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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태복음 24장의 올바른 해석조회수 : 14718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년 7월 23일 14시 54분 23초
  • 이 글은 원래 김문수 목사님이 쓰신 것인데
    최근에 출간을 위하여 허락을 받고 제가 조금 내용을 추가하였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보는 지혜가 있으니 잘 보시고 큰 평강을 누리기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마태복음 24장의 올바른 해석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분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바를 기록한 복음서이지만, 각 복음서가 목표로 하는 수신자(target audience)와 기록된 목적과 성격은 각기 다릅니다.
     
    그중에서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을 읽을 때에는 항상 그 말씀의 일차적인 수신자는 유대인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자료실에 있는 정동수 목사님의 마태복음 강해 첫 부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마지막 날들의 표적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본문 말씀이 어떤 맥락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리고, 이것을 신약 교회에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 장에 나오는 사건들을 신약 교회와 연관 짓다 보니 부분 휴거설이니 환난 중 휴거설, 환난 후 휴거설 등의 이론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4장은 교회의 휴거 사건을 다루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것이 미래형(I will build)으로 기술되어 있을 뿐, 이 당시에는 아직 신약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마태복음 24장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아직 신약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님의 침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연합되었습니다(고전12:13).
     
    이번 글에서는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마지막 날들에 대한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으며, 그것이 누구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인지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나서 가실 때에 그분의 제자들이 성전의 건물들을 보여 드리려고 그분께 나아오매
     
    1절에 ‘성전’(temple)이 나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전은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이고, 다른 하나는 신약 교회 성도들을 말합니다(고전3:16). 일부 대형 교회에서는 분당 성전, 강남 성전, 과천 성전 등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성전이 아니라 예배당 건물일 뿐입니다. 2절에 나오는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라는 표현으로 볼 때 이것은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 건물을 말합니다. 이 말씀이 신약 교회가 환난기에 들어가면 종교적 박해가 일어나서 어느 지역교회의 건물이 파괴된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땅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을 말합니다.
     
    1절에 나오는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 제자들이며 그들은 신약 교회 성도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 장엄한 모습을 자랑하려고 했습니다.
     
    어떤 이들이 성전을 가리키며 그것이 좋은 돌과 예물로 꾸며진 것을 말하매(눅21:5)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아니하느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4:2). 실제로 AD 70년 로마의 타이투스(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불길에 금이 녹아내려 돌들 사이에 스며들자 타이투스는 모든 기둥과 돌들을 다 파헤쳐서 금과 보석들을 찾아내도록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돌들이 깨어지고 가루가 났으니 돌 위에 다른 돌이 겹쳐지지 않을 정도로 파괴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 그분께서 올리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은밀히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에게 말씀해 주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들이 있으리이까? 또 주께서 오시는 때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이리이까? 하니
     
    이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적 배경은 올리브 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메시아가 큰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올 때에 올리브 산에 임하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 자체가 ‘유대인들’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날에 그분의 발이 예루살렘 앞 동쪽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설 것이요, 올리브 산이 거기의 한가운데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므로 심히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며 그 산의 반은 북쪽으로, 그 산의 반은 남쪽으로 이동하리라(슥14:4).
     
    ‘유대인 제자들’은 자기들의 신앙생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다는 말씀에 걱정이 되어서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며, 주께서 오시는 때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정확히 어느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2절에서 ‘주께서 오시는 때’란 유대인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러 오실 때’를 말합니다(행1:6). 제자들이 말하는 그 때는 예수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시고 성도들의 몸이 공중으로 채여 올라가는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관복음에는 ‘교회의 휴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교회를 대상으로 기록된 요한복음에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믿는 자들을 데려가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요14:3).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
     
    개신교회의 많은 분들은 마24:2를 인용하면서 마태복음 24장은 과거에 일어난 것이지 미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폅니다(과거적 해석 방법). 이 말이 사실일까요? 아닙니다. 마24:2는 1차적으로 AD 70년에 이루어졌지만 24장의 나머지 내용은 AD 70년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시는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3절에 있는 유대인 제자들의 질문 즉 “세상 끝의 표적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자세히 보기 바랍니다. 아직 세상 끝이 임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태복음 24장은 미래에 유대인들에게 이루어질 일들을 다룹니다.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라, 하며 많은 사람을 속이리라.
     
    5절에서 ‘그리스도’란 히브리어로 ‘메시아’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거짓 종교의 지도자들 중에는 자기가 신의 아들이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메시아"라고 하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 말씀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 또 너희가 전쟁들과 전쟁들의 소문을 들을 터이나 주의하여 불안해하지 말라. 이 모든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왕국이 왕국을 대적하여 일어나고 곳곳에 기근과 역병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고통의 시작이니라.
     
    6-8절은 마지막 날에 있을 전 세계적인 재앙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교회나 신약 교회 성도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재앙이 시작되기 전에 교회는 먼저 휴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은 신약 교회 성도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이 땅에 남아 있을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휴거 이야기는 하지 않고, 그들에게 닥칠 ‘야곱의 고난의 때’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아, 슬프도다! 그 날이 커서 그것과 비길 날이 없나니 그 날은 곧 야곱의 고난의 때로다. 그러나 그가 그 고난에서 구원을 받으리로다(렘30:7).
     
    개역성경은 6절에서 ‘전쟁과 전쟁의 소문’이라고 번역하였고 이를 근거로 많은 분들이 여기의 ‘전쟁과 전쟁’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개역성경은 복수를 제대로 번역하지 않아서 ‘전쟁과 전쟁’이 된 것이지 원래는 ‘전쟁들과 전쟁들’입니다.  
     
    [9] 그때에 그들이 너희를 넘겨주어 고통 받게 하고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해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9절에서 ‘너희’란 이스라엘 민족 즉 유대인들을 말하고, ‘민족들’(nations)이란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a nation’으로 등장하며, 이방 민족들은 복수형인 ‘nations’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마지막 날들에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대대적인 핍박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7년 환난기에 들어가면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물이 피가 되고, 전쟁이 일어나는 등 전 세계적인 재앙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중에서 이방 민족들이라고 무사할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민족들에게 임할 고난보다는 유대인들이 겪게 될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10]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고 서로 배반하여 넘겨주며 서로 미워하고
    [11] 많은 거짓 대언자가 일어나 많은 사람을 속이며
    [12] 불법이 성행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서로 배반하고, 미워하고, 속고 속이며, 불법이 성행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이 땅에는 불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님께서 그것을 저지하고, 막고 계십니다(살후2:6-8).
     
    너희는 그가 그의 때에 드러나게 하려고 무엇이 저지하고 있는지 지금 아나니 불법의 신비가 이미 일하고 있으나 다만 지금 막고 있는 이가 길에서 옮겨지기까지 막으리라. 그 뒤에 저 사악한 자가 드러날 터인데 주께서 자신의 입의 영으로 그를 소멸시키시고 친히 오실 때의 광채로 그를 멸하시리라(살후2:6-8).
     
    그런데 막고 있는 이가 길에서 옮겨지면 불법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될 것이고, 그 뒤에 저 사악한 자(that Wicked 대문자임)가 드러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지금 모든 믿는 자들 안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길에서 옮겨진다는 것은 신약 교회가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완성되면, 신약 교회는 휴거되고 교회 시대는 끝이 납니다. 그 이후로는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연결하는 성령님의 사역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이 이 땅을 떠나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그분의 사역의 방향이 이제는 교회를 세우고 자라게 하고 보호하는 사역에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인 유대인들을 향한 사역으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께서는 14만 4천 명의 봉인된 유대인들을 사용하여 왕국의 복음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계7장).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교회가 휴거된 이후에 불법의 신비가 활약하고 저 사악한 자가 온 세상을 지배할 때, 그 모든 핍박을 피해서 숨고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서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서 구원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진 환난과 핍박 속에서 적그리스도에게 붙잡혀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몸을 가지고 메시아 왕국(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많은 교회들은 여기서 ‘끝’을 ‘목숨을 다하는 끝’으로 해석하고는 죽도록 교회에 충성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여기의 ‘끝’은 6절의 ‘끝’과 14절의 ‘끝’처럼 7년 환난기의 끝을 말합니다. 목숨이 다하는 때가 결코 아닙니다.
     
    [14]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되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14절에 ‘복음’이 나옵니다. 이 복음은 교회 시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은혜의 복음이 아닙니다(행20:24).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결코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또한 내가 나의 생명도 내게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니 이것은 내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님께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기쁨으로 끝마치고자 함이라(행20:24).
     
    14절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러 오신다는 것을 선포하는 ‘왕국의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봉인된 14만 4천 명의 유대인들을 통해서 온 땅에 선포될 것입니다(계7:4). 많은 선교 단체들은 “우리가 아직 땅 끝까지 복음을 못 전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 오시는데, 아프리카 산간오지 마을, 공산주의 국가, 이스라엘, 모슬렘 국가에까지 복음을 다 전하면 그제야 예수님이 오실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신약 시대의 은혜의 복음과 마지막 날들에 온 세상에 선포될 왕국의 복음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에 빠지는 것입니다. 저 역시 선교단체에 있을 때에는 정말 그런 줄로 알고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하자”, “열심히 전도하고 제자를 양성해서 세상을 변화시키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에 매진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을 바르게 나누지 못하고,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말씀을 신약 교회에 적용하고, 성경 말씀을 영적으로,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바람에 빚어진 결과입니다.
     
    개역성경은 이것을 ‘천국 복음’이라고 또 오역하여 본문이 말하는 바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15] 그런즉 대언자 다니엘을 통해 말씀하신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너희가 보거든 (누구든지 읽는 자는 깨달을지어다.)
     
    15절에 나오는 대언자 다니엘은 신약 교회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국을 이 땅에 세우실 것을 대언했습니다(단2:44). 다니엘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임할 전 세계적인 환난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네 백성’)이 겪을 환난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대언하고 있습니다.
     
    이 왕들의 시대에 [세상 끝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왕국을 세우실 터인데 그것은 결코 멸망하지 아니하리이다. 그 왕국은 다른 백성에게 남겨지지 아니하며 이 모든 왕국들을 산산조각 내어 소멸시키고 영원히 서리이다(단2:44).
     
    그때에 [대환난기에] 네 백성의 자손들[유대인들]을 위하여 일어서는 큰 통치자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고난의 때가 있으리니 그것은 민족[이스라엘 민족]이 있은 이래로 그때까지 결코 없었던 고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유대인]이 구출을 받되 책에서 발견된바 기록된 모든 자가 구출을 받으리라(단12:1).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미리 해 주신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차 임할 통치자[적그리스도]의 백성이 그 도시[예루살렘]와 그 성소를 파괴하려니와 그것의 끝에는 홍수가 있을 것이며 또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폐하게 하는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하리니 그가 그 이레의 한중간에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하며 또 가증한 것들로 뒤덮기 위하여 심지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것을 황폐하게 할 것이요, 작정된 그것이 그 황폐한 곳에 쏟아지리라, 하니라(단9:26~27).
     
    [16]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들로 도망할지어다.
     
    16절에 구체적으로 ‘유대’라는 지명까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국이나 한국에 있는 신약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유대 지방에 있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십니다.
     
    개역성경은 여기의 ‘산들’을 역시 단수로 ‘산’으로 번역했고 그 결과 많은 목사들이 영해를 하면 여기의 ‘산’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에 충성/봉사해야 환난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서 그렇게 믿는 단순한 성도들이 매우 많습니다.
     
    [17] 지붕에 있는 자는 자기 집에서 무엇을 취하려고 내려가지 말며
     
    17절의 지붕은 한국의 초가지붕, 기와지붕, 아파트 옥상이나 유목민들의 천막 꼭대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집의 지붕은 평평하게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쉬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 장소입니다.
     
    그들이 밀려드는 무리로 인해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없으므로 그분께서 계신 곳의 지붕을 벗기고 부수어서 마비 병 환자가 누운 자리를 달아 내리거늘(막2:4)
     
    이튿날 그들이 계속 길을 가다가 그 도시에 가까이 갔을 때에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여섯 시쯤에 지붕에 올라가니라(행10:9).
     
    [19] 그 날들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영해에 빠진 목사들은 여기의 ‘아이 밴 자들’은 ‘아직 전도하지 못해서 열매가 없는 자들’이라고 말하며 ‘젖 먹이는 자들’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사실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의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은 실제로 아이 밴 유대인 여인들과 젖먹이를 둔 유대인 여인들을 말합니다. 아이들 때문에 적그리스도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 여인들이 큰 고통을 당할 것을 예수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20] 그러나 너희의 도피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너희는 기도하라.
     
    20절에 ‘겨울’이라는 특정 계절이 언급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겨울이면 지구의 남반부는 여름이기 때문에 남반부 사람들은 추위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염려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초점을 두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도망가는 데 불편을 느낄 민족은 유대인들 밖에 없습니다. 이것 역시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물론의 여기의 ‘너희’도 유대인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영해하여 ‘겨울’은 ‘믿음이 식은 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의 ‘겨울’은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유대의 겨울을 뜻합니다.
     
    [21] 그때에 큰 환난이 있으리니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때까지 그런 환난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이 짧아지지 아니하면 어떤 육체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로되 선택 받은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이 짧아지리라.
    [23]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이르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하거나, 저기 있다, 해도 그 말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대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들과 이적들을 보여 할 수만 있으면 바로 그 선택 받은 자들을 속이리라.
     
    21절에 큰 환난(great tribulation)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Great Tribulation’이나 ‘Tribulation’이라는 표현이 없고, ‘tribulation’이나 ‘great tribulation’만 나옵니다. 그 환난이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던 엄청나게 큰 환난이기 때문에 ‘great tribulation’이라고 하는 것이지, 고유명사로서 ‘Tribulation’이 따로 있고,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Great Tribulation’이라는 기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신앙적인 핍박이나 고난을 당하는 일이 있는데 그런 환난(tribulation)과 구별하기 위해서 편의상 ‘Tribulation’이라고 첫 자를 대문자로 표기해서 구별하는 것뿐입니다. 7년 환난과 후반부 3년 반의 대환난을 나누어서 전반기 3년 반은 가볍게 무시해도 좋을만한 사소한 환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면 전반기 3년 반의 환난도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여러 이민족들(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로부터 수많은 박해와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야곱(이스라엘)의 고난의 때’에는 지금까지 그들의 조상들이 겪었던 것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핍박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큰 환난’(great tribulation)이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전반기 3년 반 동안에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는 환난도 겪겠지만, 특별히 후반기 3년 반 동안은 그것에 덧붙여 적그리스도로부터 큰 핍박을 받게 되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큰 환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2절과 24절에는 ‘선택받은 자들’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진행되는 문맥을 볼 때 이들 역시 신약 교회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특별한 목적, 사역, 복을 위해서 사람이나 민족을 선택하십니다. 이것은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로 예정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선택받은 자들이란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말합니다(신7:7; 사44:1, 45:4). 거짓 메시아와 거짓 대언자들이 속이려고 하는 대상이 누구겠습니까?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사장 왕국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을 말합니다(출19:6). 다른 민족들은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언약을 받은 적도 없고, 메시아에 대한 소망도 없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친히 사랑하시고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다른 백성보다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모든 백성들 중에서 수가 가장 적으니라(신7:7).
     
    그러나, 오 나의 종 야곱아,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사44:1)
     
    내가 나의 종 야곱 곧 나의 선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노라(사45:4).
     
    [27] 번개가 동쪽에서 나서 서쪽까지 번쩍이는 것 같이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30] 그때에 사람의 아들의 표적이 하늘에 나타나고 그때에 땅의 모든 지파가 애곡하며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가지고 하늘의 구름들 가운데서 오는 것을 보리라.
     
    27절에는 예수님께서 번개가 번쩍이는 것처럼 누구나 볼 수 있게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의 성도들을 데려가시는 공중 강림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왕들의 왕, 주들의 주로서 큰 영광과 권능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은 지상 강림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공중 강림과 교회의 휴거는 여기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31]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자기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선택 받은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함께 모으리라.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집할 때 나팔을 사용했습니다.
     
    너는 너를 위해 은 나팔 두 개를 만들되 한 덩어리에서 만들고 그것들을 사용하여 집회를 소집하며 진영을 이동하게 할지니라(민10:2).
     
    마태복음 24장의 나팔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소집하는 나팔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심판의 나팔이 아닙니다. 그리고 살전4:16-17이나 고전15:51-52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팔, 마지막 나팔과도 다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와 고린도전서의 나팔 소리가 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의 부활과 살아있는 성도들의 몸이 변화되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마태복음 24장에는 부활(resurrection)과 몸의 변화(translation) 사건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모으는 나팔이지, 신약 교회 성도들의 부활과 휴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32] 이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것의 가지가 아직 연하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너희가 아나니
     
    32절의 무화과나무는 글자 그대로 무화과나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가지와 잎사귀를 보고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자연 현상을 보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닥칠지 예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현상들을 볼 때, 그것을 통해 마지막 날들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또 [너희가]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리니 오늘은 날씨가 궂으리라, 하는도다. 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가 능히 하늘의 모습은 분별하거니와 시대의 표적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마16:3)
     
    굳이 여기서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33절에서 ‘이 모든 일들을 볼 때에’ 그 때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했지, ‘무화과나무를 볼 때에’ 그 때가 가까이 온 줄로 알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0]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질 것이요,
    [41] 두 여자가 방앗간에서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지리라.
     
    40-41절에 나오는 붙잡혀 가는 자, 남겨진 자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을 했습니다. 개역성경은 ‘붙잡혀 가고’를 ‘데려감을 당하고’라고 번역했고, ‘남겨지는 것’을 ‘버려지는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가는 것이 공중으로 휴거되는 것인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마24:40, 개역)
     
    그러나 누가복음 17장 37절을 보면 그들이 붙잡혀 가는 곳은 독수리 떼들이 모이는 곳, 시체들이 있는 곳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붙잡혀서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붙잡혀 가는 자들은 적그리스도의 군대로 끌려가서 전쟁터에서 죽어 육식성 새들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계19:17-18). 이것은 신약 교회의 휴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로이니이까? 하니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디든지 시체가 있는 곳이면 독수리들이 거기로 함께 모여들리라, 하시니라(눅17:37).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 안에 서서 하늘 한가운데로 날아가는 모든 날짐승을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너희는 와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만찬에 함께 모여 왕들의 살과 대장들의 살과 용사들의 살과 말들의 살과 말 탄 자들의 살과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나 작은 자나 큰 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계19:17-18).
     
    지구의 동쪽 절반이 낮이면 그 반대편은 밤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는 지구의 동반구와 서반구에서 일어날 일을 모두 다루기 때문에 낮에 일하다가 붙잡혀 가는 사람과 밤에 자다가 붙잡혀 가는 사람 이야기가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유대 지방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낮에 들에서 일하거나 맷돌을 가는 이야기는 나오지만, 누가복음에 기록된 밤중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함께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질 것이요(눅17:34)
     
    [45] 그런즉 자기 주인으로부터 그의 집안사람들을 넘겨받아 다스리며 제 때에 그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줄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이 누구냐?
    [46] 그의 주인이 올 때에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도다.
    [47]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를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을 치리자로 삼으리라.
    [48] 그러나 그 악한 종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내 주인이 오는 것을 늦추시는구나, 하며
    [49] 자기 동료 종들을 때리고 술 취한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 시작하면
    [50] 그가 그를 기다리지 않는 날 그가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51] 그를 잘라 내고 위선자들과 함께할 그의 몫을 그에게 지정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이것을 비유나 상징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읽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굳이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믿음의 형제들에게 자기가 깨달은 말씀을 나누어주고 가르치는 것이라고 영적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으면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숭배하도록 강요하고, 짐승의 표를 받게 해서 모든 상거래를 통제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알고 그와 손을 잡겠지만, 3년 반이 지난 후에는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선포할 것입니다(살후2:4).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하나님으로 경배하도록 하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아닌 적그리스도에게 예배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를 거부하고 숨어 지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의 표를 받은 자 외에는 매매가 금지되기 때문에 그들은 숨어서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할 겁니다. 다른 생활용품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참을 수 있겠지만,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적은 양의 식량을 서로 나누어 먹고 살려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기초한 동족들에 대한 사랑이 필수적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자들은 자기가 맡은 사람들에게 신실하게 양식을 나누어 주겠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자들은 자기 배만 채우고 오히려 동족들을 핍박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기에는 예수님의 동족인 유대인 어린 아이에게 물 한 잔을 주는 것조차도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대단한 선행으로 간주될 것입니다(마10:42; 25:40). 사람들은 환난기에도 믿음으로 구원받지 선행으로 구원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그것이 선행이라는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환난기에 들어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그런 선행을 할 수가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때에 믿음에서 난 신실한 삶을 사는 종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 왕국을 세우러 이 땅에 다시 오셨을 때, 그들 중에서 믿음을 가지고 신실하게 행한 자들은 천년왕국에서 예수님의 재산을 맡을 치리자가 되겠지만(47절), 믿음이 없어서 악하게 행한 자들과 위선자들은 심판을 받아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51절). 이것을 보면 이 말씀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 신약 교회에 대한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보배로운 피로 죄의 삯을 대신 지불하셨기 때문에, 신약 교회 성도들은 죄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신약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상급에 대한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바울을 포함한 신약 성도들]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고후5:10).
     
    그리스도의 심판석은 신약 성도 중 어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보상을 더 많이 받느냐 하는 것이 결정되는 자리이지 죄에 대해 형벌을 받는 심판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신실한 종, 악한 종에 대한 말씀을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 적용하여 열심히 선한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게으름 피우고 신앙생활을 불성실하게 하면 형벌을 받는다고 가르치면 안 됩니다. 이것은 환난기에 이 땅에 남아있게 될 유대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마태복음 24장을 살펴보면서 과연 이것이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이것이 마지막 날에 이 땅에 남아있을 유대인에 대한 말씀이라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유대인 제자들, 예루살렘 성전, 올리브 산, 유대 지방, 안식일, 택한 자들, 거짓 메시아, 민족들의 핍박, 왕국의 복음, 큰 환난, 소집 나팔, 동족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종 등…
     
    여기에 기록된 말씀 중에서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이 있습니까? 교회의 휴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말씀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만약 마태복음 24장이 신약 교회의 휴거를 이야기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의 부활과 살아있는 성도들의 몸이 변화되는 사건도 함께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태복음 24장에서 그에 대한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마태복음 24장은 신약 교회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 환난기에 이 땅에 남아있을 유대인들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 말씀을 가지고, 부분 휴거설이나, 환난기 중간 휴거설이나 환난 후 휴거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 글은 마태복음 24장이 누구를 향한 말씀인가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각 구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했습니다. 자세히 다루지 못한 부분들은 정동수 목사님의 마태복음 강해를 보시기 바랍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는 그 말씀이 일차적으로 어느 시대, 누구를 향하여, 어떤 목적으로 하신 말씀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옆집 우편함에 꽂힌 합격 통지서를 꺼내 보고 자기가 수신자도 아니면서 혼자서 실실거리며 좋아하거나, 이웃집 우편함에 들어있는 법원 소환장을 뽑아들고 그것이 자기한테 온 것인 줄 알고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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