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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솔제니친이 경험한 공산주의의 망령조회수 : 8247
    • 작성자 : 김경민
    • 작성일 : 2018년 4월 19일 2시 32분 26초
  • 어린시절 아버지의 책장은 문학소녀를 꿈꾸던 내게는 큰 도전이자 동경의 보고였다.
    마치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 등장하던 낯선 방의 오래된 낡은 옷장 처럼 미지의 세계인 나니아로 들어가는 비좁은 통로 같았다고나 할까?

    그 시절 아버지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책들은 대부분 두꺼운 양장으로 커버가 되어 있고 누런 종이에 세로 줄로 읽어야 하는 그런 낯설음이 있었지만 나는 왠지 그런 책들을 접할 때마다 마치 내가 집안 한 구석에 틀어박혀 뜻도 다 모를 두꺼운 책을 심취해 읽어 나가는 소설 속 주인공 어린 제인에어가 된 듯한 착각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 기억을 더듬어보면 종류도 다양했던 것이 톨스토이의 작품이나 헤밍웨이, 헤르만 헤세, 퍼얼 벅, 앙드레 지드 같은 작가들의 소설집이나 프로이드의 책들, 삼국지, 천하통일 같은 역사책들, 그리고 엄마의 여성백과사전, 다양한 요리책들(그당시 어린 동생들과 소꿉놀이 하듯 요리책을 보며 자주 놀았던 기억이 난다.), 한국 단편 소설 전집 등 종류도 제법 다양했다.

    그 중 가끔씩 내 기억에서 이상하게 떠오르는 책 한 권이 바로 오늘 이야기 하고 싶은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이다.
    사실 그 시절엔 상당히 두껍고 뜻모를 용어들이 많아 어렵기만 했던 그 책이 왜 가끔씩 기억에 남는지...아마도 책에 실린 솔제니친의 흑백 사진도 기억의 잔상에 오래도록 남았던 것 같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철이 들어서야 그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그 시절 책에 대한 기억은 그가 감옥에서의 일상을 기록 했던 내용들이 기억의 전부 였지만 오늘 우연히 한 블로그에서 그가 타계한 이후 그에 작품과 사상에 대한 회고의 내용을 담은 글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그가 말하고자 한 이야기는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적용해야 할 공통분모가 분명 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오늘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그 시절 아버지의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은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것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문득 지금 나의 책장에는 어떤 책들이 꽂혀져 있는지 궁금했다. 또한 이다음 나의 자녀들도 부모님의 책꽂이에서 어떠한 소중한 추억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다. 

    위대한 유산은 물질적 가치 보다 정신적 가치가 더 큰 게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늦은 밤 잠을 못 이루게 되어 부족함을 드러내 이렇게 끄적거리게 되었다.

    아래 글은 우연히 솔제니친에 대한 궁금증과 어린시절 기억이 떠올라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기록자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솔제니친이 타계한 후 그가 남긴 명언들을 잘 기록한 내용이라 첨부하기로 한다.

    어쩌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 믿음을 소유한 우리들이 여전히 과거의 유물론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데에 있지는 않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부지런히 깨어서 바르게 분별하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되겠구나 하는 반성을 하며 글을 마치려한다.


    강철군화 

    2008/08/04  


    "공산주의자들은 벽에 부딪힐 때만 후퇴한다"  
     
     
     3일 타계한 솔제니친이 남긴 명언들 
     


    솔제니친, 거인의 생애


    거인이 세상을 떠났다. 구소련 시절 대표적인 반체제 작가이던 알렉산더 솔제니친이 3일 8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포병장교로 참전했던 솔제니친은, 종전 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탈린을 비판한 것 때문에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는 신세가 됐다.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암병동>,<수용소군도> 등 소련강제수용소의 실상을 폭로하는 소설들을 썼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소련에서 출판하지 못한 자신의 작품들을 서방에서 비밀리에 출판한 것이 문제가 되어 1974년 소련시민권을 박탈당하고 국외 추방됐다. 이후 그는 미국 버몬트주에서 망명생활에 들어갔다.

     


    솔제니친이 서방으로 추방될 무렵, 서방세계는 데탕트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솔제니친이 미국 의회, 노조(AFL-CIO), 하버드대학교 등을 돌면서 ‘철의 장막’ 이면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권유린을 고발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전략전술을 폭로하면서, 서방세계 사람들에게 데탕트의 환상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했다. 헬싱키협정으로 데탕트가 절정에 달했던 당시, 솔제니친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서방세계의 계속되는 양보를 비판했고, “공산주의자들은 벽에 부딪힐 때에만 굴복 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그것은 ‘메아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구소련이 붕괴한 후인 1994년, 솔제니친은 국외추방 20년 만에 귀국했다. 솔제니친은 ‘러시아 전통’의 강조를 통해 혼돈 속에 방황하는 러시아인들에게 이념적 구심점을 제공해 주려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20여 년간 일반 러시아인들과 격리된 삶을 살았던 망명객의 말에 귀 기울이기에는 당시의 상황은 너무나 척박했고, 세상은 너무나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스승 솔제니친

     

    내가 솔제니친을 만난 것은 1980년대 중반 대학시절이었다. 솔제니친의 소설 <1914년8월>과 그의 미국 내 강연 내용을 담은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전망>을 통해서였다.

     


    <1914년8월>은 제1차세계대전 직후 러시아군이 독일군에게 대패한 탄넨베르크 전투를 그린 소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 전야 러시아 젊은이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소설이었다. 흔들리는 조국의 운명 속에서 혁명이냐 개혁이냐를 놓고 고뇌하는 러시아 젊은이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꼈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전망>은 작은 문고판 책자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솔제니친의 가르침들은 내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다른 친구들이 마르크스와 레닌, 김일성을 읽으면서 ‘혁명’을 꿈꾸고 있을 때, 나는 솔제니친을 통해 그런 인간들이 세상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어떻게 인간을 짓밟는지, 그들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배웠다.

     

    이후 나는 지금까지 그의 가르침을 잊은 적이 없다. 그는 내게 있어서 좌파이념에 대한 백신주사였고, 이념의 스승이었다.

     

    솔제니친은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불굴의 투사였지만, 그렇다고 서방세계를 공산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서방세계의 물신주의(物神主義)와 방종,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를 위한 투쟁 의지’의 결여를 비판했다.

     
    솔제니친이 공산주의의 대안으로 생각한 것은 러시아 고유의 공동체주의와 러시아정교회 신앙이었다. 그의 가슴 속에는 항상 ‘조국 러시아’,‘어머니 러시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한 마디로 애국자였다. 그의 애국심은 나의 가슴을 울렸다. 그가 공산주의에 반발하면서 서방 세계를 맹종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나는 솔제니친으로부터 그렇게 크게 감동받지 못했을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소련이라는 ‘수용소 군도’에서 나온 솔제니친의 눈에 서방세계는 너무 나이브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피를 토해가며 공산주의의 위협을 경고했다. 그의 경고 가운데 상당수는 다행히 빗나가고 말았다.

     

    솔제니친이 파쇼 독재를 타도한 후 공산독재로 넘어가지나 않을까 가슴 졸였던 포르투갈은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고 의회민주주의 국가로 자리잡았다. 그가 공산주의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으로 간주했던 헬싱키 협정은 인권을 매개로 공산체제를 압박하는 유효한 수단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대단히 견고하게 보았던 공산전체주의체제는 그의 미국 순회강연이 있은 지 10여년 후에 자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솔제니친의 경고가 헛된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수용소 군도'의 체험자인 솔제니친의 공산주의에 대한 경고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둘도 없는 대공(對共)전선의 바이블이다. 그의 어록들은 김정일 집단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삼가 고개 숙여 위대한 자유투사이자 애국자인 솔제니친의 명복을 빌며, 그의 어록들을 소개한다.


    <솔제니친 어록>


    “제발 와서 간섭해 달라”
     


    ● 오늘 여러분과 더불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있는 이 시간, 만일 다른 쪽에서는 사람들이 정신병원에서 신음하며 죽어간다면 그것은 데탕트가 아닙니다.


    ● 여러분이 소련에서 박해받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여러분의 아량과 고상함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지켜주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들도 지키는 것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미래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의 복잡한 혹성 지구 위에는 이제 더 이상 국내 문제라는 것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공산지도자들은 "우리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 우리가 우리 시민들을 평화롭게 목조를 수 있도록 가만히 있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보다 많이 간섭하라. 여러분이 가능한 한 더욱 깊숙이 간섭하라. 제발 와서 간섭해 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내가 가본 몇몇 지방에서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지역들은 미국 역사의 발상지로서 미국을 창건했던 영웅들이 자신의 도덕적인 책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선(善)과 악(惡)의 개념에 대해서는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의 정책은 도덕적인 표준으로 일관되어 있었지요.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도덕적인 조치를 채택했겠습니까?

    여러분의 나라를 창건했던 지도자들은 "우리의 바로 옆에서 노예제도가 판을 치더라도 필요할 땐 노예를 부리는 사람과도 데탕트를 해야 한다.그들이 우리를 침략하지 않는 한..."이라는 식의 논리는 결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자신도 억압에 대해 들고 일어서야 한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면 그것은 결국 여러분의 장래를 동시에 보호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 소련의 공산치하에서 우리들은 이를테면 노예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비록 노예이지만 자유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여러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노예로 부리는 공산주의자에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까?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를 생매장하려고 할 때 제발 여러분들은 공산도당에게 땅을 하는 도구, 그것도 가장 현대화된 굴착기계들을 제공해 주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공산주의자를 도와주면 결국 여러분의 입을 흙으로 채우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 유감스럽게도 어떠한 타인의 괴로움도 우리들의 일시적인 지복(至福)을 어둡게 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 괴로움이 우리들의 신변에 미칠 때까지 우리들 자신에게는 절실히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인간의 천성이 아닐까요.



    “공산주의자들은 벽에 부딪칠 때만 후퇴한다”


    ● 공산주의자들은 '전쟁이 아닌 것이 곧 평화'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전쟁과 평화를 대치되는 개념으로 본 것입니다. 이는 잘못이지요. 단지 반대되는 명제의 일부분을 전체 명제에 대립시킨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공개적으로 전쟁을 벌일 수 없으면 테러를 사용하는 등 배후에서 탄압정책을 써 왔습니다. 빨치산 전쟁, 각종 폭력, 감옥, 집단수용소 등등 그들이 이용하는 수단은 많습니다. 이것이 '평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여러분들은 공산주의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레닌의 모든 '교훈' 중에서 자기 앞에 놓여진 것을 취하지 못하는 자는 바보로 취급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인 것입니다. 만일 가질 수 있으면 가져야 하고, 공격할 수 있으면 공격하라는 것입니다.

    다만 벽에 부딪치면 후퇴하라는 것이지요. 공산지도자들은 확고한 자세만을 존경하고 계속해서 후퇴하는 사람은 경멸하고 비웃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지도자의 연설에서 끝으로 인용하고자 하는 것은 "화해를 모르는 힘은 세계분쟁을 초래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복종만 하는 힘은 결코 힘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데탕트는 미소를 짓거나 구두로 양보하는데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확고한 기초 위에 존재해야 합니다. 이러한 확고한 기초 아래 데탕트가 하룻밤 사이에 파기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야 합니다. 이의 보장을 위하여 협정의 상대편 당사자는 여론과 언론 및 자유선거에 의한 의회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통제가 존재할 때까지는 결코 보장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 소련에서 소위 이념전이라고 부르는 비인도적인 선전을 자행한다면 그것이 무슨 데탕트일까요? 우리가 데탕트를 유지하려면 피차 우호적이어야 하며 이념전을 종식시켜야 합니다.

     
    ●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은 협상을 하는 재주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아무런 양보를 하지 않다가는 막판에 가서 조금 양보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은 마치 승리나 한 듯이 "보라, 그들의 양보를 얻어냈다. 이제 서명할 시간이다"라고 떠들어댑니다.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것은 인도적인 일이다”

     
    ● 오늘날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현대인들이 공산주의의 다양한 행태를 그냥 보고만 있다는 점이지요. 탱크가 부다페스트의 시가를 누비고 체코에서 탱크포가 불을 뿜어대도 아무런 일이 없었습니다. 비공산주의자들이 그런 짓을 했다면 아무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지만,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 서방세계는 자신의 잃어버린 의지력을 되찾기 전에는 아무리 강력한 무기나 수단이라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물질적인 안락을 숭배하는 사회에서는 그러한 각오가 있기 힘듭니다. 따라서 남아 있는 것은 양보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벌려는 시도와 배반만 남습니다.

     
    ● 현상유지의 쇠약한 꿈은 발전을 중단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 현재 동구의 여러 나라에서 공산주의는 이념적으로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점수로 따지자면 빵점이나 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서방의 일부 지식인들은 아직도 공산주의에 대해 관심과 연민을 갖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방세계가 공산권과 대결하는데 가장 어려운 점입니다.

     
    ● 여러분들이 자유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나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 복잡한 세상에서 상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자유를 획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세계의 상당한 인민들이 폭력과 탄압에 신음하고 있는 상황 아래서 여러분 스스로만 자유를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 우리들은 당신들에게 우리의 쓰라린 경험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수많은 죽음과 노예상태라고 하는 우리들이 지불했던 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에게 우리들의 경험을 살려주십사고 간청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당신들 사회는 경고하는 소리를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는군요. 필경 경험이란 것은 도시 전달불가능한 것으로서, 누군들 스스로 체험해야 된다는 사실을 유감스럽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요사이 많은 사람들이 반공주의(anti-communism)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우매한 표현입니다.

    마치 공산주의가 무슨 근거가 있는 독창적인 것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또 반공주의가 공산주의를 대상으로 한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공산주의의 어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때문에 나는 이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는 어느 누가 뭐라고 해도 정말 비(非)인도적인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행위는 바로 인도적인 일이 됩니다. 다시 말해 비인도적인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인간답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선(善)과 악(惡)의 관념을 망각시키려고 책동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우리 영혼의 저항입니다.


    “공산주의는 과학이 아니다”

     
    ● 전문가들의 객관적이고 정확한 통계에 의하면 러시아 혁명 이전 80년 동안 연간 약 17명이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혁명운동의 시대로서 짜르를 암살하고자 하는 시도가 많았던 때입니다. 수십년 동안 지속되었던 스페인의 종교재판도 그 절정기에는 매달 10명 정도 밖에는 처형하지 않았습니다.

    '수용소 군도'에서 나는 '체홉'이 1920년 출판했던 저서를 인용한 바 있습니다. 체홉은 이 책에서 1918~1919년 동안 매달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재판도 받지 않고 처형되었다는 '혁명활동'을 자랑스럽게 보고했습니다. 체홉이 지적한 이 수치가 완벽한 것인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아 유감스럽습니다. 그러나 체홉이 이러한 내용에 관해 역사가 조명하기 이전에 스스로 집필한 것은 사실입니다.

    스탈인의 테러가 절정에 달했던 1937년과 1938년에 처형된 사람들은 월별로 따져보면 1개월 동안 약 4만 명 이상이나 됩니다. 이러한 시기에 민주적인 서방국가들이 어떻게 러시아와 동맹을 맺을 수 있었을까요?
     

    "마르크스주의는 결코 과학이 아니다"


    이 점은 소련의 인텔리들도 전적으로 확실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의 일종으로 본다면 그것은 조크로밖에 볼 수 없지요. 그것은 물리학이나 수학 및 기타 자연과학과 비교할 수 없을 뿐더러, 일반 사회과학처럼 어떤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예측하지 못합니다.

    사실 공산주의는 그 어떤 예측도 하지 못했지요.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선전 뿐이지요.즉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이 들고 일어나 부르조아 계습을 타도하게 되면 그때는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사회가 된다는 것뿐입니다. 마르크스나 엥겔스, 레닌의 환상은 모두 이 예측을 성사시키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누구도 그러한 사회가 어떤 형태를 갖고 등장할 것인지에 관해 보다 뚜렷하게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찬란'하고 '행복'하며 모든 것이 인류를 위하는 방향으로 될 뿐이라고 말했을 따름입니다.


      ● 거듭 말하거니와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는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집단수용소를 만들어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역시 최초로 인질 제도를 도입, 자신들이 추적하고 있는 인사를 체포하지 못하면 그의 가족이나 그와 가까운 사람을 마구 체포하여 사살해 버렸습니다.
     

    ● 스웨덴의 사회주의 지도자인 오라프 팔메는 "공산주의가 생존해 나가려면 민주제도를 채택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는 마치 이리가 살아나가려면 고기를 먹지 말고 양처럼 순해져야 생존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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