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함을 추구하며-2(4)
-OAO(Original Autographs Only) 교리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4)
OAO 교리는 언제, 왜, 누구에 의해서 출현했을까? 1810년에 카톨릭 사제인 요한 레온하르트 허그(John Leonhard Hug)가 라틴어로만 된 28페이지 분량의 작은 책 "De antiquitate Codicis Vaticani commentatio"(바티칸 사본의 고대성에 대한 연구)를 내놓았다. 학자들은 그것을 샀고 고문서학자들과 본문 비평가들이 바티칸 사본을 보길 원했다. 그러나 바티칸은 예수회 추기경 안젤로 마이(Angelo Mai)의 보호아래 엄격히 보관했다. 1475년 바티칸 도서관에 마법처럼 나타난 문서인 '바티칸 사본'이 이제 개신교도들에게 보존된 성경을 대체하기 위해 요구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의 책일 뿐이었다. 본문학자들은 그것과 비교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고 성경 변개를 정당화 하기 전에 또 다른 본문이 필요했다. 1843년 콘스탄틴 티셴도르프(Constantin Tischendorf)는 교황 레오 13세와 예수회 추기경 안젤로 마이와 상의한 후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1844년 그는 충분한 자금을 모은뒤 허가를 받기 위해 카이로로 직행한뒤 사막을 가로질러 275마일을 달려 성 캐서린 수도원에 도착했다. 그는 거기서 "우연히" 당시 모든 학자들이 찾던 두번째 고대 그리스어 성경을 발견했다. 그는 43장을 훔쳐 작센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코덱스 프리데리코-아우구스타누스(codex friderico-augustanus)가 되었다. 1859년 러시아 정부의 도움으로 티센도르프는 "코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 또는 "알레프(aleph)"라고 불리는 이 책을 성 캐서린 수도원에서 카이로로, 그 다음 러시아로 가져왔다. 하지만 나머지 페이지는 이제 어둡게 처리되었다. 그 후 그는 1862년부터 조판된 복사본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바티칸을 두번이나 방문했지만 실패한 후 마침내 교황은 티셴도르프에게 바티칸 사본을 검토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고 그는 1867년에 조판된 사본으로 이를 출판했다.
이제 고문서학자들이 다퉈야할 두 개의 사본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웨스트코트와 호르트가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때부터 호르트는 새로운 이론에 대해 치열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즉, 시나이 사본과 바티칸 사본에서 단어를 더하거나 빼기로 합의한 것을 그들의 "새로운"그리스어 본문으로 삼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영국 성공회에는 두 개의 의회와 결정 기관이 있었는데 요크에 있는 소규모 북부 의회와 캔터베리에 있는 대규모 남부 의회가 그것이다. 웨스트 코트와 호르트는 영어 성경을 개정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다. 북부 의회는 거부했지만 1870년 2월 10일, 남부 의회는 승인했다.
위원회가 작업을 시작하자 위원들은 비밀리에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변경된 본문을 받았는데, 그 본문은 주로 시나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바탕으로 했다. 그들은 그 근본적으로 변경된 본문을 바탕으로 개정판을 만들었지, 전통적으로 보존된 성경 본문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
이제 1881년이 되었다. 8월까지 그들은 영어 성경의 새로운 "개정판"을 공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는 어떨까? 원래 성도들의 신앙 고백은 하나님이 그들의 영어 성경의 말씀을 섭리적으로 보존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단어,구절,전체 구절을 제거하고 단어를 바꾸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막 수도원에서 발견한 텍스트와 바티칸이 꽁꽁 숨긴 또 다른 텍스트에 근거했다. 그것은 신실하고 박해받는 신자들이 전해준 성경에 근거하지 않았다. 235년 동안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1881년 8월 이전에 영어 개정판이 서점에 나오기 전에 교리를 바꿔야 했다.
그보다 불과 4개월 전인 1881년 4월에 프린스턴 대학 교수 두명이 보존에 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바꾸는 작업에 나섰다. 이 두 사람은 프린스턴 신학교의 학장인 아치볼드 알렉산더 호지(Archibald alexander hodge)와 신학교수인 벤저민 브레킨리지 워필드 (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였다.
그들은 영감과 보존의 교리를 수정했다. "우리는 공인 본문이 아니라, 오직 자필 원본 만이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신앙의 진술을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대신, 신앙의 진술을 바꿨다. 그래서 4개월 후 웨스트코트와 호르트가 난도질한 신약성경이 출판되었을때, 그들은 신학적으로 킹제임스 성경을 거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겼다.
현재 전 세계 교회에서 OAO(Original Autographs Only)가 정통 교리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섭리적 보존(Providential Preservation)교리는 378년 된것이다. 자필원본만 무오(Original Autographs Only)교리는 143년밖에 되지 않았다. 영어 개정판보다 오래되지 않은 교리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며 완벽한 타이밍에 출현했다. OAO는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티셴도르프와 트리겔레스, 그리고 시나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성경을 뒷받침 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리였다. 이것이 현대 교리의 유래며 현대 성경의 유래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우리의 믿음을 두고 있다. 그들은 의심에 그들의 믿음을 두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권능을 믿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본문 비평가들이 자신들이 어떤 텍스트를 믿어야 되고 그렇지 않아야 될지 정해줄 것 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그것을 기독교 신앙이라고 호도하며 기독교 의심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책에 100%믿음을 두고자 한다. 그들은 어떤 것에도 100%의 믿음을 두고자 하지 않는다. 닭이 먼저인가?달걀이 먼저인가? 섭리적 보존인가?자필원본만 무오인가? 어느것이 먼저인가? 성경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닭이 먼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섭리적 보존과 킹제임스만이 먼저였다. 자필원본만 무오 교리는 절대 신앙의 진술이 아니라 의심의 진술이다.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책을 얻거나, 아니면 학자들을 믿고 애초부터 의심속에 매몰될지.
글을 맺으며 우리가 특히, 이 성경관련문제에 관해 시시콜콜하게 따지고 들고 싸우는 것은 만사 다 제쳐두고서 구약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진리를 위해 무수한 사람들이 흘린 그 무고한 피 앞에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된다는 아주 최소한의 양심을 위해서다. 특히나 죄를 알지 못한 예수님이 죄인인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모든 피와 물을 쏟으신 그 대신속죄의 비길데 없는 사랑과 공의 앞에 우리는 차마 거짓 증언 할수 없으리라.
사실 이 주제에 관해 글을 쓰려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 근본주의의 역사와 거기에 결부된 미국문화에 관해 글을 쓰려고 했으나 교리와 신학의 변질, 기독교 붕괴의 근본적인 원인이 성경문제에 있기에 한번쯤은 이 주제에 관해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될거 같아 예상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해 글을 적게 되었다. 그마저도 우리의 신실한 형제 데이빗 대니얼즈 형제의 책에 수록된 챕터 한 부분을 편역한것에 불과하다. 아무튼 이 부족한 글을 읽으면서 시간낭비가 아닌 아주 조금이라도 유익이 되었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다.
※ 이 글을 작성하며 데이빗 대니얼즈 형제의 책 51 Reasons Why the King James 챕터 155 The OAO doctrine was Created to Reject it 을 편역 및 Did the Catholic church give us the bible? 참조 및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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