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줍음과 뻔뻔스러움
사랑은 수줍음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수줍음에서 나와 수줍은 얼굴을 하고 수줍게 다가와 수줍은 손길을 내밀고 수줍음에 떨리는 입술을 열어 수줍게 사랑을 속삭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어느 시대에나 수줍은 모습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사람만이 사랑할 때 수줍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인들은 꽃의 수줍음을 알고 짐승들까지도 서로 사랑할 때는 수줍어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나봅니다. 꽃이 사람들의 눈에 안 띠는 사이에 봉오리를 터뜨리는 까닭은 꽃들이 수줍어하기 때문이라고 시인들은 노래했으니까요.
소월은 어느 누구보다도 진달래꽃의 수줍음을 잘 아는 시인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는 님이 떠나시는 길 위에 진달래꽃 색깔보다 더 짙은 수줍음으로 진달래꽃을 따다가 뿌려 드리겠노라고 노래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인들은 이렇게 꽃의 수줍음만 알아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인들은 나뭇잎 하나에도 수줍음이 있음을 알아보고 노래하곤 했습니다. 시인 박인환은 그는 누구보다도 나뭇잎의 수줍음을 아프도록 겪은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는 우리들 가슴을 아프도록 젖게 하더니 어느 여가수는 수줍은 목소리로 수줍게 노래했습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시인들은 또 한 마리의 새와 철없는 짐승들에게도 수줍음이 있음을 노래합니다. 서정주는 가을의 찬 국화꽃 한 송이의 수줍음과 함께 한 마리 소쩍새에게도 수줍음이 있음을 알아챈 시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이렇게 노래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세상 만물에는 다 수줍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흐르는 물에도, 들에도, 산에도, 볼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한 점에도, 우주 삼라만상에는 어디에든지 무엇에든지 다 수줍음이 있었음을 느끼게 합니다.
수줍음이란 부끄러움입니다. 꽃이 수줍어한다는 것은 꽃이 부끄러워한다는 것이요, 나뭇잎이 수줍어한다는 것은 나뭇잎이 부끄러워한다는 것이며, 새 한 마리가 수줍어한다는 것은 새 한 마리가 부끄러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어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꽃과 나뭇잎과 새 한 마리는 무엇을 어려워하였을까?
당연히 그들은 하늘을 어려워했던 것입니다. 꽃 한 송이도 그 앞에 모셔 서기를 어려워하는 하늘! 잎 새에 이는 한 점 바람조차도 그 앞에 모셔 서기를 어려워하는 하늘! 새 한 마리마저도 어려워 할 줄 아는 하늘을 어찌 사람 아담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늘을 어려워 할 줄 모를 수 있었겠습니까?
참된 사랑은 수줍음에서 나옵니다. 소녀가 까닭 없이 수줍어하고 소년이 또한 까닭 없이 부끄러워한다면 이로써 우리들은 그네들이 사랑에 빠진 줄을 알아차립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노래도 수줍은 노래를 부릅니다. 비록 대중가요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노래는 수줍습니다. 수줍은 사랑노래가 많이 불리는 시대일수록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뻔뻔스러운 것은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직 뻔뻔스러운 얼굴을 한 꽃 한 송이를 본 일이 없습니다. 나는 아직 뻔뻔스러운 얼굴을 한 나뭇잎을 본 일도 없습니다. 나는 아직 뻔뻔스러운 얼굴을 한 새 한 마리의 얼굴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뻔뻔스러운 얼굴을 한 어린아이의 얼굴을 본 일도 전혀 없습니다.
뻔뻔스럽다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며, 어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은혜도 모르고 감사도 모른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앞에 모셔 서기를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뻔뻔스러운 얼굴에서는 결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 같은 얼굴들을 날마다 TV 화면에서 컴퓨터 모니터에서 잡지나 영화에서 어디서든지 보고 듣고 길거리에서 바람 스쳐 지나가듯 같이 섞여 보고 듣고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수줍음이 없는 뻔뻔한 TV 화면과 수줍음이 없는 뻔뻔한 컴퓨터모니터와 수줍음이 없는 신문 보도와 수줍음이 없는 노래들과 광고들과 라디오방송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들 자신들도 어느 듯 수줍음을 모르는 지존파나 막가파들로 훈련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
사랑에도 얼굴이 있다면 그것은 수줍은 얼굴이 맞습니다. 사랑은 수줍음에서 나오는 게 맞습니다. 수줍어 할 줄 모르는 데서는 참된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수줍음은 하늘 두려운 줄 아는 것이며 그래서 그 앞에 모셔 서기를 어려워합니다. 뻔뻔한 얼굴에서는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돌이라도 수줍은 얼굴에서라야 사랑이 나옵니다.
인류는 지금이라도 역사의 방향을 하늘 두려운 줄 아는 시대로 되 돌려야만 합니다. 거기에 이 시대의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아들들과 딸들의 얼굴에 시급히 수줍음을 회복 시켜 주어야 합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 이혼선언문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무슨 훈장 치켜들듯 하고 있는 이 시대의 소위 현대인들이라는 그들의 얼굴에 수줍음을 회복 시켜 주어야 할 것입니다.
신문들은 수줍은 기사들로 가득 채워져야 하고 TV 화면들도 그렇게 수줍어 할 줄 알게 되어야 하며 거리의 좌판에 범람하고 있는 벌거숭이 잡지들과 비디오들과 라디오 방송들도 수줍음이 가득 찬 내용과 프로들로 꾸며져야 하며 패션도 수줍은 패션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현대인은 이름 없는 들꽃 한 송이에게 다가가 수줍음을 배우고 철없는 산짐승 한 마리에게 다가가 그들의 수줍음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꽃들과 나뭇잎들과 새 한 마리와 짐승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지어주신 그 지음 받은 그대로 지금도 하늘 어려운 줄을 알아 수줍은 얼굴로 살아들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인지 잠이 오지 않아 어제 설교하신 말씀을 다시 들었습니다. 처절하게 울부짖는 예레미아 대언자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또한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찌 살아야 하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저도 이제는 손가락이 뻣뻣해지기 시작하는군요. 손가락도 글쓰기에 수줍음을 타는 가 봅니다.
2013년 8월 19일(월) 유 용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