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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펄전: 전 유럽을 영적각성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복음주의 목사조회수 : 10602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3년 11월 1일 17시 42분 25초
  • 스펄전: 전 유럽을 영적 각성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복음주의 목사
     
    이 위대한 목사도 그리 길지 않았던 인생의 후반부에 통풍과 우울증으로 심히 크게 고생하였습니다.
    거짓 불 소동으로 인해 그의 설교를 들으러 왔던 사람들 가운데 7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으니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마이크가 없던 시절에 한 번에 2만 명에게 설교했다니 이보다 큰 기적이 있을까요?
      
    그가 겪었던 비방과 육체적/심적 고통이 지금 인생길에서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올립니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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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을 하지 않은 사람.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 163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키.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적이 없는 사람. 수천 명의 환자를 치유하면서도 자기 병은 치유하지 못해 늘 고통 가운데 신음하다 병으로 죽은 사람. 이것이 스펄전의 이력서다.
     
    그러나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 세기적인 복음주의 설교가, 전 유럽을 영적 각성으로 몰아넣은 부흥사, 22세의 어린 나이에 매주 만 명 이상의 군중에게 설교하던 설교의 왕자. 6천여 좌석이 마련된 메트로폴리탄 교회가 그를 위해 세워졌고, 런던 교회의 수정궁에서 설교했을 때는 이만 삼천 명이라는 기록적인 인파가 운집했는데….
     
    인간이 지닌 한계, 환경이 주는 무력감, 사회의 온갖 비리와 악조건. 이러한 것을 극복해낸 비결은 무엇일까?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을 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배우는 과정일 것이다.
     
    사상과 뿌리
     
    19세기 영국에는 기라성 같은 설교자들이 배출되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엄 캐리, 구세군의 설립자인 윌리엄 부스도 이 시대 인물이다. 그중에서도 19세기 영국의 설교계를 이끌었던 쌍두마차가 있다. 비국교도 계열의 찰스 스펄전과 국교도 계열의 존 라일. 스펄전은 이천 년 교회사에서 가장 탁월한 설교자로서 ‘설교의 왕’이라 불린다.
     
    청교도 스펄전 가문은 1568년 그들이 정착해 온 때로부터 1834년에 이르기까지 12대에 걸쳐서 많은 목사를 배출했다. 찰스 스펄전은 이런 혈통을 지닌 목사 아버지와 역시 철저한 청교도 목사였던 할아버지의 삶을 보고 자라났다. 찰스 스펄전은 1834년 6월 액세스의 지방도시인 캘버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스펄전은 작은 교회를 돌보는 목사였다. 이들 부부에게 모두 17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9명의 자녀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찰스는 6세 때 스탬본 교구 안에 있는 조그마한 조합 교회의 목사인 할아버지에게 보내졌다. 찰스의 할아버지의 삶은 철저히 성경 안에 세워져 있었다. 이런 할아버지의 신앙관은 그대로 손자에게 전해져 찰스 스펄전 또한 성경말씀 안에서 어려서부터 확고한 신앙을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어린 스펄전의 신앙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은 할아버지의 서재에 꽂혀 있던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폭스의 「순교자의 책」 등 청교도 서적이었다. 그는 천로역정을 100번도 넘게 읽었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기독도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짐이 바로 ‘죄’임을 알기까지는 자신이 직접 경험할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스펄전이 활동하던 시대는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기간이었다. 그녀의 통치기간 동안 영국은 전 세계에 식민지를 확장시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대외적인 영토 확장과 산업혁명으로 일부 특수 계층은 혜택을 받아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반면 빈민들의 생활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한 통계 자료에 의하면 빈민가 노동자 계급의 평균 수명이 25세였다는 기록도 있다. 런던에서만도 많은 아이들이 빈곤으로 거리를 배회하고, 감옥에 가거나 어린 나이에 죽어 갔다. 집 없는 아이들이 시장의 쓰레기더미에 버려진 썩은 자두, 오렌지, 사과 등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풍경도 흔한 것이었다. 당시 성공회는 국교였기에 정부의 지원 아래 기반을 든든히 닦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비국교도 교파들 즉 침례교, 장로교, 감리교, 조합교회 등은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앞서 휫필드와 웨슬리의 부흥운동에 힘입어 이들 교회가 상당한 각성과 성장을 이루기도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약해지고 형식화되었다. 이런 상황은 소년에게 야망을 갖게 했다. 복음으로, 진리로, 사랑으로! 전 영국에 빛을 비추리라!
     
    나를 바라보라
     
    1849년, 뉴마켓 마을에 있는 학교에 입학한 여름이었다. 이 무렵부터 시작된 삶에 대한 회의와 갈등이 점차 커다란 번민으로 다가왔다. 어릴 적부터 신앙생활은 해 왔지만 별다른 변화 없이 살아온 자신에 대한 의구심에서부터 시작된 회의였다. ‘도대체 회개는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그런 말을 수없이 들어왔고 나 자신도 수없이 해 왔지만 실제로 내가 체험한 것은 전혀 없지 않은가. 도대체 이렇게 살아도 신자라고 할 수 있는가!’
     
    찰스에게 일어나는 이런 의구심과 번민은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죄의식과 구원에 대한 갈망이었다. 구원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순간순간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정, 내면적인 죄들 때문에 심한 딜레마에 빠졌던 것이다. “죄의 사악함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모릅니다. 만일 그런 불행한 일을 다시 경험하라 한다면 차라리 병상에서 7년 동안 열병을 앓아누워 있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찰스는 어려서부터 청교도적 신앙생활에 익숙해 있어서 그의 생활모습에서는 어떤 결점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규범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면의 죄에 대한 번민은 계속되었고 하소연하듯 이렇게 소리치곤 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시기에 나의 이 번민을 모른 척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따라서 그는 주일이면 자기의 짐을 벗어던지는 데 도움이 되는 설교를 들을 수 있을까 하여 여러 군데를 전전하였다.
     
    1849년 12월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 마른 체격에 초라한 행색을 한 구두수선공이 어리숙하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라는 말은 아주 간단합니다. 바라보는 일은 어떤 행동이나 수고가 따르지 않습니다. 그냥 눈만 목표를 향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손발까지도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철없는 아이도 바라볼 수가 있고, 귀머거리, 늙은이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직 당신 하나만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바라보라, 내가 지금 피 흘리고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내가 지금 십자가에 매달려 있노라. 나를 바라보라, 내가 지금 죽음 당하였고 무덤에 묻혔노라. 나를 바라보라, 내가 지금 다시 살아나 하늘로 들림을 받았노라. 오 불쌍한 죄인이여, 나를 바라보라, 나를 바라보라.’”
     
    찰스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어 즉시 무릎을 꿇고 이렇게 외쳤다. “오 주여, 이 죄인이 지금 주님을 바라봅니다. 저를 구원하여 주소서.” 이때 그의 가슴 안에 홍수처럼 밀려드는 감격과 환희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설교가 스펄전
     
    스미스(W.M.Smith)는 “스펄전은 설교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스펄전은 “준비 없이 습관적으로 강단에 서는 것은 죄악이다” 라고 경고한다. 그만큼 그는 준비된 설교자였다. 비록 대학교육은 받지 못했어도 끊임없는 연구로 그의 지적 능력은 대단했다. 특히 청교도 저서들의 수집광이었고 열렬한 청교도 독서가였다. 그런 그에게 ‘백과사전 두뇌’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의 해박한 지식은 설교할 때마다 자유자재로 활용되었다. 특히 웨슬리와 휫필드, 존 번연 같은 인물들의 일화를 인용하면서 청중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성경지식을 모아 ‘주해와 주석’ 책을 펴냈는데,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하여 약 3천 권의 책을 참고했다 한다.
     
    스펄전의 설교는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성도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적용할 수 있는 설교를 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하고도 쉬운 구어체를 사용했다. 그 당시는 마이크와 앰프 시설이 있기 전이었다. 어떤 악기나 음향시설도 없는 때였다. 그런 악조건에서 수천 혹은 수만 명의 가슴을 후려치는 설교를 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6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메트로폴리탄 테버네클과 만이천 명이 입장 가능한 서레이가든 음악당에서 숱한 세월 성도들의 가슴을 적실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생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교나 하나님의 일이 목표가 아니었다. 늘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전부였다. 그의 사상과 삶의 뿌리 및 목표는 늘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님을 위해 고통 받고 병들고 무시당할 각오가 되어 있던 그의 열정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설교만 해도 무려 삼천 오백 편 이상이다.
     
    침례 이후 주일학교 설교를 시작으로 그에게 사역의 포문이 열린다.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좋았다. 농부 집 부엌이나 때론 자리가 없어서 마구간에 모이기도 하였다. 1851년 10월 스펄전의 설교에 대한 소문으로 17세에 위터비치 침례교회의 목회자로 청빙을 받고 그리고 곧 뉴파크스트릿 교회에서 청빙을 받게 된다. 당시 뉴파크스트릿 교회는 어마어마한 교회로 정평이 나 있었다. 스펄전은 그 편지를 받고 잘못 온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너무 놀랐다.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거듭 거절했지만 간곡한 설득에 못 이겨 가게 되었는데, 역시나 성도들의 냉담과 무시를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이 교회의 신자들은 부유하고 신분 높은 이들이 많았기에 교회의 외적 웅장함과 교인들의 수준에 압도당하여 설교자가 위축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부임 후 처음 한 ‘하나님은 좋은 선물만 주신다’는 제목의 설교가 모든 사람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예상외의 설교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저녁 예배 시간에는 몇 배의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동안 그 교회 신자들은 유명하다는 학자와 박사들의 설교를 수없이 들어 왔다. 그들의 진부하고 이론적인 설교에 싫증을 느끼던 차에 스펄전의 설교에서 생명력을 발견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대학교를 나왔다면 우린 아예 초청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 요청을 순수하게 그대로 받아주십시오.” 스펄전은 정식 절차를 밟은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그때부터 목사라는 칭호가 그에게 자연스레 붙여졌다. 그리하여 1854년 스무 살의 나이에 뉴파크스트릿 침례교회의 위임 목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주일마다 예배당으로 구름떼처럼 모여들어 바깥 뜰까지도 꽉꽉 찼다. 불가피하게 교회증축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임시로 런던 중심가에 있는 4천석의 좌석을 갖춘 거대한 엑시터회관을 빌렸는데, 몇 주가 지나자 이곳도 차고 넘쳤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스펄전에 대한 명성, 설교 대가로서의 위상이 영국 전역을 뒤덮었다. 영국 안에 제 2의 휫필드가 출현했다는 칭찬이 자자했다.
     
    끝없는 악평 그리고 익어가는 신앙 인격
     
    성공의 뒷면에는 항상 시기와 비난이 있게 마련이다. 개인적인 비난을 넘어서 신문지상까지 떠들썩했다. “찰스 스펄전은 대학 문턱조차 밟아보지 않은 자다.”, “그는 성직 수여식의 과정도 거치지 않았다.” 이런 보도를 시작으로 하여 그에 대한 악평은 계속되었다. “젊은 여인들은 그에게 현혹당하여 정신없이 날뛰고 있다. 얼빠진 소녀들로부터 여러 선물을 받은 것만 해도 상점 하나를 차리고도 남을 정도다.”, “그는 심히 불경스러운 종교 장사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의하여 성스러운 종교가 추잡하게 더럽혀졌고 타락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겸손을 배우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인 줄은 알았지만 그때마다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 뻔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찰스는 이런 치명적인 비난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의연하게 일들을 진행시켜 갔다. 변명하거나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진실을 호소하지 않았다. 그냥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할뿐이었다. 중상모략 하는 사람들을 향해 신문에 해명하는 글을 쓰라는 아내의 말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예수님께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내가 대항하고 나선다면 내가 그들과 다를 게 무엇이겠소. 예수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대적하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끝까지 참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행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그를 뚝심 있는 세계적인 설교가로 만들었던 것이다.
     
    죽음을 불러온 참사
     
    사람들의 비난과 악평은 결국 비참한 죽음까지 몰고 왔다. 엑시터회관의 좌석은 사천 석이었으나 서레이가든 음악당은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강당이었다. 매주일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신자 수를 감당치 못하여 마침내 이 음악당을 사용키로 했다. 1856년 10월 주일 오후 예배 때였다. 모여든 사람들의 숫자는 예측을 훨씬 뛰어넘어 늦게 온 사람들은 앉을 자리가 없었다. 설교에 들어가기 앞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큰 외침소리가 들렸다. “불이야!”
    이 요란한 외침에 얼마나 사람들이 경황없이 날뛰었든지 발코니에 앉아 있던 이들이 난간을 부서뜨리면서 아래층으로 마구 떨어져 내렸다. 이때 힘없는 부녀자와 아이들이 넘어지면서 그 밑에 깔려 죽어갔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물론 불은 나지 않았다. 찰스를 적대시하던 자들의 계략이 성공한 셈이었다. 사람들은 음악당을 다 빠져나온 다음에야 불이 났다는 것이 유언비어였음을 알게 되었다. 바닥에 쓰러져 짓밟혀 죽은 사람이 7명이나 되었고 병원에 실려 간 중상자가 30명이었다. 다음날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수많은 비난의 글들은 이천 년 전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다름 아니었다. “예배는 어디까지나 교회 안에서만 드려져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극장과 다름없는 음악당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 자체가 신성모독이다. 양심적인 지성인들은 채찍을 들고 그런 사악한 무리들을 꾸짖어 내쫓아야만 한다. 인간을 구원하는 종교 행사장에서 사람들이 죽고,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신음하면서 끌려 나오다니, 스펄전은 헌금 통 속에 떨어지는 동전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다가 그토록 비통한 아우성 소리를 듣지 못했단 말인가!”
     
    이 일로 인해 찰스가 받은 충격과 상처는 너무 커 급기야 졸도하고 말았다. 찰스는 피신한 상태에서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은 채 7, 8일을 조용히 보냈다. 너무 괴로워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사람들의 비난보다 그를 더 괴롭힌 것은 자기로 인해 사람들이 죽었다는 자책감이었다. 그럴수록 그는 조용히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하기에 힘썼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9). 이 말씀이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이러한 가시가 결코 그에게 무익하거나 해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여러 비난의 소리들을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채찍질하는 소리로 들었다. 아무리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라도 늘 칭찬과 찬양만 받는다면 어떻게 교만과 위선에 빠지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이런 비난을 통해 교만과 독선이라는 악마의 소굴에서 스펄전의 영혼을 지켜주셨다. “그렇다.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부정해야만 하나님이 주신 사역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배울 수 있고, 그분이 내 안에서 온전히 역사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나 자신이 깡그리 없어져야 한다. 오 하나님, 저를 당신의 온전한 종으로만 만들어 주소서.”
     
    변해야 산다
     
    이렇게 준비시킨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전 영국과 유럽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런던 시내에 늘어나는 술집과 창녀촌, 산업혁명으로 인한 구조적 모순, 부가 가져온 정신적 황폐와 가난으로 인한 자살, 진화론과 고등비평이 가져온 합리적 사고 등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스펄전의 설교는 물질과 인간 중심의 사고로 황폐해진 사람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는 도구였다. 복음만이 유일한 낙이고 희망임을 일깨워준 청량제였다. 콜레라가 발생했을 당시 전염병의 감염을 두려워하지 않고 병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기도해 준 스펄전을 통해 사람들은 복음을 마시고 호흡했다. 팔천 명이 넘는 신자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며 마치 잃은 양처럼 보살피고 돌보는 그의 목회 모습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자신의 설교집 판매로 생긴 수익금 일부로만 청렴하게 생활하면서 교회에서 주는 급료는 처음부터 받지 않은 그의 태도는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한 사람의 작은 빛이 온 영국과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음악당에서의 참사 이후 수만 명을 수용하는 테버네클 교회가 세워진 것은 스펄전에게 있어서 도약의 발판이 마련된 셈이었다. 스펄전의 활동영역은 전세계로 뻗어갔다. 오늘의 신학교와 다름없는 설교자 양성소를 세워 수많은 사역자들을 길러내고, 월간 잡지를 발간하여 문서선교에 힘쓰고, 고아원을 설립하여 구제사업에 힘썼다. 매주일의 설교가 인쇄물로 제작되어 유럽 각지에서 수백만 명이 그의 설교를 읽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이러한 스펄전의 청교도 정신은 로이드 존스 등으로 이어져 우리 시대 복음주의의 뿌리와 밑거름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처럼 변화된 한 사람의 힘은 시대를 초월하여 놀라운 생명력을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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