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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의 핵심: 과연 우리는 복음을 아는가?조회수 : 9707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4년 7월 16일 11시 26분 41초
  • 우리는 과연 복음을 아는가?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코버 박사의 글을 올리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Do We Really Know the Gospel?> by Manfred Kober, Th.D.
    샬롬
     
    패스터
     
    복음의 핵심
     
    구원론을 가르치면서 매년 저는 학생들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죽음의 문턱에 놓여 있는 불신자를 방문하기 위해 병원에 와 있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단 스물다섯 단어를 말해서 복음을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는 시간이 없습니다. 스물다섯째 단어가 끝나면 그 환자는 죽게 됩니다. 당신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을 설명할 것입니까?
     
    과연 학생들은 이처럼 복음을 간결하게 표현함으로써 숨이 끊어져 가는 그 사람이 올바로 반응하기만 한다면 구원받게 할 수 있을까요? 과연 학생들은 복음을 완전히 이해해서 그렇게 짧은 몇 마디 안에 구원의 메시지를 담을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도 학생들이 풀어야 했던 그 문제로 돌아가서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막16:15).
    그렇다면 이제 다음의 세 가지 사항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첫째, 복음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둘째, 복음은 무엇인가?
    셋째, 우리가 어떻게 그 복음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가?
     
    1. 복음이 아닌 것들
     
    1. 세계교회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는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회의에서 “복음은 언제나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에 참여할 책임을 포함하며 인간의 전체성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고발할 의무를 포함한다.” 라고 선언하였습니다(「Christianity Today」, 1972년 1월 2일, p.12).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수년 전 복음전도자인 포드(Leighton Ford)는 아이오와 주의 데모인에서 전도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청중들에게 ‘두 발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라고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포드가 전하는 복음은 WCC의 입장과 흡사한 것으로, 복음은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사회의 구원도 포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2. 미국의 수정 교회를 담당하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수치에서 영광으로, 자기 회의와 자기 정죄로부터 자기 확신과 자기 긍정으로 나가는 구원 메시지로 선포되어야 한다.” 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슐러는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기 존중의 신학으로 선포될 수 있다.” 라고 주장합니다(「자기 존중: 새로운 종교개혁」(Self-Esteem: The New Reformation) p.161, 47).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3. 캘리포니아의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를 담당하는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는 자신의 논쟁적인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갈보리로 초청하는 것은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대로 인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신다’(Lordship)는 전제 하에서 제자가 되도록 초청하는 것이다(p.21)…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복음은 제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부르심이었다(p.21)…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의 본질은 자아를 철저히 포기하는 것과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p.153)”(「예수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2.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Gospel)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유앙겔리온’(Euangelion)은 ‘좋은 소식’(good news)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무엇에 관한 좋은 소식인가?” 라는 물음이 뒤따릅니다. 신약성경은 복음이라는 용어를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 복음은 사람들에 관한 좋은 소식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6절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의 흔들림 없는 믿음에 대한 ‘좋은 소식’ 즉 글자 그대로 ‘가스펠’(gospel)을 가져왔다고 적고 있습니다.
     
    2. 신약성경은 더 나아가서 ‘왕국의 복음’(Gospel of the kingdom)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주로 ‘왕국의 복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마3:1-2; 4:17; 10:5-7 등). 이것은 메시아가 유대 땅에 오셔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로부터 땅에 임하는 그 왕국에 대한 그분의 참된 제안을 공적으로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왕국의 복음은 천년왕국 곧 다윗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의 7년 환난기에 다시 한 번 온 세상에 선포될 것입니다(마24:14).
     
    3.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의 셋째 용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Gospel of the grace of God)입니다(행20:24). 이 복음은 서신서들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며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습니다.
     
    내가 또한 받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그것은 곧 성경 기록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시고 바울이 선포한 복음 즉 모든 신자들이 선포해야 할 복음은 무엇입니까? 어느 저자가 간결하게 표현했듯이 ‘좋은 소식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해 죽으셨다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복음전도: 성경적 접근」(Evangelism: A Biblical Approach), Cocoris, p.60).
     
    라이리(C. Ryrie)는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 나오는 복음의 요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유익한 분석을 했습니다.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좋은 소식이다. 그분께서 죽으셨고 그분께서 살아나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 묻힌 사실은 그분의 죽음이 사실임을 입증한다…그분께서는 실제로 죽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들로 인해서 죽으셨다…부활의 증인들의 목록은 그분의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한다(「이토록 큰 구원」(So Great Salvation) p.39).
     
    그렇다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 즉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그분께서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이 복음에서 그분께서는 죄인들에게 영생의 선물을 제안하십니다. 죄인은 단순히 이 복음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행16:31). 그러면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과 그것에 속한 모든 복을 값없이 허락해 주십니다(엡1:3).
     
    3. 어떻게 복음을 소개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핵심은 복음입니다. 죄인의 구원에 있어서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WCC나 포드(Leighton Ford)처럼 복음을 ‘죄인을 대속하는 구원의 복음’과 ‘사회를 개혁하는 사회복음’으로 나눠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슐러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을 요구하는 인간의 죄에 대한 개념을 복음으로부터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맥아더처럼 구원과 성화를 혼동하고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신다’(Lordship of Christ)는 사실에 절대 복종하는 것을 구원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이제 제가 학생들에게 제시했던 신학적 물음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 봅시다. 이 질문은 원래 라이리 박사의 신학 과목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똑똑한 몇몇 학생들은 보통 이 물음의 대답으로 스물다섯 단어로 표현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인용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대답에는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주어진 질문은 자신의 말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생들은 보통 다음과 같은 답을 제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당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면 그분께서 당신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대답은 좋은 대답이긴 하지만 썩 훌륭한 대답은 아닙니다. 이 대답에서 부족한 것은 명확한 복음 제시에 필요한 요소들 중 첫째 요소입니다. 
     
    완전하면서도 간결하게 복음을 제시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사람의 문제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예비이며 셋째는 개인의 구원 획득입니다. 첫째로, 사람의 문제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자신이 길을 잃고 헤매며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돌이켜야 합니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예비하신 것에 대해 들어야 합니다. ‘나쁜 소식’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사람은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고 자기 자신의 공로나 행위로는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들로 인한 형벌을 자기 위에 몸소 짊어진 ‘죄인들의 대속 헌물’이십니다. 여기서 대속(代贖)이란 대신 속죄를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음을 맛보셨음을 아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히2:9). 하지만 그 구원자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결코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구원받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죄인은 개인적으로 이 구원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각 사람은
     
    모두에게 값없이 제시된 구원의 선물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 제시에 필요한 이 세 가지 기본 요소에 비추어서 학생들의 답안지를 분석한 후에 저는 ‘사람의 문제’와 ‘하나님의 예비’와 ‘개인적인 획득’을 모두 포함시키면서 어떻게 스물다섯 단어로 복음을 제시할 수 있는지 학생들에게 보여 줍니다.
     
    친구여, 당신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오직 그분만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을 영원히 구원하실 것입니다.
    지금 그분을 신뢰하기 바랍니다.
     
    Friend: You have sinned. But Christ died for sinners and rose again. Trust Him alone and He will save you eternally. Do it now!
     
    간략하지만 이것은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제시할 때 마땅히 포함해야 할 내용과 초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죄인은 왜 구원받아야 하는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진정 복음을 알고 있습니까?
     
    명확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 신학 교육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앤더슨 경(Sir Robert Anderson)은 복음의 증언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자격 요건에 대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고 복음 사역을 맡기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바는 그들이 세련되고 잘 교육받은 신사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천박하거나 무식한 촌뜨기이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이 신학 교리에 능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교리에 무지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재기 넘치는 사람이거나 웅변에 뛰어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예 소질이 없거나 지루하고 따분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분께서 찾는 사람은 단지 그리스도의 권능을 담을 수 있는 적당한 도구 곧 그분께서 값으로 측량할 수 없는 자신의 보화를 채워 넣을 수 있는 빈 질그릇이다(「복음과 복음사역」(The Gosple and Its Ministry), p.6-7).
     
    우리의 책임은 모든 창조물에게 구원자를 알려주고 죄들의 용서와 평화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일을 할 수 있고 또 이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 일을 날마다 더욱 열심히 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신실하게 반응할 때 우리는 구원을 선포하는 일에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권능을 부어주실 것과 전능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그 일을 형통하게 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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