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눈물이 그립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울음이 많은 나라일 수밖에 없습니다. 6.25를 경험한 우리세대는 특별히 울음이 많은 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쟁의 잿더미를 걷어내고 길을 닦고 기둥을 세워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후에도 나라 안 구석구석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정치는 정치대로 울고 교육은 교육대로 울고 경제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울었습니다. 종교조차도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들이 남아있어 지금 우리들이 듣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 어려웠던 시절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흘렸던 우리 부모님들의 눈물은 아마 항아리에 받아 담았어도 가득차고 넘쳤을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동네의 골목마다엔 어느 골목엘 들어가도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른들도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큰 소리로 슬피 우는 울음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인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팔도강산은 차라리 초목들도 사람들의 눈물로 푸르게 자랐다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산천초목조차도 사람들이 흘린 눈물로 자랐다 할 정도로 눈물 많은 땅이었으니 그 땅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한국인은 눈물 속에서 핀 사랑으로 잉태되어 눈물 속에서 태어나 자란 눈물의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그 옛날에는 어른들이 부부싸움을 한 후 어머니가 돌아앉아 우는 울음소리를 자주 들고 우리는 자랐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남편의 학대로 말미암아 견딜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가슴속에 피멍이 들도록 울음소리를 참아내며 흘린 우리들 어머니들의 피눈물 때문에 한국의 남편들은 늦게나마 깨닫고 조강지처에게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그런 울음소리들이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건 왜 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생전 부부싸움도 안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 보다 사랑의 표현도 더 많이 하지만 부부싸움도 더 많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미국 어머니들은 부부싸움을 한 후 울지 않는 것일까 궁금했습니다. 그 까닭도 명백히 알게 되었습니다. 싸우고 나서 울 정도라면 차라리 헤어지고 말지 울기는 왜 우냐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아무리 심하게 부부싸움을 하였어도 눈물로 풀어 버리고 다시 살았습니다. 그러나 미국 사람들은 울음으로 푸는 대신 헤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사회가 왜 오늘날 이처럼 살벌한 사회가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그것은 눈물이 마른 사회이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눈물 없이 자란 아이들의 마음이 어찌 연한 순 같을 수 있겠습니까? 전차표 한 장을 마련해 주지 못해서 피눈물 흘리는 부모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이 냉장고에 가득 찬 음식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어떻게 알 턱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자라던 아이들이 더구나 부모들의 무정한 이혼으로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버림받게 되었으니 부모의 사랑에 대한 감격은커녕 부모에 대한 원한의 칼날이 시퍼렇게 서게 될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미국사회가 그렇게 눈물 마른 세상으로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었으니 사막에서 자라는 식물처럼 거친 모양이 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오늘날 마침내는 부모의 가슴에 장총을 들이대고 있고 거리에서는 권총 강도가 되고 있는 것이 오늘 미국사회의 눈물 마른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도 정신들을 못 차리고 미국의 TV뉴스는 권총 강도소식부터 전해주고 드라마는 총질의 연속이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조금도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제 큰 아이가 총기 난동사건이 벌어 졌던 그 시간 바로 옆 건물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아이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너무 소름끼치는 일이었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만물을 지으실 때 다른 모든 것들과는 달리 사람에게는 눈물이라는 것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주만물 가운데 사람처럼 울 수 있는 다른 존재는 없습니다. 짐승들도 눈물을 흘리며 우는 일이 있다지만 그러나 사람의 그것과 같지는 않습니다. 원숭이가 사람처럼 통곡을 하며 우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소도 운다고는 하지만 사람처럼 통곡하며 울지는 못합니다.
사람의 눈물이란 그 마음의 때를 닦아내는 데 쓰라고 만들어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특별히 제조해 주신 클리너일 것입니다. 사람은 눈물을 흘려야 그 마음에 묻은 때가 닦여집니다. 마음에 묻은 때를 자주 닦아내어야 사랑의 샘물이 더 깊어지는 법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심령이 상한 사람을 찾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까닭은 심령이 상한 사람이라야 눈물이 많겠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그렇다면 종교란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마른 들판의 백성들을 보시고 목자 없이 헤매는 양 무리를 보는 것 같아 자주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설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설교는 바로 이 예수님의 눈물 속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눈물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육신의 배가 너무 기름진 나머지 그만 영혼의 눈물샘이 막힌 것일까요? 미국에서는 거지들 초차 마약을 사 피울 정도로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합니다. 거지들조차 마약을 사 피울 수 있을 정도로 부자 나라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이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는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라. 내가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면서 네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계시록 3장17절)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히려 "상한 영"을 찾으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신다.”하셨습니다.(시편51편17절).
지금 이 지구촌은 미국만 눈물이 마른 것이 아닙니다. 한국도 구라파도 대서양도 태평양도 지구촌 전체가 눈물에 목이 말라 사랑이 증발해 버린 삶의 불모지 같은 사막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이 시대를 위하여 울어 줄 수 있을까요? 누가 이 시대 사람들의 사막 같이 메마른 눈에 다시 눈물샘을 터트려 멸망을 향해 벼랑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는 이 시대를 위해 울음을 울 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시대 최대의 비극은 교회 강단에서조차 웃음소리는 풍부한데 울음소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 예수님의 눈물이 그리워집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통회하는 심정으로 울부짖고 있는 “예레미아”의 음성을 듣고 있는 듯 하는 말씀들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시는 그 뜨거운 눈물의 온도를 오늘도 가슴으로 느끼고 왔습니다. 아직까지 그 찌릿한 전율을 느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어찌나 감격스러운지~~~~
주님 감사합니다.
2012년 12월 9일 유 용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