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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 조회수 : 10369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년 7월 23일 14시 57분 45초
  • 이 글은 원래 김문수 목사님이 쓰신 것인데
    최근에 출간을 위하여 허락을 받고 제가 조금 내용을 추가하였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보는 지혜가 있으니 잘 보시고 큰 평강을 누리기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               
     
    “성경 해석이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정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 해석 방법은 일반적으로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일차적으로 본문 내에서 문법적 해석을 바르게 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 말씀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수신자, 기록 목적 등을 살펴보며 역사적 해석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문법적, 역사적 해석이 먼저 바르게 된 다음에라야 거기서 올바른 신학적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위의 내용은 지금으로부터 약 14년 전에 저와 함께 성경을 공부하던 분들로부터 얻어들은 내용입니다. 당시 그분들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분들이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성경 신자들(Bible believer)과는 일부 견해가 다를 수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성경 말씀은 일차적으로 그 문맥 안에서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는 데에는 입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저는 한창 Q.T.를 열심히 하면서 “이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주는 개인적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관점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경 말씀에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개인적 의미(사적인 해석)’를 발견하는 데에 몰두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신명기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가 신명기 26장 12절에서 아주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개역: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신26:12)
     
    그것은 지금 나에게 있어서 신명기 26장 12절에서 말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누구인가, 나는 누구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한 끝에, “객(나그네)은 하늘나라를 영원한 본향으로 두지 못한 자요, 고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자요, 과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시지 못한 자다.”라는 (그 당시로서는) 참으로 기발한 생각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적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묵상을 통해 깨달은 바를 함께 성경 공부하던 분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다른 분들이 이런 묵상에 대해 칭찬을 하지는 않더라도 동의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것은 성경 말씀을 ‘영해’하는 것이라고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의 말에 의하면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읽지 않고, 자꾸 거기에 무슨 오묘한 뜻이 있지 않나 생각하고 영적인 의미만을 찾다보면 결국에는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지 못하고 말씀을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맨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일차적으로 본문의 문맥 가운데서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는 조언을 듣게 된 것입니다.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의 의미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문법적 해석
    이것은 성경 본문의 문맥에 맞추어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택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다고 말씀하시면(창1장; 출20:11), 그것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6일간의 창조’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엿새 동안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읽고 받아들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간혹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6일 만에 어떻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느냐? 60만년이나, 6억년이 아니겠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충분히 그렇게 하실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분명히 ‘six days’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6일’이라고 이해합니다. 만약 그 기간이 60만년이었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는 데 60만년이 걸렸다.”라고 기록하셨을 겁니다.
    요한계시록 20장 2~7절에는 한 절마다 한 번씩 ‘천 년’이라는 단어를 써서 분명히 천년왕국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저는 이것 역시 문자적으로 천 년이지, 막연히 추상적으로 ‘오랜 기간’이나 ‘영원토록’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 절에서 ‘천 년 동안’, ‘천 년이 끝날 때’, ‘천 년이 다 차매’라고 기록하여 그 기간이 유한한 기간으로서의 천 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은 단어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자적 해석은 물론, 시제, 태, 단수/복수 등에 대한 문법적인 검토, 수사법(직유/은유/시적표현), 비유 등도 함께 고려하여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문법적 해석이 반드시 글자 그대로의 경직된 문자적 해석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는 신자들을 조롱하는 자들은 “성경이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다.”, “시편에서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위다.”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며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법적 해석에는 이런 수사적 표현에 대한 고려도 포함됩니다. 즉 성경에 나타난 명백한 비유나 수사적인 표현까지 억지로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안 됩니다.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기대면서 “당신의 가슴은 푸른 풀밭이오.”라고 말하면, 이것은 그의 품이 편안하고 아늑하게 쉴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지 그 사람의 가슴 피부에 진짜로 풀이 자라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어린양’(요 1:36)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진짜 짐승입니까? 시편 기자가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시18:2)라고 했는데, 정말로 하나님이 돌덩어리입니까? 이렇게 문장의 수사법을 고려하지 않는 경직된 문자적 해석은 잘못된 것이며, 이런 것을 가리켜서 문법적 해석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문법적 해석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에 어떤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문장의 시제나 능동태/수동태, 명령문/수사의문문/평서문, 전체 문맥 속에서 문장들 간의 관계 등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1) 단수와 복수 문제
     
    성경을 읽을 때 단수와 복수를 잘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단수와 복수의 구별이 중요하다는 것을 갈라디아서 3장 16절을 통해 직접 보여 줍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실 때 ‘씨들’(seeds)이라고 하지 않고, ‘씨’(seed)라고 단수로 표현하셨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3:16).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라고 하셨는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us, our)라는 복수형을 사용하셨는지, 성령의 열매(the fruit of the Spirit)는 아홉 가지인데 왜 단수의 ‘fruit'으로 표현되었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죄(sin)/죄들(sins), 하나님(God)/신들(gods), 주(LORD, Lord, lord) 등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개역성경 역자들이 거의 대부분의 중요 단어들을 번역하면서 단수와 복수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2) 시제의 문제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 많이 내고, 종교의식에 잘 참석하면 나중에 구원을 준다는 이야기나, 우리가 죽은 다음에 혹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끝난 후에야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없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5:24).
     
    요한복음 5장 24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현재 영존하는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죄의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에 미래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되어도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믿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수동태,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그것이 이미 완료되어 계속적으로 효력을 미침)고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교인들을 일평생 교회에 묶어두기 위하여 구원이란 계속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며, 믿는 자들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제에 유의하여 성경을 읽으면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자의 구원은 확정적이며,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성경을 읽다보면 동사의 어미에 -th, -eth가 붙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이 고어체 스타일의 표현이라고 싫어하는데, 이것은 3인칭 단수 현재 시제라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이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에 주의하지 않고 대충 읽고 번역하면 개역이나 한글킹제임스성경처럼 스가랴서 3장 2절을 엉터리로 번역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별도로 소개하겠습니다.
     
    (3) 명령문/평서문/의문문
     
    성경을 읽을 때, 그 문장이 명령문인지, 평서문인지, 의문문인지, 수사의문문인지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종종 설교 시간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라!”, “너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라!”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취지는 저도 이해를 하지만, 문제는 성경 말씀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뒤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사도행전 1장 8절은 “너희는 증인이 되어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성령님께서 임하신 뒤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한 증인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님께서 믿는 자 안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주시고, 우리를 그분의 증인으로 사용하신다는 뜻이지, 우리가 전도 훈련을 받아서 증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로되 만일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리요? 그 뒤에는 그것이 아무 쓸모없으므로 버려져서 사람들의 발밑에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산 위에 세운 도시가 숨겨지지 못하리라(마5:13-14).
     
    마태복음 5장 13~14절 역시 “너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라!”라는 명령문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 ‘소금이요, 빛이다’라는 사실 진술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소금이라면 자연히 맛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려고 어떤 노력을 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빛이면 저절로 그 환한 광채는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어둠을 물리치게 됩니다. 빛은 원래 밝고 퍼져나가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빛들로서 빛날 뿐(ye shine as lights, 빌2:15), “빛이 되어라!”는 도덕적 훈화 말씀처럼 빛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반면 고린도전서 16장 13절이나 에베소서 5장 18절은 명령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 역시 이를 주님께서 주신 명령으로 읽고 이해해야 그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4) 문맥의 중요성
     
    제가 선교단체에서 활동할 때, 매일 아침 선교회 회원들이 모여서 그 날 묵상한 말씀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한 형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시편 5편 6절을 읽었는데 하나님은 피 흘리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어린양의 피를 즐기셨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수많은 가나안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셨고,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피 흘리는 것도 즐기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다른 형제들은 부분적으로 뭔가 공감하는 듯 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매우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개역과 흠정역으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개역: …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시5:6)
    흠정역: … {주}께서는 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를 몹시 싫어하시리로다.
     
    그 당시에는 다들 개역성경을 사용하던 터라 끊어 읽기를 잘못하면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와 같이 읽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형제가 그 앞에 나오는 “주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시5:5)라는 말씀을 함께 읽었더라면 이런 오해는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자들은 문맥을 무시하고, 성경 본문에서 자기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부 내용만을 추출하여 제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There is no God.”(시14:1)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있는 자는 더 받아 풍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된다”(마13:12)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의 병폐라고 할 수 있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설명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처럼 자기 입맛에 맞게 끼워 맞추기 식의 해석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였도다. 그들은 부패하여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시14:1).
     
    있는 자는 누구든지 받아서 더욱 풍성하게 될 터이나 없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에게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13:12).
     
    제가 글을 쓰면서 여러 참고 구절을 인용하거나 종종 전후 문장의 흐름과 맥락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이런 문맥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나 마태복음 16장 28절에 나오는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라는 말씀도 전후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2. 역사적 해석
     
    역사적 해석이란 역사적인 시대나 그것이 기록된 배경과 목적, 수신자, 당시의 생활풍습 등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문맥에 맞게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네가 취할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는 다 네 사방의 이교도들 중에서 취할지니 너희는 그들에게서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를 살지니라(레25:44).
     
    레위기 25장 44절은 그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는 계급 사회였기 때문에 왕, 귀족, 평민, 제사장, 노예라는 신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제도 속에서 살 때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에 글자 그대로 적용하여 자기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노예로 사고팔고 하면 안 됩니다.
     
    레위기 11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지 말 것에 대한 규례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레위기 11장 7절에 의해 돼지갈비나 삼겹살은 먹으면 안 되고, 레위기 11장 12절에 따라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 속 생물들(오징어, 굴, 해삼, 전복 등)은 가증하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처럼 어떤 짐승들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들 짐승들이 이교도들의 우상숭배와 연관된 것이거나, 전염병을 옮기는 것이거나, 이스라엘의 더운 날씨에서는 쉽게 부패하고 변질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약 시대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저런 음식물에 대한 규례가 적용되지 않으며, 우리는 디모데전서 4장 3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만드신 음식물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고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사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셨느니라(딤전4:3).
     
    성경에 나오는 할례나 안식일에 대한 규례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택하신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이지 우리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면서 이 말씀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잘 구별해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사내아이는 다 할례를 받을지니 이것은 나와 너희와 네 뒤를 이을 네 씨 사이의 언약 곧 너희가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17:10).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그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니 이것은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니라(출31:13)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만, 각 세대별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루시고 경영하시는 경륜의 방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어느 세대에 속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신약교회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인지 바르게 나누어서 이해해야 합니다(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역사적 해석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이 성경 말씀은 누구를 위하여, 어느 시대 사람들을 향하여, 어떤 목적으로 기록하셨는지를 함께 공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하늘의 왕국과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왕국이 어떻게 다른지, 4 복음서는 수신자와 기록 목적, 배경 등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믿음과 행위에 대하여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는지 등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법적 해석뿐만 아니라, 역사적 해석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기록된 당시의 역사, 문화, 기후, 풍습, 제도 등에 대해 공부를 해 두면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맛 잃은 소금(마5:13),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요10장), 친족의 상속 재산을 대신 물러주는 제도(룻기4장), 형사취수 제도(창38장), 이스라엘의 달력과 주요 명절, 지역별 기후와 특산품, 유대인들의 식사예절 등도 알아두시면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 외에 성경에 등장하는 동물, 식물 등에 대해서 공부해 보는 것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래에 나오는 신학적 해석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찾는 해석이라기보다는, 그 말씀을 각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3. 신학적 해석
     
    신학적 해석이란,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 가운데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해석은 다소 복잡하고 사람들마다 어떤 신학적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성경 기록자가 최초로 성경을 기록한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차적인 성경의 독자들(수신자들)이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을까를 생각해보며, 이에 근거하여 그 말씀이 오늘날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묵상하여 적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명기 17장 18-20절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는 {주}의 말씀을 필사하여 평생 옆에 두고 읽으며 그 말씀을 따라 행하라”는 내용을 발견하고 마음속에 성경 말씀을 읽어야겠다는 동력이 솟아나서 성경을 읽기로 결심했다고 합시다. 그는 이미 여러 권의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데 문자 그대로 성경을 다시 필사해야 할까요? 혹은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에게 해당되는 규례이지 나는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왕도 아니므로 나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하시겠습니까?
     
    문법적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구약시대 이스라엘 왕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자신의 말씀을 읽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라는 일반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올바른 문법적, 역사적 해석의 토대 위에서 이 말씀이 나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내 삶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 말씀이 직접 우리를 대상으로 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말씀을 읽으면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구약성경의 내용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에게 여러 가지 본보기와 훈계를 주기 위해 그 말씀들을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0:11).
     
    이제 이 모든 일은 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났으며 또 그것들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해 기록되었느니라(고전10:11).
     
    사도 바울 역시 신명기 25장 4절에 나오는 “곡식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는 율법의 말씀으로부터 영적인 의미를 찾아서 그것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에게 적용하여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해석하였습니다(딤전5:18).
     
    너는 소가 곡식을 밟을 때에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신25:4).
     
    성경 기록이 이르기를,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하고 또, 일꾼이 자기 품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느니라(딤전5:18).
     
    모세의 율법에,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하고 기록되었나니 하나님께서 소들을 위해 염려하시느냐?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 말씀하시느냐? 틀림없이 이것은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나니 밭을 가는 자는 소망 중에 갈며 소망 중에 타작하는 자는 자기의 소망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하니라(고전9:9~10).
     
    성경 말씀을 해석할 때에는 문법적 해석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며, 그 다음으로 그 말씀이 기록된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나 수신자, 기록 목적 등을 검토하여 역사적 해석을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신학적 해석은 그가 어떤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해석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고, 각자가 개인의 삶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달라서 여러 가지 다양한 묵상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그 해석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인정받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 주시는 의미를 발견하고 그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저는 이것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 잘못된 해석들
     
    몇 가지 잘못된 성경 해석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문맥을 무시한 해석
     
    [그가] 바람이 사나운 것을 보고 두려워하다가 가라앉기 시작하며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마14:30)
     
    마태복음 14장 30절을 보면 바다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진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 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구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전후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해석이며, 죄가 아니라 물에 빠진 베드로의 입장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 해석이고, 문맥 내에서 특정 부분만 도려낸 잘못된 해석입니다.
     
    (2) 비유적 해석
     
    성경 100독 세미나로 유명한 조현주 장로나 이만희가 교주로 있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은 모두 성경을 비유로 풀이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기적이나 표적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6장 35-44절에는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명석을 교주로 하는 이단 JMS에서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빵을 떼면 크기가 작아지고 가루가 나기 때문에 절대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것을 비유로 해석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배불리 먹었다고 해석합니다. 이처럼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지 않고 함부로 비유적 해석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절대 변명할 수 없도록 마가복음 6장 43절에 “남은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가득 거두었다”고 기록하셨습니다. 이게 말씀 잔치였다면 ‘남은 빵 조각’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우리는 남은 빵 조각들로 가득 찬 바구니를 생각할 때, 정말 그들이 실제로 문자 그대로의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비유적 해석을 할 때에는 주의를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비유적 해석이 다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방인들의 길로도 들어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어떤 도시로도 들어가지 말며 오직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마10:5-6).
     
    마태복음 10장 5-6절에 나오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은 정말 문자 그대로 양들(sheep)일까요,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사야서 53장 6절을 읽고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등은 당연히 비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3) 문법적, 역사적 해석 vs 상징적 해석, 영적 해석
     
    저는 제법 오랜 기간 동안 장로교회에 다니면서 언약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마다 이해가 안 되는 말씀들과 부딪혀야만 했습니다.
     
    또 내가 봉인된 자들의 수에 대하여 들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십사만 사천이더라(계 7:4).
     
    그들이 왕좌 앞과 네 짐승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 같은 것을 부르더라. 땅에서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외에는 아무도 능히 그 노래를 배우지 못하더라(계14:3).
     
    요한계시록 7장 4절에는 이스라엘 자손 중 봉인된 자가 14만 4천 명이며, 14장 3절에는 구속받은 자가 14만 4천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구절을 들고 와서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14만 4천이라고 주장하며, 자기네들만 구속받은 무리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아마도 여호와의 증인들의 신도 수는 이 숫자를 넘으면 안 되나 봅니다. 이런 이단의 주장에 대해 조언을 구하면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 구원받는 사람이 14만 4천이면 그중에 네가 들어가 있고, 구원받는 사람이 100명이라도 그중에 네가 들어가 있고, 구원받는 사람이 1명이라고 해도 그중에 네가 들어가 있다고 믿어라. (성경 말씀에 근거한 답은 안 해 주고 구원의 확신으로 밀어붙이라는 이야기입니다.)
     
    - 14만 4천은 상징적인 숫자다. 3은 하나님의 수, 4는 세상의 수, 두 수의 곱은 12로서 주께서 택하신 열두 지파, 열두 제자를 나타낸다. 12의 제곱은 144이며 여기에 1,000을 곱한 것이 14만 4천인데 이것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도의 상징적 해석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14만 4천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이 다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이는 어거스틴이나 칼빈에게서 나온 언약신학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르우벤, 영적인 유다, 영적인 시므온, 영적인 갓, 영적인 아셀은 누구입니까?”
    (저는 지금까지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해 주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 14만 4천은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구속받은 자를 말한다. (다행히 문자적 해석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자손 말고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계7:9에 나오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바로 구원받은 이방인들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큰 환난을 통과하고 나옵니까?(계7:14) 살전4:16-17에 의하면 믿는 사람들은 이미 다 휴거되어서 큰 환난을 겪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요.”
    (대부분 여기에서 말문이 막힙니다만, 간혹 다음과 같은 새로운 교리를 내세우며 우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충 믿지 말고 열심히 잘 믿어야 하고, 등잔과 기름을 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고, 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하고, 끝까지 견뎌야 하고 등”(이하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구속받은 이스라엘 자손 144,000명’에 대해서 상징적 해석을 하여, “예수님을 믿는 신약교회 성도들이 곧 영적인 이스라엘이다.”라고 주장하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거기에 거론된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들은 도저히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믿고, 그 숫자도 실제 숫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경영 방식을 나누지 않고, 믿는 우리가 곧 이스라엘이라고 영적 해석을 해 버리면, 우리 성도들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 의해 휴거도 되어야 하고, 또한 우리가 곧 이스라엘이므로 대환난도 통과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공중으로 휴거되어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예수님과 휴거된 성도들 머리 위로 대환난이 쏟아진다.”라는 새로운 엉터리 주장을 늘어놓거나, 성경의 가르침대로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적용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4)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한 상징적 해석의 실례
     
    아래 인용문은 이전에 함께 성경을 공부하던 ooo 형제님께서 쓰신 내용입니다. 지금은 아마 목사님이 되어서 교회 성도들을 섬기고 있을 겁니다.
     
    “이제 잘못된 성경 해석의 실례를 하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한번 봅시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교회이고 여리고는 세상입니다. 교회에서 세상 밖으로 나가면 강도를 만납니다. 우리는 여리고로 내려가지 말고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합니다. 또 만약 강도를 만나서 피투성이가 되었다면 - 죄악에 물들었다면 - 포도즙과 기름으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포도즙은 그리스도의 피요, 기름은 성령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성령으로 치료를 받아서 우리 영혼의 상처를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더 잘 치료 받으려면 데나리온 둘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신약과 구약입니다. 또 더욱 더 심하게 해석하는 경우에는 강도 만난 자를 태우고 가는 짐승의 네 다리는 사복음서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복음서라는 짐승을 타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적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또 어떤 목사는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이고 두 데나리온은 2,000년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사건 이후 2,000이 지난 이 시점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 과연 어디에 예수님의 재림 내용이 있습니까?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를 알려주시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문맥과는 전혀 무관하게 해석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나 그 말씀을 들은 율법사의 반응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비유나 상징으로만 해석하면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달하고자 하시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우리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게 기록하셨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읽고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다. 오히려 그 말씀 속에 무슨 다른 뜻이 있거나, 감추어진 신기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를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하다 보면 오류에 빠지게 된다. 각 시대별로, 각 수신자 집단별로 각기 다르게 적용되는 말씀들에 대해서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연구해야 하며, 그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도 함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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