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정말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성도를 이룬다. 오랜 신앙의 연륜이 깊게 묻어 나오는 분도 계신가 하면, 이제 갓 복음의 꿀맛 - 아니, 매실 맛이던가? - 을 느끼며 하루하루가 새로운 분도 계시다. 전에는 모르던 신앙의 교리의 기준이 분명하게 서 가는 모습에서 성장의 기쁨을 느끼는 분도 있고, 성도들끼리 어울려 같이 땀 흘려 봉사를 하거나, 한 마음으로 기도를 나누면서 주의 백성이 된 기쁨을 즐거워하는 분도 있다.
세상에도 모임은 참으로 많다. 특정한 목적을 같이 이루기 위하여, 혹은 취미를 위하여, 혹은 같은 연고라는 이유로, 아니면 단순 친목을 위하여, 기타 등등.. 이러한 모임들은 그 모임의 성격에 따라 어느 특정 요소들이 잘 이루어지면 성공적인 모임이 된다. 예를 들어 학술 모임은 열띤 지적 활동을 나눔으로, 봉사 모임은 열심히 시간과 자신의 재능을 나누어 줌으로, 그것이 친목 모임이라면 즐거운 놀이를 같이 공유함으로 등등.. 학술 모임에는 놀이가 없어도, 봉사 모임에는 지적 논쟁이 없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다르다. 교회 안에는 예리한 분별력을 요구하는 확신에 찬 말씀 선포와 성도들의 뜨거운 말씀의 상고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그 어느 모임 이상으로 봉사와 구제가 그 안에 넘쳐 나야 하고, 때로는 한데 어울려 신나게 놀기도 해야 하는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 모임’이 요구된다.
이렇게 다양한 요구가 한데 조화를 이루며 잘 이뤄져 갈 수 있기 위해서는, 성도들 간에 서로 돌보아 주며 서로 세워주며 서로 인정해 주며 서로 권면하며, 때로는 서로 지적도 하여 줄 수 있는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봉사하고 구제를 같이 나눌 때에 누가 ‘사랑’을 문제 삼겠으며, 신나게 공을 차며 게임을 하며 혹은 모여 수다를 떨며 친목을 나눌 때에 누가 ‘사랑’에 대하여 불평 하겠는가? 교회 안에서 ‘사랑’이 가장 어려울 때는, 말씀의 해석을 놓고 다른 견해와 다른 주장이 서로 엇갈릴 때일 것이다. ‘종합선물세트 모임’과도 같은 교회 안에서 분명 말씀의 상고와 그에 대한 나눔이 성도들 간에 열심히 오가는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 요소 중의 하나일 터인데, 자칫하면 ‘사랑’을 놓치게 되는 듯한 오해가 따를 일을 누가 쉽게 하겠는가? 더군다나 성도들 간에 성경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 각기 다를 경우, 누군가가 성경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드러나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면, 자기의 이해 수준에 맞게 나름 ‘기쁨’으로 성경을 나누던 성도들에게 그것은 자칫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기를 꺾고 마는 일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니 누가 그 일을 선뜻 나서서 하려고 하겠는가?
성도들이 마음속에 이런 두려움을 품고 있다면, 그 교회에서는 결국 성경을 놓고 깊은 묵상과 통찰을 나누는 일이 성도들 간에 매우 위축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좋은 말만 귀에 좋은’ 얇은 귀를 가진 성도들만이 넘쳐 날 것이며, 달란트의 차이로 확실히 말씀에 남다른 통찰력과 소명을 받은 성도들이 있다면 그 또한 깨달은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해야 할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그저 성도들이 누리는 깊이 없는 ‘기쁨’의 말씀 나눔을 적당한 거리에서 ‘불편한 미소’를 머금고 바라만 보아야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이것이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인가?
바울은 본래 당대의 세상학문은 물론이요 율법과 신학에도 출중한 자이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오히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니게 만드는 도구로 쓰임 받을 뿐이었다. 하지만 바울이 다마스쿠스 근방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어떻게 변했는가? 그의 학문은 그를 당대 최고의 성경 주석가로 변모 시켰으며, 그를 소위 ‘바울신학’의 창시자가 되게 하였으며, 그를 이방인의 복음 전도자로 세워 특별히 세상학문에 능통한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능히 변론을 하며 복음의 당위성을 설파할 수 있게 하였다. 무엇이 차이점인가? 바울이 지닌 뛰어난 학문 위에 전에는 없던 ‘생명의 법’이 더하여 졌기 때문이다. 이제야 비로소 그가 지녔던 학문이 빛을 발하며 전에는 ‘죽이던 자’에서 이제는 ‘살리는 자’로 180도 탈바꿈을 하게 된 것이다.
학문 - 혹은 신학 - 이 나쁜 것이 아니다. 지식 자체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누구의 손에 붙들려 어떻게 사용되느냐가 중요하다. 지식과 학문이 제대로 올바르게 ‘생명의 법’을 덧입는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복음의 도구로 사용되어 질 수 있다. 아래 <성도컬럼>에 마침 유준호 형제님이 아주 좋은 한 예를 소개해 주었다. 고향에 돌아간 어느 신학생은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배운 ‘어줍쟎은 신학’을 전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성도들의 사기를 꺾고 은혜가 떠나가게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바울이 그 신학생이었다면 어떤 상황이 연출되었을까 상상해 보자. 그 또한 필경 현란한 신학과 지식을 필요한 만큼은 전했을 것이다. 율법과 은혜의 관계에 대하여 설법을 했을지도 모른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구원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전달하려 애썼을지도 모른다. 필경 그 마을의 성도들은 바울이 전하는 새로운 성경 이해의 깊이에 감동을 받았을 것이고, 이제까지 자기들이 은혜 받았다고 여기며 알던 바가 전부가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경륜과 사랑의 깊이에 대한 뜨거운 감격을 얻었을 것이다. 무엇이 차이점인 것일까? 그 신학생에게는 지식만 있었지, ‘생명의 법’이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바울은 그 깊은 지식 위에 더하여 다마스쿠스 근방에서 만난 살아 계신 예수님의 영혼을 향한 뜨거운 심장이 그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소아시아 지방의 교회들을 방문하거나 편지로 문안을 하면서, 그 교회마다 안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하여 때로는 ‘판단’을 때로는 ‘권고’를 때로는 ‘질책’을 전하여 주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거짓된 복음이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할 경우에는 분별력을 세워 주었으며, 다양한 은사들로 혼란을 겪을 때는 우리가 먼저 사모해야 할 우선순위를 정해주기도 하였다. 더러는 의견의 충돌로 바바나와 결별을 하며 길을 가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불리던 베드로를 책망하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어떨 때는 자신의 족보와 학력과 경력을 화려하게 자랑삼아 늘어놓으며 자신의 사도직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바울의 이러한 발언과 태도와 행동은 분명 주변 사람들에게 압박감을 주거나, 논쟁을 불러 일으킬만한 행동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바울의 이러한 모습을 발견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바울을 비난하지 않는다. 아니 비난은커녕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하며 그의 말들로 위로와 감동을 받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즐겨 읽는 바울의 서신은 신약 성경의 약 절반에 해당될 정도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온통 그의 ‘판단’과‘지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럼 바울은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어서 논쟁을 즐기고 다른 성도들의 잘못된 성경 이해를 판단하고 지적하여 바로 잡으려고 들었는가?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들 중에 우두머리라고 표현 할 만큼 (딤전 1:15)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만일 바울이 그저 자신의 겸손함에 집착하여 성도들과의 논쟁을 꺼리고, 각자의 성도들이 그저 자신이 임의로 성경을 해석하여 얻은 작은‘기쁨’의 수준에 만족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손에 신약 성경의 절반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자신 안에서 싸우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으로 인하여 본인 자신은 괴로워할지라도 (롬 7:21-25), 다른 성도들이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잘못 이해하거나 그 진리에 관한 지식을 남용하는 모습을 참지 못하고 ‘지적’해 내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는 더 이상 같은 종류의 논쟁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 아닌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의‘종합선물세트 모임’과도 같은 교회 안에서 그 어느 모임 못지않게 말씀의 상고와 그에 대한 나눔이 성도들 간에 열심히 오가야 한다. 다만 누구라도 깨달은 말씀을 나눌 때는 바울이 교회에 편지를 썼던 것처럼 자신의 주장 가운데 ‘생명의 법’이 함께 들어 있는지를 뒤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나, 목적이 어긋난 ‘판단’은 금물이다. 전하는 말 가운데 생명이 흐르고 있다면 결코 그 말이 추상적인 관념의 나열이 될 리가 없다. 듣는 자 또한 진정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목마른 자라면, 그 말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인하여 즐거워하지, 그 말씀을 전해 준 자를 두려워할 리가 만무하다. 우리는 서로가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라도 서로가 서로를 세워 줄 수 있다. 반드시 학문이 혹은 신학적 지식이 많아야 성경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왜 서로의 다르게 느낀 바를 말하기를 주저하는가? 그날 당장 납득이 안 되면 다음 날 이해를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다음 날도 이해가 안 되면, 두었다가 웃으며 나중에 천국 가서 같이 확인해 보자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교회 안에서 서로의 다르게 느낀 바를 말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가려 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말씀을 상고하고 나누는 그 어떤 모임도 교회 안의 다른 많은 모임들과 같이 ‘사랑’ 안에서 이뤄질 수 있다. 아니,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단순히 나는 부족한 사람이니까 가능하면 드러내기를 꺼려하고, 형제를 ‘지적’ 하거나 ‘판단’하면 논쟁이 되어 덕이 안 될 수 있으므로 가능하면 입을 다물고, 학문과 지식은 상대방을 기죽이고 무미건조한 관념의 유희로 전락할 소지가 있으므로 입도 뻥끗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랑’은, 내가 부족한 사람이어도 그 부족한 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나의 생각을 드러내고, 비록 다소간의 원치 않는 논쟁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능히 서로를 향한 존경과 예의와 인내로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판단’을 나누고, 필요 하다면 학문과 지식 또한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되도록 아낌없이 사용하는 모습 가운데, 더 풍성해 진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편지하기를, “내가 이것을 기도하노니 곧 너희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판단에서 여전히 더욱 더 풍성해지고, 너희가 뛰어난 것들을 입증하며 그리스도의 날까지 성실하고 실족거리가 없는 사람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들로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이 되기를 구하노라”(빌 1:9-11) 라고 하였다.
그렇다! 사랑은 지식과 모든 판단 안에서 오히려 더욱 더 풍성해질 수 있는 것이다 (Your love may abound yet more and more in knowledge and in all judgm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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