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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선의 함정조회수 : 8062
    • 작성자 : 김대용
    • 작성일 : 2014년 1월 8일 14시 48분 17초
  • 위선(僞善)은 참으로 집요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집요함이 마치 그림자와 같습니다. 아무리 떨쳐내려고 달음질을 해도 전혀 거리가 벌어지지 않고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아옵니다. 잠시 마음의 긴장을 풀면 어느덧 위선은 사람의 내면 깊숙이 둥지를 틀고 곧바로 증식을 위한 세포분열을 시작합니다.

    위선과 관련된 성경 구절은 신구약을 통틀어 모두 42번 등장합니다. 위선, 위선자들에 해당하는 킹제임스 성경의 단어는 hypocrite, hypocrites, hypocritical, hypocrisy, hypocrisies, dissemblers, dissembled, dissimulation 등이며 특히, 신약성경에 27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위선(僞善) 관련 구절들 중에 마태복음 7장 1~5절과 누가복음 6장 41~42절에 기록된 동일한 예수님의 교훈을 중심으로 성경이 위선과 위선자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으며 위선이 사람의 내면에 파놓은 은밀한 함정은 무엇인지 살펴보려 합니다.

    위선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가로막는 사탄의 무기 중에도 강한 위력을 자랑하는 중화기에 속합니다. 매우 선한 사람조차도 한순간에 위선의 늪에 빠질 수 있고 복음 사역에 매진하던 교회나 단체가 위선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거나 심지어 와해하기도 합니다. 개인의 삶을 황폐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요. 마치 누룩과 바이러스처럼 강한 전염성을 지니고 있기에(눅12:1) 삽시간에 대중들을 선동해 위선적 사고와 행동 아래로 헤쳐 모이게 만들어 한 시대를 타락하게 하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합니다.

    먼저 위선의 독특한 기능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심리적 좌절을 경험하게 될 때 또는 외부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경험하게 될 때 문제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타인과 단체 그리고 제도와 시스템 속에서 찾게 합니다. 그런 후에 외부로부터 포착한 문제를 자신의 내면에서 확대 재생산하고 왜곡시켜 집착하게 만듭니다.

    41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또 너 스스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찌 네 형제에게 이르기를, 형제여, 내가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주겠노라, 할 수 있겠느냐?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 뒤에야 네가 분명하게 보고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리라. (눅6:41~42)

    누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가 빠져버린 함정의 특징이 타인의 잘못과 부정적인 면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정확하게 잡아내지만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는 보지 못하는 모순의 극치임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위선자가 집중하는 타인은 우선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가까이에 있는 동역하는 형제/자매일 경우가 많다는 것도 중요한 점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아주 작은 먼지로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생활하는데 큰 지장이 없고 사실 시간이 지나면 눈물 등에 의해 저절로 제거되어 해결될 수 있는 정도의 사안입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속담을 적용해도 무방할 정도의 것으로서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지만 크게 걱정하거나 공론화할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위선자의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어떤가요? 물론 물리적으로 눈 속에 기둥만큼이나 큰 나무인 들보가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비유이기에 그런 관점에서 보면 들보는 눈의 모든 기능을 영구히 상실시키고도 남을 치명적이고 위급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선자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어 감에 있어 어쩔 수 없이 생길 수 있는 부산물과 같은 형제의 눈 속에 작은 티에 대해서는 맹렬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댑니다. 사실 이 정도의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때는 온유하게 문제에 대한 권면의 말을 건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진 사람은 절체절명의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형제를 몰아붙이고 공격하며 급기야 공동체 전체를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통탄할 일은 형제의 눈 속에 미세한 티끌을 놓치지 않는 극도의 예민함이 자신을 성찰하는 것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내면은 이미 파국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는데 아직은 그냥 두어도 괜찮은 형제의 문제에만 집착하는 이 어리석음은 결국 심각한 위기로부터 방치된 자기 자신과 무모한 위선자의 비판의 칼날을 감내해야 하는 형제/자매와 공동체 모두를 영적으로 황폐하게 만들고 맙니다.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할 수 없고 눈 속에 거대한 들보로 막혀 있는 자가 어찌 티끌이 들어간 사람의 눈 속에 바람을 집어넣어 그 부스러기를 제거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누가복음 6장의 위선자는 그런 명백한 자신의 모순과 약점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내겠다고 소리를 칩니다. 내 의견과 관점이 정확하니 내 말을 듣고 내가 제시한 해결책을 따르라고 호언장담하는 위선자는 교회 안의 지체들과 공동체에 커다란 짐이 될 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위선자가 발견한 형제의 눈 속에 티는 당장은 그냥 두어도 되지만 제거해 버린다면 좋을 것이고 분명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커다란 들보를 눈 속에 간직한 위선자가 그 티를 제거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눈 속에 있는 들보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코가 눈인지 입이 눈인지 분간조차 못하는 위선자의 손은 치료하고 해결하는 손이 아니라 흉기로 돌변할 것이 뻔합니다.

    문제를 발견한 것까지는 모르겠으나 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위선자의 좌충우돌하는 일련의 행동은 사사건건 지체들과 공동체에 상처를 주고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됩니다. 아주 작은 위선이라도 사람의 내면에서 싹이 트고 자라는 것을 내버려두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존재로 전락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위선자에게 진리의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해결책을 꺼내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먼저 자신 안에 있는 치명적 문제인 들보에 대해 집중하고 깊이 생각하라는 교훈입니다(마7:3). 자기 내면의 어떤 굽어진 요소들이 거대한 들보라는 문제를 키웠나를 차분하게 생각하고 돌아보는 것이 묵직한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입니다.

    위선자의 눈 속에 들보를 빼내는 첫 시작은 자신의 눈 속에 들보를 정확하게 보고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눅6:42) 눈 속의 티가 점점 커져 시야를 가리는 들보로 성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도 또한, 이미 커질 대로 커진 들보를 제거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부지런히 자신을 말씀의 거울로 비춰보고 자신의 내밀한 마음을 속속들이 성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성급한 행동보다 먼저 깊이 자신의 속 중심까지 돌아보고 생각하는 것이 위선의 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치료제입니다.

    마태복음 7장과 누가복음 6장에 나타난 위선자의 중요한 특징은 자신의 참모습을 정확히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 유대인들 중 가장 대표적인 위선자 그룹이었으며 종교 시스템의 전도사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도 자신의 참모습을 정확히 보지 못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는 마치 회칠한 돌무덤 같도다. 그것은 겉으로는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나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부정한 것으로 가득하도다. (마23:27)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곤경에 빠트릴 함정을 파는 행위가 정당하고 선한 것이라 여겼기에 자신들의 악행을 절대로 고침 받지 못했습니다.

    자! 오늘날 교회 안에 널리 퍼지고 있는 배교의 물결을 보십시오. 이 가증한 물결의 최전방에 서 있는 타락한 기독교계의 리더들은 자신들이 이런 악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이렇게 행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 날 밤 베개를 베고 누워 잠들기 전 저절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그 짧은 몇 분의 시간조차 두려워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져 항구적으로 자신의 양심에 스스로 장애를 입힌 사람들입니다.

    1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시는데 2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딤전4:1~2)

    이 시대가 더욱 빠르게 극악한 배교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는 것은 소수의 기독교 지도자들만이 위선의 독주에 취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대다수의 기독교인들도 이런 심각한 배교현상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무감각하기만 합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은 성경에 선명하게 기록되어있는 '위선의 역사'가 주는 뼈아픈 교훈을 깊이 되새기지 않았기에 발생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착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적어도 현시대의 기독교는 예수님 초림 당시 유대교보다 당연히 하나님 앞에 선하며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보다 오늘의 목사와 신학자들은 월등하고 바르며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같은 실수를 절대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 우리 목사님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이 무모한 믿음은 성경의 교훈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이미 있던 것 즉 그것이 후에 있겠고 이미 행한 것을 후에 다시 행하리니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전혀 없도다. (전1:9)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 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니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 (벧후2:1)

    은사주의로 교인들을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자들로 전락시키고 WCC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도 자신을 복음주의자라 외치며 만담가와 개그맨처럼 우스갯소리로 설교시간을 장식하는 타락한 목사들도 강단에서만큼은 다들 한국교회는 위기라고 말합니다. 그럼 그 위기는 도대체 누가 불러온 것일까요? 각자 다 선한 선생이 되어 한국교회의 위기와 해법을 논하는데 과연 그 위기를 만든 장본인은 누구란 말입니까?

    독주에 진탕 취하고 싶은 알콜중독자도 처음엔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딱 한 잔 만!!'이라는 위선의 구호를 외칩니다. 이처럼 한국교회를 어지럽게 만든 배교의 장본인들이 하나같이 강단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를 걱정하고 위기라고 떠드는 것은 자신의 배교행위에 면죄부를 발행하기 위한 일종의 위선입니다. 가증함으로 가득한 이런 위선적 설교에 취해 교인들은 '그래 아직 우리 교회는 괜찮은 교회야.' '아직 우리 교회는 살아있어.' '그래도 우리 목사님은 이 시대의 모순과 문제를 분별하는 제대로 된 분이군.'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깊은 늪 속에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위선으로 가득 찬 거짓 대언자, 거짓 선생을 구별하는 간단명료한 기준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하고 번지르르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행위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쌓인 구체적인 행동들입니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진리의 길을 택한 행동들이 그의 세월의 앨범 속에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15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니라. 16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변질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변질된 남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마7:15~18)

    위선자의 가장 큰 문제는 정작 자신의 치명적인 문제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겁니다. 더불어 위선자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모순은 자신의 치명적 문제는 제쳐 두고 타인의 작은 잘못과 문제를 교정해보려 달려드는 무모함입니다.

    정리하면, 위선이라는 모순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첫 번째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느냐?(마7:3)”와 “또 너 스스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눅7:42)”의 말씀처럼 먼저 자신의 문제를 감지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실체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영적 장애를 겪게 하는 자신의 치명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나서야 형제/자매의 영적 문제에 도움을 줄 수 있고 교회와 공동체의 문제 해결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 중의 기본 원리입니다.

    성경은 많이 선생이 되길 권장하지 않고(야3:1)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을 밝혀내는 논박의 전문가가 되라고 말씀하지도 않습니다(마7:1~2, 눅6:37). 물론 한편으로 성도는 시대를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성경을 기준으로 바르고 정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고전6:2).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반드시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허물은 없는가, 나에게 부족함은 없는가, 내 생각에 잘못된 부분은 없는가를 항상 먼저 살피는 사람이 지혜롭게 위선의 은밀한 함정을 피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논쟁과 논박에서 승리한 사람보다 한참이나 성숙한 주님 보시기에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오늘도 한없이 부족한 사람인 저에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엄격하고 빈틈없이 자신을 살피고 온유하게 지체를 섬길 수 있는 지혜와 명철함이 임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갈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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