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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들고 서 있는가? Part 2조회수 : 29
    • 작성자 : 김영규
    • 작성일 : 2026년 8월 3일 21시 6분 11초
  •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것은 단지 세상의 죄악이나 부끄러운 과거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한때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여기고 자랑하던 할례와 혈통, 종교적 지위와 열심, 율법에 따른 의까지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혈통을 지닌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으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율법에 관해서는 바리새인이었고, 종교적 열심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앞섰으며, 율법 안에 있는 의로는 흠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관심하거나 방탕하게 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확신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내세운 모든 항목이 똑같은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할례와 혈통과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권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핍박한 그의 열심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적했습니다. 선하게 주어진 특권도 있었고 죄로 왜곡된 열심도 있었지만, 그것들이 바울 자신을 높이고 육체를 신뢰하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모두 그의 자랑거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뒤, 자신이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는 그것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가까이 데려가는 유익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손실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본래부터 무가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바울이 그것들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을 근거로 붙들고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할례와 혈통과 율법과 종교적 열심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자신의 의가 되고,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유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바울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무능함을 보지 못하게 하고, 그리스도 없이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버린 것은 단순히 외적인 경력과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내려놓은 것은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며 자신을 높이던 마음, 육체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무가치하다고 선언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에게 속한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순서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을 비우고 자기 의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자신이 자랑하던 것들의 실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분께서 이루신 일의 완전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난 의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 비움이 은혜를 불러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의 자기 의를 무너뜨렸습니다.

     

    과거의 바울은 자신의 혈통과 행위와 열심을 바라보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을 만한 사람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뒤에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하심 앞에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과 비교하면 자랑할 것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의 앞에서는 자신에게서 난 의가 아무런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실제로 행한 금식과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내세웠습니다. 문제는 금식과 십일조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한 것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확신했고, 그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멸시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의를 진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듯했지만 그의 시선은 온통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반면 세리는 하나님 앞에 내놓을 만한 의와 공로가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가릴 수도 없었고 자신을 변호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남아 있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세리는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인정하고 긍휼만을 구했습니다.

     

    회심 전 바울은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혈통과 율법적 행위와 종교적 열심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뒤에는 자신에게서 난 의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만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효력이 있는 자신의 의를 가지고 있다가 그것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의가 있다고 믿던 확신과 자랑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얻은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문제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의를 세우려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열심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떠난 열심,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로 의를 이루려는 열심이 문제였습니다.

     

    열심은 진리를 대신할 수 없고, 열심의 크기는 의의 근거가 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종교적 열심은 사람을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기보다 오히려 자기 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 참석과 성경 통독, 필사와 암송, 찬양대와 주방 봉사, 헌금과 전도와 교회의 여러 섬김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여 행한다면, 그것들은 모두 아름다운 순종의 열매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성도가 힘써야 할 귀한 일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는 말은 순종과 섬김을 멸시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한 행위는 구원의 뿌리가 될 수 없지만, 구원받은 삶에서 맺혀야 할 열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지불하는 대가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받아들여진 사람이 감사함으로 드리는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내가 무엇을 하였느냐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왜 하며, 무엇으로 여기고, 무엇을 기대하며 붙들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같은 성경 통독이라도 하나님을 더 알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할 수 있는가 하면, 통독 횟수를 바라보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경건한 사람이라고 안심하기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봉사라도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을 낮추며 섬길 수 있는가 하면, 자신의 충성심과 헌신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행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사귐은 메말라 있으면서도 외형적인 행위와 종교적 성취를 바라보며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안심한다면, 그것들은 자신의 영적 가난을 보지 못하게 가리는 종교적 앞치마가 될 수 있습니다. 경건의 행위가 나를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없이도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게 한다면, 선한 행위마저 자기기만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가 만든 무화과나무 잎은 그들의 수치를 실제로 없애거나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음을 가려 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인간적인 시도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종교적 성취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와 영적 벌거벗음을 덮어 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만든 덮개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눈앞에서 자신을 가릴 수 없습니다.

     

    가인의 헌물에서도 이와 관련된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가인의 헌물이 단순히 땅의 열매였기 때문에 거절되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아벨이 믿음으로 더 뛰어난 희생물을 드렸다고 말하며, 가인의 행위가 악했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단순히 헌물의 재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 없이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간 가인의 마음과 행위 전체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사람이 많은 수고와 정성을 들여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가져왔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노력했느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과 믿음으로 나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성과 열심은 하나님의 방법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자신을 부유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존재로 평가하면서, 자신의 비참함과 가난함과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가난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 자신에 대한 평가와 주님의 평가는 정반대였습니다.

     

    자기 의도 이와 같습니다. 자기 의는 단순히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가 행한 것, 배운 것, 견딘 것, 드린 것, 섬긴 것을 바라보며 그로 인해 자신을 더 의롭고 가치 있는 신앙인으로 여기는 마음도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과 나의 열심을 비교하며 은밀히 자신을 높이는 순간, 나는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하였느냐에만 있지 않고, 그것을 무엇으로 여기며 붙들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내게 하나님 앞에 내놓을 만한 의와 공로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으려 하거나 자신을 남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기려 한다면, 나는 온전히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것’, 곧 자기 의를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어느 정도 잘한 사람에게 부족한 부분만을 채워 주는 보충물이 아닙니다. 내가 이룬 것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함께 하나님 앞에 제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는 근거는 내가 행한 선한 일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합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입으로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완전하고 충분하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근거로 은밀히 붙든다면 실제 마음의 작동에서는 그리스도의 충분성을 흐리게 됩니다. 자신이 이룬 것을 계속 바라보는 동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 얼마나 완전하고 충분한지 온전히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 통독과 필사와 봉사를 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자신의 의와 신앙적 자격으로 붙드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선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를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열심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열심으로 자신을 높이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섬김을 멈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얻으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면 그것은 자랑할 이유가 아니라 더 많이 순종하고 더 낮아져야 할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섬겼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근거가 아니라, 오래 참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사할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를 알고 있다면, 그것 역시 다른 사람을 멸시할 근거가 아니라 더 큰 책임과 겸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여기서 회심 전 바울의 자기 의와 구원받은 성도 안에 남아 있는 자기 의의 성향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회심 전 바울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는 근거를 자신의 혈통과 율법적 행위에서 찾았습니다. 그것은 칭의와 구원에 직접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반면 구원받은 성도가 자신의 통독과 봉사와 헌신을 자랑하는 문제는 이미 받은 구원을 자신의 행위로 다시 얻거나 유지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자랑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메마르게 하며, 성화를 방해하고, 다른 지체를 판단하게 하며, 그리스도인의 증언과 장차 받을 보상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성도의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순종과 불순종이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가 충성스럽게 순종하기를 원하시며, 그 순종을 기뻐하시고 평가하십니다. 다만 성도의 순종은 구원의 값을 지불하는 공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맺히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자신을 높이고 그리스도를 가리는 모든 것을 정직하게 그리고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종교적 경력과 성취 가운데 무엇이 나의 영적 가난과 무능함을 보지 못하게 하는지, 무엇이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지를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나는 성경을 얼마나 읽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지, 어떤 교회에 속해 있는지, 어떤 성경과 교리를 알고 있는지, 얼마나 많이 봉사하고 헌금했는지를 은밀히 자신의 가치로 삼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른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나를 겸손하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게 한다면, 그 지식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빛이 아니라 나를 높이는 또 하나의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다른 사람의 자기 의를 분별하고 지적하는 일 자체가 나의 또 다른 자기 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의 자랑과 교만을 보며 그것을 옳게 분별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 사람보다 자신이 더 겸손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바리새인을 비판하면서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면서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분별하거나 사랑으로 권면하는 일 자체가 모두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적 분별과 권면은 필요합니다. 다만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나 자신도 동일한 말씀의 빛 아래 서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보면서 자신을 더 의롭고 영적인 사람으로 여기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다른 사람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이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의가 보인다고 생각될 때 가장 먼저 살펴야 할 것은 그 사람의 마음만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입니다. 나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있는지, 아니면 그를 판단함으로써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사랑(charity)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닐 것(I am nothing)입니다.

     

    자기 의가 무너진다는 것은 자신이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자학하거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순종의 열매까지 부정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을 근거가 자신에게 전혀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선한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며,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자랑할 권리가 내게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비우는 일 자체를 새로운 자랑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 의를 내려놓았는지, 얼마나 겸손해졌는지를 바라보며 그것을 자랑한다면, ‘자기 비움마저 또 다른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훌륭하게 내려놓았는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를 붙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중심은 자신을 비우는 나의 결단에 있지 않고, 죄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신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자신이 붙들고 있던 자랑을 손실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 의를 내려놓았고, 자신에게서 난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만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에게 가장 큰 유익은 더 이상 혈통이나 종교적 성취나 율법적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가장 큰 유익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의를 의지하는 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얻었으며, 자신의 자랑을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자신이 이룬 것을 바라보는 대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일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잘난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지 못했다면,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을 만한 사람으로 바라보며 육체를 신뢰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한 채 그리스도를 절실히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았을 것이며,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진 것과 행한 것을 계속 바라보는 동안에는 영적으로 가난하면서도 부유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벌거벗었으면서도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충분히 가렸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임에도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경력과 행위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자기 의를 살피기 전에 먼저 나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들고 서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 앞에 내세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바라보며 자신이 괜찮은 신앙인이라고 안심하고 있는가?

     내가 행한 것 가운데 무엇을 은밀히 나의 가치와 자격으로 붙들고 있는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나를 높이게 만드는 나의 종교적 자랑은 무엇인가?

     내가 배설물로 여기고 내려놓아야 할 나의 자랑은 무엇인가?”

     

    이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던지는 질문이 아닙니다.

      

    바로 저 자신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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