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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억울하십니까?조회수 : 9092
    • 작성자 : 김상진
    • 작성일 : 2014년 2월 25일 16시 21분 17초
  • 어제 일이 있어서 한 후배를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후배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취업한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20대의 젊은 친구입니다. 대화 도중에 이 친구의 어조나 어감, 표현 등을 통해서 마음속에 뿌리 깊은 상처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이 후배가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오픈했는데, 들어보니 참으로 기막힌 사연이었습니다.

    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004년에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서울의 어느 학원에 들어가서 재수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곳은 한 달에 하루만 외박을 주는 스파르타식 학원이었는데, 외박을 주는 날 이 시간을 어떻게 쓸까? 라고 고민하다가 스트레스를 풀고자 친구들을 불러서 술집에서 밤이 새도록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술에 취해서 눈을 떠보니 다 가고 없고 친구의 여자 친구만 남아 있더랍니다. 새벽 5시쯤에 친구의 여자 친구는 귀가를 했고, 자신은 잠시 후에 술을 깨고 술집에서 나와 귀가를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경찰이 영장을 들고 학원을 찾아왔는데, 체포영장의 제목은 ‘살인’이었답니다. 알고 보니 친구의 여자 친구가 그날 술을 먹고 귀가하다가 집 문 앞에서 수차례 칼에 찔리는 좌상을 입어 살해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인자로 몰려는 경찰의 심문에 억울해서 미치는 줄 알았으나 경찰은 알리바이가 부족한 이 후배를 불구속기소로 결정하고 며칠간의 조사 끝에 드디어 경찰서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불행은 그 날 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죽은 여자 친구의 죽음을 두고 친구가 ‘너 왜 죽였냐?’며 따지고 들자, ‘내가 죽이지 않았다’고 믿어주지 않은 그 친구를 향해 짜증을 내면서 말을 내뱉었는데, 그날로 그 친구는 자책감과 배신감 때문인지 그만 자살을 하였고, 몇 달 뒤 후배의 어머니도 자신의 아들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주변 사람들의 압박에 못 이겨 그만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정신적인 고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도피처로 군대를 선택해서 입대를 했으나, 군에 간지 10개월 뒤에 헌병대에서 자신을 불러내더니 1년 전에 자신을 조사하던 형사들의 손에 또 다시 넘겨져 조사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사를 받게 된 배경은, 다행히도 그 여자를 죽인 진범이 자수를 했기 때문인데, 경찰은 사실 여부와 정황을 분명하게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자수한 그 살인자는 다름 아닌 2006년 서남부 연쇄살인범이었던 정남규라는 ‘싸이코패스’ 였습니다(14명 살인). 당시 정남규는 경찰에게 잡힌 뒤였고 취조 도중에 유영철이 죽였다는 살인사건을 자신이 죽였다고 주장하면서 밝혀진 해프닝이었습니다. 그 살인의 희생자가 바로 이 친구가 누명을 썼던 친구의 여자 친구 살인사건 이었던 것입니다.

    그 덕분에 누명은 벗게 되었지만, 2년여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당연 어머니와 친구의 자살 그리고 친구들과 주변사람들이 자신을 믿어주지 않고 다들 살인자로 몰아갔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어주지 않은 그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저는 이 후배의 말을 듣고 원인 모를 미안함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믿음도 없는 사람이 그런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 라는 긍휼함과 불쌍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도 힘든 일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도 이 친구만큼 힘든 일을 겪는다면 과연 우리는 계속해서 삶을 이어나갈 용기가 있을까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은 무엇으로 이겨낼 수 있을까요? 주변사람들로 부터 받은 배신감은 또 어떻게 극복해나갈 수 있을까요? 이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복음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없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 친구에게 차마 복음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나이에 비해서 너무나 큰 고통을 겪은 후배 앞에서 왠지 모르게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만한 용기가 없었습니다. 이 친구를 위로해줄만한 어떠한 말도 생각이 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착잡한 마음뿐이었습니다.

    행복감이라는 것이 상대적인 것이라면, 이 후배의 경험과 비교해봤을 때 우리는 엄청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주님께 감사함을 고백하며 살아가기 보다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날마다 온갖 불평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살아가고 있었을까? 라며 제 자신의 내면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약한 내 모습 때문에 어쩌면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지 못한 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많은 생각들로 가득 찼는데, 그 중에서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이 유일한 후배의 위로거리라고 여겨졌는지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얼마나 억울하셨을까?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 고통과 억울함을 나 때문인지 잘 알고 있는데, 왜 나는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어쩌면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실질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즉, 그 분의 고통이 사실적인 내 고통이 아니었고, 그 분의 억울함이 실질적인 내 억울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런 추상적인 복음을 나는 가지고 있지는 않았나? 또,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정도 되니까 당연히 그 아픔을 감당해 낼 수 있었을 거야!” 라는 가증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고 있지는 않았나? 그래서 자연스럽게 십자가 사건이 내 삶과 분리 된 채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주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고 뻔뻔하게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을까? 라는.., 등의 생각들로 말입니다. 후배와의 만남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실질적으로 내 삶속에 적용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게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후배는 저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저는 세상의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무섭지가 않습니다. 저는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실감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후배의 말처럼 악한 모습을 봤기 때문에 더 이상 누구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면 그것은 곧 분노의 힘이 분명할 터인데,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안 우리는 그와 같은 동일한 힘을 지닌 소망을 소유해야 당연한 이치가 아닐런지요? 그 소망이 우리 내면의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디언 선교에 생애를 바친, 브레이너드 목사님이 고백했던 글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1742년 11월 27일. 하나님께 내 영혼을 의탁하며 어느 정도 위로를 얻었다. 오전 9시 경 뉴욕을 출발하였는데, 여전히 말할 수 없는 나의 무가치함을 느끼며 괴로움에 싸여 있었다. 정말이지 이젠 나의 모든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 중 나만큼 추한 이들이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겉으로 그들이 어떻게 처신하든, 하나님 앞에서 나만큼 죄악을 심각하게 의식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오오, 나의 허약함, 나의 메마름, 나의 속됨, 과거의 울분, 그리고 복음에 합당한 기질이 없는 그런 모습이라니! 이것들이 나의 영혼을 짓누른다. 뉴욕에서 삼십 마일을 말을 달려 화이트 플레인즈(White Plains)에 도착하였는데, 도중에 계속해서 내 마음을 하나님께로 올려 긍휼하심과 순결하게 하시는 은혜를 구하였다. 그리고 심령이 상당히 낙담한 채로 저녁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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