 가정의 행복은 사랑보다 경제적 안정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원칙을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결혼 초부터 이제까지 근 40년간 아내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아내로부터는 무능한 남편으로 낙인찍혔지요. “당신이 말로만 하는 ‘사랑’이 무슨 사랑이야!” 경제적 안정을 이루지 못함이 늘 교회 중심 종교생활에 원인이 있음을 아내도 잘 알기에, 때론 이혼도 생각해 보았을 텐데…워낙 말이 없이 인내하다 보니 마음에 스트레스가 쌓여 15년 전부터 류머티즘에 걸려 손, 발목 등에 관절 이상이 생겨 급기야 3급 장애인이 되었지요.   전 목사님의 권면의 말씀 즉 아내에게 모질게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정말 뒤늦게 깨달았어요. 제가 하나님 열심히 믿는다고 자칭 열심히 믿어서 우리 가정이 이 땅에서 행복하지 못했지만, 천국에 가서 누리자고 변명을 일삼다 보니, 결과적으로 아내에게 너무나 모질게 구는 남편이 되었습니다.  천국을 향해 나그넷길을 가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세상은 힘들어도 최소한 마음은 안정이 되어 서로에게 힘이 되어야 끝까지 갈 수 있는데 이점을 너무 늦게 사랑침례교회 와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어리석은 종교생활이 후회막심이나 저의 역사이니 부끄럽지만 이제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 저의 가정이 정말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길 기도합니다.  샬롬
2014-03-06 16:01:30 | 관리자
안녕하세요?   이제 겨울이 거의 다 지나고 따뜻한 봄이 되었습니다.계절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믿음에도 따뜻한 봄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제2기 회원 가입에 많이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70여 명이 가입해 주셨고 침례 받고 가입하실 분까지 따지면 4월 중순경에는 약 200명이 저희 교회 회원으로 신실하게 주님을 섬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에게 맡겨 주신 지역 교회를 신실하게 잘 유지하고 섬기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동시에 하늘의 보상을 받는 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니 교회의 부족한 점, 부족한 지체를 살피고 돕고 섬기면 좋겠습니다.   미디어 선교 사역으로 만드는 CD, 소책자, 전도지가 모두 보충되었습니다. 앞으로 “왜 킹제임스 성경인가?”, “재림과 휴거 바로 알기”, “창조와 진화”라는 제목으로 3권의 소책자를 만들려고 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강해 등을 묶어서 매해 2개 정도의 CD를 만들려고 합니다. 이번 주에는 “영으로 찬양하는 복음성가”를 인쇄합니다. 아이들 노래도 약 60곡 들어 있어 온 교회가 쓰기에 좋을 것입니다. 도착하거든 같이 불러봅시다.   올해에는 성경을 일독하자고 작심한 분들이 많습니다. 제가 매주 문자로 보내드리는 일정대로 하셨으면 이미 신명기를 끝내고 오늘부터 여호수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정으로 하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가능하면 매해 성경을 일독하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에는 여호수아기 24장을 다 읽도록 합시다.   최근에 새로 오시는 분들은 3월 16일부터 시작되는 새 가족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곳인지 알려드리고 또 자유롭게 질문하며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므로 회원 등록 전에 참석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3월 30일에는 침례가 있습니다. 구원받으신 분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바랍니다. 다음 주에는 오전에 주의 만찬이 있습니다.   금요일 저녁 8시 모임에서는 지금 고린도전서를 강해합니다. 이번 주는 7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는 주일 오후 예배 후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성도들과 교제 나누며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나서 집에 갑니다. 가능하면 여러 성도들이 남아서 같이 교제하면 좋겠습니다. 저와 만나기 원하는 분도 주일 오후 예배 후에 약속을 하고 만나면 좋겠습니다.   양이 아니라 질적으로 우수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주일 오전 예배만큼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경배하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토요일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들고 복장도 단정하게 하고 오세요. 자매님들은 가능하면 치마나 몸매를 가리는 정장 바지를 입어주세요. 몸매를 가리는 것이 교회에서는 덕이 됩니다. 남자들이 귀고리를 하거나 누구든 예배 시간에 모자를 쓰면 우리 주님께 불명예가 됩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서 주님께 나오기 바랍니다.   한 주 동안 우리 주님의 은혜가 개인과 가정에 넘치기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03-03 11:07:50 | 관리자
진정한 우정 이라는 제목이 전혀 과하지 않은 그런 모습이네요. 우리 예수님께서 하늘의 왕국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진으로 보는 아이들의 가식없고 순수하며 마음으로 친구를 위해 기꺼이 꿇어 엎드린 모습은 저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나는 과연 저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하고 돌아보게 됩니다. 사진 감사합니다.
2014-02-26 16:10:50 | 이정희
사진 한장이 웃음도 주고 많은 생각을 하게하네요~ 마음에서 우러나 즐겁게 웃을 일이 정말 없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더 예쁜지도 모르지요^^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는 단순함이 있어서~ 한번 웃고 두번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에요~ 감사합니다^^
2014-02-26 10:45:38 | 이수영
친구를 위해 더럽다고 생각할 수 있는 화장실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기꺼이 무릎을 꿇는 어린이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그대가 있음에 행복하다고 서로에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랑침례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웃음과 함께 버무려진 깊은 교훈을 던져주는 절묘한 사진에 감사합니다.
2014-02-26 10:38:52 | 김대용
목자매님 . 정말 도움을 주고 받아도 어색하지 않는 곳이 교회라는 말이 참 좋네요. 이토록 가식과 위선이 없고 진솔한 사귐이 있는 우리 교회가 되도록 우리 다 이 친구들처럼 노력해요..ㅎㅎ
2014-02-26 09:49:52 | 오혜미
도움을 주게 되었을 때 뿌듯하고 도움을 받을 때의 따뜻함...모두 살아가고 싶게 만듭니다. 도움을 줄때도 부담없고 도움을 받을 때도 어색하지 않는 곳이 교회인것 같습니다. 이제 받기만 하지않고 교회지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날이 빨라지길...또 기도합니다.
2014-02-26 09:46:28 | 목영주
안녕하세요?   어제 한 형제님이 진정한 우정이라는 사진을 보내면서 다음의 글을 주셨습니다.   "목사님, 웃자고 보냅니다."   "상황이 좀 우습긴 하지만. 저 아이들처럼 서로 의지하고 배려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목사님. 힘내시고~~ 홧팅하세요. ^^"   이 한 장의 사진이 웃음도 주고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 주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주일에 한 번 모이지만 질적으로 우수한 예배를 드리고 또 끈끈한 우정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려면 가능한 한 지역 모임과 소그룹 모임이 활성화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주일 오후에도 예배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하며 교제하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우정이 넘치는 우리 교회를 꿈꾸면서   샬롬   패스터
2014-02-26 09:16:37 | 관리자
우리의 구원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근간입니다. 이를 위해 히브리서 6장과 10장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이트의 기사로 읽는 것도 좋지만 가능하면 PDF 파일을 다운받아 인쇄해서 성경과 비교해 가면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한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끝으로 소책자를 읽고 모든 것을 요약해서 머리에 넣기 바랍니다. 요즘 구원 취소 교리로 성도들을 불안하게 하는 자들이 많기에 정신을 가다듬고 부랴부랴 이 글을 적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2014-02-20 15:00:32 | 관리자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히브리서 6장, 10장 설명)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606   히브리서 배경   1. 요즘 구원이 취소된다는 교리를 가지고 성도들을 현혹시키는 자들이 많다. 이들이 이런 이단 교리를 가르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구절이 바로 히브리서 6장 4-8절과 10장 26-27절이다. 이런 악한 교리로 인해 고통당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기에 이 글에서는 성경을 통해 바른 교리를 정립하고자 한다.  2. 성경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문의 수신자와 문맥이다. 이런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이 히브리서 구절들 역시 수신자와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는 초대 교회가 형성될 때 예수님을 믿게 된 유대인(히브리) 성도들이다. 이 당시에는 여전히 유대교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유대인 교사들은 기독교로 회심한 이 형제들에게 손을 뻗어 그들을 다시 유대교로 복귀시키려고 노력하였다.   3. 이에 히브리서 기록자인 사도 바울은 유대인 교사들의 악한 주장을 무력화하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의 천사와 모세와 여호수아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레위의 제사장 체계와 그 안의 모든 희생물보다 우월함을 증명한다. 이것을 확증하기 위해 사도는 율법의 의식 법들이 제정된 목적과 용례를 보여 주고 이제는 그것들이 그리스도라는 실체가 옴으로써 완전히 폐기되었음을 논리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사도는 극심한 핍박을 당하는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당하는 것을 참으라고 권면하면서 배도의 물결에 휘말리지 말 것을 촉구한다. 그러면서 사도는 구약시대 영웅들의 믿음 열전을 보여 주며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동일한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우리의 참 소망이 하늘에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4. 이 히브리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던 때에 그분을 믿은 자들에 의해 주님께 인도된 자들이었다(히2:3). 이들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해 안으로는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밖으로는 로마 제국에 의해 극심한 핍박을 받으면서(히10:32-34; 12;4; 13:13-14) 믿음의 진보를 거의 이루지 못하고 성화의 삶을 포기한 채 영적으로 답보 상태에 있었다(히6:1). 이들은 또한 거짓 교리들에 유혹을 받았고(히13:9) 처음에 자기들에게 진리를 바르게 가르쳐 준 사람들을 차츰 잊어버리는 상태에 빠져 있었으며(히13:7), 그중에는 심지어 예배에 나오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히10:25).   5. 이런 위험에 빠진 히브리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들이 이런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면 비록 구원은 잃지 않지만 하나님의 징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히12:5-11; 고전3:11-17).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의 구원자가 누구인가?”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다시 믿음을 평가한 뒤 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전진해 나가라고 권면한다(히12:12-13).  6. 이 점들을 기억하면서 히브리서 6장과 10장을 문맥에 따라 살펴보면, 이 난해 구절들이 사실 구원 취소가 아니라 보상의 취소와 징계를 가르치는 말씀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히브리서 6장 배경 설명   1. 사도는 5장에서 구약시대의 대제사장들과 신약시대의 유일한 대제사장 예수님을 비교하며 설명한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이 구약시대 대제사장들과 달리 아론(레위)의 계열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르는 대제사장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을 하면서 5장 11절에서 사도는 과연 이 히브리 성도들이 영적으로 미숙하여 자기가 설명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을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진다. 그래서 그는 5장 12-14절에서 그들이 시간상으로 보아 마땅히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무를 이해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아직도 젖을 빠는 아기들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 준다.  2. 이것을 지적한 뒤 사도는 6장 1-3절에서 이제는 그들이 이런 미숙한 상태를 벗어나 완전함(성숙함)에 이르러야 한다고 권면한다. 바로 이런 문맥의 흐름에서 저 유명한 4-8절 말씀이 연이어 나온다.   히브리서 6장 4-8절 설명  히브리서 6장을 전체적으로 문맥에 따라 살펴보면 이 구절들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음에 대해 말하지 않음을 금세 알 수 있다. 본문에서 발견되는 사도 바울의 진정한 의도는 침체 상태에 빠져 있는 이 히브리 성도들을 일깨우려고 충격 요법을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히6:4-8과 히10:26-39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살펴보고 이 구절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님]께 참여한 자가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 6 만일 떨어져 나가면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니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느니라. 7 자기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땅을 가는 자들에게 합당한 채소를 내는 땅은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니와 8 가시와 찔레를 내는 것은 버려지고 저주함에 가까이 있어 마지막에는 그것이 불살라지리라.    1.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여기서 사도는 구원받은 자들이 믿다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 지옥에 가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들은 완전히 배도하여 옛 생활로 돌아갔으므로 구원을 잃고 영원히 구원을 잃게 된다.”   a. 이것은 감리교회, 성결교회, 오순절/은사주의 순복음 교회 등과 같이 ‘알미니안 주의’를 견지하는 자들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짧게 ‘구원 취소 교리’로 알려져 있으며, 대표적으로 서울 ‘큰 믿음 교회’의 변OO 목사, 연세중앙교회의 윤OO 목사, 서울 순복음교회의 조OO 목사 같은 유명(?) 목사들이 이런 교리를 주장한다. 이들 외에도 7년 환난 통과 교리를 주장하는 이들의 대부분 -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카페와 거기서 소개하는 데이비드 O, 벤자민 O 등의 목사들 - 이 이 교리를 주장하면서 신부 단장 연습, 주님의 군대 가입 등을 통해 행위로 믿음을 유지할 것을 가르친다.  b.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영원한 안전 보장 교리와 전적으로 배치된다. 히브리서 자체가 이를 증언한다. (1)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히5:9). (2)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다(히7:25). (3)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구속이다(히9:12). (4) 우리는 영원한 상속 유업을 받는다(히9:15).(5)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다(히13:5-6).    c. 또한 성경은 여러 곳에서 구원이 취소될 수 없음을 명백하게 말한다.(1) 우리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5:24). (2) 아무도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서 성도들을 빼앗을 수 없다(요10:20). (3) 이 세상 어떤 창조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낼 수 없다(롬8:28-39).   d. 아이러니하게 구원 취소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또한 구원을 잃은 뒤에 다시 회복될 수 있음을 말하지만 6절은 그리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한다. 즉, 구원을 잃었다가 다시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2.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은 이 구절들을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이 히브리 성도들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한다. 즉, 그들은 말로는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 역시 전혀 설득력이 없다.  a. 이들은 ‘한 번’ 빛을 받은 자들이다(히6:4). 여기의 ‘한 번’은 사실 ‘영원한 한 번’을 말한다. 히브리서의 ‘한 번’의 용례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한 번’은 ‘영원한 한 번’이다(히7:27; 9:12, 26-28; 10:10 등).   b. 이들은 하늘의 선물을 맛보았다(6:4).   c.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보았다(6:5).  d. 이런 주장을 펴는 자들은, 이 히브리 성도들이 구원받지 않았음을 강변하기 위해 그들이  구원을 맛보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맛보다’라는 말은 실제로 먹는 것을 뜻한다. 히2:9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셨다고 기록한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은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죽지는 않았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제로 죽음을 맛보고 죽으셨다. 그러므로 ‘맛보다’는 표현은 실제로 맛보고 먹었다는 뜻이다. 벧전2:2의 ‘맛보다’도 같은 뜻이다.   e. 이들은 성령님에게 참여한 자들이다(6:4). 히3:1은 이들을 가리켜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하면서 이들이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이라고 하며 히3:14는 이들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들이라고 한다.  f. 이런 것들로 보아 이들은 분명히 구원받은 자들이다.  g. 구원받지 않은 불신자들이 어떻게 주님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을 모욕할 수 있겠는가?(6절) 불신자들은 항상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항상 그분을 모욕하지 새로이 하지는 않는다.   3. 어떤 이들은 이런 죄가 히브리서가 기록된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예루살렘에 성전이 서 있을 때까지만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왜 사도는 지금 영적 성숙과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무를 연결하고 있는가? 히브리 성도들은 지금 영적으로 미숙해서 사도가 이야기하는 ‘하늘에서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일은 지금도 미숙한 성도들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지금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면, 성경에 기록된 이런 권면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4.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이 7년 환난기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럭크맨(Peter Ruckman)을 추종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주장이다. 히12:23을 보면 이들은 교회에 속한 자들이므로 히브리서를 환난기의 유대인들에게만 적용하려는 시도는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5. 그러면 이 구절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6절의 ‘if’와 9절의 ‘But’과 ‘though’이다. 이것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문제를 푸는 핵심이다.   a. 사도 바울은 복지부동의 자세를 고집하는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 충격을 가하기 위해 가정법을 사용해 구원받는 자는 구원이 아니라 보상을 잃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히6:9-10이 이를 증명한다. 이것은 잠시 후에 9-10절을 보여 주면서 설명할 것이다. 사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이런 가정법을 사용한 적이 있다. “육체에 따른 내 형제들, 내 친족들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랄 수도 있으리니”(롬9:3). 자기 육신의 친족인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면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랄 수도 있다고 고백했다. 이 말의 본래 의도는 유대인들의 구원을 애타게 바라는 바울의 심정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결코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알듯, 가정법은 화자(話者)의 간절한 의도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비현실적인 가정을 통해 극적으로 표현되는 서법이다.   b. 히6:3까지 사도는 자기를 포함하여 ‘우리’(we, us)라는 표현을 쓰다가 4절부터는 갑자기 ‘우리’ 대신 ‘자들’(those)로 주체를 바꾼다(우리말 성경에서는 5절). 즉, 지금 그는 무언가를 가정하려 하고 있다. “For it is impossible for those who were once enlightened…”   c. 히브리서를 바로 이해하려면 ‘우리’가 누구인지 잘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의 ‘우리’는 사도 바울과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을 가리킨다(히1:2-3; 2:1; 3:1, 14; 4:14; 4:16…12:1-2, 28-29; 13:6, 15). 이것은 너무나도 명확하므로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d. 구원 취소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이 애용하는 히10:26-27도 ‘우리’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면 쉽고 바르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먼저 19-25절을 살펴보자.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는데 20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께서 우리에게 계시므로 22 우리 마음이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우리 몸은 순수한 물로 씻겼으니 우리가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23 (약속하신 분께서 신실하시니)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굳게 잡고 24 서로를 살펴보아 사랑과 선한 행위에 이르도록 격려하며 25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말고 서로 권면하되 그 날이 다가옴을 너희가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e. 히10:19-25의 ‘우리’는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몸은 순수한 물로 씻긴 자들이다. 그래서 사도는 자기를 포함한 이 히브리 성도들이 즉 ‘우리’가 모이는 일을 폐하는 어떤 자들과 같이 모이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문맥에 따라 이 구절을 읽으면 ‘우리’는 바로 바울을 포함한 구원받은 자들임을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구절 뒤에 유명한 26-27절이 나온다. “26 우리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받은 뒤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남아 있지 아니하고 27 대적들을 삼킬 심판과 불 같은 격노에 대하여 두렵게 기다리는 어떤 일만 남아 있느니라.”    f. 그러면 히10:26의 ‘우리’ 즉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받은 뒤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남아 있지 않고 불 같은 격노를 두렵게 기다려야만 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여기서도 사실 사도는 ‘if’를 사용하여 가정하고 있다.) 어쨌든지 문맥에서 분명한 것은 여기의 ‘우리’가 바로 위에 있는 히10:19-25의 ‘우리’라는 점이다. 즉, 여기의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히브리서 10장 19-17절을 통합적으로 보아야지 26-27절만을 따로 떼어 문맥에 상관없이 해석하면 안 된다. 구원 취소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이 애용하는 히10:26-27의 ‘우리’는 히브리서 전체와 10장에서 보듯이 분명히 사도 바울을 포함한 구원받은 자들이다.   g. 그런데 이 사람들이 고의로 죄를 짓지 않으려면 믿음의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만 한다(23절). 그리하지 않으면 히10:28에 있듯이 구원은 받았어도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인해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었거늘”(히10:28).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어린양의 피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다(고전10:1-5). 이집트 탈출은 성경에서 항상 구원을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구원받은 자들 중에서도 고라와 그의 무리들(민16장) 또 나답과 아비후처럼(민3:4) 모세의 율법을 멸시하다가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사도는 히브리 성도들이 더 이상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면 심지어 육체의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육체의 죽음을 뜻하지 구원의 상실을 뜻하지 않는다.    h. 구원받은 뒤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히브리서의 교훈은 히10:34-35에 있다. 즉 성도들이 확신을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의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확신을 버리고 말씀을 저버리면 보상의 손실을 입고(고전3:12-17) 더 심한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i. 그러므로 이들은 구원은 받았지만 보상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 자들이다.   j. 신약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인들도 (육체적)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요일5:16-17; 고전5:5; 딤전1:19-20; 딤후2:16-17; 요삼9-10).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니니야와 삽비라이다. 이들은 구원받았지만 성령님을 속이려 들다가 즉사하였다. 심지어 고린도 교회에서도 주의 만찬을 멸시하다가 죽은 자들이 있었다(고전11:28-30).  k. 결론적으로 히브리서는 - 특히 6장과 10장 - 결코 성도가 구원을 잃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l. 히브리서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성도들은 미숙한 상태에서 벗어나서 완전함으로/성숙함으로 나아가야 한다(벧후3:18). 그리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징계하신다(히10:30; 12:5-11). 또한 성도가 극심한 죄를 지으면 신구약의 여러 사례에서처럼 곧바로 죽이기도 하신다.” 6. 히브리서 6장은 산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열매)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에베소서 2장 8-10절이 가르치는 바이다. “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0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7. 사도는 4-6절에서 충격 요법인 가정법을 사용하여 구원받은 자들이 떨어져 나가면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7-8절은 4-6절과 동일한 맥락으로서 땅이 열매를 맺지 못하면 불태워짐을 말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이 불로 태워져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무엇이 불타 없어지는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 등이지 땅 자체가 아니다. 땅은 남아 있다. 즉 비록 불살라지는 저주를 받을지언정 땅 자체는 남아 있다. 이것은 고전3:13-16절을 그대로 다시 표현한 것이다.  8. 이제 끝으로 우리는 “히브리서 수신자인 이 히브리 성도들은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는 올바른 질문이다. 반면에 “이 히브리 성도들은 구원을 잃는가? 잃지 않는가?”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9절과 10절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9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비록 우리가 이같이 말하지만 너희에 관한 더 좋은 것들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자신의 이름을 위해 너희가 보여 준 너희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성도들을 섬겨 온 것과 또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느니라.”   9. 먼저 9절이 ‘그러나’로 시작됨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는 앞에 있는 것과 완전히 반대를 가리키는 역접 접속사이다. 즉, 9절에서 사도는 앞의 4-8절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을 말하려고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구절을 시작한다. 또한 사도는 앞에서 가정법을 써서 그들에게 있지 않을 일을 이야기하였음을 보여 주기 위해 “비록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만”이라는 양보 구절을 사용한다. 즉, 내가 앞에서 그렇게 심하게 가정하여 말을 했지만 그게 너희와는 실제로 상관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 그는 “너희에 관한 더 좋은 것들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이 히브리 성도들에게는 구원뿐만 아니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 즉 열매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열매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는 10절에서 그들에게 구원 이후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가 있었음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이 히브리 성도들은 땅(구원)도 좋고 그 위에 열매 즉 믿음의 행위도 내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결코 구원을 잃을 수 없으며 보상도 받는다. 다만 지금 그들이 믿음의 답보 상태에 있으므로 이대로 가면 앞으로 더 받을 수 있는 보상을 받지 못할 위험에 처해 있기에 사도는 이들을 자극하여 완전함으로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10. 그래서 사도는 11-12절에서 열심을 내어 너희가 끝까지 소망의 충만한 확신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11 우리는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열심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충만한 확신에 이르기를 바라노니 12 이것은 너희가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인내를 통해 약속들을 상속받는 자들을 따르는 자들이 되게 하려 함이라.” 즉, 사도는 그들이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어 많은 보상을 받기 바랐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결코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미 구원은 끝났다.  12절에서도 사도는 그들이 확실하게 인내하여 구원이 아니라 ‘보상의 약속들’을 상속받으라고 주문하다.    11. 그리고 앞부분이 보상에 대한 내용임을 확증하기 위해 사도는 13-15절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 14절 말씀 즉 “내가 반드시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창22:16-17에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약속은 무슨 약속인가? 구원에 대한 약속인가? 아니면 구원 이후의 상속에 대한 약속인가? 아브라함의 구원은 이미 창15:6에서 끝났다. 여기의 약속은 분명히 그의 씨가 번성하게 될 것에 대한 약속이다. 즉, 보상에 대한 것이다.   12. 아브라함은 끈질기게 견딘 뒤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자손들이 번성하는 복을 받았다. 그는 75세에 자손들의 복을 약속받았고(창12:1-5), 그 이후에 24년을 약속의 자식 없이 떠돌아다니다가(창17:1-6), 100세에 가서야 이삭을 유일한 아들로 받았다(창21:1-5). 실제로 그는 자기 자손이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음을 보지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리스도의 날 보기를 기뻐하다고 그 날을 보고 즐거워하였다(요8:56). 즉, 그는 육체적 후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한 영적 후손들까지 다 보았다. 그가 이처럼 상속의 소망을 - 구원이 아니다 - 받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사도는 히브리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인내하라고 말한다.   13. 결론적으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 6장과 10장에서 구원이 아니라 보상의 소망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어야 히브리서 6장 1-3절의 권면 즉 완전함으로, 성숙함으로 나아가라는 사도의 권면이 문맥상으로 딱 들어맞게 된다.    성경 문제   1. 위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6장과 10장이 구원 취소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상의 손실과 징계를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6장에서 개역성경은 구원 취소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에게 그럴듯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2. 먼저 4-6절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if를 사용한 가정법 문장이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가정법의 ‘if’(만일 …하면)를 없애고 6절에서 아예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개역 히6:6). 즉, 개역성경은 ‘if’를 없앰으로써 아예 히브리 성도들을 타락한 자들로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 배교의 결정판이라고 하는 NIV도 6절에서 ‘if’는 그대로 살려놓았다. NKJV, Amplified Bible 등도 다 6절에 ‘if’를 제대로 달아놓았다. 개역성경이 이런 오류를 범한 것은 ASV(NASB의 모체)를 대본으로 사용하여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ASV와 NASB는 개역성경처럼 ‘if’가 없고 ‘타락한 자들의 경우에는’으로 되어 있다.   3. 그 뒤 개역성경은 9절에 치명적인 오류를 만들어 놓았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개역 히6:9). 일단 9절 처음에 ‘그러나’가 나오면서 문장이 역전됨을 보여야 하는데 개역성경은 ‘그러나’를 없앴다. 참고로 NKJV, ASV, NASB, Amplified Bible 등도 다 ‘그러나’로 시작한다. 그리고 개역성경은 ‘though’를 단순히 뒤에 ‘말하나’로 번역하여 뜻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개역성경은 “우리는 너희가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로 번역하였다. 그들이 구원에 가깝다면 그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면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원도 받지 못한 자들의 행위와 수고를 잊지 않고 기억하신단 말인가? 이것은 실로 말이 안 되는 번역이다. NKJV, ASV, NASB, NIV 역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처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그들에게 있다”라고 바르게 번역하였다. 다만 카톨릭 성경인 Amplified Bible만 ‘구원에 가까운’이라는 절을 삽입하여 놓았다. 즉, 이런 번역은 구원을 평생 과정으로 이해하는 로마 카톨릭 주의의 산물이다.  4. 이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예가 바로 벧전2:2이다. 흠정역: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개역(ASV, NASB, Amplified Bible 등):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5. 개역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고 말하면서 구원이 평생 과정임을 보여 준다. 이런 성경으로는 구원을 받았다가도 언제라도 잃을 수 있다는 구원 취소 교리가 얼마든지 가능하며 무지한 성도들은 이런 성경과 그 안의 가르침으로 인해 평생토록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두려움 가운데 벌벌 떨면서 살게 된다. 이렇게 두려움의 불씨를 품고 사는 자들에게 개역성경의 빌립보서 2장 12절은 기름을 부으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6. 성경이 두렵고 떨면서 구원을 이루어가라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꼼짝없이 교회와 교단과 목사의 말에 순종하면서 두려움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개역성경을 사용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주소이다. 그러나 바른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흠정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7. 이미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미 얻은 구원을 가지고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밖으로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요점이다. 여기서 영어는 ‘work out your own salvation’이라고 말한다. 요즘 우리는 ‘워크아웃’(work out) 기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잘 나가던 회사의 재무 상태가 나빠지면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회사가 일하는 것을 감독하고 채찍질하는 것을 워크아웃이라고 한다. 즉, 기업의 경우든 성도의 경우든 워크아웃은 기업이나 구원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을 하여 외부로 무언가를 드러내어 보여 주는 것을 뜻한다.   8. 이런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성경 번역이 믿음 생활에 대단히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가 성경 때문에 잘못되면 이로 이한 피해는 고스란히 애꿎은 성도들이 당해야 한다. 사실 구원 취소 같은 이단 교리를 가르치는 이들도 잘못된 성경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다.  성도가 구원을 잃을 수 없는 몇 가지 이유   1. 사람의 힘으로 얻지 못한다(엡2:8-10; 딤2:14).2. 한 가지 죄를 지으면 모든 죄를 지은 것과 같다(약2:10). 그러므로 무슨 죄든 죄로 인해 구원을 잃는다면 구원을 유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즉 우리의 행위가 구원에 일조하지 못하듯이 우리의 행위는 또한 구원 유지에도 일조하지 못한다. 3. 예수님의 단번 속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속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4. 구원은 출생이므로 출생이 여러 번 있을 수 없다.5. 구원은 영원한 생명, 영존하는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인데(롬8:14-17; 31-39), 이런 영원한 생명과 영존하는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에게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하며 영존하기 때문이다.6. 우리는 구속의 날까지 성령님에 의해 봉인되어 있다(엡5:30; 고전12:18). 이 세상의 어떤 창조물도 성령님을 이기고 그분의 봉인을 풀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영원하다.7. 구원을 잃는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요일5:10).   이 글과 함께 <구원의 기쁨과 확신> 소책자를 참조하면 구원의 기초가 확실히 놓일 줄 믿는다.
2014-02-20 15:00:12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