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꽃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지루하게 길었습니다. 장마가 7월 한 달 동안이나 오락가락 이어지더니 장마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기다리고 있던 무더위가 8월 한 달을 무섭게 달구었습니다. 그러나 계절의 바뀜이야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8월의 달력을 떼어내자 벌써 아침저녁 바람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지난 두 달 동안 비도 왔고 너무 더워서 하지 못했던 운동을 하리라 마음먹고 가벼운 복장으로 동네 뒷산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우리 동네 뒷산 길은 내가 이곳에 살기 시작한 이후 계속 올라 다닌 길입니다. 이제는 낯이 익을 대로 익어서 오름세며 내림세가 한 눈에 환합니다. 길목마다 서 있는 나무들의 크기며, 심지어 풀 한 포기의 모습까지도 눈에 익어 이름이라도 지어 부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지난 두 달 동안 못 보았다고 여간 새롭게 반기는 것 같지 않습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길가의 이름 모를 잡풀들은 또 그것들 나름대로 모두가 반갑다고 손짓하고 어찌 그리 오랫동안 뜸하였느냐며 반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무나 풀들도 모두가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하긴 꽃과 나무와 풀들이 거기서거기지 무슨 특별나게 다를 게 있으랴 만은 자연이 아름답다 함은 꽃과 나무와 풀들과 바위덩이까지 포함해서 이르는 말이기에, 이제 막 긴 여름의 무더위를 견뎌내고 가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산 전체가 한 덩어리의 꽃밭과도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한 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걸으며 뜻밖에 문득 깨닫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니, 오랫동안 한 마디 말로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했던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어떤 의미를 이제야 비로소 한 마디 말로 정리할 수 있게 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는 왜 문학을 좋아하는가?”라는 것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정확하게 이끌어내지 못하였던 것처럼 나는 왜 문학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정확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왜 문학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과는 달리 삶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기에 그 답은 이미 내 속에서 정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문학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내 속에 없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좋아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얄궂게도 내 속에 있는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를 한 마디 말로 속 시원하게 표현해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연인 이었던 아내가 “왜 나를 좋아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딱히 답할 말을 찾지 못하여 그건~그건~ 하였듯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답을 한마디 말로 정리하여 끄집어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이런저런 단편적인 답들을 끄집어 내 보기는 하였지만 만족한 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가장 만족한 답을 오늘 오랜만에 뒷산에 오르다가 꽃처럼 아름다운 산의 모습을 보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떠오르듯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닌 문학은 나의 희망사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나에게 문학이란 참으로 희망사항이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사랑해온 문학이란, 남의 글을 통해서 읽은 많은 문학작품들과 그리고 마침내 내 손으로 쓴 이런저런 글들의 모든 내용들이 한마디로 나의 희망사항들이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내가 쓴 글들은 모두가 나의 희망사항들일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시겠지만 나는 결코 내가 쓴 글 속에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글 속에 있는 나의 모습은 현실의 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 희망사항 속의 나 일 뿐이었습니다. 현실은 이러한데 그런 현실의 내가 아닌 희망사항속의 저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 나의 모든 글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오, 오, 참으로 그랬었구나!
나의 현실이 이렇다는 것은 무엇이며 글 속에서 바라는 바 희망사항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한 마디로 현실의 나는 결코 꽃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오, 오, 맞았어. 바로 그것이었던 거야!
지금 두어 달 만에 산에 오르며 바라보고 있는 꽃동산 같은 저 자연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나는 결코 저 아름다운 꽃동산처럼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내가 꽃 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구체적인 예로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먹는 모습도 아름답지 못하고 배설하는 모습도 아름답지 못합니다. 나는 성질도 아름답지 못하고 버릇과 습관도 아름답지 못합니다. 나는 생각도 아름답지 못하고 태도도 아름답지 못합니다. 나는 한 번도 만물 앞에서 저 나무들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 본 일도 없습니다. 나는 한시도 내 겉과 속을 가리지 않고는 만물 앞에 나설 수 없을 만큼 추하고 더러운 모습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울 목사님의 말대로 한다면 나는 배설물과 같은 모습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이 같은 사실을 아마 젊은 날부터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노랫말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지어 부른 시였습니다. 즉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문학작품에서나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다 죄 많은 인생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누가 꽃을 가리켜 죄 많은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니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도저히 꽃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노랫말로 희망사항을 노래하고 시를 지어 희망사항을 낭송하는 것이었습니다. 꽃보다 아름답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나도 문학을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해서였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나 자신이 꽃 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 글도 쓰고 다른 사람의 문학작품도 읽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웠다면 온 인류의 죄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어 주셨다는 예수님의 기독교구속의 논리는 성립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데 무엇 때문에 대속의 죽음까지 죽어야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꽃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학도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식 문화의 단어로 말하면 문학은 나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써왔던 이런저런 글들도 모두가 나의 희망사항이었으며 하나님께 올리는 나의 간절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
2013년 9월21일(토) 유 용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