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요즘 뉴에이지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두막>이라는 영화 역시 이 범주에 속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여러 사람들이 기독교 영화인줄 알고 보았을 것입니다.
‘더북’, ‘요한계시록’ 뮤지컬을 소개하고 감상문을 써 주신 자매님께서 이에 대해 감상문을 써 주셨습니다. 글이 길지만 한번 시간을 내서 읽어보면 유익할 것 같아 소개합니다.
장문의 글이라 상하(上下)로 나누어 올립니다.
샬롬
패스터
<영화 “오두막” 감상평>, 영화는 영화일 뿐, 오해하지 마세요(전O지)
1. 한 번쯤 볼 만한 영화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말로 다할 수 없는 감동이 있는 기독교영화”라는 멘트와 함께 영화 “오두막”을 소개받았다. 윌리엄 폴 영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인데 책만 해도 2천만 부가 넘게 팔렸다니 영화 관람객 수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은 이유가 무엇일까?
판타지 영화라서 신비한 면도 있고 흥미가 있었다. 사람들이 누구나 가질 만한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내가 고통 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선과 악이 무엇인가?”, “흉악범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등의 심오한 질문들을 던져 의미도 있었고 가볍지 않아 좋았다.
우리 삶의 난제인 ‘치유와 용서’를 다루고 있고 회복과 가족애를 그려 따뜻한 느낌을 주는 영화다. 사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완전한 치유를 받을 수 있으며, 삼위 하나님이 관계 속에서 협력해서 사역하시는 것을 인식시키고, 하나님과 우리를 부모자녀관계로 묘사한다는 점도 성경적이어서 좋았다. 또 신 노릇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심판자의 자리에 있으나 심판은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점, 사랑의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가 치유받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고, 주인공이 영적 체험을 한 이후에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며,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2. 판타지 영화를 볼 때 주의할 점 힐링 영화라 적잖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겠지만 하나님을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우려되는 부분도 있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설정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오두막”의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다르게 표현된 부분이 있어 해석상의 주의를 요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종종 오해한다. 우리가 성경에 무지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알아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가운데 세상의 영성들과 세계관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맥이 딸을 잃은 슬픔을 겪다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적 체험을 통하여(즉 환상을 보고) 치유 받고 삶이 변화되었다”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종교영화가 아닌 판타지 힐링영화로 소개되었다. 이런 영화를 볼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게 있다. 지금은 감각적인 가상 이미지가 실재를 압도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이다. 영화는 포스트모던적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실재와 허구, 내러티브와 이미지를 뒤섞음으로써 가상의 세계를 실재인 것처럼 전달한다는 점에서 절대적 객관적 진리를 추구한다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영상으로 어떤 표현도 가능해졌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이 무한히 뒷받침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특성을 감안하고 영화텍스트를 접해야 한다.
영화는 스트레스를 풀고 즐기기 위한 것인데 그렇게까지 복잡한 생각을 해야 하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다양한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특정 세계관의 영향을 받게 될 위험이 있으므로 이 혼합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기준으로 세계관들을 분별하면서 영화를 볼 필요가 있다. 영상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고 지속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하나님과 주말을 보냈다면 그 말을 누가 믿겠어요? 대단히 황당하지만 진실이 아니란 법은 없죠.”라는 대사로 시작한다. 영화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며, “진실이 아니란 법은 없죠”라는 말로 이 영화의 내용이 진실일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부여한다. 기독교신자의 가정 이야기로, 주인공이 삼위 하나님과 종교적인 대화를 나누며, 예배 장면, 교회에서 치르는 장례식 장면도 나와서 기독교신자들에게 친숙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영화 “오두막”은 기독교영화를 표방하면서 기독교에 관해 왜곡된 인식을 갖게 할 위험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이 영화가 어디까지나 픽션이며 판타지라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말고 보아야 한다.
3. 깨어진 가정, 뒤틀린 부자관계
주인공 맥은 미국 중서부 아일랜드계 농부 집안에서 자랐다. 맥의 아버지는 교회 장로지만 엄격하고 냉담한 사람으로 술을 마실 때마다 이성을 잃고 아내와 자녀들에게 폭행을 가한다. 어느 날 이웃집에서 뚱뚱한 흑인 아줌마가 매맞은 맥을 불러 빵을 구워 먹이며 “아버지가 그러면 안 돼. 그건 사랑이 아니야. 하나님께 말씀드려. 늘 듣고 계시니까.” 라고 위로해 준다.
나중에 이 아줌마는 파파 하나님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이 아줌마 모습으로 맥이 어릴 때부터 함께했다는 것인지 이웃집 아줌마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나중에 맥이 오두막에 갔을 때 그 아줌마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 맥의 아버지를 정죄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이 아줌마 형상으로 맥이 어릴 때부터 나타나 “나는 언제나 네 옆에 함께 있다. 폭력적인 네 아버지와 달리 나는 사랑이 많은 존재다” 라는 것을 영화 초반부터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맥은 예배 후에 강단 앞으로 나가 목사님에게 “술 취한 아빠의 폭행으로부터 엄마를 지켜드리고 싶은데 지켜드릴 수가 없다”고 울면서 호소한다.
아버지는 그날 밤 비가 몹시 퍼붓는데도 다른 사람을 앞에서 망신을 주었다는 이유로 맥을 참나무에 묶어놓고 밤새도록 사정없이 매질을 한다. 그리고 한 대씩 맞을 때마다 맥에게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외치게 한다. 경직된 말씀적용이 매보다 더한 형벌이 되는 셈이다. 이 영화는 알코올 중독에 빠져 아내와 자녀에게 극심한 폭행을 일삼고, 성경말씀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율법적으로 적용해 자녀에게 강요하는 아버지로 인해 깨어진 가족관계를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기독교인들의 위선과 왜곡된 말씀 적용으로 인해 선한 기독교 율법(롬7:12)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될 수 있다.
4. 가출과 결혼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은 맥은 13세 되던 해에 아버지의 술병마다 살충제를 타놓고 “언젠간 저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랄게요” 라는 편지를 남기고 가출한다. 자기가 저지른 일이 용서 받아야 할 죄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월이 흘러 맥은 좋은 아내를 만나 단란한 삶을 살고 있지만, 아버지를 간접살해하고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악몽에 시달린다. 아내는 하나님을 허물없이 ‘파파’라고 부르며 신앙생활을 하고, 아이들도 친근하게 ‘파파’라고 부른다.
맥은 가족들과 함께 교회에 나가기는 하지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맥에게는 성경말씀이 아버지의 매질만큼이나 큰 억압과 폭력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고, 아버지와의 사이에 형성된 증오심이 하나님 아버지조차 잘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맥은 아내 낸, 아들 조시와 딸 케이트, 막내딸 미시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도 영화니까 가능한 이야기이다. 한 사람은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고, 한 사람은 믿지 않을 때 그 가정은 하나 되기가 어렵고, 영적 전쟁이 늘 일어나기 때문에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맥이 자신의 죄 문제를 덮어둔 상태에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이것은 맥이 자신을 속이는 위장된 행복일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 죄를 토설해야 행복하다고 말씀한다. 그런데 어느 날 큰 불행이 이 가정을 덮친다.
5. 인디언 공주의 죽음 vs 예수의 죽음 어느 연휴에 간호사인 아내는 일이 있어서 못 가고 맥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주립공원으로 캠핑을 떠난다. 가는 길에 맥은 멀트노마 폭포 앞에 멈추어 인디언 공주의 전설을 들려준다.
“어느 마을에 끔찍한 돌림병이 돌았다. 나이든 추장의 어린 외동딸이 ‘추장 딸 중 하나가 희생을 하면 병이 낫는다’는 전설적인 예언을 듣게 된다. 부족민을 많이 사랑하던 공주는 암벽에서 뛰어내렸고, 대정령이 감응해 그다음 날 사람들이 다 나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미시가 묻는다.
“대정령은 파파의 다른 이름이야?”
이 질문을 통해 관객들은 알게 모르게 정령숭배의 세계관에 노출되며,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흐려질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관객들이나 아이들은 자칫 하나님을 자신이 알고 있었던 정령들과 같은 존재라고 인식할 수 있는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전설의 내용이 사실인가를 묻는 미시의 질문에 맥은 전설이 실화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고 답한다. 미시가 또 묻는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전설이 아니잖아?” 관객들은 미시의 이 질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인디언 공주의 희생의 죽음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죽음을 나란히 두고 보게 된다. 하지만 두 죽음을 이렇게 병치시켜 놓으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와 가치가 현격하게 축소된다.
두 죽음을 동일시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며, 자비와 공의의 양면을 지니신 하나님 아버지가 그 두 가지 속성을 다 충족시키면서 인류의 죗값을 치르도록 아들을 친히 내어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인디언 공주의 죽음은 대속을 위한 예수님의 의지적 희생과 아울러 하나님 아버지의 희생과 사랑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파파는 왜 그렇게 심술궂으셔?”
미시의 질문을 통해 관객들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서 왜 인디언 공주도 죽게 하고,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게 내버려두었는가 하는 점에서 하나님이 참 나쁜 분이라는 오해를 할 수 있다. 미시는 여기에서 작가의 대변인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
“아빠, 나도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할까?”
미시의 이 질문은 나중에 미시의 죽음을 암시하는 복선의 역할을 한다. 미시의 죽음을 기점으로 맥이 치유되었으므로 미시는 맥의 치유를 위한 희생양이 되는 셈이다. 마치 예수님이 우리의 희생양이 되신 것처럼. 그래서 자연스럽게 두 죽음이 병치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어떤 희생적 죽음과도 단순하게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6. 큰 불행 연휴 마지막 날, 맥의 아들 조시와 딸 케이트는 카누를 타고 놀고, 미시는 텐트 앞 벤치에 앉아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빨간색 크레파스로 인디언 공주를 그리면서 논다. 미시가 맥에게 “인디언 공주도 나처럼 빨간색 옷을 입혔는데 신발은 무슨 색으로 칠하면 좋을까?”라고 묻자 아빠가 옷 색깔에 맞추는 게 좋겠다고 답한다. 그래서 미시는 붉은 색으로 신발을 칠한다.
붉은 색이 강조되는 것은 곧 미시가 살해당하면서 흘리게 될 피를 암시할 수 있다. 이 역시 주님의 피와 미시의 죽음이 흘리는 피를 무의식중에 동일시하게 만듦으로써 예수님의 고귀한 보혈의 의미와 가치를 현격하게 축소시키는 기능을 한다. 자발적인 죽음과 살해당한 죽음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의미상 남을 위한 죽음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인디언공주의 죽음과 미시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나란히 놓고 보게 만든다.
케이트의 장난으로 카누가 뒤집히자 맥이 재빨리 뛰어 들어가 조시를 구조해 내고 인공호흡을 시켜 간신히 살려낸다. 그 와중에 미시가 실종된다. 미시의 자리에는 못 보던 빨간색 무당벌레 핀이 하나 놓여있고, 미시가 손에 쥐고 그리던 빨간색 크레파스도 없다. 미시가 핀으로 유혹을 받아 크레파스를 손에 쥔 채 납치당한 것이다.
경찰은 샅샅이 수색한 결과 깊은 산 속 오두막에서 미시의 피 묻은 드레스를 발견한다. 오두막 입구 벽에는 미시가 저항하며 끝까지 손에 쥐고 있었을 빨간색 크레파스로 칠해진 표식이 있어 미시가 이곳에서 처참하게 죽었음을 암시한다. 경찰은 범인이 어린 소녀들만 5명이상 납치해 범행을 저질러 온 연쇄 살인범이라는 것만을 밝혀냈을 뿐이다.
미시의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빈 관으로 교회에서 미시의 장례를 치른다. 미시는 특별했던 아이라 맥의 슬픔은 더욱 깊었다. 어머니도 지켜주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딸도 지켜주지 못했다. 맥은 자책감에 사로잡히고 가족들과도 소원해진다. 케이트도 자기 때문에 미시가 그렇게 되었다고 자책한다. 다른 가족들은 상담치료를 받으며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낸도 맥을 위로해 주지만 맥은 상담치료도 거부하고 4년째 깊은 우울증에 빠져 헤어나질 못한다. 이 장면에서 이들에게 진실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자신의 슬픔을 가지고 파파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7. 하나님의 초대 눈이 많이 오던 어느 날, 맥은 우체통에서 엽서 한 장을 발견한다. 내용은 다음주말에 그 오두막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보낸 이는 파파다. 맥은 몹시 혼란스러워한다. 발신인의 주소도 없고, 눈 위에 발자국도 찍혀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낸 엽서일까? 살인범이 나까지 노리고 한 수작인가? 갈등하던 맥은 친구의 4륜구동 지프를 빌려 그 오두막으로 향한다.
사방이 흰 눈으로 덮여 있고 오두막은 낡았으나 미시의 핏자국은 그대로 남아있다. 맥은 “여기까지 오라고 하더니 나타날 용기도 없는 비겁한 하나님이냐?”라고 원망하고, 의자를 던져 부수면서 엽서를 찢어버리며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킨다.
슬픔과 죄책감을 못 이겨 맥이 자기 이마에 총구를 겨눌 때 눈길에 청바지와 점퍼 차림의 한 아랍인 남자가 장작더미를 들고 나타난다. 맥이 그를 따라가자 폐허였던 오두막은 햇살이 눈부시고 새들이 지저귀며 숲이 우거지고 온갖 꽃들이 피어있는 봄날의 정원처럼 바뀌어 있다.
8. 삼위일체 하나님 그곳에 들어서자 뚱뚱한 흑인 아줌마가 “이렇게 컸네” 하면서 맥을 안아준다. 맥은 그 여자를 몰라본다. 옆에서 동양인 여자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청바지 차림의 아랍 남자는 성자 예수님이고 원피스를 입은 흑인아줌마 엘루시아는 성부 하나님, 청바지를 입은 동양인 여자는 성령 하나님인 사라유이다. 그들은 한 집에서 산다.
맥이 누가 그 파파냐고 묻자 세 명이 동시에 “I am”이라고 대답한다. 이 영화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본질상 같은 분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삼위일체의 개념을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표현해내야 하는 영화적 한계로 인해 삼위일체에 대해 오해할 수 있도록 묘사되고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맥이 오두막이라는 특정한 장소에서 세 분 하나님을 동시에 만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성경에 따르면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성령 하나님은 보혜사로서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세 분이 어느 곳에 함께 계셔서 우리가 그곳에 가서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영화의 표현의 한계를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상당히 조심스럽게 판단해야 하는 내용이다.
이 장면은 우리도 어느 특정한 장소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장소에 가지 않더라도,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어떤 고통과 슬픔에 처해있어도 전혀 예기치 못한 장소와 때에 먼저 말씀으로 찾아와 우리를 만나주시고 구원하신다. 세상의 종교는 사람이 신을 찾아가는 인본주의적인 구조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친히 죄인을 만나러 찾아오신다.
9. 하나님의 여성화
영화에서는 성부를 흑인 여자, 성자를 아랍계열 남자, 성령을 아시아인 여자, 지혜의 신은 백인 여자로 형상화하였다. 성자만 여자로 바꾸지 않은 이유가 궁금한데 어쨌든 신격화한 4명 중에서 3명이 여성이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하나님을 흑인여성으로 표현한 이유가 모든 상징을 뒤섞어 하나님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성별도 인종도 없으시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구 문화의 영향으로 하나님을 백인 남자로 인식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여성화한 것은 하나님의 엄마 같은 면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마음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 이 책과 영화가 세계적인 호응을 받은 이유 중 하나도 그런 하나님을 그려주기 때문일 수 있다. 엄마는 대체로 자녀가 웬만큼 잘못을 저질러도 품어주고 용서하는 이미지이며, 여성 하나님은 감성적이고 인간 친화적이며 따스하고 자애롭고 푸근한 뉘앙스를 풍긴다.
하나님을 특정한 인식의 틀에 가두기를 원치 않았던 저자의 의도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여성 하나님은 두렵고 엄중한 심판자의 이미지를 제거하고 친근하고 무한히 사랑으로 용납해주는 하나님이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낸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 가톨릭에서도 유일하고 참된 중보자이신 예수님보다도 그 어머니 마리아에게 먼저 접근해 자신의 소원을 예수님께 빌어달라고 마리아에게 기도한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늘 자신을 아버지로서 나타내셨지 어머니로 계시하신 바가 없다. 비록 잉태나 해산, 보호와 양육 등의 어머니 이미지를 차용해 하나님의 행동이나 성격을 묘사한 부분이 있지만 하나님을 어머니로 부르지 않는다. 우리 신앙의 지침이 되시는 예수님도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자주 부르셨다. 성경은 성령 역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남성으로 묘사한다.
여자 파파 하나님은 나중에 인디언 할아버지 남자로도 변하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여성화와 양성화는 기존의 정형화된 질서나 사고의 틀을 깬다는 점에서 그동안 근대사회가 이성중심적, 남성중심적인 사회라는 데 대한 반발로 일어난 포스트모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여성 하나님을 주장한다. 그리고 저자 자신이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작품 속에서나마 보상심리로, 자신의 치유를 위해 그렇게 설정했을 수도 있다.
소설이나 영화는 그 자체로 진실과 진리를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등장인물을 작가가 원하는 대로 묘사할 수 있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기 때문에 보고 즐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진리에 관한 문제를 담고 있는 영화라면 경계심을 갖고 보면서 진리를 분명히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특정한 모습으로 그려진 하나님을 성경이 말하는 참되고 온전한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영화를 보면서 타 종교의 세계관의 영향을 받아 우리 내면에 인식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10. 하나님을 형상화할 수 있는가? 영화니까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와 예술적 문학적 허용을 감안한다고 해도 성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설정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본질적 특성을 왜곡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대담한 시도로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존재로 묘사하지 않는다. 인간은 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눈으로 보면 그는 죽는다(출33:20). 심지어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을 서늘한 바람으로 느꼈고 음성만 들었다(창3:8). 성경을 보면 모세 같은 위대한 지도자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출33:23), 화염이나 빽빽한 구름 속에서 음성만 들었으며(출3장, 출19장), 엘리야나 이사야나 에스겔 같은 대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보좌의 영광만 묘사했을 뿐 얼굴은 보지 못했고 음성만 들었다(왕상19:9-18, 사6:1, 겔1:28).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골1:15)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분을 눈에 보이는 형상적 존재로 대리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성부나 성령은 형상화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 특성이다. 구약의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에게 종종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마침내 인간과 함께 하여 구원하시려고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제자 빌립이 예수님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답변하셨다(요14:9). 유일하게 하나님을 본 분은 예수님이시다(요6:46). 성부에게서 성자가 나왔으며,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왔는데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시면서 자신의 대리자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요14:16). 이 성령도 영이시므로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다(요14:17)
좀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보자면 하나님을 사람으로 묘사한 것은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제2계명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왜 형상화하지 말라고 했을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으로 형상화하는 순간, 죄로 인해 부패한 종교성을 갖게 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해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가 극심한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 우상화하며 섬길 것을 염려해서 모세를 통해 가르치게 하신 것이다.
성경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갖게 만들고 하나님 대신 의지하게 되는 모든 것이 우상이라고 말한다. 우상숭배 금지를 10계명 중 1,2계명에 명시한 사실은 하나님이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영이시며 우주보다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조그만 형상으로 축소하고 제한할 수는 없다. 눈으로 보면 더 잘 믿을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사람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하나님은 사람과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만만하게 여기고 부릴 위험이 따른다. 우상은 하나님처럼 말씀하지 않으며 인간의 내적변화와 무관하게 복을 준다고 약속하므로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놓고 숭배하면 신앙의 본질을 잃게 될 위험이 따른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때가 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미 죽었던 자들도 다 살아나 영원한 심판에 처해지는데(요5:25-29), 그때 주님을 믿어 죄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완전한 구속함을 입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전13:12)고 성경은 말씀한다.
11. 자유분방한 하나님 “오두막”이 말하는 성부 하나님은 조금도 거룩하지 않다. 평범한 이웃집 아줌마로 매우 친근하다. 여자 파파 하나님은 귀에 이어폰을 끼고 팝송을 들으며 빵을 반죽하고 음식을 만들거나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성령과 함께 어울려 춤을 추고, 선글라스를 끼고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한가로이 쉬기도 한다. 성령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청바지를 입었다. 참 자유분방하다.
하나님에 대한 경직된 사고방식을 지적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하나님의 친근함에 강조점을 두다 보면 경외심을 잃고 자칫 하나님을 별 거 아닌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별 거 아닌 것, 말씀하신 대로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으로 느슨하게 인식할 수 있다. 경계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우리는 피조물이다. 피조물인 하와가 뱀에게 미혹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분의 말씀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안 지켰을 때 어떤 대가를 받았던가!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을 보면 친근함보다는 엄위함을 느끼고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엎드렸다. 다니엘같이 고도의 영성을 가진 사람도 땅에 엎어져 혼절할 정도였고(단10:9), 사도 요한 같은 깊은 영성의 사람도 그 발 앞에 엎드려 죽은자같이 되었다(계1:17)
주님은 분명히 우리의 친구이시다.(요15:14-15).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써 주시는 과분한 호칭이지 우리가 예수님을 그렇게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을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피조물이 조물주와 나란히 서려고 하는 순간 그는 끝장난다.(창3장)
12. 역할의 혼동 맥은 엘루시아를 만났을 때 파파 하나님이 자신이 상상해온 턱수염의 하나님의 모습과 달라서 혼란스러워한다. 엘루시아는 맥에게 “네 과거를 볼 때 아버지의 모습이 부담될 것 같아서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면서 “나는 너를 치료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맥은 대뜸 “전능자라면서 어찌하여 내 딸을 죽게 만들었느냐? 내가 필요로 할 때 어디에 있었냐?”라고 따진다. 엘루시아가 “그때도 너와 함께 있었다. 나는 너를 떠난 적이 없다”고 답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참 든든하고 위로가 된다.
맥은 “당신 때문에 내 애가 죽었다. 애도 못 도우면서 어떻게 나를 돕느냐? 내 딸이 죽어갈 때뿐 아니라, 당신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의 곁도 떠나는 나쁜 습관을 가졌다”라고 항의한다. 이 부분에서 관객들이 맥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 말에 동의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외치며 하나님께 버림받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죽었을 거라는 왜곡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신 적이 없다. 성부께서 예수님을 잠시 외면하신 것은 아들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죄를 너무나 싫어하시고 차마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져 죄 덩어리가 되어버린 예수님에게 자신의 진노를 쏟아부어 예수님이 고통 받는 것이 너무도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죽으신 게 아니다. 순교자들도 두려워하지 않는 죽음을 예수님이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했을 리가 만무하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하시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한 것을 기뻐하셨다. 예수님은 그 일을 감당할 힘을 얻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 기도하셨고 자원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책을 읽든 영화를 보든 그 결과로 선하신 하나님을 나쁜 분으로 오해하고 대적하게 하는 것은 마귀의 1번 전략이다. 에덴동산의 하와도 인간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시고 자유의지까지 주시고 왕권도 주시며 최고의 대우를 해 주신 하나님인데도 선악과 하나를 금했다는 이유로 나쁜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사실 선악과는 인간의 본분을 알게 해 주고 타락을 막아주는 장치였다는 점에서 축복이었다.
맥의 공격적인 질문에 엘루시아는 “나도 똑같이 큰 대가를 치렀다”면서 자기의 팔뚝에 선명한 못자국을 보여준다. 예수가 못 박힐 때 자기도 함께 못 박히며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수난을 당하신 분은 성자 예수님인데 이 영화는 성부 하나님의 팔목에도 똑같이 못 박힌 상처가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이 장면을 성부께서 성자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가 겪는 고통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며 그 아픔을 헤아리신다는 것을 표현한 영화적 기법으로 받아들인다면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 장면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신학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된다. 성부와 성자의 역할의 명확한 구분이 있음을 인정하는 기존 신학을 뒤집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 구분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깊지 않은 관객들은 성자와 성부의 역할이 뒤섞이는 혼란을 경험할 수 있다. 백번 양보해서 만일 이 장면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 함께 고통 받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면 형상화한 성령하나님의 팔뚝에도 못자국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장면은 구원을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영화가 얼마나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든다.
13.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가?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며,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악을 즉각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맥의 질문은 누구나 함직한 질문이다. 창세기 3장은 이 세상에 고통과 슬픔과 악이 들어오게 된 과정을 밝히고 있다. 사단의 미혹에 빠진 피조물 하와가 창조주의 자리를 넘보다가 금단의 열매를 따 먹고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 죄의 값인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오고 그 사망의 그림자들인 질병, 이별, 상처, 고통, 슬픔, 눈물, 악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악은 하나님의 선한 질서 안에 내재된 프로그램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이 땅에 잠시 허용된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세차게 대항하는 악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선을 극대화시켜주고 증명하는 기능을 한다.
하나님의 전능성과 선하심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억압하며 인간의 악행을 즉각적으로 중단시키는 것으로만 드러나는가? 나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을 즉시 징벌해주셔야 전능하시고 정의로우시고 선하신가? 이는 매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이다. 즉각 심판하시면 제일 먼저 심판받을 사람은 아마도 자기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심판을 유예하시는 것은 모든 죄인을 향한 최대의 은총이다.
14. 하나님은 왜 악을 막지 않으시는가? 맥이 “세상에 고통과 괴로움이 넘치는데 왜 막지 않느냐?”고 묻자 엘루시아는 “불완전한 그림만 보고 세상을 이해하려 하느냐? 네가 상처의 옹이구멍으로만 세상을 본다. 네 인생의 근본 문제는 나를 선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선하다.”라고 말한다.
세상에 악이 넘치는데 왜 하나님이 막지 않는가? 성경은 그 답은 종말의 때에 알게 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모든 악의 공격과 도전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는 것으로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드러내시고, 끝까지 악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다가 악이 무장해제되는 종말론적 전쟁 때에 그 전능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신다.
지금은 사단이 결박된 채로 활동이 가능한 때이다. 그래서 이 땅에 죄와 악이 존재하고 사망의 그림자들인 질병과 눈물과 이별과 아픔과 슬픔이 존재한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마귀가 불과 유황못에 던져질 때는 사망과 음부까지도 불못에 던져진다(계20:14). 죄가 없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새하늘과 새땅에는 죄의 삯인 사망도 없고, 사망의 그림자들도 없다(계21장).
15. 성령 하나님 맥이 돌아가려고 하자 성령 하나님인 사라유는 맥에게 정원을 가꾸는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내일 이곳에 특별한 것을 심을 예정이라는 것이다. 함께 정원을 가꾸면서 맥이 어떤 나무의 뿌리를 자르려고 하자 “그건 독성을 지닌 쓴뿌리라 함부로 자르면 안 된다, 독은 나쁜 것이지만 꽃꿀을 섞으면 놀라운 치유제가 된다”고 말한다. 쓴뿌리와 같은 맥의 고통이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 치유 받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령 하나님의 이름인 “사라유(Sarayu)”는 힌두교적 어원을 갖고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흐름’이라는 뜻인 여성적 어원인 '사르'에서 왔다. 남성적 어간인 ‘사라유’는 ‘공기, 바람의 흐름’을 가리킨다. 성령을 가리키는 데 쓰인 히브리어 ‘루아흐’ 또는 헬라어 ‘프뉴마’ 등이 ‘바람, 호흡’ 등의 어의를 갖고 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령을 설명해 주실 때 ‘바람의 흐름’으로 설명해 주셨다(요3:8). 어의상 성경과 일부 일치점을 갖는다.
‘사라유’는 고대로부터 존속해온 인도의 강 이름이기도 하다. 이 강은 고대 경전인 베다경과 고대 인도 서사시집인 라마야나에도 언급돼 있다. 성령의 이름을 성경이 말하는 ‘파라클레이토스’라는 이름이 아닌 ‘바람의 숨결’이라는 의미를 가진 인도의 언어로 표현한 것은 힌두문화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는 관객들에게는 기독교와 힌두교가 혼합종교화되는 느낌을 줄 수 있다.
16. 성자 예수님 성자 예수님은 목공일을 한다. 유대인 남자 목수인 예수가 흑인 여성의 아들로 나온다는 점에서 함족속이 셈 족속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뒤집고, 그동안 상대적으로 열등하게 여겨져 온 족속과 젠더를 상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기존의 모든 질서를 해체하는 포스트모던적 세계관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맥은 예수의 지시에 의해 바다 위로 혼자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간다. 그때 갑자기 배가 삐걱거리면서 갑판이 깨지고 물이 스며들기 시작하더니 배가 파손되면서 바다에 검은 기름이 퍼지는데 거기에 아들의 환영이 보인다. 그 모습을 잡으려는 맥의 손에 검은 기름이 가득 묻는다.
배가 가라앉아 가자 당황하는 맥에게 예수가 물 위를 걸어 다가온다. “그건 바로 당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이에요. 과거도 고통도 생각 말아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 나만 바라보고 심호흡을 하세요.” 라고 말한다.
성도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성경적 교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장면이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예수가 맥에게 심호흡을 하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현 시대의 사조는 요가나 명상 같은 활동을 통해 진정한 평안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심호흡을 하면 평강이 오는가? 심호흡으로 인해 느끼는 편안함은 생리적인 대사의 결과이지 본질적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영적 체험은 아니다. 도교의 양생술의 하나인 단전호흡에서는 명상으로 소우주인 인간의 기를 대우주의 기와 합일시켜 순환시킨다고 주장한다. 불교나 힌두교에서 사용하는 명상 방법들은 마인드 컨트롤이나 초월명상 등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기독교는 심호흡을 해서 불안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하지 않고, 참 평강을 얻기 위해서는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죄문제를 해결하고 평강의 왕 예수를 내 안에 모셔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저 막연하게 괜찮아질 거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긍정의 힘으로 극복하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근거로 확고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라고 말씀한다.
맥이 심호흡으로 안정을 되찾자 예수는 맥에게 물 위를 걷자고 한다. 맥이 못할 것 같다고 하니까 “할 수 있다, 걸어보라.”라고 말한다. 맥은 예수와 함께 물 위를 걷는 체험을 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확고하지 않은 관객들은 이 그림을 통해 인간의 잠재력과 신념으로 불가능한 일을 해 낼 수 있다는 뉴에이지 세계관에 물들 위험성이 있다.
맥이 처음에 오두막에 와서 삼위 하나님을 만났을 때 어리둥절해서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엘루시아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했다. 뉴에이지 사상은 인간의 내적 능력을 개발시켜 우주적 차원에 도달하는 것이 구원이며, 죄의 결과도 없고, 인간의 성취할 수 있는 일에는 어떠한 한계도 없다고 보고, “할 수 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은 한계가 많은 존재이며,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맥이 예수와 함께 물 위를 걸으며 “이것은 내가 배운 종교와 다르다”고 말하자 “종교는 일이 많다. 나는 종교를 원하지 않고 가족과 친구와 삶을 나누기 원한다”라고 답한다. 이 부분은 기독교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하며 기존의 정형화된 종교의 틀을 깨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진리는 무수한 틀 깨기에 의해서 밝혀져 간 부분도 없지 않으나 이 장면을 통해 관객들은 신앙의 영역을 “가족과 친구와 삶을 나누는 것” 정도로 축소시켜 받아들이게 될 수 있다. 기독교의 영역은 나와 내 가족과 친구의 경계를 넘어서 지역사회와 국가, 나아가 전 세계를 포괄한다. 기독교는 개인만큼이나 공동체를 중시하며 그 공동체가 예수를 머리로 하는 거대한 한 몸이라고 말하면서 한몸 의식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라고 말한다.
맥은 그동안 자신은 신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감각적으로 감정적으로 느껴야 알 수 있는 존재로 말하지 않는다. 내 감정이 어떠하든 말씀이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나와 함께하시는 것이다. 17. 지혜의 여신
예수는 맥에게 이제부터는 혼자 가라고 보낸다. 가다가 길이 막히자 맥은 벽에 손을 대 벽을 스르르 통과해서 컴컴한 동굴 속에서 지혜의 여신 소피아를 만난다. 성경에서 지혜는 성자 예수님이신데, 영화에서는 그리스 여신을 출현시킴으로 삼위일체를 살짝 비틀어 기독교와 그리스신화를 혼합종교화하는 느낌을 준다. 성경에 따르면 소피아가 아니라 하나님이 재판관이시고 재림 예수님이 심판주이시다. 이 장면은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와는 다른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맥은 소피아를 만나서 “나는 신이 선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미시도 파파의 자식인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라면서 신의 선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내 자식이 어릴 때 죽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며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죄로 인해 사망 판결을 받은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시고 생명과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으로 완전하게 증명된다.
소피아는 맥에게 자기의 자리를 내 주면서 앉아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맥에게 “평생 모든 사람을 피부색, 옷차림 등에 따라 그의 일, 행동, 동기까지 다 아는 듯이 즉결심판을 내리던 심판전문가”라고 말한다. 이 부분은 심판의 대상인 인간이 심판주 노릇을 하며 사는 것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들며 공감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맥은 자신이 심판자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러한 삶을 살아왔다는 진실을 마주하면서도 그에 대한 마땅한 반응인 애통함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관객들도 맥처럼 이 장면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속이 뜨끔하기는 하지만 진정한 회개에는 이르지 못한 채 피상적인 반성으로만 그칠 수 있다.
소피아는 맥에게 세상의 고통과 괴로움에 처한 자를 몇 명이나 알고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면서 욕심쟁이, 남을 해치는 자, 살인자, 마약상, 테러리스트는 유죄인가? 자신의 괴로움을 달래려 부인을 때리고 아들을 때리는 자(맥의 아버지)가 유죄인가? 죄 없는 여자애를 무참하게 해친 자(딸 살해범)는 유죄인가? 라고 묻는다.
이 질문의 저의에는 그들이 무죄라는 답이 들어있다. 사실 우리의 본성은 그런 흉악범들을 능가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도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다시 그런 행실을 하지 않으면” 구원받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전제조건이 빠졌다.
왜 무죄인가? 자기 본성과 의지의 발로가 아니라 어릴 적 부모의 학대나 나쁜 환경으로 인해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져야죠” 맥이 이렇게 대답하자 소피아는 어린 시절에 맥의 할아버지에게 매 맞고 자란 아버지의 환상을 보여준다. 소피아는 맥의 아버지의 죄를 변호하고 그건 아버지의 아버지 때문이라고 합리화해준다. 다섯 살짜리 미시를 성폭행하고 죽인 변태인간도 그 아버지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뒤틀린 유산은 아담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한다. 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결국 아담을 지으신 하나님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위험성이 있다.
성장과정이 불우해서, 부모의 학대를 받고 자라나서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말은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것이다. 과거의 권위자인 아버지와의 잘못된 관계가 원인으로 작용해 그 이후에 맺어지는 모든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분명히 자기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 건데 자기의 책임은 온데 간데 없다.
물론 어릴 적 환경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일평생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 부모도 어린아이가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하나의 환경이라는 점에서 관계가 좋다면 잘 자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인간은 환경을 다스리는 존재로 부름 받았다.
성장해서 겪게 되는 문제의 원인과 책임을 부모에게서만 찾는다면 좋은 부모 환경 아래서 자란 아이가 범죄자가 되는 것과 나쁜 부모 환경에서도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맥도 맞으면서 자랐지만 자기 애들을 때리지 않고 좋은 아빠가 되었다. 다 부모 탓이라면 낳아주고 사랑으로 길러준 부모의 덕은 아예 없는 것인가? 부모든 자녀든 다 죄로 일그러져 있는 세상에서 부모를 잘 만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부모에 대한 관점에서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독교는 어린 시절에 부모가 어렵게 했다고 상처 받았다면서 부모를 미워하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비록 부족해도 그 부모를 하나님이 내게 선물로 주셨으니 하나님과 부모를 함께 엮어서 존중하고 순종함으로 받들며, 하나님이 내게 최상의 부모를 주신 줄 알고 감사하며 그 부모와의 관계를 증진시킬 것을 요구한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순종할 수 없다고 본다.
소피아는 맥에게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가, 선이나 악의 구분 기준이 뭔가”를 묻는다.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무는 포스트모던적 사고다. 맥은 “내게 이로우냐 아니냐”가 기준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해가 되지만 남들에게 더 많이 유리하게 될 경우도 있는데 그건 악인가, 선인가? 그때 하나님은 누구 편을 들어서 징벌할 것인가? 악한 동기로 했는데 선한 결과를 가져왔거나, 선한 동기로 행했는데 악한 결과를 초래했다면 그것은 어떻게 징벌할 것인가?
인간이 판단하는 선과 악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타락 이후에 인간의 부패한 양심과 왜곡된 인식능력에 기초해 판단하는 선과 악은 자기 의에 불과하며, 사실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10)
인간은 부패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선악을 올바르게 판단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만 가능하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이 다 악하다.
소피아는 맥에게 “선인 악인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생각이 바뀐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사실 그 분별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에게 있으면 날마다 수도 없이 바뀐다. 그러면서 소피아는 맥이 늘 다른 사람을 선하다 악하다 자기의 잣대로 비판해 온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이 세상에 당신같이 신 노릇하는 사람이 70억이다. 내 선이 이웃의 악과 충돌하면 전쟁이다. 늘 서로 대화하는 게 평화다.”라고 말한다.
이쯤해서 관객들은 종교간에도 대화를 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좋다는 뉴에이지 세계관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진리는 배타적이다. 이 사람도 내 아버지, 저 사람도 내 아버지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 영화에서는 자식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어도 징벌하지 않는 모성적 하나님이 강조되고 있다. 소피아는 맥에게 자식 중에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자를 한 사람만 택하고 나머지는 다 지옥에 보낸다면 누구를 택하겠느냐고 묻는다. “딸 케이트가 아빠에게 상처주는 말을 했으니까 보낼 수 있느냐? 아들 조쉬가 아빠를 밀어내고 아빠 말도 안 듣고 몰래 돌아다니고 거짓말을 했으니 지옥에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물으며 괴로운 선택을 강요한다.
소피아의 질문은 천국과 지옥에 가는 기준에 대해 오해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부모 말을 잘 듣고 착해서 천국에 가고, 부모의 말을 잘 안 듣고 속이고 속 썩인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다. 천국과 지옥은 그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나뉜다. 행위로 결정된다는 주장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원천적으로 무효화한다.
소피아의 말은 율법주의적인 세계관이다. 이슬람교가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심판날에 인간의 행위를 겨자씨만큼의 차이도 가려내는 신비한 천칭저울에 올려놓고 심판한다고 본다. 그런데 만약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행위의 횟수와 비중을 계량화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리고 커트라인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 미세한 차이로 지옥에 간다면 그보다 더 억울한 일은 없을 것이다.
맥은 선택하지 못하고 차라리 내가 지옥에 가겠으니 애들은 놔 주라고 말한다. 이 말은 예수님의 희생을 연상시키지만 맥의 이런 태도와 예수님의 희생과는 결코 병치할 수 없는 비중의 차이가 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 보면 파파의 심정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고 소피아가 맥에게 묻는다. 사랑이 많으신 파파 하나님은 아무도 지옥에 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영화 오두막 감상문 下 바로가기 : https://cbck.org/ChengduColumn/View/W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