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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인원 행성의 출현?조회수 : 9870
    • 작성자 : 김정훈
    • 작성일 : 2011년 10월 31일 23시 54분 2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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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인원 행성의 출현?

     

     

    왠 낯선 침팬지

     

    얼마 전 거리를 누비는 시내버스에 왠 낯선 침팬지 얼굴이 커다랗게 하나 그려져 있는 영화 광고를 본 적이 있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사실 옛날에 TV에서도 보여준 적이 있던 오래된 추억의 명화인데.. 정확히 1968년에 개봉 되었으며, <벤허>로 유명한 찰턴 헤스턴이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의 제목이 바로 <혹성탈출>이었다. 최근 버스에 광고된 이 영화는 말하자면 그 뒤에 다시 새롭게 만들어진 <혹성탈출>의 앞 이야기인 셈이다.

     

    “영화는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는 필자의 기준을 일단 통과할 만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는 그렇게 끝났다. 치매를 치료하려고 개발하던 약물이 공교롭게 실험용 침팬지의 지능을 상상 외로 높이게 되고, 그 한 마리의 침팬지가 주변의 다른 유인원들을 일깨우며 점차 무리를 확대하여 인간과 분리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 것으로 영화의 이야기는 전개된다. 반면 침팬지의 지능을 높여 주었던 동일한 약물에 감염된 인간은 면역체계가 급격히 약해지고 결국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피를 토하고 죽는 일이 발생한다. 아마 이 영화의 다음 편이 만들어진다면 사람은 점차 멸종되어 가고 지능이 높아진 유인원들은 반대로 인간이 사라진 이 지구를 대신하여 지배하는 이야기로 전개될 것이 충분히 예측된다. 참고로 이 영화의 원제목은 <유인원 행성의 출현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이다.

     

       영화를 보면 어떻게 유인원들의 감정을 진짜 같이 섬세하게 표현해 냈을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그래서 전에 <아바타>라는 영화에서 화제가 되었던 소위 요즘 할리우드가 자랑하는 ‘이모션 캡쳐 (emotion capture)'라는 기술적 방법에 흥미가 당길 수도 있겠다. 유인원들이 한 명의 영리한 리더를 통해 점차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 가고, 급기야는 인간이 만든 울타리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들 속에서 혹자는 어떤 이유로든 억압 받는 이 사회의 소수를 생각하며 사회적인 측면의 문제의식을 끄집어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주인공 침팬지 ‘시저 (Caesar)’가 시간이 지나면서 도구를 사용하고 빠르게 언어 능력을 획득하는 것을 보면서 누군가는 또 ‘그래.. 과거에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어느 운 좋은 유인원이 저렇게 인간으로 진화했을 거야..’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앗, 그렇다면 이건 좀 곤란한데..! 영화에 사용된 기술적인 내용이나 혹은 사회적 문제를 영화 속 유인원들에 은유적으로 비유하여 하나의 담론으로 풀어내는 것은 뭐 상관없지만, 과학적 사실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비판 없이 사실로 믿게 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사람과 동물의 인지능력 차이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은 <인간의 혈통>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사람을 단지 ‘커다란 뇌를 갖고 있는 원숭이’ 정도로 여겼다. 그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인지능력들의 기본적인 형태를 모든 동물에게서 발견할 수 있으며, 사람은 그저 운 좋게 좀 더 큰 용량의 뇌를 가진 덕분에, 그러한 능력을 갖게 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운 좋게? 도대체 사람과 동물의 인지능력이 어느 정도 차이가 있기에 이것들이 다윈이 상상한 대로 그저 ‘운 좋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일까?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진화론자들이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라고 여기고 있는 침팬지를 포함한 모든 동물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인지능력의 차이에는 도저히 우연히 생겼다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상상 이상의 엄청난 간격이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영화에서 주인공 침팬지 ‘시저’가 관객의 시선을 고정 시키는데 한 몫을 단단히 하는 아주 중요한 한 장면이 있는데, 바로 인간의 언어를 말하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비록 ‘No'라는 한 단어 이었을지라도 영화를 보는 관객은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강렬한 효과를 끌어내는지.. 왜냐하면 바로 그 언어야 말로 인간을 동물과 구별 짓는 인지능력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엄청난 힘이 있는 능력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다른 동물은 물론이고 침팬지조차도 인간의 것과 비교될 수 있는 그런 언어능력은 없다. 오직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이 탁월한 언어능력은 가령 원하는 정보를 무한 반복하여 집어넣어 표현할 수 있고,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범주를 구별하여 인식할 수 있는 등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셰익스피어를 읽어 보라.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을 들어 보라. 지금까지 인간과 침팬지의 언어를 연구하여 얻어낸 중요한 결론이 있다면,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개념들을 습득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보통 3살을 넘어 가면서부터 배우게 되는 내용부터는 침팬지가 결코 따라 올 수가 없으며 그때부터 점점 인간과 침팬지의 언어 능력이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 짓는 탁월한 인지능력 가운데 또 하나는 인간에게서만 관찰되는 복잡한 사회 인지능력이다. 가령 18개월 된 어린 아이도 ‘감정이입’의 능력이 있어서 자신의 인형이 상처를 입는 것을 보면 가서 위로해 주거나 고쳐 주는 등의 행동을 한다. 또한 6개월밖에 안 된 아이도 이미 마음속에 사물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심리적 표상을 갖고 여기에 긍정 혹은 부정의 값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마치 여러 개의 마주 댄 거울의 상이 겹쳐 보이듯이 속에 겹겹이 끼워진 여러 개의 심적 상태를 가질 수 있기도 하다. 가령, “A는 B의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야한다는 것을 C가 믿고 있다고 D가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거나, 실제 행동으로 관찰되는 상황을 가령 “선생님을 쳐다보는 A를 바라보는 B를 응시하는 C를 관찰할 수 있다.”는 식으로 기술해 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성에 기초한 인간의 심층적인 인지능력은 동물에게서는 그와 비슷한 것조차도 찾기가 어렵다. 더 나아가 동물에게는 소위 ‘지식’의 심적 표상이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관찰되는 형태의 ‘가르침’의 개념이 존재할 수 없다. 동물에게서 간혹 관찰되는 ‘가르침’과 유사한 행동은 대부분 한 가지 목적을 갖고 있으며 ‘적응’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인간의 ‘가르침’은 제한이 없는 많은 목표를 향한 광범위한 영역에 적합한 가르침이다. 
     

    인간과 동물의 뇌, 그 구조적 차이점

     

    이제 인간의 뇌는 동물과 어떻게 다른지 잠시 살펴보자. 신경과학자들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인간의 뇌는 다윈이 말한 대로 다른 포유동물의 뇌와 기본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이에 힘입어 인간의 뇌를 보다 미세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인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즉, 사람의 뇌는 침팬지를 포함한 다른 포유동물의 뇌와는 달리 훨씬 복잡한 신경 연결망으로 엮여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언어와 연관된 부위나, 감정이입과 죄책감 등 사회적 정서와 연관된 뇌 부위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영화에서 한 과학자가 치매 치료제로 개발한 약을 침팬지에게 주사함으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능을 획득하고 그 결과 침팬지가 인간처럼 도구를 사용하게 될 뿐만 아니라 논리 및 언어 능력을 얻게 되는 설정은 영화를 재미있게 끌어가기 위한 스토리 전개에는 필요할지 몰라도, 현실적으로 그런 약은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앞으로도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영화 속의 그 약은 필경 신경 세포의 재생 및 성장을 촉진 시키는 약일 가능성이 높은데,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바, 뇌 속의 신경 세포는 단순히 그 양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망을 형성하느냐에 따라 그 기능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이때 연결망은 어떤 선행된 프로그램을 따라 기초 회로가 형성되어 있어야 하고 그 바탕 위에 반복적인 학습 및 경험을 통하여 가지치기를 해나가도록 짜여 있다. 따라서 어떤 약이 비록 신경세포의 양이나 가지 수를 증가시키도록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복잡하고 정교한 인지능력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그 위에 이것들을 안내하는 또 다른 절차와 메커니즘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결국 이것은 ‘정보’의 개념으로의 선행 조건을 요구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간의 뇌에는 대략 천억 개의 신경세포가 존재하는데, 이는 자그마치 은하계에 존재하는 별의 숫자와 동일하며, 이들 천억 개의 뇌세포 중 같은 것은 또한 단 하나도 없다! 인간의 뇌를 통하여 흐르고 있는 전기화학적 신호들이 어떻게 지각, 기억, 감정, 사회성과 같은 고차원적인 인지능력으로 전환되어 나타나는지 그 규칙을 해독하기 위해 많은 과학자들이 매달리고 있지만, 그 답의 극히 일부를 밝혀내는 것만도 아직은 너무도 버거운 상태이다. 뇌 속을 흐르는 신경암호들은 종종 디지털 컴퓨터의 기계암호에 비유되곤 한다. 한 계산에 의하면, 뇌의 약 10% 정도만 동시에 작동해도 뇌는 적어도 초당 약 1천조개의 정보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이것은 인간이 만든 가장 우수한 슈퍼컴퓨터보다 1,000배가 넘는 엄청난 능력이다.

     

    침팬지가 우연히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망상

     

    지난 2001년에 언론에 크게 보도되어 잘 알려진 것처럼 인간의 DNA는 총 30억 개 정도의 염기로 이루어져 있다. 흔히들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적 차이를 DNA 염기배열만 액면 그대로 단순 비교하여 약 2%, 즉 6천만 개의 염기에 해당되는 정도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백질을 만드는 염기배열 가운데서도 염기치환이 일어난 것만을 선택적으로 골라 만들어진 수치이며,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임이 계속 지적되고 있다. 여기에다가 단백질을 만드는 DNA 염기 배열 이외에 아직 그 기능이 밝혀져 있지 않은 다른 DNA 영역까지 고려하게 된다면, 인간과 침팬지 사이의 염기서열의 차이점은 10% 이상으로 벌어지게 될 것이다. 과학자들이 보다 정밀히 연구할수록 소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어떤 가능한 유전적인 원인 또한 생각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아내고 있다.

     

       그렇다 해도 여기서 잠시 계산을 해보고 넘어가자. 진화론자인 할데인(Haldane)은, 자연선택의 과정을 통해 한 개체군 내에서 어떤 돌연변이를 고착하는 데 드는 높은 유전적 비용을 고려해 볼 때, 인간의 유전자 내에 약 천 개의 유익한 돌연변이를 고착시키는 데는 대략 600만 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수학적으로 계산한 바 있다. 그렇다면 1개의 유전자를 형성하는 데 평균 2천 개의 염기가 요구된다고 가정했을 때, 천 개의 유익한 돌연변이는 적어도 2백만 개의 염기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200만 개의 염기마다 600만 년이 걸린다면, 어떤 공통조상으로부터 인간과 침팬지가 갈라져 나와 그들의 DNA 중 2% 즉, 6천만 개의 염기 배열의 차이를 만드는 데는 아무리 ‘운이 좋아도’ 적어도 1억 8천만년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진화론자가 말하는 인류가 유인원으로부터 분리되어 진화되었다고 보는 200~400만 년의 시간과는 적게는 45배에서 많게는 90배가량의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나타나는 너무나도 현격한 인지능력과 또 이를 뒷받침할만한 뇌구조의 차이를 보여 주기 위해서 도대체 얼마만큼의 유전적 차이가 요구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실 아무도 모르고 있다.

     

       생물의 우연 발생적 존재의 기원을 받아들이고자 할 때, 더 많은 유전자는 당연히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물은 단순히 유전자 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것들이 어떤 장소에서 어떤 순서로 발현되느냐를 지정하는 단계적 명령계통도, 즉 소프트웨어가 또한 필요하다! 뇌를 구성하는 신경세포들 역시 소위 해부학적 ‘회로’의 구성이 절대적이다. 이를 지시하는 어떤 상위 계통의 명령체계가 필요하고, 이것들이 돌연변이와 자연선택만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상상할 수 없는 긴 시간과 가정이 요구된다. 여기서 잠시 인간이 만든 컴퓨터를 생각해 보자. 컴퓨터는 결국 하드웨어도 중요하지만 잘 만들어진 소프트웨어들이 이상 없이 잘 구동이 되어줄 때라야 비로소 제 기능을 다한다. 컴퓨터를 사용해 보면 세상의 어느 누구라도 이것이 매우 정교한 지적 설계의 산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다. 뇌라는 하드웨어적 구조의 존재도 우연히 이루어졌다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낮은 확률에 기댄 막연한 믿음을 필요로 하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놀랍도록 정교한 소프트웨어적 인지기능의 발현과 그것들을 나타내주는 문법(syntax)의 작동은 더더욱 우연 발생적 기원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 슈퍼컴퓨터를 초월하는 인간의 뇌의 효과적인 정보처리 능력을 볼 때, 더구나 언어, 의식, 창의성을 가능케 하는 인간만의 놀라운 인지기능을 생각해 볼 때, 이 모든 것들이 발현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는 뇌의 존재야말로 그 어느 것보다도 지적 설계론적 기원, 즉 지적인 존재인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음을 강하게 증거 한다. 침팬지가 인간이 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이다! 미안하다, ‘시저~’!

     

    하나님의 형상과 창조 질서

     

    성경에 따르면 사람은 분명 다른 동물과는 구별되게 창조 되었다. 그 차이점이 유전자 상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현재 사람이 갖고 있는 총 DNA 염기의 수 30억 중에 그것들이 우리의 세포 내에서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우리가 어렴풋이나마 아는 것은 고작 2% 미만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98% 이상은 아직 베일에 덮여 있다. 즉, 인간 유전자 지도를 책으로 비유 한다면, 책의 글자를 읽을 줄은 알았지만, 읽고도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는 단지 2% 정도 밖에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제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유전학의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면 될 수록 그 새로운 결과들이 진화를 증거 하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체의 설계 가능성을 더 뒷받침하게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새로운 증거들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야 비로소 사람들이 창조주의 살아 계심을 고백하게 될 것인가?

     

       사실 바울이 말한 “그분의 보이지 아니 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세상의 창조 이후로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 (롬 1:20)”는 말씀처럼 인간의 육체만 자세히 들여다보더라도 그 놀라운 창조주의 설계 솜씨를 발견하지만,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이 또한 창조주를 증거 한다. 성경은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 사람들이(창 1:27)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고 말한다(창 2:7). 더 나아가 “사람의 혼은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고 목이 탄다 (시 42:1-2)”고 말한다. 물질로부터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비물질적 영혼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또한 그 분의 설계를 강력히 증거 한다.

     

       영화 속에서 약물을 개발하는 과학자 ‘윌’의 여자 친구 ‘캐롤라인’이 몇 번인가 이런 말을 한다. “윌, 자연의 법칙을 거슬려선 않되.” 과학은 잘 다스리면 인간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도구가 되지만, 인간의 탐욕과 오만함이 결합되면 치명적인 재난을 불러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바로 그런 것이 SF 영화의 단골 소재가 아니던가! 그러나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도구로서의 과학조차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법칙을 설계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잊는다면 그것은 현대의 바벨탑일 뿐이다! 캐롤라인의 말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윌,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법칙을 거슬려선 안 돼!!”

     

    글쓴이: 김정훈 (연세대 의대 교수,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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